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구의 세계

니트 스웨터와 팬츠 모두 사카이(Sacai),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셔츠 몽클레르 감므 블루(Moncler Gamme Bleu), 니트 스웨터 소윙바운더리스(Sewingboundaries).
니트와 팬츠 모두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니트와 팬츠 모두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배우 여진구와의 대화는 호흡이 빠르다. 거의 모든 질문에 빠른 속도로 답한다. 지나간 캐릭터에 대한 소회, 선배들과 함께한 현장에서 느낀 심경,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 삶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나면 하고 싶고 가고 싶은 곳들. 주제를 막론하고 주저 없이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씩씩하고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는 점에서 연기도 예술의 영역이라는 그는 현장에서 부딪히며 연기를 배웠으니 이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잘 표현하고 싶어 대학에서  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간 여진구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괴물 같은 아빠들을 자양분 삼아 더 큰 괴물이 되어버린 화이를 연기했고, <서부전선>과 <대립군>까지 설경구, 이정재 등의 선배들과 함께하며 현장에서 제 몫을 거뜬히 해냈다. 그리고 12월 개봉을 앞둔 장준환 감독의 차기작 <1987>(가제) 속 이야기의 시작인 박종철을 연기하며 자신이 살지 않은 시대, 경험하지 않은 역사 한가운데에 선다. 인터뷰가 있던 당일 새벽까지 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 촬영을 했다지만 마지막 회차 촬영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는 스물한 살의 이 배우는 지금 연기에 대한 열정과 취향에 대한 발견으로 자신의 세계를 건강하고 현명하게 빚어가는 중이다.

 

올 상반기에 <대립군>이 개봉했다. 많은 배우가 연기한 바 있는 ‘광해’ 역을 맡았는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캐릭터를 만들어가기 어려웠을 것 같다. ‘광해군’이기 때문에 어려웠다기보다는 <대립군>의 광해가 내가 알던 왕의 모습이 아니어서 어려웠다. 위엄 있거나 권위적인 왕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 리더십을 갖추게 되리라 짐작은 하지만 당장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힘든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약한 소년이자 어린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몇 편의 사극을 해오면서 왕을 맡기도 했는데 그때 캐릭터와 많이 달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감독님과 의견을 많이 주고받았다. 감독님은 광해의 감정이 격정적이지 않고 잔잔한 시냇물이나 촛불처럼 흔들리기를 바랐다.

배우에게 캐릭터는 숙제다. 숙제를 풀 때 어떤 식으로 푸는가? 혼자 상상하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힘들다. 선배들이나 감독님과 영화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시간들이 모여 차츰차츰 선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 같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는 아무래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많다. 그런 식으로 틀을 다지고 현장에서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는 게 편하다. 지금껏 선배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았는데 내가 애써 역할에 힘을 주지 않아도 선배들과 함께 연기하면 감정이 잘 흘러간다.

선배들로부터 들은 조언 중에 마음에 유독 와 닿았던 조언이 있다면? 작품에 몰입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러다 자칫 역할에 집착하게 되면 스스로를 틀에 가둬버릴 수도 있다는 말. 작품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오히려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연기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도 중요하다. 독백하듯이 연기할 수 없지 않나. 지금보다 더 진한 감정을 연기하게 되면 그런 조언이 마음에 더 크게 와 닿을 것 같다.

영화 속 광해처럼 흔들리거나 위태로웠던 순간이 있었나? 어려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많은 응원을 받아서인지 그런 순간은 없었다. 사춘기도 별다를 게 없었다.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하고 힘들어할 때도 나는 운 좋게 안정적이었다. 가끔 뒤늦은 사춘기가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불안하진 않다.

늘 칭찬받는 배우였다. 그런 칭찬이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연기만큼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 줄다리기 같은 긴장감은 필요한 것 같다. ‘잘해서 칭찬받고 싶다’라기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작품을 앞두고 목표는 늘 ‘살아보자’다. 그 역할로 후회 없이 잘 살아보자.

대학생 여진구의 모습이 궁금하다. 학교 다니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가장 많이 기대했던 건 또래와 함께 하는 작업이었다. 또래끼리 아이디어도 내보고 거침없이 표현하며 연기해보고 싶었다. 그 덕분에 연기에 대한 생각이 조금 변했다. 전에는 ‘이 역할은 이런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렇게 할 것 같아. 이 친구처럼 해볼까’라고 생각하게 됐다. 좀 더 부딪혀보고 싶어졌다. 물론 친구들과 연기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학교생활부터 다른 관심거리까지 친구들과 있으면 얘기할 게 많다.

배우 말고 인간 여진구가 꽂혔던 게 있나? 궁금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에 흠뻑 빠진다. 최근에 꽂힌 건 와인. 인터넷이나 책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마셔보기도 하며 공부했다. 요즘은 스페인 와인이 좋더라. 고기를 좋아해서 묵직한 느낌의 와인을 좋아한다. 고전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한다. 지인으로부터 유명 감독의 대표 작품을 하나씩 모아놓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 책에 소개된 영화를 하나씩 찾아 보는 중이다. 책에 등장한 영화를 찾아 보고 나면 해당 페이지를 접는다. 모든 페이지를 접게 될 날을 기대하며.(웃음) 한동안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빠져 있기도 했다.

예정대로라면 올 하반기에 <1987>이 개봉한다. 이야기의 시발점인 ‘박종철 열사’를 연기했는데 사극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와는 또 달랐겠다. 기술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박종철 열사와 최대한 비슷해 보이도록 분장한 것이다. 가발부터 안경, 옷까지 고증하듯이 맞췄다. 특별 출연이긴 하지만 많이 조심스러웠다. 실존 인물이라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내가 그분의 삶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박종철 열사가 돌아가신 나이가 딱 지금 내 나이다. 촬영장에 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이번에도 역시 선배들에게 많이 물었다.

셔츠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팬츠 발렌티노 바이 무이(Valentino by MUI).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가늠이 되는가? 대답하기가 조심스럽다. 어렵기도 하고.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거리로 나선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데 직접 살아본 시대가 아니어서 명쾌한 답을 내놓기 쉽지 않다.

<화이>에 이어 장준환 감독과는 두 번째 작업이다. 이번에도 기라성 같 은 선배들과 함께한 작업이기도 했고. 감독님과의 현장은 경험한 적이 있어서 편안했다. 선배들은 늘 나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열정을 잘 다룰 줄 안다. 나는 뜨거운 불을 만들어내기만 할 뿐 그 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데기도 하고 막막하다. 선배들처럼 자신의 열정을 냉철하게 조절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열정에 데는 건 뭔가? 내 열정과 작품의 타협점을 못 찾을 때가 있다. 작품 전체를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연기를 하다 보면 시야가 점점 좁아질 때가 있거든. 열정에 데어 힘들 때도 선배나 감독님을 찾아가는데 내가 찾기 전에 먼저 물어봐주실 때도 많다. 아마도 옆에서 내 감정 상태가 다 보이는 모양이다.

주변의 많은 선배들처럼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어떤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나? 내가 지금 바라보는 선배의 바로 그 모습. 후배가 필요할 때 편하게 맞아주고 후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선배가 되고 싶다. 아직은 먼 미래 얘기겠지. 그런데 요즘 <다시 만난 세계> 촬영장에 가면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스태프들도 있다. 느낌이 색다르더라.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았다. 언젠가 다른 좋아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성격이 원래 뭐 하나를 오랫동안 못한다. 그런데 연기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변수도 워낙 많고 선배들도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말씀하신다. 나에겐 무궁무진한 세계다. 연기에 질릴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좋아하는 것들이 더 생길 것 같기는 하다. 전에는 오로지 연기 하나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해보고 싶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연기를 안 하면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들을 함께 좋아하면 되겠다 싶다.

하반기 <1987>이 개봉하기까지 쉬어가는 시간이 있겠다. 올해는 정말 마음껏 연기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고 쉴 생각에 또 기분이 좋다.(웃음) 몇 작품을 이어 하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삶을 대하는 방식도 그렇고. 온전한 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만난 세계> 촬영이 끝나면 여행을 많이 가려고 한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데 지구 정반대편인 남미나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남반구에 가서 완전히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 별다른 계획 없이, 여행 책 한 권만 있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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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송중기

버건디 벨벳 재킷, 버건디 캐시미어 터틀넥, 버건디 벨벳 팬츠 모두 에르메스(Hermes).
다크 그레이 체크 롱 코트, 브라운 니트 스웨터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화이트 러플 셔츠, 블랙 조거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블랙 캐시미어 롱 코트, 화이트 셔츠, 베이지 핸드 드로잉 팬츠, 네이비와 브라운 배색의 프린지 장식 슈즈 모두 버버리(Burberry).
블랙 브이넥 니트 스웨터, 그레이 체크 팬츠, 블랙 퍼 장식 로퍼 모두 프라다(Prada), 화이트 오버사이즈 셔츠 와이씨에이치(YCH).

어미를 잃은 강아지처럼 소녀의 손짓을 따르고 인간성 대신 야성을 몸에 걸친 늑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얼굴과는 어울리지만 야생의 얼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송중기는 지저분한 얼굴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눈빛으로 관객 앞에 섰다. 그리고 2017년 우리에게 어느새 익숙해진 군복을 입고 상처 가득한 얼굴로 총과 칼 혹은 촛불을 들고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사람들을 지키고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영’으로 돌아왔다. 제작 전부터 뜨거운 관심과 응원을 받아온 영화 <군함도>는 예상치 못한 논란과 비판의 한가운데에 들어섰지만, 실제 군함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춘천의 세트장에서 동고동락 한 감독과 배우들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를 넘나들며 꿋꿋이 관객을 만났다. 어쩌면 상업 영화로 만들기에 다소 예민한 소재의 영화를 차기작으로 고른 순간부터 논란 혹은 그로 인한 갖가지 위험 요소가 예상된 건지도 모른다. 흥행과 비평의 결과에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해 아쉬움도 크며 결국 모든 책임은 자신을 비롯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속상한 마음의 근원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군함도>를 위해 보낸 모든 시간은 대견한 성장의 시간이었음은 확신한다. “인생의 큰 일을 앞두고 있어 더 진지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영화를 촬영했죠. 광화문 촛불집회가 있던 날 영화 속 촛불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고요. 좋은 선배들을 만나 영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주제로 토론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선배들과 교감하면서 제 더듬이가 넓어진 듯해요. 서른두 살에 이 영화를 찍었고 서른세 살이 됐는데 이제 시선을 좀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중심에 류승완 감독님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이 있죠.”

브라운 롱 코트, 다크 그레이 브이넥 니트 스웨터, 네이비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화이트 셔츠 버버리(Burberry).
그레이 오버사이즈 재킷, 화이트 러플 셔츠, 다크 그린 벨벳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브라운 트렌치코트, 베이지 알파카와 실크 소재 싱글브레스트 수트, 러스트 색상의 알파카 캡, 오프화이트 하이킹 부츠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Ermenegildo Zegna Couture), 베이지 모헤어 니트 스웨터 올세인츠(All Saints).
그레이 무통 롱코트, 다크 그레이 화이트 라이닝 팬츠 모두 닐 바렛(Neil Barrett), 오프화이트 니트 스웨터 타임 옴므(Time Homme), 화이트 스니커즈 루이 비통(Louis Vuitton), 러스트 색상의 캡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Ermenegildo Zegna Couture).

<군함도>와 관련한 해외 프로모션까지 모두 마쳤겠다. 2주 전에 아시아지역 영화 프로모션이 끝났다. 요즘은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다.(웃음) 실은 개인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기억이 좋다. <늑대소년>의 첫 상영을 부산국제영화제 때 야외의 전당에서 했거든. 박보영, 유연석 배우와 함께 그곳에서 <늑대소년>을 처음으로 봤다. 좌석 수보다 두 배 정도 많은 관객이 찾아준 바람에 자리가 모자라 계단까지 꽉 찼다. 나도 계단에 앉아 봤다. 첫 상영이어서 엄청 떨리는 자리였는데 관객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상영이 끝나고 횟집에 가서 정말 기분 좋게 뒤풀이를 했다. 아쉽게도 공식 초청작이 아닌 데다 당시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어서 시간이 여의치 않아 레드카펫을 밟지는 못했다. 마리끌레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쉽지 않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무사히 잘 치러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고, 영화배우 중에는 그래도 막내에 속하는 나라도 이렇게 나서면 더 많은 어른들이 동참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러고 보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배우들의 기억이 다들 좋다. 왜 영화제에 정치적인 이슈가 얽혀 문제가 됐는지 아쉽다. 어쨌거나 이 시기를 잘 지나 더 멋지게 나아가면 좋겠다.
<태양의 후예> 방영이 끝날 즈음 인터뷰를 했을 때 <군함도>를 위해 몸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크랭크인 전이었는데 배우들과 촬영장에서 함께 만들어갈 에너지가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며칠 전이었나? 어떤 분이 <군함도> 출연 배우들과 류승완 감독님의 사이가 틀어졌느냐고 물었다. 아마 개봉 후 많은 논란이 있었던 터라 그런 소문이 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개봉하고 더 친해졌다. 사흘 전에도 황정민 선배와 한잔했다. 풍파를 겪어서 그런지 진짜 끈끈해졌다. 무대인사를 다니며 더 진솔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촬영장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나눴다. 어쩌면 서로 좋은 ‘오지랖’을 펼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이니까. 혹시 영화에 대한 논란이 상처가 될까 봐 서로에게 더 애틋해진 것 같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촌스러움이 좋다는 말을 했다. 감독님이 제작발표회 때 나를 일컬어 ‘촌스럽다’고 평하셨다.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아니까 좋았다. 촬영장에서는 감독님이 나에게 우직하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며 더 영악해져도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도 감독님이 촌스러워서 좋다. 감독님은 나보다 더 촌스럽다.(웃음) 인간적으로는 쓸데없는 감정의 허세가 없고 영화를 보면 앵글의 허세도 없으며 일부러 멋 부리지도 않는다.

개봉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 논란에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쉽지 않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나 역시 진짜 속상했지만 일단 이런 상황에선 자기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더 잘했더라면 더 많은 관객이 인정해주었을 텐데.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도 사람인지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감독님은 요즘 계속 고전을 읽으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인데 종종 인상적인 문장을 보내주신다. 무대인사를 다니면서는 우리끼리 있을 때 농담도 더 많이 했는데 실은 다들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 내 새끼 같은 작품이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드니깐. 솔직히 나는 흔들리지 않기 위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나마 찾은 방법이라면 <군함도>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 것이다. 관객 옆에서 반응을 보고 모니터링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그냥 계속 봤다. 몇 번이고 다시.

영화에 대한 논란 중에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뭘까? 그렇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겠냐마는, 모두 죽을 듯 살 듯 덤비다시피 작업한 작품이라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내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 평가를 정답과 오답으로 나눌 수도 없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뿌듯했던 순간도 있다. 마지막 무대인사를 간 곳이 춘천이었는데, 춘천은 <군함도> 촬영의 90% 이상이 이뤄진 곳으로 무대인사는 처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충분히 했어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극장을 찾아주신 관객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그렇지. 영화가 더 잘됐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군함도에 대해 많이 알릴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라는 얘기를 나눴다. 물론 상업 영화의 가치는 많은 관객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미라도 남긴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또 이런 순간도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삼척에 놀러 갔는데 그때도 혼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감사하게도 내가 찾은 상영관이 꽉 차 있었다.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계속 ‘아이고, 아이고’하며 보시고 그 아주머니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에고, 나쁜 놈들’ 하며 보시더라. 신선하고 고마운 경험이었다. 영화란 게 분명한 산업이고 어떠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영화적인 여러 다양한 요소를 섞어야 하는 건데 많은 비난을 받으니까 영화라는 매체로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내년 이 맘때면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좀 더 정리가 되려나?

실은 영화의 흥행이 예상 밖으로 저조해서 이번 인터뷰에 더 나서지 않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거야 사실이니까.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끄러운 작품이 아니다. 열과 성을 다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아쉬움이 있을 뿐. 나는 이경영 선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경영 삼촌이 보내주신 문자를 캡처해뒀다. 그걸 자주 본다. 삼촌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연기를 하신 분이니까 주옥같은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나는 아직 젊은 배우고 할 게 많으니 배우의 길을 길게 봐야 하지 않겠는가.

<늑대소년>의 소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보호가 필요한 인물이었다. 반면 ‘무영’은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다. 결의 차이가 꽤 크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인데 이번 영화를 보시고 지금껏 내가 출연한 작품 중 가장 공감한 역할이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 왜냐고 물었더니 ‘난 네가 활동하는 모습이 다 좋았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네 모습에 깊이 공감했어. 지금까지 네가 꽃미남이었다면 이제야 좀 연기를 더 하고 싶어 보였어. 그렇게 또 시작하면 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뭉클하더라. 길지 않은 영화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군함도>는 결이 많이 다르다. 앞으로 작품을 선택하는데 이번 영화가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소년’이 아니라 사람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리더’ 격이었으니 현장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을 것 같다. 뭐랄까. 선수 중의 선수들이 모인 현장이었다. 그분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끓어올랐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분들에 비해 경험이 턱없이 적은 나에게 그곳은 배움의 터였다. 그래서인지 현장에 가면 한결 진지해졌다. 촬영하러 가는 길이 학교에 가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하나 더 배우고 싶은 현장이었다.

송중기의 외모에서 상처투성이 ‘무영’의 얼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잘할 수 있고 잘 어울릴 것 같은 역할과 자신감에 비해 욕심을 부리고 싶은 역할 사이에서 어떤 걸 선택하는 편인가? 시나리오를 택할 때마다 늘 그 기로에 선다.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고 나에게 맞는 것을 되풀이할까, 아니면 새로운 것을 해볼까. 나는 그 선택을 색에 비교하곤 하는데 가령 내가 원래 가진 색이 파란색이면 빨간색으로 바로 가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해도 변화하고 싶은 욕심과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군함도>의 ‘무영’이 파란색이었다면 빨간색으로 가기 전에 초록색에 갔다가 노란색으로 가서 주황색, 그다음에 빨간색이 되어야 한다.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확 변해버리면 관객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빨간색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걸 해내고 싶다. 아직 그 고민의 답을 찾지는 못했다. 어떤 작품이 맞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래서 요즘 선배 배우들을 만나면 선배들 얘기를 많이 듣는다. 선배들은 어땠는지.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색으로 채우고 싶나? 빨주노초파남보보다는 후회 없는 선택으로 채우고 싶다. 작품의 흥망과 상관없이 이유가 확고하니 선택했을 것이고, 긴 세월이 지나 돌아봤을 때 ‘그래, 내 선택이 맞았어’라는 작품이 쌓여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 같다. 앞서 빨주노초파남보를 이야기했지만 그건 사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평가한 모습이다. 스스로의 만족도를 따진다면 선택에 후회 없는 작품을 많이 갖고 싶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을 수야 없겠지. 그래도 후회가 없다면 조금이나마 덜 아쉬울 것 같다.

지난 인터뷰에서 언젠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 때를 김민기의 ‘봉우리’에 빗대 말했다. 그 뒤로 나도 종종 ‘봉우리’를 듣는다. 가사를 되새기게 하는 곡이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지난번 인터뷰 내용을 캡처해 보내면서 취향이 왜 그리 나이 든 사람 같으냐고 놀렸다.(웃음) 어제도 ‘봉우리’를 들었다. 노래에 보면 ‘나는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거긴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그럼 또 다른 봉우리로’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인생의 모습과 잘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해질 때 위안이 되기도 하고. 내 다음 봉우리는 무엇일까? 결혼이 될 수도 있겠다. 전에는 나는 배우니까 다음 봉우리는 당연히 어떤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봉우리가 굳이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올라가서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다. 아직은 다음 봉우리를 찾지 못했다. 내가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이 하나 먹으며 계속 걷는 중인 것은 맞다.

배우로 더 성취하고 싶은 것이 있나?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해보고 싶다. 많은 선배들이 먼저 이뤄놓은 ‘한류’라는 공간 안에 나도 조금이라도 들어서게 되었으니 좀 더 확장해 다른 문화권의 현장도 경험하고 싶다. 가장 함께하고 싶은 감독님이 이안 감독님인데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많이 다르고 현장 분위기도 다를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대중은 송중기라는 배우가 정의롭고 바르길 기대한다. 그런 점이 부담도 될 테고 뭔가를 선택할 때 걸림돌이 되기도 할 것 같다. 엄청. 그런 기대가 없으면 좋겠다.(웃음) 선택할 때 그런 시선이 장애가 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남들에게 보이는 직업이다 보니 당연히 신경 쓰인다. 부담도 크고. 내가 박보검에게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있다.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마라, 다 짐이 될 수 있다. 착하다는 이미지가 배우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제 보라색으로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할 수도, 주춤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뜨거웠던 20대를 지나 30대에 들어섰다.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세월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의 내가 더 기대되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다행인 건 불안보다 기대감이 더 크다는 거다. 당장 내년, 내후년보다는 30대 후반의 내가 어떤 역할로 어떤 무대 위에 서있을지 궁금하다. 어떻게 세월을 보내야 할지 찾고 있다. 요즘 문득 30대의 사춘기가 온 것 같다. 결혼하고 사춘기가 오면 안 되는데 어쩌지.(웃음)

당신의 전성기는 지났는가, 아니면 앞으로 올 것 같은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정점을 찍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기준으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의 정점은 아직 찍지 못했다. 어느 시점에 정점이 왔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다만 그때가 온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 정점이란 정말 뭘까? 선배들과 술을 마시며 한번 얘기해봐야겠다.

지난 인터뷰 때와 같은 질문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지금의 송중기는 행복한가? 심하게 행복하다. 지난 작품을 생각하면 속상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 행복하고 뿌듯하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큰 결정을 한 시기이기에 행복하다. 그녀가 있어서 행복하고. 인생의 아주 행복한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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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채의 고요한 단언

버건디 터틀넥 풀오버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레드 원피스 조셉(Joseph), 체크 코트 셀린느(Celine).
핑크 브라운 퍼 코트 미우미우(Miu Miu), 레드 시스루 스커트 디올(Dior).
핑크 코트 넘버21(N°21), 스카이블루 셔츠 푸시버튼(pushButton), 와인색 니트 크롭트 스웨터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팬츠 노앙(Nohant), 레드 힐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이날의 대화를 정리해보면 배우 정은채는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돌진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는 샛길을 찾아 걷는 사려 깊은 산책자에 가깝다. 영화라는 신비로운 길에 매 혹돼 <플레이>(2011), <무서운 이야기>(201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역린>(2014), <더 킹>(2017) 등 장르에 대한 호오나 배역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잘해낼 수 있는 것 들을 찾아 걷는 이다. 그러니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무엇이 되어보겠다는 유의 욕망은 그녀와 멀어 보인다. 외려 자신의 욕심이 작업물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계하는 쪽에 가깝다. 그녀는 이 길 위에서 인연처럼 ‘해원’을 만났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시간을 담담히 지나며 부일영화상 신인여자연기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신인상, 올해의 영화상 신인여우상,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 했다. 그리고 이번 가을, 해원 위에 덧입혀도 좋을 인상적인 연기를 남긴 영화 <더 테이블>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더 테이블>은 싫어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영상은 아름답고 리듬은 유려하며 대사는 생생하고 연기는 사랑스럽다. 정은채가 참여한 두 번째 에피소드는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몇 달 만에 연락해온 남자를 다시 만나는 경진의 이야기다. 두 남녀 사이의 팽팽한 긴장 이면에 겹겹이 감춰져 있는 감정의 레이어를 찾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어색한 공기 속 경진의 어쩔 도리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정은채는 오직 표정과 눈빛만으로 표현한다.

<더 테이블>이라는 영화의 형식이 대화의 흐름으로 인물의 성정과 사건을 유추하게 만들듯 이날의 인터뷰 또한 그녀가 남긴 말들을 더듬으며 배우 정은채라는 사람을 짐작해 본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난 뒤 흘러나오던, 유순하면서도 명료한 대답들이 곧 정은채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은채는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정확히 말한다. 중간중간 특유의 해사한 웃음을 ‘파’ 하고 터뜨리면서.

레드 코트 막스마라(MaxMara), 블루 터틀넥 스웨터넘버21(N°21).
핑크 태슬 장식 원피스 에밀리오 푸치(Emilio Pucci).

<더 테이블>이 본격 N차 관람 영화로 사랑받고 있다. 본인은 이 영화를 몇 번 정도 봤나? 세 번 봤다. 부산국제영화제 스크리닝에서 처음 봤고 이후 전주 국제영화제와 개봉 시사회에서 봤다.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편이 아닌데 <더 테이블>은 러닝타임이 짧기도 하고, 피로감이 덜한 편이라 다시 봐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나뉘어 있으니 다음번에 집중해서 보고 싶은 에피소드가 생기는 것 아닐까. 나 역시 볼 때마다 마음이 가는 에피소드들이 다 달랐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영화를 다시 찾는 분들도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김종관 감독이 배우 정은채의 눈빛을 극찬하더라. 어느 시사회였나 김종관 감독님이 4명의 배우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감독님은 일찍이 이런 유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본인 나름대로의 답을 구상하고 오신 듯 했다. 모든 배우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 하고, 그렇다고 그냥 다 잘했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잘 꾸려 오셨다.(웃음)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의 첫 느낌이 궁금하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앞뒤 설명 없이 이야기가 바로 열리는 느낌이라 흥미로웠다. 저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두 사람이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은데 경진은 왜 계속 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지 궁금해지더라. 이런 질문들을 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이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촬영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예상보다 큰 긴장감이 돌았다. 상대 배우였던 전성우씨와 사전에 미팅은 했지만 다양하게 교류하지는 못했다. 성격이 진중하고 조용한 편이고,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웃음) 본의 아니게 나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연기하다 보니 감독님이 의도했던 긴장감이 더 살아났다.

‘너를 좋아해서 네가 밉고, 너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나도 밉다’는 것이 경진의 가장 큰 마음 아니었을까. ‘경진’이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경진은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했던 거다. 호의와 미련이 남아 있으니까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그 자리에 나갔겠지. 이번에는 상대가 나에게 얼마나 진심을 내줄까 하는 걱정도 컸을 테고. 그렇다고 상대의 감정과 반응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거나 직접적인 화두를 던지지는 않고 그 사람에게 계속 반응하고 그의 반응을 살피는 그런 섬세한 사람이라고 봤다.

맞다. 4명의 캐릭터 중 경진이 가장 섬세한 성정의 인물 같다. 실제 배우 정은채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GV에서 저런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받은 적이 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 함께했던 PD님이 ‘아마도 저렇게까지 갑갑하게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확실한 의사 표현을 했을 것이고, 모호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쪽은 아닐’ 거라고 대신 답해주셨다. 나 역시 그 답에 동의하고.(웃음)

두 번째 에피소드는 두 남녀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상 생활에 서 관계를 맺는 데 유연한 편인가? 능숙한 편은 아닌 것 같다.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신중한 편이다.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 스쳐간 사람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깊어진 사람도 있다. 관계의 모양은 제각각이더라. 다만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보고, 깊이 알려 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벌어진 시간이 낮보다는 낮 두 시 반이다. 평소에 주로 무엇을 하는 시간인가? 보통 두 시 반이라면 집에서 차를 마실 시간이다. 오전에 운동을 하고 해가 지면 산책을 나간다. 맞다. 밤 산책만의 묘미가 있다. 낮 보다는 밤 시간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둠이 깔리면 생각이 더 깨끗하고 선명해지는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때니까. 내게 밤은 평온이 찾아오는 시간 같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어릴 때는 강박적으로 일기를 썼다. 지금은 쓰고 싶을 때 쓴다. 쓰는 행위 자체를 좋아해서 굳이 내 글을 쓰고 싶지 않을 때는 책을 펼쳐 필사를 한다. 손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행위가 여러 생각을 없애 주니까 명상하는 기분도 든다.

패션을 전공했고, 그림과 음악도 좋아한다. 음반을 낸 적도 있고. 다양한 예술 매체 사이에서 왜 영화를 업으로 삼았나?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고 미술이나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역시 모두 영화를 통해서였다. 영화라는 예술 매체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된 관심인 셈이다.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환상을 품고 있다.

영화에 빠졌던 강렬했던 첫 극장 체험을 기억하나? 중학교 때 부산에서 살았다. 당시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팝콘을 먹겠다고 극장에 갔는데 그때 본 영화가 <번지점프를 하다>다. 영화를 보면서 ‘이게 뭐지?’ 싶은 문화 충격을 받았다. 당시 영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날의 느낌과 극장 안의 공기까지 모든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여전히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이고, 여러 번 봐도 좋다.

필모그래피가 한 맥락으로 읽히지 않는다. 매번 장르를 달리해왔고, 특별 출연에 가까운 작은 역할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본인의 의지로 작품을 선택한다는 느낌이다. 의지라기보다 인연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참여하게 된 작품들은 희한할 정도로 과정이 수월했다. 특정 시기에 때마침 작품 제안이 들어오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투입될 수 있는 상황들이었다. 그럴 경우 작업의 결과가 더 좋더라. 진행 흐름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내가 욕심부리지 않고 연기에 임할 때 만족도도 높았다.

작품이나 캐릭터를 통해 배우로서 어떤 입지를 다져야겠다는 계획이나 목표는 세우지 않는 편인가 보다. 그 또한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다. 혹 그렇다 하더라도 나를 입증하고,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면 메이저 작품들만 선택했겠지.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작업에 참여했을 때 내가 얼마나 작품에 기여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려한다. 나만의 일이 아니니 적어도 나 한 사람보다는 작업물의 완성도가 더 중요하지 않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작품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는 편이라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상태에서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하나 더 있다면 지금껏 해오지 않은 캐릭터에 끌리는 편이다.

배우들은 늘 새로운 캐릭터에 목말라 있는 것 같다. 특히나 여성 배우들은 더더욱. 한국 영화의 성비 불균형 문제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 들 것 같다. 영화계 젠더 문제는 현재 대형 영화관에 걸려 있는 포스터들만 봐도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 아닌가. 이런 이유로 4명의 여성 배우들이 다른 시도라 할 수 있는 <더 테이블>에 기꺼이 참여했던 것 같다. 한국 영화계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시도가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즐겁게 임하고 싶다.

요즘 배우 정은채를 사로잡는 생각은 무엇인가? <더 테이블>로 인한 활동을 하고 있고, 영화 <안시성>을 촬영 중이라 일에 대한 생각이 가장 크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스스로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하나 생각 한다. 방향을 ‘제시해야겠다’가 아니다.(웃음) 굳이 여기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아도 방향에 대한 질문은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나다운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대다. 정은채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건강하고 투명한 정신으로 남에게 해롭지 않은 삶.

일러스트 장식 트렌치코트, 퍼플 도트 무늬 스커트 모두 버버리(Burberry), 레드 니트 톱 막스마라(MaxM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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