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der Free – 문소리

그레이 드레스 파비아나 필리피(Fabiana Filippi).

문소리의 고민

“사회 여러 층에서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줄을 잇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발전적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겠나. 오래된 문제라 하루아침에 달라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폭로가 피해자에게 최선의 자기표현 수단이며 극복 방법인 것은 분명하다. 좋지 않은 일을 겪고도 지금껏 입밖에 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내 털어놓았으면 한다.” 얼마 전 ‘미래의 여성지도자상’을 받은 배우 문소리는 수상 소감에서 영화계 성폭력을 비롯한 젠더 이슈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고민 중이라 밝혔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영화인들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제작사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와 임순례 감독은 영화판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든든’이라는 성폭력 상담 창구의 대표를 맡아 성폭력 피해 영화인과 함께 고민하고 업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배우로 20년 가까이 살아오며 이 업계가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점은 여성 영화인뿐만 아니라 남성 영화인도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변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같은 여성으로 화가 나기도 하고 지금껏 방관한 건 아닌가 하는 자기반성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긴 시간을 배우로 살아왔기에 페미니즘이나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갖고 공부할 의지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영화와 함께해온 삶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나를 성장하게 해주었으며, 즐거움을 주었다. 배우로 살아오며 연기를 통해 경제적 보상과 성취감을 얻은 것 외에도 삶에 관해 여러 가지를 배웠고, 그러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도 했다. 내 인생은 연기 활동으로 조금씩 성장해온 셈이다. 어쩌면 그저 운명일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배우의 세계에 발 디딘 초반에는 지금만큼의 부담감이나 책임감은 없었지만 오히려 여성이라 느끼는 두려움이 컸다. “두려움을 안고 일하면 에너지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이 세계에 막 진입한 배우들이 두려움으로 소진하는 에너지를 오롯이 연기에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찌어찌 지금껏 잘 헤쳐왔지만 그렇게 끝낼 문제가 아니다. 이제 중견 영화인의 자녀들이 부모의 뒤를 이어 영화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딸을 가진 엄마로 젠더에 대한 고민의 폭을 나와 내 주변인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 고민이 더 나은 앞날을 위해 다음 세대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한두 사람의 전사 혹은 혁명가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변화란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쇼 비즈니스 업계는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속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 업계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서류로 업무상의 전달을 하고, 퇴근하면 각자의 삶이 있는 직종과는 다르다. 촬영이 끝나고 주변의 누군가와 술을 한잔 할 수도 있고 작업실에서 만나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범죄 행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북유럽에서는 영화를 제작할 때 참여하는 여성 영화인 수를 쿼터제로 보장하고 영화마다 젠더 감수성 등급을 매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유럽에 비해 젠더 이슈를 둘러싼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 그나마 희망적인 점은 유럽에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독일의 페미니스트가 쓴 책을 읽었는데 30년 전의 독일 사회는 젠더적 관점에서 상상 이상으로 구시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독일에 살고 있는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나라는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독일도 지금의 변화를 이룬 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물론 사회가 쉽게 변하진 않겠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의지가 모이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열심히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할 때다. 그러다 보면 내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훨씬 나아져 있겠지.”

네이비 수트 파비아나 필리피(Fabiana Filip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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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가 번지는 세상

티셔츠 프리마돈나(Fleamadonna), 샤 톱 와이씨에이치(YCH), 장갑 발렌시아가(Balenciaga).

오직 위스키와 담배만을 사랑하는 ‘미소’는 담뱃값이 2천원 오르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가사도우미로 살아간다. 이 매력적인 한 줄의 시놉시스만으로 좋은 소문이 난 영화 <소공녀>는 그간 상영할 때마다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3월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다소 판타지적인 미소라는 캐릭터와 그를 둘러싼 이 사회의 현실적인 단면은 좋은 균형을 이루며 깊은 공감을 자아내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즈음 관객은 어딘가에서 사랑하는 작은 것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 미소를 향해 빙긋이 웃음 짓게 된다. 미소로 분한 이솜과 감독 전고운은 ‘위로’처럼 거창한 단어를 쓰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꼭 미소처럼 말했다.

원피스와 니트 톱 모두 준지(Juun.J), 슈즈와 니삭스 모두 니나 리치(Nina Ricci), 이어링 엠주(mzuu).
원피스 벨앤누보(Bell & Nouveau), 헤어핀 사이먼 로샤 바이 분더샵(Simone Rocha by BoonTheShop).

이솜

영화에서 이솜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인가? 볼 때마다 다른데 마지막에 미소의 모습이 언뜻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면 내 캐릭터지만 그립다, 미소가.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촬영하는 내내 혼자 다녔다고 들었다. 현장에 혼자 다녀보고 혼자 스케줄을 관리하는 것을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 회사나 매니저에게 너무 익숙해지는 것 같아서. 그러기에 딱 좋은 작품이 <소공녀>였다. 쉽진 않았다. 스태프들과 가까워지면서 현장 분위기를 너무 잘 알게 된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했다. 캐릭터나 장면에만 몰입해 있어야 할 때에도 그 외의 것들이 보이니까. 하지만 추운 날씨에 대기할 장소가 없어서 스태프들과 같이 대기하기도 하고 내 차에 스태프들을 태워서 현장을 이동하거나 장비를 옮겨주거나 하는 것들이 재미있었다.(웃음) 옷도 캐릭터 의상을 입고 퇴근해서 그대로 입고 출근했다. 혼자 다닐 만하던데?

전고운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무조건 함께 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봤다. 무엇이 와닿았나? 일단은 그 전에 <소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전작인 <범죄의 여왕>이 끝날 때 나오는 쿠키 영상을 보기도 했다. ‘위스키와 담배를 좋아하는 30대 여자’라는 캐릭터 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흥미로웠다. 누가 할지 궁금했는데 시나리오가 내게 들어왔다. 일단 ‘광화문 시네마’라는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보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미소는 굉장히 드문, 좋은 캐릭터다. 보통은 술, 담배를 하는 캐릭터가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내겐 그런 것들이 유니크하게 다가왔고 감독님의 스타일을 아니까 머릿속에 떠올린 것들이 좋은 작용을 한 것 같다.

전고운 감독의 연출은 어떤 방식인가? 워낙 짜인 대로 하는 것을 안 좋아하셔서 배우들의 이야기를 잘 받아들여 주셨고 그런 면에서 서로 호흡이 좋았다. 등장하는 캐릭터가 많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대본에 있는 대로 하되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으면 감독님에게 의견을 냈고 그렇게 자연스러워지도록 감독님이 많이 유도했다. 그 덕분에 캐릭터들의 사이가 더 끈끈해졌다.

배우 이솜의 필모그래피에 오랫동안 기억될 이름이 아닐까 싶다. 미소를 연기하는 동안 미소가 이솜의 인생에 끼친 영향이 있나? 당시에는 미소와 아주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미소를 알고나서는 좀 더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의 이솜은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느니 집을 포기하겠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나? 사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나는 집이 너무 좋거든.(웃음) 그런데 생각을 해봤다. 정말 오로지 자기 인생을 위해서라면 집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소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삶을 꾸리려 노력한다. 미소처럼 단출하게 살 수 있다면 이솜의 삶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질까? 어렵다. 나도 미소처럼 민폐 끼치는 걸 꺼리고 친구들을 정말 좋아한다. 친구들이 재워달라고 하면 미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재워줄 수 있다. 내 삶은 맛있는 음식, 산책, 영화, 모닝커피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안재홍과의 호흡은 어땠나? 재홍 오빠는 정말 같이 하고 싶은 상대 배우 일 순위였다. 잘 몰랐을 때 시상식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재밌고 인간적이어서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연기할 때도 역시 그랬다. 무엇보다 ‘광화문 시네마’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제작사와의 의리를 지키는 모습과 정말 좋아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것이 매우 고마웠다. 상대 배우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난히 몸을 많이 쓴 촬영이 아닌가 싶다. 큰 짐을 들고 다니며 가사도우미의 일을 하고 추위에 떨어야 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체력이 좋아서 그런 것은 괜찮았는데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것이 힘들었다. 거의 한 신에 반 갑 이상은 피웠으니까. 게다가 담배는 미소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여서 감독님이 맛있게 피워야 한다고 집요하게 요구하셨다. 어지러워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고, 안 그래도 짐이 많은데 의상을 잔뜩 겹쳐 입어야 하는 것이 버겁기도 했다. 촬영 당시 내 별명이 덩치 큰 해그리드였다. 하하.

그래도 좋은 기억이 많이 남은 현장이었을 것 같다. 애정이 정말 큰 작품이었다. 현장에서 매 회차 폴라로이드를 직접 찍었는데 현장 스틸 기사님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열정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년에 그 사진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었다.

그런 열정이 모여 만든 <소공녀>를 어떤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나? 작은 것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싶은 분들. 특히 청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을 것이다.

오프화이트(Off-White), 팬츠 로우클래식(Low Classic),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원피스 블루마린(Blumarine), 트렌치코트 완다 나일론 바이 매치스패션닷컴(Wanda Nylon by matchesfashion.com), 슈즈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전고운 감독

<소공녀>가 스웨덴 예테보리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다녀왔단 소식을 들었다. 분위기가 어땠나? 해외 영화제는 처음 가봤는데 규모가 크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부산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동네의 작고 귀여운 극장에서 진행됐는데 관객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놀랐다. 극장이 1백 년이나 된 건물이라 극장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 극장에서 상영하기가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운이 좋았다. 나는 내 영화를 보는 것을 진짜 싫어하는데 외국인들 반응이 궁금해서 같이 봤다. 잘 웃고 재미있게 보셔서 신기했다. ‘한국 문화 코드 때문에 웃긴 게 많은데 왜 웃지? 이렇게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웃음)’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다.

미소를 보면서 <바그다드 카페>의 ‘야스민’이 떠올랐다. 자신의 상황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따듯한 사람. 서울이 워낙 과열된 도시니까 ‘미소’ 같은 인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착한 사람. 내가 생각하는 착함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선 사람이 멋이 있어야 호감이 가니까 멋에 대해 생각했고, 멋이 있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 만들다 보니 미소가 나왔다. 필요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이솜을 미소로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저예산 영화라 배우에게 페이를 충분히 줄 수가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솜이 씨에게 내가 얻을 것은 분명히 있었다. 인지도가 적당하고 모델 출신이라 예쁘기도 한데 연기는 아직 안 보여준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을 <소공녀>에서 보여준다면 서로 좋은 작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솜이 씨를 두고 외모와 내면 그리고 내가 실질적으로 줄 수 있는 것까지 아주 다양하게 생각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미소가 30대 중·후반이었다고 들었다. 성인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좋고 재미있는 영화. 그래서 주름이 잘 보이고 노화가 보이는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아마 그랬다면 영화의 느낌이 아예 달랐을 것이고 지금만큼의 호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쉽지가 않더라.

의도와는 달랐더라도 완벽히 다른 매력을 가진 미소가 나왔다. 그래서 아쉽지 않다. 영화라는 작업이 정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솜 배우를 포함해 의상 등 모든 스태프가 그렇게 미소를 만드는 데 더 좋거나 덜 좋은 문제를 떠나 캐릭터가 처음과는 다르게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좋았다.

미소는 왜 하필 위스키를 좋아할까? 제일 가까운 이유는 내가 위스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른 술은 못 마신다. 몸에서 안 받거든. 외적인 의미를 만들자면 사치스러운 양주의 이미지를 가져가고 싶었다. 기술적인 이유로 가난한 나라에서는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을 보면 전쟁이 났을 때 결국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게 술과 담배라는 게 인상 깊게 남았다. 인간에게 술, 담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다. 어딘가에 중독되어 사는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굉장히 현실적인 영화다. 광화문 시네마 특유의 과장된 느낌이 빠져 있는 것도 좋았다. 낭만적인 캐릭터와 현실의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지나치게 궁색해 보이지 않도록. 그 고민이 가장 컸다. 미소는 결국 솜이 씨가 하는 역할이니 솜이 씨에게 매달렸던 것 같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둘이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고 대화도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다행히 성향이 잘 맞았다. 갑자기 친해진 친구처럼. 그런 친구 믿으면 안 되는데.(웃음) 현장에서는 배우들이 머리로 분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경직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솜이 씨와 시간을 많이 보냈기 때문에 미소가 판타지적인 캐릭터인데도 사람 같아 보인 것 같다. 솜이 씨가 다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상황이 짠하다고 느껴질 때의 필연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구성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배우들의 힘이기도 하다. 웃기게 해석될 여지도 있는 장면에서도 관객 대부분이 우는 걸 봤다. 연출 의도와 달랐는데 오히려 더 좋게 나온 부분이 있었나? 솔직히 내 의도보다 모든 게 못하다. 영화 가편집본을 보고 정말 우울했다. 누구나 이상형이 있지 않나. 나는 미카엘 하네케를 생각했다.(웃음) 그렇게 연출력이 위대한 감독들의 작품을 보다가 내 첫 작품을 보니 얼마나 가소롭던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왜 좀 더 가지 않았을까 자책했다.

그렇게 느끼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거다. 내가 느껴야 한다. ‘와, 정말 신선하다, 이 영화!’ 사실 내가 모든 면에서 만족의 기준이 높은 편이긴 한데 다행인 건 이 영화가 꼴 보기 싫지는 않다는 점이다. ‘좀 아쉽지만 그래도 귀여워’ 이런 느낌이다. 이게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칭찬이다.

늘 직접적인 이유와 해명이 필요한 이 사회에서 미소 같은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대놓고 위로를 하려는 영화가 아닌데도. 내가 항상 위로를 느낄 때는 영화든 사람이든 공감을 될 때였던 것 같다. 아무도 안 만들어줄 것 같았던 이야기를 만들어주면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됐다. <소공녀>도 만들면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일으켜 작은 위로를 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몇 명에게라도 전달이 되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나? 사실 내 친구들 보라고 만들었다. 친구들이 다 미소처럼 가난하기 때문에 ‘야, 우리 그냥 살자!’라는 의미로 만들었다. 내 친구들 같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을까?

전고운 셔츠와 스커트 모두 막스마라(MaxMara), 이어링 벨앤누보(Bell & Nouveau).
이솜 블라우스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원피스 캘빈 클라인 바이 무이(Calvin Klein by MUE), 초커 벨앤누보(Bell & Nouveau),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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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가 피어나는 시간

트로피컬 패턴 원숄더 원피스 블리다(VLEEDA).

BEAUTY NOTE

건강한 피부를 표현하고 싶을 때는 자신의 피부 톤과 같은 컬러를 선택해서 사용한다. 파우더리하게 표현하면 메이크업이 오래 유지된다. 마몽드 브라이트닝 커버 파우더 쿠션 23C호 내추럴 피치 사용. 피부가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몽드 크리미 틴트 스퀴즈 립 7호 베러 댄 코랄을 사용하고 립은 자연스러운 컬러로 표현한다. 모두 마몽드 제품.

플라워 패턴 블라우스, 플리츠스커트 모두 오즈세컨(O’2nd).
오프숄더 슬리브리스 톱 블리다(VLEEDA).

BEAUTY NOTE

마몽드 크리미 틴트 스퀴즈 립 10호 레트로 로즈. MLBB 컬러로 안쪽부터 스머지해서 표현한다. 피부는 마몽드 브라이트닝 커버 파우더 쿠션 23C호 내추럴 피치 사용. 모두 마몽드 제품.

블루 블루종, 시퀸 스커트 모두 코치1941(Coach 1941), 아이보리 스퀘어 백 ‘찰리’ 코치(Coach), 골드 후프 이어링 밀튼아티카(Milton Attica).
와인색 톱, 슬리브리스 원피스 모두 코치1941(Coach 1941), 메탈릭한 느낌의 스퀘어 백 ‘파커’ 코치(Coach).
화이트 롱 원피스 올세인츠(All Saints), 브라운 스퀘어 백 ‘로그’ 코치(Coach).

연일 이어지는 강추위에도 익숙해질 무렵 뜨거운 아프리카 세이셸에서 사진 몇 장이 도착했다. 짙은 초록색의 투명한 바다 앞에 선 배우 박신혜는 여전히 산뜻해 보였고 전보다 더 그윽해진 눈빛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난해 영화 <침묵>에서 변호사 ‘최희정’으로 분해 단단한 연기를 선보인 그녀는 늘 그랬듯 자신을 꼼꼼히 돌보며, 이제껏 생각해본 적 없는 책임과 무게의 나이로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다.

네이비 반소매 톱, 플라워 패턴 플리츠스커트 모두 오즈세컨(O’2nd), 이어링 겟미블링(Get Me Bling).

세이셸의 첫인상이 어떤가요? 천천히 돌아가는 길들이 인상 깊었어요. 마치 쉬어 가라고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만든 것 같아요. 유턴하듯이 산을 돌아서 가는 길에 멀미가 나기도 했지만 숲을 끝없이 달리는 느낌이 들어 행복했어요.

도시와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자연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데, 박신혜는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자연은 속일 수가 없으니까요. 세련된 건 만들어서 갖출 수 있는 반면 자연스러운 건 꾸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을 줄 알고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하는, 어떻게 보면 과감한 용기가 필요한 거니까 자연과 잘 어울린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세이셸 같은 휴양지와 도시 중에 어떤 여행지를 선호해요? 굳이 나눈다면 휴양지인 것 같아요. 도시를 가더라도 시간을 쪼개서 돌아다니기보다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한가하게 여행을 하는 편이에요. 전에는 계획을 꼼꼼히 짜서 미술관에도 가고 공원에도 가고 그랬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오히려 남는 게 없더라고요.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게 저한테는 더 잘 맞는 여행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휴양지는 최고죠.

스태프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옆에서 지켜보기에 조금 부러울 정도였죠. 그런 인복이 없었다면 이 직업을 계속 해나갈 수가 없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끼가 많아서 이 일을 해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제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그 마음을 대신 표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번 여행을 함께 하는 스태프 중에 커플이 있었죠. 내내 부럽다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요. 세이셸이 커플의 휴양지, 유명한 신혼여행지라서 더욱 그랬을 것 같은데요. 제게 무척 소중한 헤어 선생님의 남편 분이 함께 왔어요. 실제로 마주치고 인사한 적이 많지 않아서 둘의 모습이 더 예뻐 보였던 것 같아요. 한 여자가 사랑받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까 정말 부러웠어요.

박신혜가 꿈꾸는 사랑은 어떤 모습이에요?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서로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아는. 배우라는 직업이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른, 말을 한다 해도 이해받기 힘든 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힘든 생활 속에서 작은 것 하나로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고 서로의 생활에서 작지만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해줄 수 있는 사람. 저도 상대방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요.

영화 <침묵> 이후 지금까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무엇에 가장 빠져 있나요? 고양이요. 물론 강아지도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고양이는 강아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제 기분이 울적해 보이면 가만히 옆에 와서 기대요. 그런 게 무척 신기해요.

고양이와 보내는 시간 말고 쉬는 동안 가장 많이 한 건 뭐였어요?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물론 여행의 절반 이상이 휴양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죠. 아버지가 올해 환갑이셔서 다 같이 환갑을 축하하는 여행도 다녀왔고, 서핑에도 즐겁게 빠져 있었어요.

반소매 프린트 톱, 블루 니트 스커트 모두 오즈세컨(O’2nd), 실버 이어링 밀튼아티카(Milton Attica).

서핑처럼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나 봐요. 에너지를 자꾸만 분산시켜줘야 더 끌어올려지는 것 같아요. 몸을 안 쓸수록 무거워지고 답답해지더라고요. 어떤 사람이든 움직여야 건강해지고 정신도 활발해지면서 엔도르핀도 많이 솟는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을 보면 음악을 듣는 것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이런 휴양지에 오면 물놀이를 열심히 하다가도 하루 종일 침대 안에서 나오지 않을 때도 있어요. 음악 듣고 책 보고 웹 서핑도 잠깐 하고 그냥 망상에 빠져 멍때리기도 하고.

최근에 가장 꽂힌 음악이 있다면요? 딘의 ‘인스타그램’. 현실을 콕 집어낸 가사가 인상적이에요. 그리고 김동률의 ‘답장’. 어릴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사랑 노래나 사람에 대한 메시지들이 가슴 한편에 먹먹하게 들어오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아주 좋아요.

노래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배우들이 OST도 많이 부르죠. 언젠가 OST를 부르는 박신혜를 볼 수 있을까요? 드라마나 영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참여할 수 있다면 좋은 것 같아요. 팬미팅 때 팬들한테 보여드릴 콘텐츠가 많아지는 거니까.

얼마 전에 인맥이 넓은 연예인으로 어느 언론사에서 뽑기도 했던데요. 많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나요? 데뷔한 지 15년이 됐으니 작품으로 만난 분들만 해도 1백 명이 넘어요. 계속 일을 한다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죠. 서로 마음 상할 일은 최대한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늘 좋은 기억만 갖고 현장을 마무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먼저 연락하는 성격이 못 돼서 자주 보는 사람들은 한정적이에요. 언제 만나더라도 반갑게 인사하는, 단지 그 정도인데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많은 분이 ‘박신혜는 이 사람 저 사람 참 많이 아는구나’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가 흔히 아는 남사친들도 있잖아요. 이홍기 씨도 그렇고 용준형 씨도 그렇고. 현장에서 봤을 때 좋았던 사람들은 오랜만에 봐도 그때의 기억이 그대로 떠올라요. 홍기랑 제가 2009년에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에서 만났거든요.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쭉 가지고 가는 거예요.

상대가 유명해지거나 활동이 줄어들면 어쩔 수 없는 갭이 생겨 대화의 주제도 줄어들고, 그러다 보면 연락이 뜸하게 되잖아요. 대부분 인간관계가 그런 면이 있고 관계를 유지해나가기 힘들어지는 경우도 많죠. 저는 사람에게 되도록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좋으면 그냥 좋은 거. 누군가 “그 친구 요즘 소문이 안 좋던데 괜찮아?”라고 했을 때 나한테는 그러지 않고 나와 같이 있었을 때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고 내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어떤 말이든 안 믿는 편이에요.

요즘 가장 친한 친구들과는 주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나요?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 차기작을 궁금해해요. 동갑내기 여자 친구들하고 언제 어떤 작품을 할지 얘기하다 보면 각자의 취향이 드러나요. 사소하게는 좋아하는 계절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너랑 나랑 겹칠 일은 없겠다, 다행이다”라면서 농담도 주고받기도 하고.

어떤 계절을 좋아해요? 여름에 약간 힘들어하는 타입이에요. 더운 것을 잘 못 견뎌서. 물론 추운 것도 잘 못 참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름보다는 겨울이 나은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이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또 풀어내야 하잖아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도 볼 때마다 늘 밝아요. SNS가 가장 어려워요. 팬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긴 하지만 사생활을 드러내야 할 때가 많거든요. 그런 눈들을 피하기 위해 여행을 가기 시작했는데 여행 가서도 나를 지켜보는 많은 눈들이 존재하니까 약간 힘들어요. 하지만 개의치 않으려고 노력해요. SNS 속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요. 서핑을 할 때도 알아보는 분들이 많지만 그냥 내가 즐기는 걸로 견뎌내죠. 요즘은 또래 친구들, 언니 오빠들하고 작은 모임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서 얘기하고 서로 나누다 보면 스트레스가 약간 풀리는 면도 있어요.

속으로 앓기보다는 얘기를 하면서 푸는 스타일이군요. 네,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죠.

늘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가 있어요. 하지만 누구든 우울하거나 어두운 면이 있죠. 사람들은 항상 전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박신혜에게 다가오지 않나요? 그런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요. 인터뷰를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서 얘기할 때, 친절하기만 한 편이 아니라고, 저도 인간인지라 지키는 선은 최대한 지키되 아닌 것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하는 부분이 있다고 솔직히 양해를 구하는 편이에요. 무조건 참는 건 내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하는 지름길이더라고요. 그렇다고 해도 얼굴을 붉히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나요? 그래서 웃으면서 거절하는 방법을 터득했어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잖아요. 할 수 있는 것은 하되 안 되는 건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 웃으면서 거절하기.

그것이야말로 10년 넘게 쌓아온 내공이겠죠. 어느새 스물아홉이에요. 어때요? 스물여덟과 스물아홉, 또 서른은 느낌이 전부 다를 텐데요. 스스로는 아직도 스물네다섯 살 같아요. 제 또래의 직장인이나 저와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은 뭔가 어른스럽고 그 나이에 맞게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이제껏 저는 제가 어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이 같은 면이 많더라고요. 배우 박신혜로, 인간 박신혜로 더 성장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어요.

아마 서른아홉, 마흔아홉이 돼도 알 수 없을 거예요. 우리는 그 나이를 처음 사는 거잖아요. 그래도 서른을 앞두고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요?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책임감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건 느끼고 있어요. 1부터 100까지 놓고 봤을 때 전에는 10만 책임졌다면 지금은 나이에 맞게 더 많은 양을 책임져야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귀찮아하지 않고 차근차근 다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책임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드라마와 영화 찍고 나서 허리가 안 좋아졌는데 올해 완전히 회복해서 서른이 되기 전에 차기작을 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고 싶고요.

차기작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나요? 여러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요. 마음에 살포시 들어오는 작품을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어요.

박신혜의 관점으로 차기작을 고른다면 어떤 주제를 담은 작품이나 어떤 유형의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요? 드라마도 영화도 너무 자극적인 소재들이 많잖아요. 저는 제가 살고 싶은 삶을 담은, ‘그렇지, 이러면서 다 살아가는 거지’라면서 가만히 웃을 수 있는 인간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만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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