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known Woman

스카이 블루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스카이 블루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그런 여자가 있다. 방금 전까지 꽃처럼 웃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상대방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 여자는 순수하고 투명한 소녀처럼 보이지만, 설득이나 양해가 불가능한 내면은 때로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파멸과 불행으로 툭 밀어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육감적인 몸을 가진 것도, 조각한 듯 완벽한 얼굴을 가진 것도 아닌데 표정과 몸짓과 한마디 말로 남자의 이성과 지성을 마비시키고, 도덕과 양식을 잊고 질투에 불타는 수컷이 되게 만든다.

 

화이트 스팽글 언밸런스 원피스 샤넬(Chanel), 가로 직사각형 바 브레이슬릿, 로즈 골드 레이어드 링 모두 티로즈(TRose).
화이트 스팽글 언밸런스 원피스 샤넬(Chanel), 가로 직사각형 바 브레이슬릿, 로즈 골드 레이어드 링 모두 티로즈(TRose).

<은교>의 김고은이 등장과 함께 영화계를 흥분시킨 건 연기 경험이 전무한 스물한 살 어린 여배우에게서 그 여자를 봤기 때문이다. 김고은이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하게 될지는 일찌감치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다. 간혹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순서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 김고은이 그랬다. 너무 일찍 만난 은교의 잔영은 사라질 것 같지 않았고, 두 번째 작품이 데뷔작의 강렬함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몬스터>다.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였다면 왠지 실망스러웠겠지만, 그렇다고 스릴러도 짐작 밖이다.

“상상만큼 <은교> 다음에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다시 학교 다니고, 난 길게 보고 갈 거니까 괜찮아, 하면서도 불안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마침 스릴러 장르에는 늘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항상 여자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구도는 싫었어요. 그렇지 않아서 선택한 것 같아요. 그런 얘기를 자주 하던 때였거든요.”

 

타임 원피스
블랙 시폰 원피스타임(Time), 세로 직사각형 바 네크리스, 로즈 골드 레이어드 링 모두 티로즈(TRose).

아직 개봉 전인 영화는 트레일러만으로 <은교>의 기억을 무디게 만든다. ‘복순’은 노점상을 하면서 동생과 둘이 산다. 바가지머리에 손으로 짠 털 조끼와 꽃무늬 남방, 몸뻬 차림의 복순이 무슨 일로 수가 틀렸는지 과도를 뽑아 들고 성질을 피우는 장면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은교는 갔다. 대신 동네에서는 ‘미친년’으로 통하고, 동생을 죽인살인마와 맞짱을 뜨고 껌 씹듯 분을 씹으며 ‘씹새끼’ 같은 19금 욕도 뱉을 수 있는 여자로 김고은은 돌아왔다.
“복순이는 자기한테 소중한 걸 지키려는 아이에요. 그래서 동생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맹목적일 수 있는 아이요. <은교> 할 때 힘들었을 거라고들 하시는데 사실 전 기쁘고 행복했어요. 뭘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앵글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그런 것조차 전혀 몰랐으니까요. 저 하는 걸 보시고 감독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면서 제 움직임에 카메라가 따라오게 하셨어요. 저는 이건 이렇게 해보자, 어떻게 하면 이거보다 더 잘할 수 있지? 노력만 하면 됐죠. <몬스터>를 찍으면서 정신적으로는 훨씬 힘들었어요. 일단 저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커 버거웠어요. <몬스터>를 하며 이제 현장에 익숙해졌어요. 아,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카메라 감독님도, 조명 감독님도 힘들구나, 알게 된 거죠. 뉴욕 아시아 영화제 갈 때 정지우 감독님이 제 얼굴이 달라졌다고, 딴사람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김고은 화보
화이트 시폰 스팽글 패턴 장식 원피스 이로(Iro), 실버 링 디디에 두보(Didier Dubot).

<몬스터> 속 김고은에게는 <마더>의 원빈 같은 낯섦이 있다. 우아한 외모에 갇힌 동네 바보, 쉽고 만만할 거라는 예측을 벗어나는 막무가내의 자아 같은 것들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 조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김고은은 복순이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라는 애초 설정을 버렸다. 교육과 관계를 통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 보통 아이들과 다른 결을 가지게 된 아이가 되면서 복순은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계산된 분석이나 반복된 리딩으로 얻어진 결과는 아니다. 정해진 캐릭터를 학습하고, 구현하기보다 캐릭터와 만나고 융화되는 과정을 거쳐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김고은이다.

‘분석하려고 하면 백지가 된다’는 김고은의 고백을 불성실이나 신인 배우의 미흡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김고은이 배우로서 자극을 받고 영감을 얻는 여배우 틸다 스윈턴이나 나탈리 포트만이 생래적 아우라를 더해 자신들의 연기를 완성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성적으로 캐릭터에 접근하고, 장면마다 호흡마다 치밀하게 조율한 연기에 더해지는 무엇. 그것은 배우 자신의 은밀한 방에서 이뤄지는, 아무도 관여하거나 참견할 수 없는 화학적 과정이고, 노력만으로는 꺾을 수 없는 타고난 배우들의 세계다. 아직 김고은은 작품과 세월 속에 제련된 배우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일천한 경험을 가졌을 뿐이지만, 같은 증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고은 화보
라이트 그레이 쇼트 니트 톱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아이보리 시폰 롱스커트 세린느(Celine).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날, <몬스터> 개봉을 목전에 둔 김고은은 <협녀: 칼의 기억> 막바지 촬영 중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스튜디오를 나서던 김고은이 돌아와 다시 앞에 앉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까 배우란 직업에 대해 물어보셨잖아요. 결투 신을 찍다 알게된 건데, 내가 남을 다치게 하는 순간도, 남이 나를 다치게 하는 순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더라고요. 유난히 합이 긴 신이었어요. 중간에 제가 다친 걸 알았는데, 어차피 다친 거 지금 얘기하나 이 신 끝나고 얘기하나 똑같으니까 일단 가자, 하고 찍었어요. 그 신 다 찍고 나니 다들 왜 그걸 참고 있었느냐고 난리였죠. 심하게 다쳐서 결국 그날은 촬영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배우를 계속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왠지 그랬어요.”

 

네이비 패턴 화이트 베스트 팬츠 산드로(Sandro), 스트라이프 슈즈샤넬(Chanel), 별 모양 링, 세로 직사각형 바 네크리스 모두 티로즈(TRose).
네이비 패턴 화이트 베스트 팬츠 산드로(Sandro), 스트라이프 슈즈 샤넬(Chanel), 별 모양 링, 세로 직사각형 바 네크리스 모두 티로즈(T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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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Fair Lady

머리에 두른 실크 스카프 에르메스(Hermes), 퍼프소매 화이트 원피스 질 스튜어트(Jill Stuart)
머리에 두른 실크 스카프 에르메스(Hermes), 퍼프소매 화이트 원피스 질 스튜어트(Jill Stuart)

화보를 진행하기 전, 오마주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박신혜가 선택한 인물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과거의 인터뷰에서 오드리 헵번에 대한 애정을 공공연히 밝혀왔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위대한 배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배우인 동시에 아름다운 인간이었던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말과 삶이 일치했기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박신혜, 그녀도 아름다운 인간으로 살고 싶은 것 같았다.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지금 봐도 참 세련되잖아요. 거기에서 배어나는 사랑스러움이나 당당함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고요. 그분은 자존감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도 사랑하지 못하니까요. 그녀는 대단한 스타였지만 자신의 삶을 충실히, 열심히 살았잖아요. 그 점을 꼭 닮고 싶어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게 제 가장 큰 목표예요. 지금처럼 평소에 봉사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을 것 같아요.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요.

 

트윌리 스카프 에르메스(Hermes), 라이트 핑크 컬러 풀 스커트 에이치앤엠(H&M), 페이턴트 플랫 슈즈 레페토(Repetto), 진주 귀고리와 화이트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클래식한 자전거 비토 바이 바이크 팩토리(Vite by Bike Factory)
트윌리 스카프 에르메스(Hermes), 라이트 핑크 컬러 풀 스커트 에이치앤엠(H&M), 페이턴트 플랫 슈즈 레페토(Repetto), 진주 귀고리와 화이트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클래식한 자전거 비토 바이 바이크 팩토리(Vite by Bike Factory)

나는 지난해 이맘때 박신혜를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 꼬박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에게는 멋진 일들만 벌어진 것 같다. 든든한 ‘오빠’들과 함께 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은 놀라운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드라마 <상속자들>을 만나면서 박신혜는 또래 청춘 배우들과 함께 말 그대로 빛나는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박신혜는 영화 <상의원>(가제)의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시대 한복 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번 사극에서 한석규, 고수, 유연석 등의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 늘 상대 배우 복이 많은 그녀다. 크랭크인까지 딱 2주 남았다.

“요즘은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녹초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한 작품이 끝나면 아무래도 같이 한 사람들도 생각하고 후유증이 남으니까. 이번에도 <상속자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다음 날 일어나니까 눈물이 맺혀 있는 거예요. 이제 새로운 영화도 해야 하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몸이 피곤해도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저만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럴 때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요즘에는 꽃을 만지고 있는데 참 기분 좋은 일이더라고요.”

 

블랙 니트 스웨터 에이치앤엠 컬렉션(H&M Collection), 블랙 팬츠 마쥬(Maje), 진주 귀고리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티 세트 파넬(Parnell), 클래식한 패턴의 러그 이튼 알렌(Ethan Allen)
블랙 니트 스웨터 에이치앤엠 컬렉션(H&M Collection), 블랙 팬츠 마쥬(Maje), 진주 귀고리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티 세트 파넬(Parnell), 클래식한 패턴의 러그 이튼 알렌(Ethan Allen)

전에 그녀를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도 그녀가 무척 많은 취미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박신혜는 스노보드와 웨이크보드, 펜싱, 승마, 배드민턴, 수영, 골프까지 섭렵한 스포츠 마니아에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는 시간을 가장 사랑한다. 재작년부터는 몸의 균형 감각을 높이기 위해 현대무용도 배웠다. 그 외에도 도예, 요리, 배낭여행까지 그녀는 하고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다. 이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안다. 취미가 많은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꽤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예민해지기도 쉽고, 압박감도 많은 환경에서 일하면서 이 정도의 취미를 즐기려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누구보다 바쁘면 바빴지 결코 한가할 리 없는 박신혜는 필사적으로 본인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에서든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주위 시선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자, 생각하는 편이에요. 안 그러면 진짜 못 살 것 같아요. 얼마 전에 가족들하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사적인 시간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어요. 또 언제 이런 관심과 사랑을 느껴볼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쉽지가 않구나, 생각하게 되죠. 근데 이번에 <상의원>을 하면서 만난 한석규 선배님이나 고수 선배님은 어떤 여유가 있고, 그 모습이 참 멋있는 분들이에요. 이야기를 나눠보면 한마디 한마디가 시 같고.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런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블랙 하이넥 스웨터와 아이보리 샤 스커트, 토슈즈 모두 레페토(Repetto)
블랙 하이넥 스웨터와 아이보리 샤 스커트, 토슈즈 모두 레페토(Repetto)

이번 화보에서 오드리 헵번이 사랑한 것들을 재현하려고 했을 때 굳이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여배우들이 힐을 신고 또각거리며 걸을 때 플랫 슈즈를 신고 촬영장과 촬영장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는 헵번의 모습과 박신혜의 몇 가지 습관 사이에는 상당히 공통분모가 많다. 조건 없이 순수한 우정을 나누어주는 동물과 항상 함께있고, 튀튀를 입은 모습이 참 잘 어울리고, 자신을 웃게 만드는 일에서만큼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 여자들이다.

“일을 하다 상처 받거나 힘이 들 때면 일단 얼굴에 웃음이 없어지잖아요. 그렇게 웃지 않으면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는 것 같아요. 내가 웃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웃고, 또 그 사람들이 웃는 걸 보면서 나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고. 그래도 도저히 웃고 싶지 않은 날에는? 그럴 땐 그냥 솔직히 말해요. ‘죄송해요, 제가 상황이 너무 안 좋아요,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할게요. 다음에 만났을 때는 더 잘할게요.’ 이게 제 스타일 인 것 같아요.”

 

따뜻하다거나 사랑스럽다는 말이 칭찬인 시대는 지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래도 박신혜의 웃는 모습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모두가 무뚝뚝하고 시크한 시대에 긍정적이고 따뜻한 기운을 품은 배우가 있어서 좋다. 어쨌거나 박신혜는 잘 웃는 여자다. 앞으로도 그녀가 웃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예전에는 시청자나 관객과 같이 늙으며 말벗이 될 수 있는, 같이 걸어갈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였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는데, 한 가지 더 추가된 게 있어요. 배우라는 게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직업이잖아요. 그게 엄청난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한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큰일인 것 같아요. 이러다가도 이러다가도 또 무너질 것이고, 그래서 무섭기도 하지만, 이건 늘 가슴에 새기고 있으려고요.”

 

클래식한 재킷 드민(Demin), 슬릿 디테일 H라인 스커트 아이잗 컬렉션(The Izzat Collection),스틸레토 힐 디올(Dior), 진주 귀고리와 모자, 블랙 벨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클래식한 재킷 드민(Demin), 슬릿 디테일 H라인 스커트 아이잗 컬렉션(The Izzat Collection),스틸레토 힐 디올(Dior), 진주 귀고리와 모자, 블랙 벨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골드 실크 드레스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골드 새틴 펌프스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진주 귀고리와 블랙 롱 글러브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플라워 프린트 소파, 클래식한 패턴의 러그 모두 이튼 알렌(Ethan Allen)
골드 실크 드레스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골드 새틴 펌프스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진주 귀고리와 블랙 롱 글러브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플라워 프린트 소파, 클래식한 패턴의 러그 모두 이튼 알렌(Ethan 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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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욱의 탐색

그레이 코트와 수트 모두 엔트로페(Entrofe), 구두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그레이 코트와 수트 모두 엔트로페(Entrofe), 구두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딱 1년 전이겠다. 2012년 12월쯤인가, 폭설 때문에 거리에 나온 차들이 오도 가도 못했던 날 몇 명의 스타가 폭설 때문에 지하철을 탔다며 인증샷을 올렸다. 그중 하나가 지창욱이었다. ‘신분당선이 생겨 좋다’는 멘트와 함께 올라온 그의 인증샷은 폭설이 내린 그날, 많은 인터넷 뉴스를 장식했다. 참 별게 다 뉴스거리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고 다시 12월, 지난겨울보다 눈도 더 많이 내리고 추위는 더 혹독할 거라는 겨울, 그는 50부작 사극 <기황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매일 밤샘 촬영이 이어지는 빡빡한 스케줄 사이 어쩌다 촬영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난 날(물론 아주 늦은 밤이다) 그를 마주했다.

<기황후>에서 그는 참 이상한 황제 ‘타환’을 연기한다. 명색이 왕인데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제 한 몸 지켜낼 힘도 없다. 지질한 황제 타환은 몸만 어른이지, 아이처럼 귀여운 구석도 있다. 유일하게 마음을 준 ‘기승냥’(하지원)에게는 애교에 투정까지 부리고,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서글프게 눈물을 흘린다. 한 회에 그가 연기해야하는 감정의 진폭은 꽤 크다.

“타환은 아주 입체적인 캐릭터예요. 철없는 아이 같지만 아픔이 있고, 때론 울분을 삭여야 하죠. 감정을 얼만큼 드러내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을 엄청 많이 했어요.”

 

블랙 재킷과 팬츠, 화이트 셔츠 모두 디올 옴므(Dior Homme), 실버메탈 시계 펜디 워치(Fendi Watch).
블랙 재킷과 팬츠, 화이트 셔츠 모두 디올 옴므(Dior Homme), 실버메탈 시계 펜디 워치(Fendi Watch).

<기황후>는 16회 차 정도 촬영을 마쳤다. 미니시리즈로 따지면 작품 하나에 해당하는 분량이지만 최종회가 될 50부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일일 드라마도 해보고 주말 드라마도 해봤으니 오랫동안 호흡을 유지해야 하는 작품이 처음은 아니에요. 하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죠. 반년 가까이 하나에 집중해야 하니까요. 잠도 잘 못 자고 체력적으로도 힘이 들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연기를 기계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내야 하는데 어느 순간 캐릭터가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일관된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의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주말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은 그런 고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고 힘들었던 작품이다. “많이 괴로웠어요. 하루는 드라마에 함께 출연한 조진웅 형이랑 강남 한복판의 설렁탕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제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다가 펑펑 운 적도 있어요. 형이 그때 이렇게 말해줬어요. ‘힘들면 힘들어하는 게 맞고, 눈물이 나면 우는 게 맞다. 왜 자꾸 감정을 감추고 부정하느냐.’ 그렇게 함께 출연했던 형과 선생님, 작가님 덕분에 작품을 무사히 마친 것 같아요. 작가님은 지금도 저를 그때 극 중 이름인 ‘미풍’이라고 부르세요. 아마 그때 연기를 포기했더라면 다시는 이 일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데님 셔츠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버건디 컬러 니트 풀오버 발란타인(Ballantyne), 블랙 팬츠 디올 옴므(Dior Homme), 브라운 구두 알도(Aldo).
데님 셔츠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버건디 컬러 니트 풀오버 발란타인(Ballantyne), 블랙 팬츠 디올 옴므(Dior Homme), 브라운 구두 알도(Aldo).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에서 연기하며 희열이나 뿌듯함이 아닌 괴로운 마음이 컸던 건, 그때까지도 ‘이 바닥’은 그에게, ‘이상한 나라’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그에게는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게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데, 우리는 대수로운 일인 양 떠들며 특별한 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와 ‘연예인’이 사는 세상은 다르니까, 평범한 일을 그들이 하면 특별한 것이 되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어느 날 문득 막연하게 ‘배우’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여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창욱은 그날로 문과에서 예체능으로 진로를 바꾸고 연극영화과 입학을 준비한다. 누군가는 중학교 때부터 연기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데 그는 고작 석 달을 준비하고 덜컥 합격했다.

“너무 쉽게 합격하니 연극영화과가 별거 아닌 것 같았죠. 저는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면 매일 막 신나게 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저랑 완전히 달랐죠. 아주 오래전부터 이 길을 준비한 친구들은 세상을 초월한 사람들 같았어요. 모두 이미 예술가처럼 느껴졌어요. 다들 독특하고 이상해 보였죠. 수업에 들어가면 신체 훈련이랍시고 바닥을 막 구르는데 너무 어색했어요.

나 혼자만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않고 방황했어요.” 불안한 시작이었지만 그는 결국 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곧 죽어도 연기를 하겠노라고 바득바득 우기며 엄마에게 상처 줘가며 진로를 결정했는데 시작도 해보지 않고 관둘 수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방황하는 동안 수업 대신 선배를 따라다니며 단편영화를 촬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미친 소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촬영장에서 보니 꼭 필요한 수업이었던 거죠. 다시 시작하고 나서도 후회한 적이 많아요. ‘나한테 소질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눈앞이 캄캄하죠.” 후회의 순간을 뒤로하고 지금의 지창욱이 그만의 타환을 제대로 만들어내고 있는 건, 그리고 준비 없이 들어온 이상한 나라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사람들 덕분이다. 연기를 시작하고 알게 된 선배와 감독, 작가의 조언과 가르침 그리고 응원.

 

지창욱 화보
회색 머플러 노스프로젝트 바이 비이커(NorseProjects by Beaker) 화이트 & 그레이 셔츠 플러스 바이 커드(Flus by Kud) 팬츠 발란타인(Ballantyne)

2013년의 끝자락, 지창욱은 요즘 꽤 행복할 것 같다. <기황후>가 방송하는 날이면 그의 연기를 칭찬하는 뉴스가 어김없이 업데이트 되고, 드라마 속 그의 모습을 캡처하는 블로거도 부쩍 많아진 것 같다. 그래, 칭찬 속에 사는 건 좋은 일일 거다. “사실 사람들 반응은 잘 보지 않으려고 해요. 뮤지컬 <쓰릴 미>를 할 때 였는데, 그때 제 연기를 두고 엄청나게 많은 리플이 달렸어요. ‘저 연기는 이렇게 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식의 의견이었죠. 팬층이 두껍고 많은 배우가 거쳐간 작품이라 더 그랬을 거예요. 그 많은 의견을 읽고 나니 나중에는 제 연기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고 흔들리더라고요. 점점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이제는 댓글이나 평을 잘 읽지 않아요. 대신 대본을 읽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죠. 내가 하는 역할에 사명감을 가지고 누구보다 나 자신이 캐릭터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연기에 스스로 확신이 없으면 결국 중심을 잃고 캐릭터는 두루뭉술하게 흘러가버리더라고요.”

지창욱에게 2013년의 시작은 뮤지컬 <그날들>이었다. 1월부터 연습을 시작한 <그날들>은 지난 한 해 가장 큰맘먹고 한 도전이기도 하다. 흥행 성적도 좋았고 지창욱은 이 작품으로 뮤지컬 어워즈에서 신인상도 받았다. 뮤지컬은 그에게 꿈이었다. 그 꿈이 이뤄져 무대에 오른 자신이 신기할 만큼. “스물한 살에 제 생애 첫 독립영화 촬영을 마치고 대학로에서 오디션을 봤어요. 알과핵 소극장이란 곳인데 그곳에서 일주일간 공연을 했죠. 주인공 한 명이 이끌어가는 형식이 아니라 몇 개의 단막극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뮤지컬이에요. 그때 엄청나게 혼났어요. 그 뒤로 뮤지컬 무대에 꼭 다시 서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가창 수업도 듣고 혼자 뮤지컬 곡 연습도 하곤 했죠.” 그러다 <쓰릴 미>를 하고 <그날들> 무대에 올랐다.

“그거 알아요? 죽도록 연습하는데 마음만큼 안 되는 거예요. 어느 날인가는 갑자기 ‘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안 찍었으면 확 도망가려고 했어요. 그때 장유정 감독님이 큰 힘이 됐어요. 힘들고 막히면 무조건 감독님한테 풀었죠. 술 먹고 감독님 앞에서 막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제가 사회에서 ‘엄마’라고 부르는 분이 되었죠.” “주사가 술 먹고 우는 건가봐요.(웃음)” “아니에요! 절대! 진짜!”

 

하늘색 롱 코트 철동 바이 커드(Cheol Dong by Kud), 블루 체크 셔츠 문수 권 바이 커드(MunSoo Kwon by Kud), 와인 컬러 벨벳 팬츠 디파트먼트 파이브 바이 비이커(Department Five by Beaker), 구두 유나이티드 누드(United N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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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욱에게 2014년의 시작은 당연히 <기황후>다. 아직 절반도 채 오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딴짓’을 상상할 수도 없다. 연말에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날 계획도, 친구들을 만나 밤새 술을 마시는 계획도 한참 미뤄둬야 할 판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몇 번이나 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의 착하고 건강한 청년의 이미지 때문에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그를 보고 놀라기도 한단다. 하긴 <기황후> 이전의 그는 늘 착실한 누군가였다. 일탈과는 좀처럼 상관없을 것 같은 남자.

“작품이 없을 때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보낼 때도 있어요. 갑자기 문득 뭔가가 하고 싶으면 실행에 옮겨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하루는 갑자기 새벽 4시에 여행을 가고 싶었어요. 무작정 대충 짐을 싸 집을 나섰죠. 그런데 계산을 잘못한 거예요. 해가 뜨고 나니까 잠이 막 쏟아지는 거죠. 그래서 일단 휴게소에서 잠을 자고 가기로 했어요.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눈을 뜨니 정오가 다 됐더라고요. 대충 세수하고 다시 길을 떠났어요. 그렇게 슬렁슬렁 가다 보니 부산이더라고요.”

드라마<다섯 손가락>이 끝난 뒤에는 술만 마시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매일 나가던 촬영장에 나갈 수 없고, 매일 만나던 스태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공허해 일주일을 꼬박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일주일 내내 한 일이라 곤 술을 마시거나 자거나 혹은 술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공허한 마음을 조금 달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이런저런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품을 하나 끝내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사람인 것 같아요. <기황후>가 끝나면 난 더 이상 타환으로 살지 않겠죠. 하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남아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이 생기면서 점점 내가 진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선배들이 항상 말하죠. 배우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 처음엔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느낌이 와요.하지만 여전히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어요. 계속 고민해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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