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고 싶은 남자, 진백림

세상은 넓고 배우는 많다. 오늘은 이 배우에게 반했다가도 내일이면 저 배우가 더 눈에 밟히는 게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래도 어떤 배우들에 대해서는 그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돌아올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그의 스크린 속 모습에 설렌다. 관객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오롯이 배우의 역량이다. 오랫동안 멋있는 모습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 배우 진백림은 자신의 몫을 잘해왔다. 그의 이름은 한국 관객에게는 아직 조금 낯설지 모른다. 진백림은 열아홉이던 2002년 <남색대문>이라는 영화로 대만에서 데뷔한 이래 중화권에서는 줄곧 청춘을 상징하는 배우로 통해왔다. 대만을 벗어나 홍콩, 중국, 일본에서까지 드라마와 영화 작업을 해왔으니 어찌 보면 그동안 우리만 그를 몰라본 것일 수도 있겠다. <남색대문>의 풋풋하던 고등학생은 <쿵푸덩크>의 열혈 농구부 주장과 중국 쓰촨 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음산>의 방황하는 청년을 거쳐 마침내 2011년 드라마 <연애의 조건>의 말쑥한 남자 ‘리따런’에 이르게 된다. 대만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에서 진백림은 오랜 이성 친구를 짝사랑하며 그녀의 곁을 지키는 속 깊고 자상한 남자를 연기했다. 리따런의 등장에 대만 전역의 여심이 들썩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도 <연애의 조건>은 제법 화제가 되었다. 하지원과 이진욱 주연으로 올여름 방영된 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은 바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마침 올해 진백림은 손예진, 신현준과 한중 합작 영화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를 찍었고, 연이어 하지원, 천정명과 영화 <목숨 건 연애>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계 진출 소식을 알렸으니 국내 관객으로서는 또 한 명의 주목할 남자 배우를 막 알게 된 셈이다.

촬영장에서 만난 그는 명성에 걸맞게 14년간의 연기 경력이 느껴지는 능숙한 포즈와 표정을 보여주었고, 그간 일해온 곳이 아닌 낯선 환경에서도 오랜 기간 프로로서 활동해왔음이 느껴지는 노련한 태도로 촬영을 이끌었다. 게다가 꽃미남의 정석을 따르는 고운 얼굴은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게 소년 같은 구석이 있다. 여러모로 인기 스타임을 실감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인간 진백림’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알게 된다. 필모그래피가 40여 편이 넘도록 매년 쉬지 않고 달려 연기하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말할 만큼 휴머니티를 잃지 않는 남자. 삶을 깊이 사유하고 자신을 성찰하려 노력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유쾌하고, 여유 있고, 솔직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소년 같은 미소를 보여주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1510mcmamr31_08
남색 페도라 아페쎄(A.P.C.), 가죽 블루종 발렌티노(Valentino),안에 입은 화이트 셔츠 유니클로 앤 르메르(Uniqlo and Lemaire),팬츠 디올 옴므(Dior Homme).
1510mcmamr31_07
네이비 컬러 재킷과 팬츠 모두 디올 옴므(Dior Homme), 면 티셔츠 버버리 브릿(Burberry Brit), 가죽 브레이슬릿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s & Jewelry).

하지원과 영화 <목숨 건 연애>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어떤 영화인가? 이제 촬영에 들어가는 단계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지원이 추리소설 작가인 ‘제인’ 역할을, 천정명이 형사인 ‘록환’ 역할을 맡았고, 두 사람은 우연히 연쇄 살인 사건을 쫓게 된다. 나는 그 와중에 제인 앞에 나타나 그녀와 로맨스를 만드는 조금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라고 할까? 이틀 후에 첫 촬영에 들어가고, 4일 전에 다 같이 대본 리딩을 했다. 모두들 프로페셔널하고 재능이 대단하더라. ‘이거 재미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온전히 한국 영화라 중국 스태프가 한 명도 없다. 나와 매니저 ‘리’뿐이다. 꽤 부담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이번엔 영어 대사만 있어서 한시름 놓았다.(웃음) 모레 촬영하는 첫 신이 마침 하지원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실제로도 그녀와 처음 얼굴을 맞대고 일을 시작하는 셈이니까 아마 꽤 리얼한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웨이보에 한국어 더빙을 하는 모습을 올리기도 했다.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를 찍을 때다. 한국어 더빙 연기는 나에겐 재앙에 가까웠다.(웃음) 물론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한국어는 문법상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문장 끝에 올 때가 많아서 타이밍을 잘 맞춰야 했다. 상대 배우가 중요한 말을 하기도 전에 무심결에 너무 빨리 반응해버리면 안 되니까. 이 영화 전에 <디스턴스>라는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게 끝나고 이 영화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딱 4일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국어 대본을 받고는 일단 대사를 몽땅 외웠다. 당연히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른 채 겨우 발음만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는 한국어 문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2주 정도 지나니 대사의 뜻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뜻도 모르는 대사를 4일 만에 다 외우다니 당신은 천재인가? 아니다.(웃음) 난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느냐에 달린 거다. 나 자신에게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하고 물어보면 대답은 하나다. 잘해냈는지는 몰라도 최선은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올해 특히 쉬지 않고 연이어 영화를 찍었다. 한국에 진출하기 직전에 찍은 <디스턴스>에선 3명의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들었다. 싱가포르 감독인 앤서니 첸이 제작한 영화다. 그와 함께 하는 첫 작업이었다. 관계에 대한 영화다. 아버지와 아들 또 그의 자식, 사형수가 된 오랜 친구와 맞닥뜨린 남자, 어린 시절 선생님을 사랑했던 교수와 그 교수를 흠모하는 견습생 등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카르마 같은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와 나 둘 다 <디스턴스>에 집착하다시피 몰두했고, 크랭크인 전부터 영화를 찍는 내내 매일 붙어 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옴니버스영화로 세 개의 스토리, 3명의 주인공이 있고 그게 전부 내 몫이었다. 각 캐릭터가 말투, 행동, 표정이 다 달라야 하는데 다음 스토리를 촬영하기 전까지 딱 이틀씩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앤서니 첸과 촬영 로케이션, 대본, 다른 배우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상의했다. 우리는 이 영화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표현되길 바랐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그 과정은 자못 흥분되는 일이었다.

작품을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뭔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 난 그건 순전히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고, 그냥 내 것이 되는 작품들이 있다. 타이밍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연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사실 당시의 내 기분과 연결되는 것 같다. ‘오, 이거 좋아’, ‘윽, 이거 싫어’, 이거다. 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완벽한 환경, 완벽한 시나리오, 완벽한 타이밍, 모든 걸 갖춘 상태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거다. 다만 난 똑같은 걸 하고 또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항상 전작과 다른 걸 찾는다.

 

1510mcmamr31_02
유니크한 프린트의 니트 풀오버와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실버 네크리스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s & Jewelry).
1510mcmamr31_01
슬립온 슈즈 루이 비통(Louis Vuitton).

한국에서도 당신은 <연애의 조건>의 완벽한 남자친구 리따런 역할로 많이 알려져 있다. 웨이보에는 ‘천년을 수행해야 리따런 같은 남자를 얻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그 역을 연기할 때가 딱 스물여덟, 스물아홉 시절이었다. 극 중 리따런과 비슷한 나이였고, 그래서 리따런의 사랑이 어떤 건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러는지, 무슨 결정을 내릴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대본을 읽어보고 이거 잘할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연애 경험에 비추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 그렇치만 그런 경험이 많았다는 뜻은 아니다.(웃음) 다만 그런 연애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충 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리따런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얼마 전 한 대만 잡지가 10대 여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표에서 남자친구 삼고 싶은 배우 1위를 차지했다. 14년째 배우로 일하고 있는데 여전히 인기가 대단하다. 집계 실수가 있었던 거 아닐까?(웃음) 솔직히 나는 내가 팬들을 어떻게 만족시키는지 잘 모르겠다. 난 팬 관리를 정말 못한다. 그냥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고, 계산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배우가 되고 나서 후회는 없나? 대만에서 사생활이 전혀 없다는 것 빼고는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내 작품이 나의 당시의 인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내 일은 마치 다이어리를 쓰는 것 같다. 예전에 찍은 작품을 보며 내가 당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걱정을 했는지 돌아볼 수 있다. 가끔 특정 신을 보면 그때 내가 어땠는지 떠오른다. ‘아, 저 때 배가 갑자기 엄청 아팠었는데. 아닌 척했지’ 이런 거 말이다.(웃음) 올해 한국에서 작업한 작품들도 나중에 돌아보면 진짜 열심히 했었구나,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인간 진백림으로서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언젠가 TED 강의를 본 적이 있는데, 한 피아니스트가 나왔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도 행복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으로 비쳤으면 좋겠다. 나와 있을 때는 사람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영화에 나오고, 어떤 걸 이뤘고, 이런 것보다 사람들이 나와 함께할 때 어떤 걸 느끼는지가 나에겐 더 중요하다.

연관 검색어

뉴욕에서 만난 메건 콜리슨

 

메건 콜리슨
블랙 울 스웨터, 실크 스커트, 볼드한 장식 벨트, 모직 베레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빈티지 감성의 울 스웨터, 심플한 화이트 셔츠, 블랙 보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차콜 캐시미어 터틀넥 풀오버, 블랙 드레스, 다크 그레이 핀스트라이프 울 베스트, 버건디 레이스업 힐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차콜 캐시미어 터틀넥 풀오버, 체크무늬 실크 드레스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플로럴 크레이프 드레스, 브라운 시어링 베스트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올리브 그린 트위드 울 재킷, 블랙 캐시미어 터틀넥 풀오버, 블랙 레이스 스커트, 비즈 장식 버클 벨트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퍼플 트위드 울 재킷, 다크 그레이 핀스트라이프 팬츠와 베스트, 화이트 셔츠, 블랙 타이, 블랙 스웨이드 엠브로이더리 장식 뉴스보이 캡, 버건디 레이스업 힐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블랙 울 엠브로이더리 장식 코트, 블랙 캐시미어 터틀넥 풀오버, 블랙 레더 스트레치 팬츠, 레더 블랙 스트랩 슈즈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블루 롱 슬리브 스웨터, 블랙 플레어 팬츠, 미니 버킷 숄더백, 로프 디테일의 링 레더 벨트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메건 콜리슨
그린 하운드투스 울 재킷, 오렌지 그린 체크 코튼 셔츠, 스웨이드 스트레치 팬츠, 블랙 캐시미어 터틀넥 풀오버, 버건디 레이스업 힐 모두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casting: Oliver Ress@Creartvt
producer: Ray Yi

The Journey

1503mcmamr12_06
지퍼 디테일 블루종, 레드 포인트 포켓 블랙 티셔츠, 슬림 핏 스트레이트 데님 팬츠 모두 트루릴리전(True Religion), 뱅글 에이치알(H.R), 스터드 장식 파이톤 스니커즈 아쉬(Ash).

세월과 풍파가 지혜로운 남자 대신 용렬하고 때 묻은 꼰대를 만들 때가 훨씬 많다는 건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다. 묵힌 시간만큼 깊고 숙성된 맛을 낼 거라는 기대를 깨고 중간 어느 시점에 맛이 상해버린 와인 같은 남자들을 충분히 목격하고 나면, 그제야 풋내 난다고 생각했던 20대의 남자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들인지 이해하게 된다.
이종석은 20대다. 인문학적 성찰 따위 근처에도 가본 적 없고, 사회정치적 식견은 고사하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의 대상인 요즘 20대들이 사랑하는 20대가 이종석이다. 그러나 못나고, 부족하고, 제 밥벌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그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고, 이루고 싶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밟히고 꺾인 꿈이 있고, 사랑하고 싶고, 살아남고 싶고,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애들이다. 이종석의 캐릭터들은 그런 요즘 20대의 판타지를 그려낸다. 나랑 다 비슷하고, 자주 나보다 불행한 환경을 겪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그걸 넘어 행복을 이루는 게 이종석의 박수하고, 박훈이고, 최달포다. 우리는 그런 이종석과 20대란 시절을 둘 다 사랑한다.

 

1503mcmamr12_01
블루 카무플라주 소매의 레더 블루종 필립 플레인(Philipp Plein), 화이트 셔츠 메사제리에(Messagerie), 블랙 팬츠 씨와이 초이(Cy Choi). 실버 링 에이치알(H.R), 블랙 윙팁 슈즈 닥터마틴(Dr. Martens).

<피노키오>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배우가 스스로에게 만족했는지는 다른 얘기다. 드라마가 잘된 것도 잘된 거지만, 개인적으론 그 이상으로 좋다. 작년 이맘때 슬럼프가 왔다.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없고 힘들다고 처음 느꼈다. <닥터 이방인>도 잘됐다, 사실. 그런데 끝나고 나니까 원톱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힘들었는지 몰라도 너무 지쳤다. 그때 여기서 쉬면 진짜 오래 쉬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 쉬어볼까 하다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이하 <너목들>) 팀이 작품 한다고 해서 ‘이럴 때 쉬면 안 돼’ 하고 시작한 거다.

이종석이 슬럼프에 빠졌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것 같다. 워낙 잘되고 있었으니까. 작품과 작품 사이에 공백도 없이 달려왔다. 내 필모그래피를 보니 1년에 평균 두 작품은 했더라. 쉴 새 없이 계속 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지친 것 같다. 되게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피노키오>로 힐링한 것 같다. 좋은 드라마였던 것 같고.

캐릭터는 어땠나.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캐릭터에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강한 트라우마와 사연은 가지고 있었지만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특별히 할 만한 게 없어, 작가님이 만들어놓으신 기본적인 설정, 즉 더벅머리라든지 고무신이라든지, 그런 설정들을 따라가다 보니까 가닥이 잡혔다.

정말 당황스러운 설정이었다.(웃음) 그러니까. 웃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팬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도 했다.(웃음) 그래서 4회까지는 모니터링을 못했다. 너무 못생겨서. 내려놓고 찍었다.

1503mcmamr12_03
포토 프린팅 셔츠 닥터마틴(Dr. Martens), 블랙 팬츠 씨와이 초이(Cy Choi), 실버 뱅글, 블랙 스톤 뱅글 모두 에이치알(H.R), 브라운과 네이비 컬러 블록의 크리미 러버 스코노(Skono).

나이도 그렇고 이미지 관리도 하면서 연기를 할 때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피 끓는 청춘>도 그렇고, 또래 배우들에 비해 유독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느낌이다. 사람이 매혹적일 때가 그럴 때인 것 같다. 예를 들면 보영 누나(이보영)가 <너목들> 할 때 더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정말 예쁜 사람이 그렇게 망가지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잘되고 있는 거다. 내가 생각했던 미래를 펼쳐봤을 때 어느 정도 이렇게 하고, 목표를 하나씩 이뤄가려고 했다. 그런데 <너목들>이 너무 잘됐다. 그래서 정말 좋고 감사한 일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이 거품이 빨리 꺼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너목들> 끝나고 다음 작품을 해야 하는데 너무 부담인 거다. 그냥 연기를 하면 그뿐인데. <피 끓는 청춘>을 할 때도 다 반대를 하긴 했다. 그런데 그 캐릭터가 재미있었다. 연기라는 게 한 사람이 다른 작품에서 연기를 한다고 한들, 이종석이 연기하는 캐릭터이지 않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대적 배경도 있고 말투, 사투리가 있으니까 조금은 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 보면 잘한 것 같다.

<시크릿 가든>으로 주목받았을 때 변화를 약간 준 비슷한 역할을 몇 번 더, 혹은 몇 년 더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종석은 자기를 유명하게 만든 캐릭터를 버렸다. 그래서 <피노키오> 하고 나서 감독님하고도 그런 얘길 했다. 내가 했던 캐릭터들이 정말 하나같이 양가 부모가 살아 계시지 않고, 사연이 있고, 과거에 아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고. 감독님이 ‘너는 남자 배우들이 많이 하는 재벌 캐릭터는 편하게 하겠다’는 얘기를 하시더라. 나는 사연이 있는 캐릭터가 연기를 할 때 회를 거듭할수록 더 재미있는 것 같다. 표현도 그렇고. 더 힘들기도 한데, 그게 익숙하니까.

남들이 힘들다는 캐릭터들을 선호하고, 쉬지도 않고. 피로감이 쌓이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닥터 이방인> 전후로 딱 그랬다. 사는 게 너무 힘든 거.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날인데도 진짜 피곤한 거. 그게 계속 반복됐다. <피노키오> 찍으면서는 한숨 자고 일어나면 개운한 느낌이었다. 그냥 마음의 문제였던 것 같다. 크게 괴로워하면서 고민하지도 않았던 것 같고 흘러가는 대로, 대본 따라서, 감독님 따라서 그렇게 지냈다. 워낙 신뢰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조수원 감독님, 박혜련 작가님은 100% 믿는 분들이고, 리더십도 너무 멋있고 좋다. 대본보다도 그분들 때문에 하게 됐다. 기자라는 소재가 지금까지 다룬 적 없는 소재도 아니고, 잘된 적이 거의 없는 소재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들이랑 하는 일이니까 좋았다.

1503mcmamr12_05
패치워크 데님 셔츠, 블랙 포인트 포켓 화이트 티셔츠, 자연스러운 워싱의 데님 롤업 쇼츠 모두 트루릴리전(True Religion). 블랙 스톤 뱅글, 실버 링 모두 에이치알(H.R), 스트라이프 패턴이 믹스된 데님 소재의 쿨맨 슬립온 스코노(Skono).

영화와 드라마의 비중이 고른 편이다. 안 그래도 <닥터 이방인> 다음에는 영화를 해야지, 생각했는데 <피노키오>까지 하면서 드라마에 치우진 감이 있다. 드라마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쪽에서는 누가 나를 인정하겠나. 사실은 드라마든 영화 쪽이든 나를 배우로 인정해줄지 둘 다 미지수다. 누군가 나를 봤을 때 스타로서는 인정해도 배우로서도 인정할지,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나를 배우로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영화 쪽의 주연급 배우들은 나이도 있고 경험도 많은 편이니까 스스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비슷한 시기에 A라는 배우랑 B라는 배우가 작품 속 연기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 독립영화를 계속 해오다 상업영화를 했는데 그게 잘된 경우와 TV를 통해서 잘된 배우를 평가하는 게 다른 것도 있는 것 같다.

유명 배우나 아이돌이 뮤지컬 한다고 할 때처럼? 그게 좀 아쉽다. 나도 영화를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당장 주연을 하고 싶지는 않다. 데뷔 초반 언젠가 내 나이 서른 즈음까지 아무도 나를 배우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끊임없이 작품을 하긴 하는데, 쪽팔리지 않나 못하면. 잘해야지, 잘해야지만 했던 것 같다. 피노키오가 편했던 건 그런 강박 없이 그냥 했기 때문이다. 현장도 좋고, 사람도 좋고. 아직까지 나는 드라마가 더 좋다. 미친 듯이 죽고 싶게 힘들긴 하다. 후반에는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자고 찍으니까. 방향이 처음 시놉시스와 완전히 달라질 때가 있는데도 좋은 건, 회를 거듭할수록 꾸준히 감정을 이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다. 로딩이라고 해야 하나, 아 몸이 달아오르는구나 느껴가는 재미가 있다.

1503mcmamr12_02
컬러풀한 페인팅 프린트의 셔츠, 쇼트 슬리브 니트 톱, 팬츠 모두 디올 옴므(Dior Homme).

매번의 작품 속 인물들은 그냥 이종석 자신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맞다. 정말 자연스럽게 연기하는데 연기 같은 사람도 있고. 나는 보통 말할 때 너무 히마리가 없다. 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열심히 발음하고 대사하려고 노력한다. 60신 중에 내가 욕심내는 신이 2신이면 나머지는 날린다. 그냥 상대 배우를 받아주는 거다. ‘따먹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래서 나는 회당 2신 정도밖에 따먹지 못한다. 연기가 거지 같을 때도 많고, 내가 왜 그렇게 대충 말했지 할 때도 많은데 그 2신으로 상쇄하는 것 같다.

대충 말했다고? 그보단 힘을 뺀 연기처럼 보인다. 이종석 나이의 배우에게 가장 힘든 것이 힘을 뺀 연기일 것 같은데. 그러려고 노력하기는 한다.

 

1503mcmamr12_04
오간자를 에이어드한 롱 스웨트 톱 노나곤 바이 비이커(nona9on by Beaker), 블랙 쇼트 팬츠 일레븐파리(Eleven Paris), 실버 링 에이치알(H.R), 블랙 레더 슬립온 아쉬(Ash).

신인 배우들과 연기 수업을 같이 듣는다고 들었다. 물론 배우들도 연기 수업 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그것도 신인 배우들과 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그러면서 많이 느는 것 같다. 재미없다, 혼자 하면. 선생님이 대사를 쳐주고 내가 대사를 받으면서 선생님의 코치를 받는 수업도 한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이랑 수업을 하면 그 배우만의 표현이나 억양을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하지 말아야 할 걸 배우게 된다. 처음 신인 배우들이랑 할 때는 활동하던 애가 와서 수업 듣는다니까 얼마나 잘하나 보자, 했던 것 같다. 그게 죽을 만큼 괴롭기는 했다.

이종석은 배짱이 좋나 보다. 배짱 안 좋다. 너무 내성적이다. 연기하는 게 신기하다. 나는 사는 데 낙이 없다. 정말 재미가 없다. 의욕적으로 뭔가를 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 유일하게 연기를 할 때, 그리고 그 작품을 나중에 볼 때 그걸 내가 보고 있는 게 좋다. 연기를 하다 보니까 정말 하기 싫지만 수영도 배워야 되고, 다른 뭐도 배워야 하고. 연기를 계속하면서 수동적인 내가 뭔가를 하게 되는 것도 좋다.

딱히 뭐가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하기에 연기는 힘든 일 아닌가? 연예계에 발을 담그는 건 또 다른 문제고. 왜 연기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됐나? 나도 그게 딜레마고 힘들다. 연기하는 건 좋다. 연예계는 다르다. 사실 그렇게 광고를 찍어야 돈도 많이 벌 것이고, 예를 들어 축하 멘트도 따줘야 하고. 그런 것들. 인터뷰는 내 얘길 하는 거니까 재밌다. 근데 부수적인 것들이 힘들다. 그래도 어쩌겠나.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많이 좋아졌다. 옛날부터 TV 보는 걸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무릎 다치고 인대가 끊어져서 6개월 동안 집에 있으면서 주야장천 드라마를 본 거다. 비가 <풀하우스>에 나오는데 너무 멋있는 거야. 그냥 연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비처럼 되고 싶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디 가서 쪽팔리긴 싫으니까 잘하려고 용을 쓰는 거다. 방송 나갈 때, 시청자 입장에서 객관화해서 내 연기를 보려고 한다. 어떻게 연기를 저 따위로 할까 생각할 때도 많다. 그게 쪽팔린 거다. 잘해야 돼, 잘해야 돼, 하다 보니까 지친 거 같긴 하다.

 

1503mcmamr12_07
로고 프린트 장식 워싱 블루 컬러 집업 후드 점퍼, 그레이 컬러 프린트 티셔츠, 니트가 믹스된 소프트한 재질의 데님 팬츠 모두 트루릴리전(True Religion). 실버 뱅글, 블루 로프 뱅글 모두 에이치알(H.R), 스터드 장식 파이톤 스니커즈 아쉬(Ash).

직업으로 배우는 할 만한 일인 거 같나? 아직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촬영장에서 나는 점점 더 여유도 생기고 편해지는 것 같은데, 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는 느낌은 왠지 모르겠다. 왜 선배들이 연기는 할수록 어렵다고 하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거.

어떤 게 어렵나? 욕심이 어렵게 만드는 건가? 그런 거겠지. 좀 더 잘 표현하고 싶고. 대사가 있으면 여기서 이 정도 톤까지 끌어올리고 싶은데 내 발성이 거기까지 안 될 때 짜증이 난다. 빽 질러야 하는데 내 목이 안 될 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대사를 눌러서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해놓고 짜증날 때가 많다.

미안한데, 난 처음 이종석이 등장했을 때 연기를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그런다.(웃음)

목소리도 전형적인 남자 배우 목소리도 아니고, 외모도 강한 남자 배우 캐릭터도 아니고. 그런데 사람들은 이종석이 연기를 잘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종석 같은 배우는 이종석뿐이다. 내가 봐도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다. 나는 나이 먹어서 근사한 얼굴이 아니다. 주름지면서 그게 멋있는 얼굴이 아닌 거다. 지금은 어리고 탱탱하니까 괜찮은 얼굴. 그래서 연기를 정말 잘하지 않는 이상 나는 없어질 거다. 그래서 나는 남자 영화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잘하고 나한테 어울리는 건 멜로에 가깝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리고 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자. 그러는 중이다.

 

1503mcmamr12_08
워싱 데님 재킷, 로고 레터링 디자인의 화이트 티셔츠, 빈티지 워싱 바이커 데님 팬츠 모두 트루릴리전(True Religion), 블랙 스톤 뱅글, 레더 뱅글 모두 에이치알(H.R), 블랙 레더 슬립온 아쉬(Ash).

어떤 사람을 좋아하나. 연락을 누구한테도 잘 안 한다. 휴대폰이 두 개인데 둘 다 거의 안 울린다. 극소수하고만 연락한다. 대부분 일 때문이고, 먼저 연락하는 경우도 없고. 사람들 소식은 항상 찾아본다. 김상중 선배님과 유준상 선배님이 너무 좋다. 존경하고 동경하고 사랑하는데 먼저 연락을 못한다. 다만 멀찍이서 행보나 일들을 지켜본다. 조수원 감독님, 박혜련 작가님도 좋지만 연락은 안 한다. 뭘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저녁을 먹을 수도 있고. 그냥 그런 거 때문에. 나는 집에 숨어 있는 게 너무 좋다. 그래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고 생각하고 있다.

그건 전형적인 여배우 패턴인데. (웃음)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보려고 한다. 운동도 몸을 만들어야 하니까 하지 그냥은 안 한다. 집에서 TV 보는 게 제일 좋다. 나는 TV 속 세상이 너무 좋다. 그냥 누워 있으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다음 날이면 기억도 안 날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시간이 진짜 빨리 간다. 멍할 때도 많고. <드래곤볼>에 시간의 방이라는 방이 있다. 거기 있다가 나오면 시간이 별로 안 지나가 있다. 내가 그렇다. 누워 있다가 정신 차리면 3시간이 지나가 있을 때도 있다. 작품을 계속 해서 그동안 여유 있게 살진 않았다. 그게 충전이었고, 그걸로 일했던 것 같다. 이제는 여유 있게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올해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생각한 게 그거다. 이제 나 쉴 거임, 그게 처음이다.

스스로에 대해 냉철한 편인 것 같다. 단점을 먼저 까서 보여주려고 한다. 인터뷰를 해도 먼저 얘기하려고 하고. 나는 숨기려고 하는데 남들이 먼저 알면 창피하니까. 남의 입으로 내 단점을 듣는 건 너무 수치스럽다.

 

1503mcmamr12_09
브라운 레더 재킷 메사제리에(Messagerie), 스컬 프린트 티셔츠 필립 플레인(Philipp Plein), 실버 링 에이치알(H.R), 슬림 핏 스트레이트 데님 팬츠 트루릴리전(True Religion).

슬럼프 얘기로 돌아가보자. 이번 드라마가 휴식 같았다고 하지만, 너무 일찍 완전히 방전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가 아니다. 다작을 하면서 빨리 성장을 했다고 볼 순 있겠지만 남들처럼 작은 역할로 시작해 연기를 하면서 서서히 배우고, 독립영화를 찍고 뮤지컬 하는 배우들처럼 기본기가 좋은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하다가 바닥이 드러나고 다시 채우면서 해나가는데 내 에너지를 다 썼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작년이다.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는 거. 이제는 감정을 어떻게 쓰는 건지 알게 됐다. 처음에는 울기 위해서 감정을 잡으려고 아침부터 음악 듣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냥도 울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은 거다. 그 전에는 눈물을 보여주면 슬픔이 표현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여기서 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게 된다.

연기를 잘한다는 게 뭘까. 잘 모르겠는데 참 희한한 건 가수들도 감정 위주로 노래하는 사람, 고음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데 경연 프로그램 보면 1등은 고음으로 승부하는 가수들이더라. 연기도 격정적인 감정 신을 잘 표현하는 게 연기를 잘하는 것인가, 아니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섬세하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나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는 게 더 하기는 힘든데. 잘 모르겠다. 연기를 잘한다는 기준이 뭔지 아직 못 찾았다. 그걸 찾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연관 검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