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쉼표, 장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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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니트 스웨터 버버리(Burberry).

모든 사람이 장근석은 보통의 연예인과 다르다고 말한다. 분명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는 꽁꽁 싸매고, 숨기는 신비주의 대신 SNS 같은 미디어를 활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외 공연을 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동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보디가드를 동원하거나 공식 일정 이외의 모든 시간을 호텔에 발이 묶여보내지 않는다. 공연차 일본에 머무를 때의 일화다. ‘PM 19시 00분 테니스 클럽. 지금 오면 번개 가능’ 같은 멘션을 날려 순식간에 테니스장 앞으로 팬들을 불러 모은다. 물론 유니폼을 갖춰 입거나 헤어스타일을 곱게 손질한 모습은 아니다.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그대로 팬들에게 던져준다. 스타와 팬 사이에 존재해야 할 어떤 ‘빛이 나는 거리감’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좋으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장근석이다.

“가끔 매니저나 회사에서 컴플레인을 하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연예인도 하나의 상품이자 브랜드일 수 있으니, 그들로서는 완벽한 상태일 때 노출시키고 싶죠.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흠이 없다고 해서 완벽할까요. 저는 제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상자였으면 좋겠어요. 서로 알고 시작하면, 기대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줄어들 테니까요. 적어도 저와 제 팬들은 서로의 유리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껏 그가 만들어낸, 보통의 연예인과 행보가 다른 이슈가 몇 가지 이던가. 별로 개의치 않는다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발언 정도로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상처받지 않겠는가, 어떻게 무신경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장근석은 자신이 벌인 일에 덤덤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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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한 핏의 화이트 맨투맨 셔츠 준지(Junn.J), 화이트 체크 팬츠 보테가 베네타(Vottega Veneta), 화이트 샌들 재희 신(Jehee Sh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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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티셔츠 알렉산더 왕 바이 10 꼬르소 꼬모(Alexander Wang by 10 Corso Como), 베이지색 수트 김서룡 옴므 (KimSeoRyong Ho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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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티셔츠 페르드르 알렌느(Perdre Haleine).

작품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니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미남이시네요> 이전의 장근석은 장르에 편견이 없었다. 저예산 영화나 트렌디한 드라마와 퓨전 사극을 오갔다. 마치 ‘월리를 찾아라’처럼 어떤 게 진짜 장근석의 모습인지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또래의 고만고만한 배우들은 장근석을 좋은 예로 삼았다. 물음표가 생긴 건 그를 ‘근짱’으로 만들어준 <미남이시네요> 이후의 행보다. 작품을 풀어내는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 작품이 대중에게 시사하는 바는 대부분 비슷한 카테고리로 연결되었다. 근짱이 그의 작품 선별에 까지 영향을 미쳤을까 싶지만 장근석은 작품 선택에 용기가 없는 배우가 아니었다.

“가끔 제 자신에게 물을 때도 있어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할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꽃향기 폴폴 나는 달큰한 캐릭터에 나도 모르게 중독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데 말이죠, 묻고 또 물어도 그건 아니라는 거죠. 결국 시청률이 모든 걸 말하는 요즘의 방송 시스템에서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근래 몇 편의 작품이 그다지 훌륭한 성적표를 받지는 못했어요. 한 두 작품 하고 반응이 예전만 못하면 제가 곧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작품 선택은 결국 배우가 짊어져야 할 가장 큰 책임이에요. 마지막까지 책임을 회피한 적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선택했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일엔 ‘때’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제 나이 스물일곱에만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죠. 30대 중반이나 40대 중반에 꽃미남을 연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맥락인 것 같아요. 지금 보여줘야 할 나의 20대가 담길 수 있는 작품.”

최근 몇 년간의 장근석은 그야말로 ‘꽃.같.다’. 긴 머리에 기타를 쳐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20대 남자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평생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에게, 서너 편의 꽃미남 드라마가 후에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간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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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이닝 티셔츠 질샌더(Jil Sander), 배기팬츠 카루소(Caruso).

작품을 마친 배우의 속내는 시커멓게 타고 남은 재와 같을 것이다. 〈예쁜 남자〉를 끝낸 그의 속내도 마찬가지다. 모든 스위치를 꺼둔 사람처럼 차분하다. 오늘 표지 촬영에서 장근석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말을 걸어오는 듯한 눈동자의 움직임 말고는 어떤 것도 ‘연기’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의도한 컨셉트 이상의 감도 높은 사진을 건졌지만 어쩐지 그의 조용함이 낯설다.

“정지 상태예요. 일단 멈춤. 중요한 것은 어떤 시각을 갖느냐의 문제인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묵힐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지금은 달리고 싶지 않아요.”

늘 에너지가 충만하고 감정의 데시벨이 최고조에 이르던 장근석이 맞나 싶지만, 이런 조용한 침잠 또한 그가 가진 모습 중 하나다. 그에게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당당하다 못해 지나치리만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있다, 분명히. 거침없이 직진하며 소리 높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도 안다. 그렇지만 조용히 뒤에서 상대를 서포트하며, 자신을 낮출 줄도 아는 사람이 또한 장근석이란 배우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만들어놓은 이미지 안에서만 장근석을 관찰했을 수도 있다. 진실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것처럼, 몰랐던 게 아니라 그런 장근석은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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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티셔츠와 플라워 프린트 팬츠 모두 카루소(Caruso).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슬로 라이프’를 지향한다. ‘빨리빨리’가 한국을 대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요즘은 ‘천천히, 서서히, 느리게’로 삶을 포장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기를 희망한다. 방송의 흐름도 같다. 독하게 던지고 한번에 ‘쭉’ 빨아들이던 자극적인 소재가 사라진 지 오래다. 카메라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실수하고, 넘어지는 모습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런 의미로 모든 면에서 빨라도 너무 빨랐던 장근석은 지금 자기 기록을 잠시 멈춘 상태다. 방향을 잡고, 어느 쪽으로 몸을 틀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평행선에 올려두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어떻게 사람이 매번 ‘방방’ 뜰 수가 있겠어요. 가라앉고 다운되고, 기운 빠지는 날이 제게도 있죠. 털고 일어날 비법은 없어요.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 하는 마음 정도. 편하게 생각하고, 쉽게 행동하려고 하죠. 비워놓고 내려놓는 과정을 반복하고 나면, 어느 정도는 공간이 비워지더라고요.”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다시 채워 넣기의 반복. 모든 게 마음속으로 정리한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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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비 니트 스웨터 준지(Junn. J), 셔츠 시스템 옴므(System Homme), 팬츠 랑방(Lanvin).

현재 그 앞에는 좋은 시나리오가 있고, 해마다 진행해온 공연이 있고, 2주에 한 번은 목소리를 들려주기로 한 오디오 팟캐스트 <직진 라디오>가 있다. 당장 이번 주만 해도 광고 촬영이 두 건이나 잡혀 있다. 개인 SNS는 멈춘 지 오래고, 팬들은 그런 그를 걱정하고 궁금해한다. 그런 일련의 주변 상황 때문에 잠수 한번 제대로 탈 수가 없다.

“〈직진 라디오〉는 팬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요. 저작권 때문에 라디오라도 노래 한 곡 선물할 수 없지만, 각 나라에서 날아오는 팬들의 사연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게 돼요. 때로는 감정으로 느끼고 공유하는 게 직접 만나 눈 맞추고 손 잡아주는 것보다 더 큰 감흥을 남기는구나 싶기도 하고. 재미있어요.”

피할수록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남자. 그럼에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 아이스커피 잔을 드는 그의 손이 달팽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송곳 같은 말이 아니다. 사탕처럼 달콤한 말도 아니다. 그저 시간을 던져주고, 그 시간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려주는 진심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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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티셔츠 알렉산더 왕 바이 10 꼬르소 꼬모(Alexander Wang by 10 Corso Como), 베이지색 미디 길이 팬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최근 몇 년간, 장근석은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데뷔 20년 경력의 내공으로도 견디지 못할 만큼 혹독하게. 연기만 하던 이가, 앨범을 내고 가수 활동을 한다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압박감을 느낄 정도로 부담감이 팽배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시간은 필요하다. 그가 ‘직진’을 외치며 달려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이외에 우리가 해줄 별다른 예방 조치는 없다. 다만, 지금은 브레이크를 당길 타임일 뿐.

“가능한 한 배우의 끝자락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고 싶어요. 결국 제가 서고, 중심을 잡아야 할 곳은 작품이니까.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작품이 안전하고, 올바른 선택이 되리라고는 감히 단정지어 말할 수 없네요. 다만, 상처 없이 아름다운 조화는 현실감이 없잖아요. 가시도 있고, 적당히 상처도 있는 생화가 생명력이 있어서 좋습니다.”

스물일곱. 아직은 모든 것이 경험이 되는 나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손 내미는 포장 없는 담백함. 장근석이란 배우를 등지고 돌아설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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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완의 청춘

블랙 터틀넥 풀오버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터틀넥 풀오버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올해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루키상’을 받게 된 건 배우 임시완이다. 우리 가 가수가 아닌 배우로서 임시완의 행보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영화 <변호인> 때문이다. 연기를 하는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역할이고,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영화를 찍었을지 궁금했다.

“부담감이 컸어요. 작품을 시작할 때부터 개봉하기 전까지 많이 불안했어요. 저한테는 버거운 역할이었고, 존재감이 큰 선배님들이랑 함께했고, 그 안에서 제가 한 부족한 연기가 튀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됐고요. 개봉 후 많은 분이 좋게 이야기해주어서 조금 안심했죠.” 이번 영화를 찍으며 그는 삭발을 했고, 실제로 굶으며 10kg까지 감량했으며, 끔찍한 고문 장면을 소화해냈다. 나도 모르게 임시완이 아니라 영화 속 ‘진우’를 만난 것처럼 물어보게 되었다. 이제 몸은 괜찮아졌느냐고.

“고문당하는 장면이 임팩트가 강하다 보니 많은 분이 몸은 괜찮으냐며 안부를 물어보세요. 올초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 대신 <변호인>과 관련된 이야기만 들은 것 같아요. 근데 그 장면에서는 고통을 가해야 하는 입장인 곽도원 선배님이 더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 신 찍고 오히려 두 발 뻗고 잤는데, 선배님께서는 심적으로 괴로우셨는지 밤에 혼자 술을 드셨다고 하더라고요.”

 

블랙 터틀넥 풀오버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레더 왕관 데멘드 데 뮤테숑 바이 커드(Demande de Mutation by Kud).
그동안 알려진 임시완의 이미지는 영화 초반부에 야학에서 누님들에 게 책을 읽어주며 말갛게 웃는 신의 진우의 모습에 가깝다. 반듯하고 바른 생활의 남자로 유명한 그는 담배나 문신 같은 반항적인 청춘을 상징하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연애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분석적인 성격으로 연예인을 할 만한 끼가 없어서 고민하던 시기도 있었다는 그는 연기를 하고 나서 길을 찾은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처음에는 데뷔만 하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데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더라고요. 잘하는 사람도 많고 치열한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계속 활동을 하는 게 나만의 욕심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참에 드라마 <해를 품을 달>로 연기라는 걸 접하게 됐어요. 그때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연예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리고 이제 임시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제국의 아이들이 아니라 <변호인> <미생 프리퀄> <스탠바이> <해를 품은 달> 같은 배우로서 쌓은 필모그래피가 먼저 떠오른다. “가수와 배우, 어느 쪽을 택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어요. 제 진로는 대중이 결정해줄 거라고요.”

 

안에 입은 니트 스웨터 쟈딕 앤 볼테르(Zadic & Voltaire), 레더 믹스 보머 재킷 올세인츠(All Saints), 데님 팬츠 카이아크만(kai-aakmann).
영화 <변호인>에서 송 변호사를 일깨우는 진우의 명대사가 있다.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지만 바위는 죽어 있고 달걀은 살아 있다. 달걀은 깨어나서 바위를 넘을 수 있다.’ 영화에서 임시완이 연기한 건 1980년대 초반을 살았던 청춘의 초상이다. 힘없고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청춘. 그 청춘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황폐해져 텅 빈 눈을 되기까지의 과정은 슬프고 처절하고 잔인하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들을 향해 분노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20대 후반을 지나고 있는 임시완이 생각하는 아름다운청춘은 어떤 모습일까?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작품도 잘 만나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때 시에 완벽할 완이라는 좋은 이름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저한테는 마치 부적 같아요. 어떻게 이런 운이 따르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게 이름밖에 없어요(웃음).  본인이노력한다고 해서 그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공평한 사회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노력한 만큼의 결과만을 얻어도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결과가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용기 있게 도전하고, 확신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욕심을 부리는 분들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청춘의 모습인 것 같아요. 이번에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는 사실 도전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요. 처음에 하던 공부를 접고 연습생으로 연예계에 뛰어든 것. 그리고 이번 영화 <변호인>을 하기로 한 것. 아, 그리고 최근에 정글에 다녀온 것. 이 정도가 저의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정글도 참 좋았어요. 물론 쉽지는 않았는데 평생 경험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 해본 거니까요.”

 

블랙 레더 패치 팬츠 씨와이 초이 바이 커드(Cy Choi by Kud), 블랙 터틀넥 풀오버, 슈즈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레더 패치 팬츠 씨와이 초이 바이 커드(Cy Choi by Kud), 블랙 터틀넥 풀오버, 슈즈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로 스스로에게 정당한 휴식을 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 차기작으로 결정한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잠시 휴식 중이다. 쉬엄쉬엄 운동도 시작했고, 개인적으로 욕심이 있는 영어 공부도 하고 있다. 20대는 그럭저럭 잘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학창 시절로 가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해볼까 싶다. 최근에는 혼자 극장에 가서 <변호인>을 다시 봤다.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촬영 할 때의 느낌을 저한테 각인시키고, 되짚어보고 싶었어요. 좋은 선배님들 사이에서 배운 게 저한테는 아주 컸던 것 같아서요. 물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변호인>을 기점으로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분명히 무언가는 달라진 것 같아요. 제게 큰 재산으로 남을 작품이에요.

 

블랙 오버사이즈 코트 데어 로에(Der Rohe).
블랙 오버사이즈 코트 데어 로에(Der Ro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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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Woman

스카이 블루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스카이 블루 레이스 시스루 원피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그런 여자가 있다. 방금 전까지 꽃처럼 웃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상대방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 여자는 순수하고 투명한 소녀처럼 보이지만, 설득이나 양해가 불가능한 내면은 때로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파멸과 불행으로 툭 밀어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육감적인 몸을 가진 것도, 조각한 듯 완벽한 얼굴을 가진 것도 아닌데 표정과 몸짓과 한마디 말로 남자의 이성과 지성을 마비시키고, 도덕과 양식을 잊고 질투에 불타는 수컷이 되게 만든다.

 

화이트 스팽글 언밸런스 원피스 샤넬(Chanel), 가로 직사각형 바 브레이슬릿, 로즈 골드 레이어드 링 모두 티로즈(TRose).
화이트 스팽글 언밸런스 원피스 샤넬(Chanel), 가로 직사각형 바 브레이슬릿, 로즈 골드 레이어드 링 모두 티로즈(TRose).

<은교>의 김고은이 등장과 함께 영화계를 흥분시킨 건 연기 경험이 전무한 스물한 살 어린 여배우에게서 그 여자를 봤기 때문이다. 김고은이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하게 될지는 일찌감치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다. 간혹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순서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 김고은이 그랬다. 너무 일찍 만난 은교의 잔영은 사라질 것 같지 않았고, 두 번째 작품이 데뷔작의 강렬함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몬스터>다.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였다면 왠지 실망스러웠겠지만, 그렇다고 스릴러도 짐작 밖이다.

“상상만큼 <은교> 다음에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다시 학교 다니고, 난 길게 보고 갈 거니까 괜찮아, 하면서도 불안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마침 스릴러 장르에는 늘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항상 여자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구도는 싫었어요. 그렇지 않아서 선택한 것 같아요. 그런 얘기를 자주 하던 때였거든요.”

 

타임 원피스
블랙 시폰 원피스타임(Time), 세로 직사각형 바 네크리스, 로즈 골드 레이어드 링 모두 티로즈(TRose).

아직 개봉 전인 영화는 트레일러만으로 <은교>의 기억을 무디게 만든다. ‘복순’은 노점상을 하면서 동생과 둘이 산다. 바가지머리에 손으로 짠 털 조끼와 꽃무늬 남방, 몸뻬 차림의 복순이 무슨 일로 수가 틀렸는지 과도를 뽑아 들고 성질을 피우는 장면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은교는 갔다. 대신 동네에서는 ‘미친년’으로 통하고, 동생을 죽인살인마와 맞짱을 뜨고 껌 씹듯 분을 씹으며 ‘씹새끼’ 같은 19금 욕도 뱉을 수 있는 여자로 김고은은 돌아왔다.
“복순이는 자기한테 소중한 걸 지키려는 아이에요. 그래서 동생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맹목적일 수 있는 아이요. <은교> 할 때 힘들었을 거라고들 하시는데 사실 전 기쁘고 행복했어요. 뭘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앵글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그런 것조차 전혀 몰랐으니까요. 저 하는 걸 보시고 감독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면서 제 움직임에 카메라가 따라오게 하셨어요. 저는 이건 이렇게 해보자, 어떻게 하면 이거보다 더 잘할 수 있지? 노력만 하면 됐죠. <몬스터>를 찍으면서 정신적으로는 훨씬 힘들었어요. 일단 저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커 버거웠어요. <몬스터>를 하며 이제 현장에 익숙해졌어요. 아,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카메라 감독님도, 조명 감독님도 힘들구나, 알게 된 거죠. 뉴욕 아시아 영화제 갈 때 정지우 감독님이 제 얼굴이 달라졌다고, 딴사람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김고은 화보
화이트 시폰 스팽글 패턴 장식 원피스 이로(Iro), 실버 링 디디에 두보(Didier Dubot).

<몬스터> 속 김고은에게는 <마더>의 원빈 같은 낯섦이 있다. 우아한 외모에 갇힌 동네 바보, 쉽고 만만할 거라는 예측을 벗어나는 막무가내의 자아 같은 것들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 조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김고은은 복순이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라는 애초 설정을 버렸다. 교육과 관계를 통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 보통 아이들과 다른 결을 가지게 된 아이가 되면서 복순은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계산된 분석이나 반복된 리딩으로 얻어진 결과는 아니다. 정해진 캐릭터를 학습하고, 구현하기보다 캐릭터와 만나고 융화되는 과정을 거쳐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김고은이다.

‘분석하려고 하면 백지가 된다’는 김고은의 고백을 불성실이나 신인 배우의 미흡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김고은이 배우로서 자극을 받고 영감을 얻는 여배우 틸다 스윈턴이나 나탈리 포트만이 생래적 아우라를 더해 자신들의 연기를 완성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성적으로 캐릭터에 접근하고, 장면마다 호흡마다 치밀하게 조율한 연기에 더해지는 무엇. 그것은 배우 자신의 은밀한 방에서 이뤄지는, 아무도 관여하거나 참견할 수 없는 화학적 과정이고, 노력만으로는 꺾을 수 없는 타고난 배우들의 세계다. 아직 김고은은 작품과 세월 속에 제련된 배우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일천한 경험을 가졌을 뿐이지만, 같은 증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고은 화보
라이트 그레이 쇼트 니트 톱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아이보리 시폰 롱스커트 세린느(Celine).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날, <몬스터> 개봉을 목전에 둔 김고은은 <협녀: 칼의 기억> 막바지 촬영 중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스튜디오를 나서던 김고은이 돌아와 다시 앞에 앉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까 배우란 직업에 대해 물어보셨잖아요. 결투 신을 찍다 알게된 건데, 내가 남을 다치게 하는 순간도, 남이 나를 다치게 하는 순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더라고요. 유난히 합이 긴 신이었어요. 중간에 제가 다친 걸 알았는데, 어차피 다친 거 지금 얘기하나 이 신 끝나고 얘기하나 똑같으니까 일단 가자, 하고 찍었어요. 그 신 다 찍고 나니 다들 왜 그걸 참고 있었느냐고 난리였죠. 심하게 다쳐서 결국 그날은 촬영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배우를 계속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왠지 그랬어요.”

 

네이비 패턴 화이트 베스트 팬츠 산드로(Sandro), 스트라이프 슈즈샤넬(Chanel), 별 모양 링, 세로 직사각형 바 네크리스 모두 티로즈(TRose).
네이비 패턴 화이트 베스트 팬츠 산드로(Sandro), 스트라이프 슈즈 샤넬(Chanel), 별 모양 링, 세로 직사각형 바 네크리스 모두 티로즈(T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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