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는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글쓰기와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영화다. 배경은 1963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인종차별이 심해 볼 일이 급했던 흑인 가정부가 백인 주인의 화장실을 몰래 쓰다가 혹독하게 야단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피부색이 짙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바이러스나 옮기는 벌레처럼 취급하던 시절. 뉴욕에서 공부하던 ‘백인 아가씨’스키터가 고향으로 내려온다. 미시시피의 아가씨들은 전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뉴요커로 살던 스키터는 달랐다. 작가를 꿈꿨다. 남들 다 하는 방식의 결혼과 연애에는 흥미가 없었다. 지역 신문사에 취직한 스키터는 정치 경제 시사 분야를 맡고 싶었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살림 정보 칼럼을 맡게 된다. ‘아가씨’로 살아온 그녀가 부엌과 집안 살림을 알리 없다. 도움이 필요해서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을 만난다. 평생 가정부로 살면서 무려 17명의 백인 아이를 돌봤지만 헌신해봐야 남의 자식이고 고마움을 몰랐다. 정작 본인의 아들은 사고로 한순간에 세상을 떠났다. 슬픔을 품었지만 말하지 못한채 에이블린은 가정부들의 큰언니 노릇을 하며 부엌에서 늙어갔다. 살림 비결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에이블린의 슬픈 삶을 엿보게 된 스키터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봅시다. 흑인 가정부의 삶을 온 세상에 알립시다.’ 그러나 평생 순종하며 살아온 에이블린은 스키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조력자가 나타났다. 유쾌한 가정부 미니가 일하던 집에서 쫓겨났다. 백인 주인의 화장실을 몰래 쓴 것이 이유였다. ‘같이 하자.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자.’ 밥벌이가 걸린 위험한 결단이었지만 미니가 앞장서자 다른 가정부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여러 날 밤 몰래 모여 이야기를 쏟아냈다. 스키터는 열심히 기록했다. 모여서 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마침내 책이 발간되었고 미국 전역에서 팔려나갔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세상 사람들이 미시시피 시골 동네의 인종차별을 비난했다. 에이블린의 백인 주인도, 미니의 옛 주인도 책을 읽었다. 누군가는 부끄러움을 배웠고 누군가는 보복하려 했으나 세상은 더 이상 백인들만의 편이 아니었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는 여성학자 장영은이 글 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토니 모리슨, 마거릿 애트우드, 수전 손택, 에밀리 브론테, 박경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25명의 여성 저자를 모아두고 장영은은 적었다. ‘이들 중에는 취미로 글을 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글쓰기를 통해 삶의 부조리에 맞섰다.’ 목차만 읽어도 25인의 삶이 보인다. ‘글 쓰는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승리한다’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살았고, 역사에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서점 창업에 대한 강의 제안을 많이 받는다. 대학에서도 연락이 오고 지자체는 물론이고 얼마 전에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연락을 받고 수원까지 갔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두 마스크를 썼지만 눈이 초롱초롱한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전부 여성이었다. (우리 서점에서도 종종 서점 창업 관련 강의를 하는데, 수강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다). 한 시간을 제안받고 갔지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넘쳤고, 질문도 많아 두 시간이 짧았다. 실무적인 이야기가 주로 오고 갔지만 마지막 질문이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에 남았다.

“저는 유리 멘털이에요. 진상 손님들이 있을 텐데 어떻게 대처하죠?”
한 사람이 질문하자 주변 사람들이 끄덕였다. 수업할 때마다 듣는 질문이다. 정작 나는 서점을 열기 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종류의 걱정이었다.

“대답해보시겠어요? 무례한 손님을 완전히 피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한 번 더 대답해주세요. 진상 손님은 왔다 갈까요, 평생 서점에 머물까요?”
“왔다 가죠.”
이렇게 대답하며 수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어려움도 결국은 지나간다. 하물며 진상 손님이야 고작 10분에서 길어야 30분 머물 뿐이다. 그들이 떠나지 않으면 내가 책방 마당으로 잠시 나와 있으면 된다. 비싼 월세 내고 하는 일인데 그 정도 자유는 누려도 되지 않나? 어쨌거나 결국은 간다. 간다는 걸 알면 제법 괜찮아진다. 그래도 괜찮아지지 않는 마음이 있으면 어쩔까.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파일러 권일용 전 경정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서점에서 북 토크를 했는데 인기가 어머어마하게 많아서 1년 뒤 한 번 더 모셨다. 두 번 모두 같은 질문이 나왔다. “사이코패스를 쫓으려면 스트레스가 굉장할 텐데 어떻게 해소하시나요?”권일용 프로파일러는 대답했다. “제 별명이 권삐루예요. 맥주를 좋아하거든요. 일 끝나고 동료들과 모여서 맥주를 마시며 풉니다. 단 퇴근 후에는 일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에요. 각자 사는 이야기를 합니다. 취미 얘기, 친구 얘기, 사소한 얘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인지 답하는 동안 그는 빙그레 웃었다. 연대가 필요하다. 괜찮아지려면. 이겨내려면. 계속 하려면.

<헬프>의 주인공들처럼 쓰기와 연대로 삶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다. <음식의 위로>의 저자 에밀리 넌은 우울증에 걸렸다. 영혼의 쌍둥이였던 오빠는 자살했고 연인은 떠났으며 직업도 살 곳도 잃었다. 막막함 속을 혼자 헤매다 팔로어가 3백 명인 자기 페이스북에 글을 썼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맛있는 거 해줄게’라고 적었다. 에밀리 넌은 회복할 힘을 얻었다. 몸과 마음을 정비하고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다정한 식탁을 차려줄 사람들을 찾아 떠난다. 만났고 먹고 나눴고 회복했다.

예를 들면 진상 손님처럼,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두려운 대상이 있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별을 보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종종 별을 잊고 어둠을 본다. 마음에 그늘이 드리우고 생각은 걱정에 잠식된다. 미드 <슈츠>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여성 대표가 어려울 때면 하던 대사였다. “I’ll find a way.” 길은 반드시 있을 거다.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서점 창업 강의에 가면 늘 받는 질문이니 아마 다음에도 똑같이 어려움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가요’’어려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가요’라는 말 대신 다음엔 다른 말을 해야겠다.

‘쓰고 있나요? 같이 있나요?’
우리의 역사를 같이 쓸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