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인의 질문

코트 휴고 보스(Hugo Boss), 브라운 터틀넥 브아빗(VOIEBIT), 팬츠 우영미(WooYoungMi), 첼시 부츠 아테스토니(a.testoni).
터틀넥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배우 정해인을 모르는 이에게 그를 가장 쉽고 게으르게 설명하는 방법은 ‘드라마 <도깨비>의 지은탁(김고은) 첫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데뷔 후 4년 동안 우직하게 쌓은 그의 이력을 정독하고 나면 틀림없이 그 정의를 수정하고 싶을 것이다. 정해인이 연기한 역할을 되짚어보면 드라마 <삼총사>의 호위 무사부터 <블러드>의 천재 학자, <그래, 그런거야>의 막내아들, <불야성>의 보디가드, 독립영화 <서울의 달>의 ‘동대문 사입삼촌(소매상으로 보낼 의류 구매와 배송 대행 역할)’까지 방대하다. 구축해온 캐릭터의 다채로움과 장르의 스펙트럼은 신인 배우의 것이라기에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인상적인 역할로 대중에게 하루빨리 눈도장을 찍겠다는 조급함과는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대중에게 이른바 ‘먹힐 만한’ 것을 찾아내 서둘러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성공의 세계에서 정해인은 자신만의 속도로 갈 길을 간다. 정해인은 인터뷰 중 ‘내가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고,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 작품에 임한다고 답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깨우쳐간 지 4년째인 올가을 그는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자신의 이력에 큰 방점 하나를 찍고 있는 중이다. 배우 이종석, 배수지와 함께 같은 능력(미래를 보는)을 지닌 ‘히든카드’ 한우탁으로 극에 즐거움을 더하고 있는 정해인은 인터뷰 당일까지도 자신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함구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첫 방송을 몇 시간 앞둔 그는 꽤 설레는 듯했다.

그레이 체크 수트 클럽모나코(Club Monaco), 블랙 티셔츠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슈즈 프레드 페리(Fred Perry).

 

조금 뒤면 첫 방송이네요? 사전 제작을 한 때문인지 첫 방송일이 마치 영화 개봉일 같아요. 제가 첫 촬영, 첫 신부터 투입됐는데, 그날이 올해 2월 23일 이었어요. 드디어 보여드리게 됐네요.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어떤 점이 본인에게 가장 와 닿았나요? 복합적인 드라마라는 것이 좋았어요. 장르로 치면 판타지, 로맨스, 스릴러가 섞여 있고 법정 드라마의 요소도 있어요. 저마다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죠. 소재 자체가 판타지니까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현실에서 이뤄지길 바라지만 불가능한 바람이 있다거나 힘든 현실에 지치고 다친 경험이 있다면 이 드라마로 위안받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이 맡은 ‘한우탁’이라는 캐릭터를 ‘사교성 좋고 의협심 뛰어난 경찰’이라고 설명했어요. 한우탁과 정해인 사이에 교집합이 있다면요? 사실 사교성의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조심스러운 성격이에요. 말수가 없기도 없지만 편하게 농담하는 상황조차 진지하게 반응해 주변에서 재미없다고 해요. 함께 연기한 동료 배우들이 선비라고 놀려요. ‘정 선비, 정 선비’ 하면서. 닮은 부분을 꼽자면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는 점?

배우들 간의 호흡이 좋았나 봐요. 촬영 후 배우 이종석, 신재하 씨와 삿포로 여행도 다녀왔죠? 상엽 형도 가려 했는데 스케줄이 안 맞아서 함께하지 못했어요. 작품을 마치고 배우들과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었는데 아마 종석이도 그랬을 거예요. 식도락 여행으로 계획을 함께 짰어요. 주로 맛있는 음식 먹으러 다니고 새벽 4시까지 방에서 이야기했어요.

남자 셋이 새벽 4시까지 무슨 이야기를 해요? 연기랑 사는 이야기죠. 가족, 부모님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속내를 털어놓기가 점점 어려워지지 않아요? 대중을 상대하는 배우라면 더더욱. 사생활이니까 먼저 물어보기 조심스럽죠. 촬영하면서 동료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돈독해졌어요.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작품이에요. 또래들과 작품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단체 카톡방만 봐도 황당하게 웃겨요. 각자 지금 어디서 뭐 하는지 사진으로만 대화하기도 하는데, 잠시 다른 일하느라 확인 못 한 사이에 대화가 2백 개씩 쌓여요.

거기서도 웃기진 못하죠? 정 선비. 그래도 제가 리액션은 잘해요.(웃음)

영화 <역모: 반란의 시대>(이하 <역모>)도 11월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흥부>는 내년 설 연휴에 맞춰 선보일 예정이죠?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소처럼 일하는 한 해’를 보내겠다고 했는데 그 결과물들이 이제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이 작품들을 하는 사이 보여드린 게 없어서 주변 사람들은 제가 논 줄 알아요.(웃음)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는데 ‘끝난 거냐?’ ‘이젠 안 하는 거냐?’라고 묻기도 하고.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마치고 한 달 넘게 쉬고 있는 지금이 데뷔한 이래 가장 긴 휴식기예요. 그래서 여행도 알차게 다니고 있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여행 경비를 다 대서 가족과 오키나와도 다녀왔어요.

<역모>에서는 처음으로 상업 영화의 주인공을 맡았죠? 2년 전 촬영한 작품인데 저예산 영화라 어렵게 찍었어요.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힘든 여정이었는데 무사히 완성돼 애착이 커요. 두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드라마 찍듯 쉴 틈 없이 촬영했거든요. 회차마다 액션 신도 있었고요. 90% 이상을 대역 없이 하느라 다치기도 많이 다쳤어요. (손등을 보여주며) 여기 흉터가 칼싸움 신에서 난 상처예요. 꿰매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으니까 응급으로 천을 칭칭 감고 촬영을 마저 했죠. 한쪽 손만 감으면 어색해 보이니까 양손 다 감고요. 게다가 촬영 당시가 한여름이었거든요. 5백 밀리리터 생수를 열 병씩 마셨는데도 8시간 동안 화장실을 한 번도 안 간 적도 있어요. 찍고 나서 알았어요. 나중에는 소금도 먹고. 그런데 저만 그런 고생을 한 게 아니에요.

여름에 사극 촬영하기가 쉽지 않죠. 신기한 게 지난 4년 동안 여름마다 사극을 찍었어요. 첫해 여름은 <삼총사>였고, 그다음엔 <역모>, 작년에는 <임금님의 사건수첩>, 올해는 <흥부>를 찍었어요. 하하하.

보통의 배우들이 10여 년에 걸쳐 하는 고생을 압축적으로, 그것도 자진해서 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 이유가 늦은 데뷔 때문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늦게라도 빨리 뭘 해야겠다는 조급함 때문이 아니라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조급함은 독이 된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쫓기는 느낌이 드는 순간 여유가 사라지고 불안해지니까요. 굳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초조한데 조급하기까지 하면 연기에 방해가 되니 그런 감정은 최대한 갖지 않으려 노력하죠. 타고나길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아요. 외려 일을 늦게 시작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배우이기 이전에 정해인이라는 사람 자체가 흔들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배우가 된 후 작품 스코어가 좋지 않을 때에도 초조하고 불안하기 보다 다음에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성향이에요. 그 덕분에 흥행 성적이 좋지 않은 작품이 있어도 거기서 느끼고 얻은 것이 많아요. 약이죠.

반면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짧은 등장인데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뭔가 아이러니함을 느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몇 신 나오지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좋은 드라마였고, 충분히 인기를 얻는 중에 투입된 역할이잖아요. 같은 시기에 <불야성>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씁쓸한 마음이 잠깐 들기도 했죠. 그때 또 느꼈어요. ‘아, 내가 생각이 많구나. 좀 더 초연해져야겠다’ 하고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초연하게.

주말 가족극부터 사극과 판타지, 장·단편 독립영화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 있어요. 두루 겪어보니 어떤가요? 동대문 사입삼촌 역할도 해보고, 호위 무사에 경호원, 경찰, 막내아들도 해봤는데 더 다양하게 해 보고 싶어요. 스스로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고 못하는 것들이 뭔지 알고 싶어요.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보완해가면서 자양분으로 삼고 싶어요.

‘착한 배우’로 성장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요. 대중의 폭발적 관심을 받고 유명세에 시달리다 보면 그게 쉽지 않을지도 몰라요. 음, 배우라는 직업 특성상 새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니 어떤 배우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사람이 돼야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좋은 환경에서 좋은 연기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상대방이 좋아야 제 마음이 편하고, 또 상대방이 저를 좋아해야 연기도 잘 나오는 것 같아요. ‘연기만 잘해야지’는 제 목표가 아니에요. 연기는 조금 못하더라도 아직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계속해서 지키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다면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좋은 사람이고자 노력하는 태도.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 흐름과는 맞지 않아 굳이 물어보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에요. 우리 이야기 중간에 ‘정 선비’가 마침 나왔으니.(웃음) 다산 정약용 선생의 직계 6대 후손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포털사이트에 이름이 올랐어요. 꽤 화제가 됐죠? 어제 TV 연예 프로그램 인터뷰에서도 같은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물론 당연히 자부심이 있어요. 한데 많은 분들이 계속 물어보시니까 조금 난감하다 할까요.(웃음) 정약용 선생님은 위대한 실학자이기도 하지만 예술 방면에 능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그분의 예술 쪽 기질만을 받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알려진 이상 더 조심하고 잘해야겠어요.

라이더 재킷 올세인츠(All Sa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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