<야생의 위로>라는 책을 받았다. 영국의 박물학자 에마 미첼의 책이다. 에마는 25년이나 우울증을 앓았다. 치유에 도움이 된 것은 자연이었다. 숲에서 5분 거리로 이사한 뒤 에마는 매일 자연으로 걸어 들어가 나무의 향기를 맡고 바람을 느끼고 꽃을 그렸다. 에마는 디자이너이며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땅에 떨어진 솔방울과 나뭇가지를 모아 작품을 만든 뒤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10만 명이 넘는 팔로어들이 그녀가 화면 안에 재구성해낸 자연을 사랑했다. 에마는 천천히 괜찮아졌다. 그러나 치유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날씨였다. 정확히 말하면 계절. <야생의 위로>는 가을에서 출발해 겨울과 봄을 거쳐 여름에 끝이 난다. 우울증 환자가 대개 그러하듯 에마 역시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을부터 에마의 기분은 가라 앉기 시작한다. 겨울은 끔찍했으나 뜻밖에도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는 계절은 봄이다. 세상에는 꽃이 피어 찬란한데 에마는 홀로 어둠의 터널을 통과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름에 도달했을 때 에마는 제법 괜찮아진다. 마음에 어둠을 품은 사람들이 대부분 거치는 과정이다. 여름이 되면 내면의 회색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

“왜 가을부터 시작하는 거죠. 읽다 보니 덩달아 마음이 힘들었어요.”
“식물 관련 책을 제대로 쓰려면 가을에서 시작하는 게 맞아요. 열매 맺고 씨앗이 생기는 계절이잖아요. 존재가 시작되는 시기인 거예요. 가을이. 식물에게는.”

편집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가을에 시작된다. 식물은. 마음에 감기가 든 박물학자는 그러나 여름에 괜찮아졌다.

<마르셀의 여름>이라는 프랑스 영화를 사랑한다. 여름휴가를 떠난 프랑스인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제는 ‘La Gloire De Mon Pere’, 영어 제목은 ‘My Father’s Glory’.

마르셀의 아버지 조제프는 마르세유의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란 소년 마르셀은 여섯 살이 되자 입학했다. 소년에게 아버지는 학교에서 제일가는 선생님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완벽했다. 이모가 결혼을 할 때까지는. 늦은 나이까지 홀로 지내던 이모가 돈 많은 고급 공무원과 결혼을 했다. 이모부가 빛나는 만큼 상대적으로 아버지가 초라해질까 봐 초등학교 1학년 마르셀은 긴장했다. 여전히 아버지가 가장 빛나는 사람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길에서 도마뱀을 발견했을 때보다, 호수 위에 둥둥 떠가는 구름을 볼 때보다 소년이 더 행복했던 것은 아버지가 공치기 놀이에서 1등을 했을 때였다. 완벽한 여름휴가의 날들이었다. 사냥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모부가 최신식 사냥총을 꺼냈다. 아버지의 총은 낡은 화승총이었다. 이모부는 잘난 척을 해댔고 소년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빛나는 쪽은 아버지여야 하는데, 초라해지면 안 되는데. 걱정이 된 소년은 어른들 몰래 사냥터에 숨어든다. 아버지는 총 쓰는 데 재주가 없었다. 새를 맞히기는커녕 장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년은 사람들 몰래 아버지를 돕기로 했다. 새들을 아버지 앞으로 몰아주려 했지만 되레 길을 잃고 만다. 헤매던 끝에 총소리를 들었다. 소년 앞으로 커다란 새 두 마리가 떨어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를 잡은 줄도 모르고 이모부에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마르셀은 피가 떨어지는 새 두 마리를 들고 두 사람 앞으로 달려간다. “아빠가 잡았어요! 아빠가 이렇게 큰 새를 두 마리나 잡았어요.”

그 여름. 소년은 모든 면에서 최고인 줄 알았던 아버지가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에 실망했을까. <마르셀의 여름>이 매력적인 이유는 휴가가 끝날 무렵 소년이 아버지를 더 사랑하게 됐다는 데 있다. 아버지는 부족한 것이 많은 보통 사람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할 일이 있었다. 성장은 부족을 부정하는 데서 오지 않고 끌어안는 데서 온다.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그해, 여름 손님>은 주인공 엘리오가 열일곱 살 때 여름을 떠올리며 시작한다. 리비에라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20대 청년 올리버가 방문했다. 처음 보는 지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영혼 올리버에게 엘리오는 빠져들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눈보라 속에서 찬란한 여름을 되찾아 오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타오르던 여름이 끝나자 엘리오는 열정을 쏟을 곳을 잃었고 겨울에는 상실이 아파 울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지나 그해 여름을 생각하면 또렷이 떠올랐다. 올리버의 목소리, 그의 말버릇까지도. 엘리오는 수많은 여름 중 특별한 여름 하나를 가졌고 사랑을 배웠다. 사랑 안에 숨은 폭풍과 사랑 안에 숨은 칼날까지도 모두 만났다. 비록 겨울이 아팠더라도 여름의 찬란함은 빛이 바래지않았다.

거북스럽던 마음의 검은 구름이 걷히고 제법 살만해지는 계절이다. 여름은.
거추장스러운 옷의 조각들을 벗고 속살을 드러내는 계절, 사랑하는 사람의 약점까지도 선명하게 보이는 시절이다. 여름은. 끌어안으면 사랑은 더욱 성숙한다, 여름이라서 더더욱.
뜨겁고 분명하다. 거추장스러운 옷의 조각들을 벗어내듯이 감정이 선명해지는 계절이다. 여름은.

영화 <500일의 썸머>는 ‘썸머, 이 나쁜’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주인공 톰은 첫눈에 썸머에게 반했고 운명이라고 믿었지만 둘은 엇갈렸다. 톰에게 썸머는 모호하기만 했다. 마음도 관계의 이름도 알 수 없었다. 놓쳤고 아팠다. 많은 사람이 썸머를 보내고 나서야 톰이 오텀을 만난 사실에 주목한다. 혼란스러운 관계를 보내고 나서야 성숙한 만남이 온다고 하지만, 마지막 만나던 날 썸머가 톰에게 했던 이야기도 기억해두면 어떨까.
썸머는 톰과 멀어진 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 책 재밌어요?”
썸머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남자는 마주 앉아 들었다. 밀고 당기기 같은 것은 없었고,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둘은 자신의 우주에 상대를 초대했다. 둘은 곧 결혼했다.
제대로 뚜껑을 열지 않아서, 표지를 펼치지 않아서, 몸을 사려서 썸머를 잡지 못했던 톰과는 달랐다. 좋은 것은 대부분 분명하다.

다 열어 보이는 계절이다, 다 열고 진짜를 보이고 진짜를 만나는 계절이다, 여름은.
더 괜찮아지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는 계절이 길. 여름이.

 

<향장>은 매달 <볼륨을 높여요>, <별이 빛나는 밤에> 등 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원고를 담당했던 작가이자 독립 서점 ‘리스본’을 운영하는 정현주의 에세이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