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아의 하루

염정아의 하루
옆트임 블랙 드레스 캐롤리나 헤레라(Carolina Herrera), 블랙 벨벳 재킷 발맹(Balmain), 슈즈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액세서리 덱케(Decke).

스튜디오에서 만난 염정아에게선 달뜬 기운이 느껴졌다. 올해 화보 촬영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 때문일 리는 없고(그녀가 수없이 해온 사진 촬영일 테니 말이다), 촬영 당일의 분위기라기보단 최근에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라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슈팅에 들어가면 깊게 가라앉았다가 잠시 옷을 갈아입고 헤어스타일을 정돈할 때는 촬영 스태프에게 장난스레 농담을 건네는 그녀에게서 긴 시간 카메라 앞에 서온 사람의 몸에 밴 능숙함이 느껴졌다. 촬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긴말도, 여러 컷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요새 <장산범>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고 했다. 데뷔작 <숨바꼭질>로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스릴러를 만들어낸 허정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2004년 출연한 영화 <여선생 vs 여제자>를 인연으로 오랜 기간 돈독한 친분을 쌓은 제작자는 <장산범>의 여주인공으로 염정아를 미리 점찍어두었고, 출연 제의를 받은 염정아는 흔쾌히 승낙했다. 장산범은 원래 경남 장산 지역에 나타난다는 매끄러운 흰 털을 가진 요괴의 이름이다. 모티프가 된 설화의 내용에 걸맞게 영화 또한 제법 공포스럽게 그려질 예정이다. 감독의 전작을 생각해보면 정확한 줄거리를 몰라도 이 작품이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자아낼지 짐작할 수 있다. 염정아는 이 작품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 역할을 맡았고, 배우 박혁권이 그녀의 남편으로 분한다. 어느 날 이들 부부에게 자신이 바로 잃어버린 그들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소년이 찾아오면서 영화에 어둠의 기운이 드리운다.

염정아의 하루
네이비 니트 톱과 버건디 점프수트 모두 타임(Time), 슈즈 세린느(Celine).

그러고 보니 공포물, 그리고 엄마. 묘하게도 그녀가 12년 전 출연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에서의 모습이 교차된다. 영상, 음악, 의상, 무대효과 등 많은 것이 이 영화를 웰메이드 호러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영혼을 스멀스멀 잠식하는 듯한 배우들의 섬뜩한 연기는 뒤통수를 아리게 하는 뻐근하고 묵직한 공포를 자아냈다. 염정아가 연기한 새엄마 ‘은주’ 역의 다층적인 면모는, 그 역할을 맡은 배우로 하여금 100% 헌신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소화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부담이 큰 도전을 요구했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다가도 행복한 두 아이의 엄마인 양 재잘거리고, 발작적으로 웃다가도 얼음처럼 냉정한 표정의 계모로 돌변하는 스크린 속 염정아가 무섭지 않았다면 영화에 집중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시간이 흘러도 영화사의 어느 시점에서건 좋은 연기, 좋은 캐릭터로 회자될 배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장화, 홍련> 이후로 <장산범>을 찍기까지 그동안 그녀는 한 번도 공포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섬세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갖춘 이미지를 생각하면 조금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대신 이듬해 개봉해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는 당돌한 눈빛으로 남자들을 휘어잡는 팜므 파탈로 변신했다. 자극적이고 대담해 보이던 <범죄의 재구성>의 펑키한 사자 머리가 뒤이어 개봉한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갑자기 노처녀 시골 선생님의 젤 듬뿍 바른 우스꽝스러운 파마머리로 바뀌었을 때, 염정아는 자신이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렇게 연달아 보여준 채도 높은 연기가 염정아의 개성이라고 생각될 즈음, 그녀는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을 찍었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다 잠시 피신한 남자를 숨겨주는 사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변두리의 여선생. 고통스러운 시대상에 파묻혀 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는 먹먹한 사랑을 연기하는 그녀는 옅은 잿빛으로 자신의 색을 완전히 빼버린 모습이었다.

염정아의 하루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그러는 사이 그녀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드라마 <로열패밀리>에서 재벌가의 냉혹한 싸움을 이겨내고, <내 사랑 나비부인>에서 허영기와 허당기를 둘 다 가진 톱 탤런트 새댁이 되는 등 도회적인 이미지를 잘 살린 역할을 연이어 맡았다. 다만 커리어만큼이나 소중히 가꾸어야 할 것이 많아졌고, 한 사람이 같은 시간에 쏟을 수 있는 노력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에 어떤 일상은 필연적으로 달라져야 했다. 일에만 온전히 쏟았던 관심을 가정에 나누면서, 오롯이 여배우로서 살아온 삶이 변해가는 데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을까? “남편과 아이들이 생기고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된 게 오히려 다음 일을 선택할 때 한 발짝 물러서서 더 넓은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원체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뎌요. 당장 작품을 하지 않아도 다른 해야 할 일이 항상 넘치고, 그래서 관심을 어디에 나눈다는 게 무의미하죠.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온 신경을 가정에 쏟고, 촬영에 들어가면 또 거기에 목을 매고요.” “항상 그때 처한 상황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게 제 모토예요. 그래서 작품을 할 때 깊이 빠져들었다가도 그 시간이 지나면 금방 빠져나오는 스타일이죠. 일을 안 할 때요? 그야말로 남들과 똑같은 주부예요. 아이들 학원 쫓아다니고, 장 보는 것 좋아하고. 다만 요리를 좀 못할 뿐이고요.(웃음)”

염정아의 하루
블랙 백리스 원피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지금의 신도시가 생기기 전부터 동탄에서 살아온 그녀는 일명 ‘동탄맘’으로 종종 동네 주민들의 목격담에 등장하곤 한다. 여전히 어쩐지 콧대 높을 것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에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 것만큼이나 일상에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솔직한 사람이다. 지난해 개봉한 <카트>에서 맡은 역할은 그런 일상의 염정아가 조금 더 묻어난 인물이었다. 생계를 책임진 주부이자 마트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직원은 그녀로서도 그간 해본 적 없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엄마이자 아내로서 배우고 느껴온 삶의 새로운 단면을 가장 많이 투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배우의 삶과 그가 맡는 배역이 동시에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지켜보는 대중으로서는 즐거운 일이다. 미칠 듯이 스크린을 뛰어다니는 시기를 지나 풍부한 경험과 여유, 그리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여배우의 삶에 안착한 그녀의 성공이 부럽게 느껴졌다. 정작 자신은 그런 삶을 ‘성공’이라는 목적 지향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제가 오늘 뭘 할지, 이달엔 어떤 걸 할지 단기계획은 진짜 잘 세우고 착착 진행하거든요. 하지만 미래를 길게 보는 데는 솔직히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아요. 충실하게 지금을 살면 어느 순간 잘 사는 지점에 가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할 뿐이죠.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욕심이 들어요. 예전보다 작품 수는 줄었지만 그래서 일 하나하나가 더 귀하고, 일할 때 더 즐겁거든요. 배우는 나이가 들수록 참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그런 일을 이렇게 오래 계속할 수 있으니 행운이죠.” 그녀는 삶이라는 큰 그림은 매일의 작은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듯하다.

염정아의 하루
브라운 니트 톱과 플라워 프린트 와이드 팬츠 모두 세린느(C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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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여인이 되다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이어링 스몰 모델 2천5백10만원대, 옐로 골드에 라피스라줄리와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네크리스 스몰 모델 7백10만원대,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스몰 모델 1천3백9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누드 톤 저지 원피스 아보아보(avou avou).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우아하면서도 개성 있는 디자인의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브레이슬릿 가격 미정, 오른손의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1천2백80만원대, 왼손의 핑크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4백8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슬리브리스 톱 로앤디누아(Ro & De Noir).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핑크 골드에 말라카이트와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네크리스 미디엄 모델 2천1백60만원대,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스몰 모델 1천3백90만원대, 두 번 감긴 강인한 인상의 화이트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1천2백8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시스루 엠보싱 원피스 맥앤로건(Mag & Logan).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다이아몬드와 라피스라줄리를 세팅한 옐로 골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이어링 스몰 모델 1천4백80만원대, 오른손의 옐로 골드에 라피스라줄리를 장식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스몰 모델 8백20만원대,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1천2백80만원대, 왼손의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스몰 모델 1천3백90원대, 화이트 자개와 러블리한 핑크 오팔이 세팅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엑스스몰 모델 각각 3백5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앙고라 카디건 톰보이(Tomboy).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핑크 골드에 오닉스와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펜던트 네크리스 미디엄 모델 1천6백40만원대, 오른손의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1천2백80만원대, 옐로 골드와 우아한 블루 라피스라줄리가 어우러진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스몰 모델 8백20만원대, 왼손의 화이트 자개와 핑크 오팔이 세팅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링 엑스 스몰 모델 각각 3백5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니트 슬리브리스 톱, 안에 입은 캐미솔 톱 모두 다홍(Dahong), 니트 쇼츠 레베카 밍코프(Rebecca Minkoff).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오른손의 핑크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브레이슬릿 2천5백60만원대, 레이어드한 다이아몬드 세팅 화이트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1천2백80만원대, 핑크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더블 링 4백80만원대, 레이어드한 핑크 골드 러브 웨딩 링 2백40만원대, 화이트 골드 러브 웨딩 링 2백60만원대, 왼손의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러브 브레이슬릿 1천2백80만원대, 핑크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 8백20만원대, 레이어드한 화이트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링 2백90만원대, 핑크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링 2백7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펀칭 레이스 톱, 플리츠스커트 모두 씨뉴욕 바이 1423 네이브워터(Sea NY by 1423 Naivewater).
윤아, 여인이 되다 - 마리끌레르 2015년 11월호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이어링 스몰 모델 2천5백10만원대, 화이트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아뮬레뜨 드 까르띠에 브레이슬릿 5백90만원대, 러브 컬렉션의 상징인 스크루 모티프에 4개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핑크 골드의 러브 브레이슬릿 1천2백30만원대 모두 까르띠에(Cartier), 아일릿 디테일 톱, 플리츠스커트 모두 페이우(Faye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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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여정

유정의 여정
드레스와 화관 모두 비네뜨(Vignette).

죄와 벌, 복수와 용서는 수세기 전부터 고전이 사랑한 이야기 재료다. 형태와 구조만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도 숱한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차용되는 데는 그만큼 풀기 어려운 삶의 근원적인 질문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평생의 짝이라 생각한 연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마가 사형을 언도받았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그 살인자에게 순수하고 예쁜 딸이 있다면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해도 될까? <더 테러 라이브>를 각색한 박은경·이동하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화 <비밀>. 살인자의 딸을 데려다 키운 형사, 그리고 피해자의 약혼자가 10년 뒤 다시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갈등의 중심축인 살인자의 딸 ‘정현’, 그 무거운 왕관을 김유정이 썼다.

유정의 여정
원피스 씨씨콜렉트(CC Collect), 반지 젤라시(Jealousy), 브레이슬릿 겟미블링(Getmebling).

말도 잘 못하던 네 살 때부터 카메라 앞에 선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영화 <비밀>의 의미는 크다. 인터뷰 중 그녀는 ‘느꼈다’, ‘생각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찰나의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뭉개지 않고, 세세하게 느끼고 깊이 생각하려 애쓰는 그녀의 평소 생활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작품의 무게를 견디며 좋은 배우라면 한번쯤 경험할, 몰입이 동반하는 공포를 생애 처음으로 느꼈다고 고백했다. 연기는 무섭지만 가야 하는 길이고, 자신을 계속 앞으로 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결국 연기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배우이자, 열일곱 살 소녀가 겪을 감정의 동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마주한 진한 눈빛과 풍부한 표정에서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을 봤다.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해사한 미소의 소녀로 돌아와 알밤을 내밀었다. “이거 저희 엄마가 아침에 삶은 밤이에요. 제가 밤을 아주 좋아해서 잘 아는데요. 이거 되게 맛있는 밤이에요.”

유정의 여정
원피스 럭키슈에뜨(Lucky Chouette), 반지 스톤헨지(Stone Henge), 브레이슬릿 스와로브스키(Swarovski), 네크리스 겟미블링(Getmebling).

<비밀>은 고통스러운 용서에 대한 이야기죠. 열일곱 살이 아니더라도 이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주제예요. 시나리오 읽고 느낌이 어땠어요? 보통 시나리오를 보면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는데 <비밀>은 잘 보이지 않았어요. 제 또래 아이가 겪기 어려운 일이고, 설사 경험했다 하더라도 온전히 버텨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어린 시절, 옷장에 숨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아이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까? 그걸 계속 생각했어요.

단편적인 감정의 연기가 아닌 여러 개의 층이 켜켜이 쌓인 복잡한 캐릭터예요. 이런 작품을 해온 배우들이 종종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하잖아요. 어땠나요?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는 그 말을 처음 경험했어요. 그리고 몰입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알았어요. 이전까지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도 없을뿐더러 지금보다 생각하는 힘이 적었기 때문인지 얼렁뚱땅 일상으로 돌아왔거든요. 당시 영화 <비밀>과 드라마 <앵그리맘>을 연달아 촬영했는데 <앵그리맘>의 ‘아란’이라는 역할도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친구의 자살을 경험한 아이라 쉽지 않았어요. <비밀>을 촬영하면서 친해진 스태프 한 분이 쫑파티에서 제가 두 작품을 동시에 찍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앞으로는 지금처럼 강도 높은 역할을 선택할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는데, 그 이후에 두 개의 역할을 한 만큼 두 배로 감정이 몰아쳤어요. 묘했죠. 김유정이라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어요. 캐릭터에서 빠져나온다는 말은 곧 나를 찾아 돌아오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비밀>의 정현이와 <앵그리맘>의 아란이가 제 양옆에 서 있다가 떠나면서 제 일부를 함께 떼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렇게 계속 연기를 하면 나 다 없어지는 거 아니야?(웃음) 했죠. 앞으로 역할을 결정할 때 이런 상황도 고려해야겠구나 싶었고요.

앞으로 연기를 하면서 배우로서 성장통도 겪어야 할 텐데요. 지금이 그 시기인 것 같아요. 내가 성장통을 겪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알아챌 정도예요. 하지만 쑥쑥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이 순간을 자세히 느껴보고 기억하려고 해요. 이 과정을 지나야 제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무엇이 먼 미래의 순간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내게 더 이로울까 한번 더 생각해봐요. 훗날 지금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하길 참 잘했다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저 혼자 결정하는 걸 연습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사소한 고민도 많아요.(웃음)

생각이 많아서 그럴까요? 의외로 목소리가 작고, 말수가 없어서 놀랐어요. 어릴 때는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도 못했어요. 촬영장에서 하루 종일 참은 적도 있죠. 중학생 때부터는 말도 많아지고 목소리도 컸는데 지금은 다시 바뀌는 거 같아요. 자꾸 조심하게 되고 덜 말하려고 해요. 조용히 말하고, 가만히 있는 게 되레 편해요. 내가 어떻게 했을 때 편안하고 좋은지 인지하면서 진짜 나를 알아가는 것 같아요. 그 과정이 너무 좋고 재미있어요. 제 안에 큰 기둥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성격이라 바로 감정이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앞으로 조심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게 상대방에게도, 또 저에게도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싫으면서 억지로 하는 건 저도 싫죠.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때로는 하기 싫은 것도 마음을 잘 바꿔서 해내야 하는 것도요.

유정의 여정
니트 톱 커밍스텝(Coming Step), 스커트 프리마돈나(Fleamadonna), 구두 레페토(Repetto), 브레이슬릿 해수엘(Haesoo.L), 반지 스톤헨지(Stone Henge).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 중에는 연기를 학습한 탓에 지나치게 기계적인 연기를 하는 이들이 더러 있죠. 그런 면에서 유정씨는 유연하게 성인 연기로 진입한 편이에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도 받았고요. 배운 연기가 아니기 때문일 거예요. ‘이 대사는 이렇게 쳐야 해’ 하는 식으로 가르쳐준 사람이 없어요. 연기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요. 인식이 박혀 있는 게 없으니까 자유롭게 연기하는 편이죠. 물론 그 자유로움도 제가 계속 답습하다 보면 나쁜 습관이 될 수 있겠죠. 옆에서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제가 계속 조심해야 해요.

시나리오 쓰는 게 취미라고요. 그날그날 잠깐의 기분이라도 문장으로 쓰려고 노력해요. 거기에서부터 시나리오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줄의 생각이 열 줄이 되고, 그 열 줄들이 모여 장면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을 하죠. 버스정류장에 누가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을 풀숏으로 보면서 스토리를 붙여나가는 거예요. 글을 쓰다 보면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해져요. 평소에는 너무 많이 주위를 살피면서 지내야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주변을 보지 않아도 되거든요.

오늘 아침에도 영화를 보고 왔다고 하던데,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요? <로렌스 애니웨이>나 <러블리 본즈>처럼 묵직하게 와 닿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이 있는 작품들이 저와 잘 맞아요. 아침에 본 <레인 오버 미>도 좋았어요.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상황에서 무언가 하나는 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해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어! 저런 표현도 가능하구나,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하는 순간이 많거든요. 저는 그분들보다는 경험이 적으니까 책이나 영화, 사람들의 관계도 연기의 눈으로 보게 되는 거예요.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배우는 연기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장면을 이런 각도로 찍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 캐릭터의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죠. <비포 선라이즈>에서 줄리 델피가 연기한 ‘셀린느’ 같은 캐릭터도 좋아요.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거기에 잘 녹아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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