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의 내밀한 순간들

©Time

1957년 3월 4일, <타임> 표지

“그의 책에도 나와 있듯 크리스찬 디올은 사람들이 자신을 장인으로 기억해주길 원했습니다. 이 가위 역시 그런 의미죠. 장인이 존재하기에 디올과 같은 패션 하우스가 특별해집니다. 사람들은 디올을 그저 하나의 브랜드라고 생각하지만, 디올이 오트 쿠튀르 하우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New York Daily News/Getty Imageskorea

1996년 12월 10일, 뉴욕 현대미술관을 찾은 다이애나 비

“디올의 액세서리는 절 매혹시켰죠. 이 백을 보면 늘 페레가 이끌던 시절의 디올이 생각나요. 어떤 대상이 아이콘으로 기억될지는 시간만이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한 시즌용으로 만든 아이템이 두 시즌 이상 살아남는 것도 대단한데, 2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죠.”

 

©in Dior by Avedon, Justine Pidardie, Olivier Sailard, éditions Rizzoli, 2015, photo Thiery Legay

1955년 8월, 리처드 애버던이 촬영한 ‘도비마와 코끼리 그리고 겨울 서커스’

“처음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전 애버던의 사진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당시 디올의 조수였던) 이브 생 로랑의 드레스와 그걸 둘러싼 이미지 자체가 너무나 강렬했거든요. 코끼리, 헤어스타일, 도비마의 포즈까지도요. 서커스 속의 이 오트 쿠튀르 드레스는 디올 하우스가 펼치는 남다른 미학의 정수를 포착한 작품이죠.”

 

©Photo Regina Gelang, ©Münchner Stadtmuseum, Samlung Fotografie, Archiv Relang

1947년, 파리

“잘록한 허리와 풍성한 힙 라인을 강조한 1947년의 코롤 라인(Corolle line)은 파리라는 도시, 그리고 에펠탑의 라인과 대응되죠. 인체 구조도 마찬가지고요.”

 

©Horst P. Horst/Vogue Paris

1949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주노 드레스

“무슈 디올은 건축가와도 같아요. 형태와 구조로 기억되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그가 가진 능력의 전부는 아닙니다. 디올은 가볍고 섬세한 아름다움이라는 면모 역시 갖추고 있었어요. 멜랑콜리한 색조를 보면 알 수 있죠.”

 

©Dior Home, Spring Summer 2002

에디 슬리먼

“에디 슬리먼은 디올에 머물며 남성복의 실루엣을 바꿔놓았습니다.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알 거예요. 디올의 이름은 이브 생 로랑, 마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에디 슬리먼, 라프 시몬스 등 여러 디자이너의 명성 위에 세워진 길고 풍부한 역사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마치 디올의 유산을 관리하는 큐레이터가 된 것 같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Eugene Kamerman/Gama-Rapho

막대기를 들고 작업 중인 크리스찬 디올

“크리스찬 디올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쿠튀리에가 그의 팀을 이끄는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죠. 마치 지휘자가 지휘봉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처럼요. 리더가 되려면 비전과 열망을 가지고, 또 그걸 나눠야 해요. 반대로 팀은 그러한 리더를 지지하고 공동의 목표를 함께 이뤄가죠. 무언가를 혼자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Sex and the City 2, Michael Patrick King, 2009, Warner Bros

<섹스 앤 더 시티>

“‘디올을 사랑해(J’adore Dior)’는 존 갈리아노의 모토였고, 사람들의 입에 끝없이 오르내렸어요.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이 티셔츠를 입고 등장했던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주 멋졌죠.”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의 인터뷰

아틀리에에서 팀과 함께 작업 중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패션계의 슈퍼스타들이 으레 그렇듯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에게도 자신만의 시그니처 룩이 있다. 옆 가르마를 타 뒤로 빗어 넘긴 블론디 헤어와 올 블랙의 옷차림, 그리고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이 그것. 마리냥 거리에 위치한 디올 하우스 라운지에서 그녀는 종종 큰 소리로 웃으며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자신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난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뭐든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경쾌함을 사랑한다.

2016년 9월, 디올 여성복 컬렉션의 아트 디렉터로 선 첫 무대에서 그녀는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글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를 새긴 티셔츠를 선보이며 명품업계 에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의식을 환기했고, 새로운 컬렉션에서는 페미니즘 서적인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Women Who Run with the Wolves)> 을 언급하며 여성들이 자신의 직감을 믿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존 갈리아노가 남긴 문구 ‘디올을 사랑해(J’adore Dior)’를 재해석해 ‘J’ADIOR’를 선보이기도 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환호했고, 이는 곧 그녀의 상징이 되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다양한 모습을 지녔다. 세계 패션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카리스마와 타로 카드 해석을 즐기는 독특한 취미 모두 그녀의 일부다. 그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슈퍼맨을 의미하는 듯한 이니셜 S자 형태의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서 유독 빛나고 있었다.

 

패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전 열두 살 때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땋은 머리에 리본 장식을 한 작은 인형처럼 보이는 옷을 입길 원하셨죠. 그러나 전 벼룩시장에 가서 청바지와 군용 재킷을 사 왔어요. 어머니는 싫어하셨겠지만 옷을 입는 건 저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머니가 여성성에 관해 어떤 시각을 깨우쳐주었나요? 할머니처럼 아주 독립적인 여성이 되라는 것이었죠. 어려서부터 자율적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저 역시 아이들에게 같은 입장이에요. ‘레이첼, 니콜라! 지금 바로 일을 시작해야 해!’라고 소리치죠.

정신분석학자인 클라리사 핀콜라 에스테스의 책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 디올 2018 크루즈 컬렉션의 출발점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책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로마의 가족 품을 떠나 파리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책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는 의구심으로 인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거든요. 한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가 누군가의 직감을 아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책은 저를 강하게 만들었어요. 제 직감을 믿게 됐고, 위험을 감수할 결심을 했죠.

책에서 얻은 페미니즘의 가르침 중에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여성들이 자신의 직감을 잘 살피고 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회는 여성을 어린 나이부터 억압하고, 스테레오타입의 여성성을 강요하죠. 하지만 동요될 필요가 없어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디올의 2018 크루즈 컬렉션에 언급된 또 다른 인물 조지아 오키프는 옷을 통해 캐릭터를 창조하고 권위를 부여한 인물이죠. 본인의 모습을 정의하는 데 도움을 준 디올의 아이템은 무엇인가요? 재킷과 코트입니다. 저는 여러 분위기의 옷을 혼합하는 방식을 즐겨요. 무겁고 견고한 재킷에 가벼운 스커트를 매치하는 식이죠. 제가 바라는 ‘개성 있는 태도’를 위해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이러한 대비가 디올의 룩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성’에 관해 바꾸고 싶은 인식이 있나요? 제가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여성 스스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누군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되죠. 저는 젊은 세대가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들은 똑똑해요. 제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은 명확한 의견을 가지고 스무 살의 어리석었던 저보다 훨씬 더 멋진 청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를 보며 세대 차이를 실감한 적이 있나요?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한번은 딸아이가 포스팅을 하고 있길래 ‘그건 좀 위험할 것 같구나’ 하고 말했더니, 자신이 무엇을 보여줄지는 스스로 결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답하더군요.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소셜 미디어와 그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도 뛰어납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 신중해야 할 사람은 제 세대죠. 그 세계의 문법을 잘 모르니까요.

딸 레이첼의 의견을 참고하는 이유는 무언가요? 레이첼은 제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아요. 그저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할 뿐이죠. 지금 제겐 그런 의견이 필요해요. 그것이 제가 밀레니얼 세대와 소통할 수 있도록, 또 디올이 젊은 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우니까요. 물론 아이의 말이 제 생각을 아예 바꾸는 건 아닙니다. 저도 고집이라면 만만치 않거든요. 그저 레이첼이 제 일에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죠.

딸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다른 문화를 참조하며 작업하는 편이에요. 반면 레이첼은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타인의 것을 동의 없이 도용하는 것) 현상에 관심이 많아 혹시라도 그렇게 보일 위험이 있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죠. 여행 중에 제가 그 지역의 의상을 구입 해 그 속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찾으려고 하면 딸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런웨이에 기모노를 내놓으면 그건 문화적 전유야. 엄마가 디올의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다른 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아프리카나 페루의 전통 의상과 기모노를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저와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이죠.

딸의 그런 이야기에 동의하나요? 꼭 그렇지는 않지만 딸과의 시각 차이 덕분에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게 된 건 사실입니다. 패션업계에서 분명히 토론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지금은 다문화 시대니까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하죠.

여성들과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가 되려면 여러 문화를 포용하고 다양한 여성과 공감해야 해요. 저는 이탈리아인이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인이고, 낸 골딘은 미국인이죠. 자라 온 환경과 그로부터 얻은 경험은 사고방식에 분명한 영향을 미쳐요. 그렇게 다른 성향을 가진 여성 아티스트들이 여성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을 위한 회사’라는 아이디어와 목표는 제게 아주 중요하거든요.

2017 F/W 컬렉션에 타로 카드 모티프가 등장한 걸 보면, 크리스찬 디올처럼 당신도 타로점을 좋아하는 것 같네요. 다들 마법을 좋아하지 않나요? 제게는 가벼운 꿈 같은 것이랄까요. 물론 매일 타로점을 보지는 않지만 저는 종종 그 상징에 매혹됩니다. 제일 좋아하는 카드는 ‘죽음’인데, 키워드와 반대로 부활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카드죠.

디올의 첫 여성 수석 디자이너가 되기 전, 발렌티노에서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와 함께 7년간 작업했죠. 남성과 여성의 창의성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다고 생각하나요? 창의성은 성별을 가리지 않아요. 그러나 제가 느낀 차이가 있다면 남성은 여성을 이상화하는 반면 여성은 상상 속 여성을 투사하지 않고 현실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발렌티노에서 만들어냈던 작업물에 비해 당신의 디올 컬렉션에서는 로맨틱한 무드가 덜 느껴져요. 친구인 알버 엘바즈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나네요. “당신의 첫 번째 쇼를 봤을 때는 ‘마리아 그라치아가 전쟁에 나가는 사람 같군’ 하고 생각했고, 두 번째 기성복 컬렉션을 보고 나서는 ‘마리아 그라치아가 여전히 전쟁 중이군’ 하고 생각했으며, 프리폴 시즌에는 ‘마리아 그라치아가 다시 꿈을 꾸겠다고 결심한 모양이군’ 하고 생각했다.” 알버의 감상 덕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느껴요. 제 컬렉션은 강하면서도 섬세합니다. 여성이 존재하는 방식과 같죠. 이게 바로 제가 정의하는 로맨틱함입니다. 발렌티노가 추구하던 로맨틱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에요. 사람들은 종종 제게서 강인함을 보거나 기대하지만, 저는 스스로 섬세하다고 생각하고 믿는 대로 표현할 뿐이에요. 그들의 말 때문에 제가 강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Dior 70 Years Of Desire

1966 년 3월 <보그>에 실린 사진. 사진작가 기 부르댕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모델 니콜 드 라 마르주를 ‘우신예찬(Éloge de la Folie)’이라는 표제로 촬영했다. 스팽글 자수로 장식한 디올 드레스는 마크 보앙이 디자인한 것이다. ©ESTATE OF GUY BOURDIN

프랑스의 유명 언론인인 프랑수아즈 지루는 ‘1947년 2월 12일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크리스찬 디올이 바로 다음 날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그의 말처럼 42세의 디올이 자신의 첫 컬렉션에서 만들어낸 건 옷을 넘어 새로운 역사에 가까웠다. 그는 뉴 룩(New Look)이라 불리는 실루엣을 창조해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패션 왕국을 세웠다. 당시 그의 명성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인 드골 장군에 비할 정도였다. 뉴욕에서 카라카스까지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진정한 오트 쿠튀르를 선보이던 그는 짧은 시간에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1957년 어느 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위대한 패션 하우스의 왕좌는 이제 디올 역사상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에게 돌아갔다. 크리스찬 디올의 통념을 뒤집는 천재성, 이브 생 로랑의 아방가르드, 대중에게 잊힌 불운의 디자이너 마크 보앙의 초정밀적 디자인, 지안프랑코 페레의 화려함, 존 갈리아노의 극적인 판타지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식어 스스로 떠났다고 알려진 라프시몬스의 감각적인 미니멀리즘까지. 그녀는 이전의 디자이너들이 내부 분열과 교체를 거듭하며 쌓아 올린 전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합하고 계승해 브랜드를 지킨다. 그들이 남긴 모든 것은 디올의 유산인 동시에 그녀에게 영감을 선사할 위대한 도서관과도 같다.

패션 역사 큐레이터 플로랑스 뮐레와 올리비에 가베의 기획으로 탄생한 <크리스찬 디올: 꿈의 디자이너(Christian Dior: Couturier du Rève)> 전시는 이 거대한 70년 서사에 바치는 기념비다. 우리는 이곳에서 디올의 정체성을 확립한 디자이너들의 학구적 섬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전시에 앞서 큐레이터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특수성과 과감한 시도로 그들이 패션계에 남긴 거대한 유산을 회상해보기 바란다.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연 크리스찬 디올.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여성들이 즐거움과 우아함, 아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ASOCIATION WILY MAYWALD/ADAG

크리스찬 디올 1947~1957

CHARACTER “20 대의 크리스찬 디올은 종종 피카소와 브라크, 미로, 달리, 콜더의 작품이 전시된 아트 갤러리로 향했습니다. 그는 달리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모던 스타일이라는 공통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죠. 두 사람은 함께 벼룩시장을 구경하거나 벨에포크 시기의 보물을 찾아 나서곤 했어요. 크리스찬 디올은 그야말로 로맨틱 가이였습니다. 그는 과거를 탐구하고 그 위에 현대성을 입혀 새로운 결과물로 선보이는 걸 좋아했죠. 단숨에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화려한 모임보다는 소수의 친한 친구들과 지내는 걸 훨씬 즐겼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위상에 삶이 짓눌리는 걸 싫어했어요. 본인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그 역시도 위대한 디자이너의 역할을 연기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 이후로 훨씬 편해졌다는 자서전 <디올과 나(Christian Dior et Moi)>의 글귀가 이를 뒷받침하죠.”

STYLE “ 첫 컬렉션을 디자인할 당시 패션계는 1940년대의 남성적인 실루엣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넓은 어깨와 밋밋한 힙 라인, 짧고 좁은 스커트가 주를 이뤘죠. 그때 등장한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은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샨퉁(shantung)이라는 실크 패브릭으로 만든 바 수트(Bar Suit) 재킷은 부드러운 어깨 라인과 자연스러운 형태를 지녔어요. 그는 여성의 몸을 굴곡진 형태로 인식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패브릭이 아주 풍성하게 이용됐는데, 이건 프랑스의 전후 재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해요. 이러한 행보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배급 카드를 사용하던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사람들은새로운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패러슈트 패브릭을 사고 침대 커버와 드레이프를 이용해 자신만의 뉴 룩 스커트를 만들어 입었죠. 디올이 시도한 스타일은 순식간에 유행이 돼 번져나갔습니다. 모두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태어난 새로운 것을 환영했어요.”

LEGACY “ 그는 곡선적인 실루엣을 강조했어요.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패브릭은 걸을 때마다 형태가 바뀌었죠. 세상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패션 역사의 혁신이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를 휩쓸었던 여성성이 현대적으로 되살아난 것 같았으니까요. 그는 여성이 가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아주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이브 생 로랑 1957~1960

CHARACTER “ 이브 생 로랑은 1955년 크리스찬 디올에게 고용되었고, 디올 사후에 그 자리를 물려받아 21세라는 어린 나이에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호화스러운 분위기에 갇히지 않았어요. 그 대신 거리의 움직임과 생제르맹데프레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들, 지하 공연장이나 나이트클럽, 재즈를 관찰했죠. 프랑수아즈 사강, 쥘리에트 그레코와 같은 동시대 젊은이의 우상들이 그의 뮤즈가 되었습니다.”

STYLE “ 이브 생 로랑의 최초 컬렉션인 트라페즈(Trapèze, 1958)는 옷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젊은 여성들의 요구를 담아냈습니다. 가슴선을 따라 허리를 조이던 솔기가 느슨해졌고, 드레스도 한결 편안하게 바뀌었어요. 무슈 디올이 선보였던 H, Y, A 실루엣에 대한 오마주로 삼각형 모양의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또한 자유로운 움직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죠.”

LEGACY “ 비트닉(Beatnik) 컬렉션에선 그가 기존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검은색 모노크롬 가죽을 사용했어요. 가죽과 스웨이드는 당시 스포츠 의류에만 쓰이고 오트 쿠튀르에는 쓰이지 않던 소재죠. 이브 생 로랑은 <위험한 질주(The Wild One)>(1953)에 등장하는 미국의 폭주족과 프랑스의 블루종 누아르족 그리고 교외의 반항아들로부터 영감을 받았어요. 패션계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디올의 고객들이 그런 옷을 입는다는 건 그때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지금 보면 한없이 강렬하고 스타일리시한 이 컬렉션 때문에 그는 결국 직장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패션계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남았죠. 검은색 가죽 재킷은 이제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아이템이 되었으니까요.”

 

마크 보앙 1960~1989

CHARACTER “ 전임자와 다른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마크 보앙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주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는 우아함과 고상함의 수호 자를 자처했습니다.”

STYLE “ 커팅의 귀재로 불리던 마크 보앙은 밀리미터 단위까지 정확성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어요. 그는 실루엣을 재정비했습니다. 가슴둘레를 좁히고 어깨와 팔 부분을 조금씩 줄였죠. 허리는 잘록해 보이면서도 너무 조이지 않도록 변형했고요. 그는 유니섹스와 1960년대 트위기 스타일을 환기했습니다. 과장 대신 현실적인 방향을 선택한 거죠. 1980년대에 마크 보앙은 전문직 여성들의 스커트 정장을 재해석하기도 했어요. 어깨는 넓어졌지만 균형 잡힌 디자인만큼은 여전했습니다.”

LEGACY “ 캐롤라인 드 모나코(그레이스 켈리의 딸이자 모나코의 공주)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잡지 표지에 등장할 때마다 마크 보앙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패션의 역사에 크게 기록되지는 못했지만 디올의 고객들은 그를 추앙했습니다. 마크 보앙의 옷을 입으면 멋져 보인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죠. 특별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현대적인 감각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고 느낀 겁니다. 과하지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았어요. 마크 보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고객에게 필요한 것을 늘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입기 편하고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우수하다는 점은 오늘날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작업과 공통된 특징이기도 합니다.”

 

지안프랑코 페레 1989~1996

CHARACTER “ 그가 수석 디자이너로 지명됐을 때 다들 놀랐습니다. 국수주의 언론은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가 프랑스 브랜드의 수장이 된다는 사실에 의아해 했죠. 패션이 곧 프랑스와 동의어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까요. 지안프랑코 페레는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관능적인 오페라 스타일을 추구하는 동시에 기하학적이고 명료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추종했어요.”

STYLE “ 호화로움 그 자체였죠. 풍부한 형태와 입체감, 주름과 같은 요소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놀라운 광기 속에 건축적 감각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요? 그의 패션은 마치 향수와 같아서 강렬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LEGACY “ 전형적인 1980년대 패션을 선보였던 페레는 수하의 디자이너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기성복이 점차 자리 잡으면서 ‘작은 손(petite main)이라 불리던 장인들의 일자리도 사라지던 시기였어요. 이런 우울한 흐름과 달리 그는 모자 장인과 플로리스트, 자수공예가 등을 고용해 자신의 의상을 완성했습니다. 예술적인 장식에 언론과 고객의 갈채가쏟아졌죠.”

 

존 갈리아노 1996~2011

CHARACTER “ 존 갈리아노는 파티 중독자였습니다. 1980년대의 클럽에선 늘 친구인 리 보워리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지독한 괴짜로도 잘 알려진 이 퍼포먼스 아티스트는 런던 공연 예술계의 악동으로 불리던 싱어송라이터 보이 조지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외출해 방종을 즐겼어요. 갈리아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패션에 대해서도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STYLE “ 그의 패션은 충격적인 시각적 병치와 대조적인 영감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사이 컬렉션은 벨에포크 실루엣과 S자형 코르셋을 마사이 예술과 혼합해 창조해낸 것이었죠. 영감의 원천이 워낙 다양해서 그 기원이 어디인지를 결국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LEGACY “ 존 갈리아노는 극단적인 생을 살다 비극적 종말을 맞은 여성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서 추문을 낳기도 했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이나 독약을 눈에 넣어 눈동자를 이국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마르케사 카사티의 일화가 대표적인 예죠. 갈리아노는 내면의 진실이 옷을 통해 밖으로 터져나오며 표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이러한 여성들은 불온하기 때문에 매혹적인 존재였죠.”

 

라프 시몬스 2012~2015

CHARACTER “ 라프 시몬스는 아주 신중하고 은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제품 디자이너였는데 1950년대 모더니즘, 특히 그가 수집하는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았죠. 그는 순수한 형태를 좋아했습니다.”

STYLE “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 섬세함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형태를 보는 감각이 뛰어나 입체감과 정교한 구조, 놀라운 복잡성만으로 심플한 효과를 만들어냈어요. 보디스와 그 위에 장식된 선들을 이용해 18세기 파니에 드레스의 구조를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디자인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해 패턴의 절개를 피했고, 의상의 표면은 그래픽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죠.”

LEGACY “ 라프 시몬스는 혁신에 가까운 자수 예술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미스 디올(Miss Dior) 드레스에 대한 찬사의 의미로, 수천 개의 작은 실크 수공예 꽃잎을 이용한 그러데이션 패턴을 만들기도 했죠. 미니멀리즘에서 나올 법한 표현 방식도, 차갑거나 수수한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색채 배합은 아주 섬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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