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뮤지션 박재범

박재범
레더 베스트 닐 바렛(Neil Barrett), 블랙 크롭트 팬츠 릭 오웬스(Rick Owens), 실버 메탈 브레이슬릿과 양손에 착용한 링 모두 미네타니 바이 10 꼬르소 꼬모(Minetani by 10 Corso Como), 화이트 슬리브리스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박재범
블랙 슬리브리스 톱 크리스반 아쉐 바이 쿤(Kris Van Assche by KOON), 피어싱 형태의 이어링 미네타니 바이 10 꼬르소 꼬모(Minetani by 10 Corso Como).

최근 박재범이 발표한 싱글 ‘JOAH(조아)’와 ‘WELCOME(웰컴)’을 들어보고 뮤직비디오까지 섭렵한 사람이라면 박재범이라는 가수에게 적잖이 놀랐을 거다. 단지 음악이 귀에 착 감긴다는 느낌 때문만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색깔의 곡들을 각기 다르게 소화해내면서도 뭔가 독특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노래와 안무가 훌륭한 가수들이 워낙 많아요. 그래서 예전에 하던대로 얼굴에 힘 팍 주고 안무와 노래만으로 승부하기보다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고 뮤직 비디오도 그에 맞게 찍었죠. 특히 ‘JOAH’는 들으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걸 노렸어요. 뮤직비디오 영상도 설렘과 기쁨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죠. 이번 곡은 뮤직비디오가 큰 역할을 해요. 세 곡의 뮤직비디오가 완전히 다른 느낌인데, 다양한 제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른 가수들이 보면 부럽거나 억울한 기분이 들 정도로 박재범에게는 타고난 촉과 근성이 있다. 누구라도 박재범의 노래를 듣고, 공연을 보면 그가 별종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별난 놈’ ‘대단한 녀석’ ‘남다른 유전자’ ‘색다른 별종’ 같은 다양한 수식어가 줄줄 쏟아져 나온다. 재범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특별한 발상, 그리고 그것을 유연하게 풀어가는 능력을 그는 가졌고 과정과 결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도 타고났다. 소속사에서 만들어놓은 이미지와 역할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아이돌로 지내기에는 아까운 면이 분명 있다.

“여태까지 제가 아이돌로 불린 것은 상관없었어요. 아이돌 출신 맞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활동하면서 느꼈어요. 저는 아이돌과 달리 제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직접 다 만들고 제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가수라는 사실을.”

 

박재범
레이어드한 네이비 셔츠 우영미(WooYoungMi), 네오프렌 소재 쇼츠 닐 바렛(Neil Barrett), 펜던트 네크리스 크롬하츠(Chrome Hearts), 윙팁 워커 로크(Loake).

WELCOME’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는가? 뮤직비디오에서 재범은 연기를 하고 있다. 표정으로, 몸짓으로, 혹은 근육으로. 그런데 그런 모습이 어린아이의 흉내나 장난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JOAH’에서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풋풋한 소년이던 재범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는 건가? 그에게서 풍기는 섹시한 수컷의 냄새는 음악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진해진다. 기존 화보에서 언뜻 보여줬던 ‘좀 섹시한 면도 있네’ 정도가 아니다. 곡을 소화하는 보컬의 능력도 그렇지만그것을 표현하는 감성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이 결정적이다. ‘WELCOME’ 뮤직비디오에서 그는 한껏 섹시미를 과시한 후 오초희와의 베드신을 연기한다. 그녀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속삭이듯 노래하는 장면, 희한하게 뽀송한 소년의 향기가 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그 모습이 더 섹시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박재범 외에 누구에게서도 느껴지지 않을 독특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저는 귀엽게 봐주시는 것도, 섹시하게 봐주시는 것도 다 좋아요. 그 자체가 제 모습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억지로 귀여워 보이려고 하거나 섹시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건 질색이에요.” 섹시한 남자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아직은 소년이라는 것이 재범이 파놓은 함정이다. 재범이 가진 특별한 매력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 함정이 무엇인지, 왜 빠져도 헤어날 맘이 들지 않는지 잘 안다. 심지어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이미지도 아니라는 것이 팬들을 중독되게 만드는 거다.

 

박재범
레더 베스트 닐 바렛(Neil Barrett), 블랙 크롭트 팬츠 릭 오웬스(Rick Owens), 블랙 스니커즈 위에스씨(Wesc), 화이트슬리브리스 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제 나이를 먹고 소년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질 때가 된다면, 그는 또 어떤 느낌을 전유물로 갖게 될까. 매일, 매년이 기대되는 남자, 박재범이다. 재범에게서 강하게 풍기는 ‘자유로움’은 괜한 것이 아니다. 그는 또래의 남자에게 흔치 않은 면을 가지고 있다. 재빠르게 털어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 상처받지 않는 쿨함,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적지 않은 시련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그룹 탈퇴 후 시애틀로 돌아가 타이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에게 연연함이란 없는 것 같다. 질질 끌거나 질퍽거리는 것 자체가체질에 맞지 않고 재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답답하고 힘들고 속상하죠. 순간적으로 그런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 일을 자꾸 생각하고 자책하면 앞이 보이지 않잖아요. 오히려 실수하거나 일이 꼬이면 그걸 최대한 빨리 잊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할 일이 많은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 진행이 더 안 되니까요. 어떨 때는 스트레스를 받을 틈도 없어요.”

 

박재범
지퍼 디테일 슬리브리스 생로랑 파리 바이 쿤(Saint Laurent Paris by KOON), 블랙 포켓 레더팬츠 자라(Zara).

재범이 그렇다고 특별히 자유롭게 지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처럼 착실하게 학교와 집을 오가고 친구들과 건전한 교제를 지속했을 뿐이다. 게다가 끼를 주체 못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가수가 된 것도 아니다. 우연히 어머니의 권유로 오디션을 보게 됐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룹의 멤버로 서게 됐다. 다들 재범에게는 독특한 미국식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예상외로 그의 생활은 반듯하고 잔잔했다.

“학창 시절 이후 최근까지 술, 담배 전혀 안 했다고 말하면 대부분 안 믿으시더라고요. 담배는 아직도 안 피우지만 술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배웠어요. 제 주변 사람들이 다 음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놀면서도 음악 만들고 춤추는 게 그냥 일상이고 놀이예요. 멈출 일이 없죠. 마치 나와 하나인 것처럼요. 그리고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라 사람들과 끊임없이 얘기하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박재범
레더 디테일 스웨트셔츠 자라(Zara), 셔츠 디올(Dior), 블랙 쇼츠 크리스 반 아쉐바이 쿤(Kris Van Assche by KOON), 하이톱 스니커즈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바이제레미 스캇(adidas Originals by Jeremy Scott),블랙 캡 크롬하츠(Chrome Hearts), 레이어드한 패턴 양말 삭스어필(Socks Appeal).

어떻게 보면 노래 좀 하고, 춤깨나 출 줄 아는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는 게 어울렸을지도 모를 그가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해가는 것은 기적이나 사고일지도 모르겠다. “하면 안 된다는 공식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해요. 방송 불가 판정을 받은 ‘WELCOME’만 해도, 단순히 시도해볼 만한 장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방송되지 않을 게 뻔했지만 뮤직비디오도 신경 써서 찍었어요. 이것만으로도 아주 멋진 시도라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철저한 노력파로, 무서울 정도의 근성을 발휘하는 그다. 머릿속에 ‘해서는 안 되는 음악’이라는 틀이 없는 가운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열정과 시도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그, 바로 뮤지션 박재범이다.

 

박재범
블랙 슬리브리스 톱 크리스 반 아쉐 바이 쿤(Kris Van Assche by KOON), 블랙 크롭트 팬츠릭 오웬스(Rick Owens), 블랙 스트레이트팁 슈즈 캠퍼(Camper).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Charisma Cut

쇼트커트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매니시한 멋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 대신 진짜 남자처럼 보이지 않도록 뒷머리는 길게 남겨두었다는 게 헤어아티스트 재선의 설명. 옆쪽의 긴 머리는 무스만 발라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팬츠, 톱, 재킷 모두 세린느
쇼트커트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매니시한 멋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 대신 진짜 남자처럼 보이지 않도록 뒷머리는 길게 남겨두었다는 게 헤어아티스트 재선의 설명. 옆쪽의 긴 머리는 무스만 발라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팬츠, 톱, 재킷 모두 세린느
머리 한쪽만 파격적으로 짧게 잘라 옆 가르마를 탄 김나영. 다른 한쪽의 긴 머리를 헤어 롤로 말아 굵은 웨이브를 연출했다. 붕붕 뜨는모발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바람에 날리듯 자연스럽게표현했다. 톱과 스커트 모두세린느
머리 한쪽만 파격적으로 짧게 잘라 옆 가르마를 탄 김나영. 다른 한쪽의 긴 머리를 헤어 롤로 말아 굵은 웨이브를 연출했다. 붕붕 뜨는모발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바람에 날리듯 자연스럽게표현했다. 톱과 스커트 모두 세린느

한쪽은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로 다른 한쪽은 단발머리로 언밸런스한 매력을 살린 아주 과감한 스타일이에요. 한쪽 머리가 길어 가르마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죠_ 헤어아티스트 재선

전체적인 모발에 웨이브를 주고 가르마 반대 방향으로 빗어 한층 볼륨 있는 스타일을 연출했다. 여기에 큰 헤어 장식을 하니, 여성스러우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화이트 재킷과 원피스 모두 스텔라 맥카트니, 헤어 장식 크로쉐
전체적인 모발에 웨이브를 주고 가르마 반대 방향으로 빗어 한층 볼륨 있는 스타일을 연출했다. 여기에 큰 헤어 장식을 하니, 여성스러우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화이트 재킷과 원피스 모두 스텔라 맥카트니, 헤어 장식 크로쉐

이제야 제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만난 것 같아요. 커트를 하고 나니 한층 세련된 느낌이 나고,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요._ 김나영

긴 옆머리를 앞머리처럼 연출해 펑키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에 스터드 장식 헤어밴드를 하니 색다른 분위기가 난다. 이런 스타일은 밝은 색깔로 염색한 머리에 잘 어울린다. 가죽 톱 꼼데가르송, 쇼츠 르윗, 헤어 장식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긴 옆머리를 앞머리처럼 연출해 펑키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에 스터드 장식 헤어밴드를 하니 색다른 분위기가 난다. 이런 스타일은 밝은 색깔로 염색한 머리에 잘 어울린다. 가죽 톱 꼼데가르송, 쇼츠 르윗, 헤어 장식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황정민이 다른 이유

1202mcmacemj16_04

2001년 말 어느 날, 방은진 감독의 경기도 수지 집에서 송년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임상수 감독과 김인식 감독이 와 있었는데(아마도 이들의 방문은 방은진을 캐스팅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임상수 감독의 새 영화 여주인공으로) 두 사람은 서로 헐뜯는 데 바쁜 모습이었다. 둘은 기이하게도 늘 시나리오 작업을 공동으로 한다. 지금까지도. 어쨌든 충무로에서 까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두 사람이다. 김인식 감독이 먼저 그랬다. “이 인간 새 영화 만든다는데, 아 글쎄 쓰레기야 쓰레기. 주부가 옆집 고등학생하고 막 섹스를 하고 말이야. 시나리오를 보는데 정말 눈 뜨고는 못 보겠더라고.”

임상수 감독이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한방 날렸다. “그래서? 그러는 너는 남자끼리 뒹구는 영화 찍었잖아!” 임상수의 말에 씩씩대던 김 감독이 내게 그랬다. “당신이 좀 보고 판단해줘. 저런 인간과는 말 못 하겠어!” 우스갯소리인 줄 알고 며칠 잊고 지내던 어느 날 김인식 감독에게서 VHS 테이프가 왔다. <로드 무비>라고 제목이 써 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테이프를 모니터에 넣었다. 아항,하품이 나왔다. 일이니까. 언젠가는 봐야 하는 거니까.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담배를 하나 붙여 물었다. 그리고 10분 정도 꼼짝 못 하고 화면을 지켜봤다. 의도적으로 어둡게 음영을 깔아 놓은 화면에서는 두 사람이 거친 섹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남자의 허리에 두 다리가 강하게 얽혀 있다. 오디오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리를 감고 있는 다리의 굵기가 남달랐다. 그때 알았다. 저거, 저거, 남자 다리잖아! 바로 황정민과 정찬이었다. 황정민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임상수 감독의 논쟁적인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도 황정민은 거침없이 옷을 벗어 젖혔다. 속물 근성 강한, 그러나 비교적 잘나가는 변호사 역이었던 황정민은 와이프(결국 방은진에서 문소리로 바뀌었다) 아닌 젊은 여자와 혼외 정사를 즐긴다. 근데 그 섹스의 표현 수위가 엄청나게 높았다. 한국 영화가 정녕 ‘위대한 섹스의 반란’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 섹스를 통해 세상의 억압을 뚫고 나가려 하던 때가 있었다면 바로 그 중심에 황정민이 있었던 셈이다.

 

영화를 즐기면서 한다는 것

“그때는 뭐가 뭔지 잘 몰랐던 때예요. 마치 나한테 맞지 않는 옷인데, 이 사람 저 사람 입어보라고 하니까 그걸 주워 입고 나서는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랄까? 이게 영화라면, 이런식으로 하는 게 영화 만들기라면, 나하고 영화는 안 맞겠다 싶었던 시절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연기 좀 합네,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내 안에 있는 것을 하나도 제대로 내비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자기는 모자랐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넘치게 봐줬다는 점이다. 황정민은 <로드 무비> 등으로 신인배우상을 탔으며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글쎄 말이에요. 그러니 전 더 이상했죠. 이거 뭐지? 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이건 도대체 뭐지?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꼭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영화를 한다는 것은 ‘동화(同化)’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극중 인물에 동화돼야 하고 감독은 그런 배우와 동화해야 하며 (그래서 감독과 배우는 영화를 만드는 와중에 종종 연애에 빠지곤 한다) 또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관객 역시 그 작품에 동화돼야 한다.

동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비우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춰야 한다. 전도연과 함께 출연했던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은 비로소 영화를 하는 기술을 터득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남우주연상을 탄 어느 시상식 무대에서 유명한 수상 소감을 남겼다. 이른바 ‘숟가락론’이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나는 그저,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을 얹은 셈이었다. 그러니 이 영광은 모든 스태프에게 돌아가야 한다. 도연아, 고마워’라는 식의 얘기였다. 사람들은 단박에 그의 겸손함에 열광했다. 황정민은 스타가 스타연하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지 보여줬다.

“그때쯤부터였을 거예요. 나 자신이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즐기면서 하자는 마음이 생긴 거죠. 요즘도 그래서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요. 예를 들어서 테이크가 수십 번씩 가고 그러면 다들 굉장히 힘들어하거든요. 근데 그게 꼭 배우 탓만이 아닐 때도 많잖아요. 조명이 약간 부족 했다든가, 동선이 좀 차이가 났다든가 등등. 그러니까 같은 거 많이 찍는다고 힘들어하지 마라, 네가 잘못하고 있다고 주눅들지 마라, 나중에 가장 좋은 컷이 나올 건데, 그때 만족할 걸 생각해라, 라고 말이죠. 전 요즘 현장이 즐거워요. 영화배우라는 것이 행복해요. 어리고 배곯던 시절, 아무런 조건 없이 꾸준히 연극을 했던 때 행복해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와 난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바로 그 점이 좋아요.”

 

1202mcmacemj16_01

한결같은 느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생각해보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비교적 다양한 캐릭터로 채워져 있다. <로드 무비>처럼 방황하는 청년 동성애자가 있는가 하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심통 난 드러머일 때도 있었고, <바람난 가족>의 바람피우는 야비한 변호사도 했었고, <검은집>의 겁 많은 보험조사원이기도 했다. <그림자 살인>에서 구한말의 수사관으로도 나왔고, <사생결단>에서 범죄자보다 더 악질인 형사 역도 해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는 영화 내내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맹인 검객이기도 했다. 아, <모비딕>도 있었다. 아마도 황정민만큼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기자 역이 어울리는 배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허진호 감독의,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영화 <행복>에서 황정민은 또 한 번 최고의 열연을 펼친다. 아, 황정민, 정말 연기 잘해, 라는 소리를 그 영화에서는 특히 들을 만했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이제 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현대 의학 쪽은 손을 놓은 상태에서 대체의학을 찾아 한 요양소를 찾은 황정민은 거기에 자신보다 일찍 와 있는 임수정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니, 사랑에 빠진 척한다. 그가 사랑한 것은 결국 자신의 병든 육체와 정신이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덜 목적으로 여자와 함께하는 삶을 택했을 뿐이다. 결국 황정민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뚜렷한 이유도, 명분도 없이 남자는 여자를 지겨워하고,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여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한 공중화장실에서 황정민은 거울을 마주하고 선다. 그리고 갑자기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다. 나쁜 놈. 그는 자신이 나쁜 놈이고 개새끼이며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결국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찌어찌 여자를 찾아 다시 요양소로 가고, 이미 여자는 자신을 그리워하고 용서하다 쓸쓸히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소식을 듣고 담벼락 한쪽에서 황정민은 꺼이꺼이 목을 놓는다.

<행복>은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찾게 되는 신기루 같은 존재이며 행복한 순간에는 결코 그 행복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인간이 얼마나 우매한 관념의 똥 덩어리 같은 존재들인지 얘기하는 작품이었다. 황정민은 바로 그 너절하고 지리멸렬한 존재감을 100% 표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황정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한결같다는 것이다.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고 다양한 배역을 맡으면서도 그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 한쪽에 갖고 있을 법한 순수함과 위악과 그 양면성과, 그리고 그 중간 지대를 모두 대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황정민은 늘 보는 사람들마다 저건 바로 나야, 하는 대상이 된다. 어떤 영화에서든 그는 항상 나와 같이 이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세상살이를 더불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황정민만큼은 내가 가난한 직업을 택하든,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일을 택하든 같이 담배 한 대 물고, 연기를 푸욱 내뿜으며 ‘에이, 괜찮아 괜찮아. 다 그런 거야’라고 위로해줄 인물처럼 느껴진다.

“사람들 모두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사람들을 살짝 정의롭지 못하게도 만들고, 거짓과 타협하게도 만들잖아요. 매일 바르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하며 살게 되기도 하고요. 많은 분이 저를 사랑해주시는 게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처럼 저 역시 사회적 정의고 뭐고 잘 알면서도, 매번 실수가 많고,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는 사람 같다는 느낌 때문일 거에요. 어떻게 사람이 안 그럴 수 있겠어요. 세상을 살면서.”

황정민은 영웅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반영웅의 이미지도 아니다. 그는 그 중간쯤 회색지대에서 많은 사람들과 쭈뼛쭈뼛 서 있는 사람 같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에서 부하들에게는 조직의 원칙을 내세우며 늘 센 척하고 살지만, 결국 비리 검사 앞에서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고 무릎을 꿇는 형사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큰 격랑이 일 것인가. 우리 역시 그 같은 비바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다.

 

1202mcmacemj16_02

댄싱 퀸 아내를 둔 시장이 된다는 것

황정민의 신작 <댄싱퀸>은 겉보기에는 매우 말랑말랑한 작품이다. 어찌어찌하다 대학 운동권의 기수가 됐다가, 그래서 변호사가 돼도 떠밀려서 인권 문제를 맡느라 꾀죄죄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또 어찌어찌하다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게 되고(그때 황정민의 고백 역시 이거다. “에이 씨 누가 날 떼밀었다 아이가?”) 그래서 결국 한 정당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가게 된다는 얘기다.

거기까지는 밋밋한데, 이 사람의 마누라가 한때 신촌의 마돈나로 불리던 춤꾼이라는 점이 얘기를 뒤집히게 만든다. 전직 신촌의 마돈나 마누라는 뒤늦게 댄스 가수가 되겠다며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고 또 거기서 뽑히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오, 재밌겠다고? 물론 재미있다. 그러나 영화는 시종일관 진부한 상업영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근데 왜 황정민이 이 작품을 선택했을까? 엄정화 때문에? 황정민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엄정화와 연기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아니다.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이 영화를 황정민이 선택한 이유는 정치와 쇼의 기묘한 상관관계를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정치란, 쇼와 같다.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서 남자가 하려는 것은, 그렇게나 무시하려 했던 와이프의 일과 다르지 않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한국에서 쇼를 한다는 건, 진심의 의미를 담으면 정치를 뛰어넘는 역할을 한다. 영화 후반부에 남자가 아내의 일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진정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쇼가 갖는 이분법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분법적이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이 이 <댄싱퀸>이고, 황정민은 바로 그 점을 읽어 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을 것이다.

황정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인터뷰를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요?” 일상에서는 그가 댄싱 퀸이고 아내가 시장이다. 그는 종종 자신의 진짜 아내 얘기를 한다. 다른 배우들보다는 그 빈도가 많다. 그의 엄격한 관리자는 아내다. <댄싱퀸>을 보고 나서 지금껏 한 연기 중에서 제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는 황정민도 그랬고, 나도 그랬는데, 그의 부인의 평가에는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황정민에게는 늘 모든 작품이 베스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번 <댄싱퀸>보다 더 힘든 작품도 지금껏 많이 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내의 평가는 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럼에도 늘 아내의 평가를 제일 앞세우는 것은, 그녀를 영화적 동지이자 동반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말 심야 시간대에 멀티플렉스에 부인과 영화를 보러 나온 황정민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촬영이 없을 때면 마치 부족한 곡기를 채우듯 극장을 순회하며 영화를 본다.

“<댄싱퀸> 개봉할 때 대니얼 크레이그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개봉한다면서요? 아이 씨. 데이비드 핀처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데. 왜 하필 그 영화가 개봉되는지불안해 죽겠네요.” 서로 관객층이 달라서 괜찮을 거라고 얘기한다. 얘기가 나온 김에 황정민의 입에서는 영화 얘기가 줄을 잇는다. 갑자기 데이비드 린치 얘기까지 나온다. “린치 영화 중에 <스트레이트 스토리> 있잖아요. 좀 된 영화요. 그 영화에는 딱 두 명 나와요. 70대 노인과 장애인 딸이요. 근데 두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와아, 영화가 그런 거예요. 아주 작고 단순한 이야기로도 사람 가슴에 팍 꽂히게 하는 거. 늘 그런 영화를 보고, 저런 영화를 해야 한다고 살아요.”

공교롭게도 황정민과 10년 만에 자리를 했다. <로드 무비>에서 이번 <댄싱퀸>까지 황정민은 스타의 계단을 차곡차곡 걸으며 올라왔다. <신세계>처럼 앞으로 찍어야 할 영화가 뒤에 줄을 잇고 있으며 <한반도>처럼 막바지 촬영 중인 블록버스터급 TV 드라마도 있다. 10년 후에 황정민은 과연 어떻 게 돼 있을까.

“제가 어떤 배우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글쎄? 폴 뉴먼 같은 배우?” “에이, 꿈이 너무 큰 거 아녜요, 그거?” 꼭 그런 건 아니다. 지금대로라면 황정민은 한국의 폴 뉴먼 같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1202mcmacemj16_03

ⓒ MARIECLAIREKOREA 사전동의 없이 본 콘텐츠의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