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의 한결

네온 컬러 보디수트, 시스루 스커트 모두 렉토(Recto).
화이트 톱 로우클래식(Low Classic), 데님 팬츠 시스템(System), 시스루 트렌치코트 버버리(Burberry).
화이트 톱 로우클래식(Low Classic), 데님 팬츠 시스템(System), 시스루 트렌치코트 버버리(Burberry).
브라운 톱 미우미우(Miu Miu).
핑크 실크 롱 원피스 르비에르(Leviere), 레이어드한 시스루 재킷 와이씨에이치(YCH).

‘어떤 기분이냐 하면···’ 혜리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음’ 하고 시작하는 대답의 첫머리에는 어김없이 이 수식을 썼다. 혜리는 대수롭지 않다면 대수롭지 않을 대화 안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최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사람이었다. 준비된 일장 연설이 아닌 그때그때 담백하게 꾸려낸 그녀의 대답들이 인터뷰가 끝나고도 오래 남았다. 이름난 달변가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진심이 반가웠다.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잘 받아들이고, 잘 인정하고, 잘 넘기는 것 같아요. 그게 강한 거라면 강한 건데”라고 답했다. 편견 없이 흡수하는 능력, 얽매이고 전전긍긍하기보다 숨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다음 행보에 힘을 싣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혜리는 언제부터 알았을까.

작년 이 계절에 첫 영화 <물괴>를 촬영했죠? 2017년 3월부터 6월까지 찍었어요. 딱 좋은 계절에요.

때로 특정 계절로 한 시절을 기억하기도 하죠. 혜리에게 작년 봄은 어떤 시간이었어요? 첫 영화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 시간.

영화 <물괴>는 오는 가을에 개봉하고, 영화 <뎀프시롤: 참회록> 촬영도 앞두고 있어요. 얼마 전부터 신동엽 씨와 tvN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토요일>의 고정 MC로도 출연하고 있고요. 그렇게 나열하고 보니 뭘 되게 많이 한 것 같네요.(웃음) <놀라운 토요일>은 현재 2회까지 촬영했는데 혹시 나만 재미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고정 예능도, 고정 MC도 처음이거든요. 지금까지 예능 프로그램은 딱 한 회분씩만 출연했으니까 그때마다 하루치 에너지를 쫙 쏟고 끝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매주 고정으로 출연하다 보니 에너지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매 회 차마다 힘이 넘치면 보는 분들이 지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서요. 아직 모니터를 못했는데 일단은 하던 대로, 나답게 해볼 생각이에요.

프로그램 제작진도 혜리의 에너지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길 바랄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오랜만의 예능 프로그램 촬영이어서 그런지 초반에는 어색하기도 했어요.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게 이 프로그램의 포맷인데, 정답을 맞히는 과정에서 카메라가 있다는 것도 잊고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많은 이들이 혜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길 바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평가해보면 대중에게 혜리라는 캐릭터는 주변에 있을 법한 편한 사람 같아요. 저 역시 동의하고 그게 저의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고요.

친숙함을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요? 친숙하게 소비되는 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고민도 했었어요. 대중에게 꾸준히 모습을 보여야 하는 직업을 가졌으니 어쩔 수 없는 고민이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고요. 이 고민이 크게 남아 있었다면 스스로 길을 못 찾았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 데뷔 제안을 받았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왜 망설였던 거예요? 연예인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니 정해진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봤어요. 게다가 전 시골에서 자랐으니까 ‘연예인? 내가? 으잉?’ 하고 말았지요. 걱정하고 망설였다기보다 애초에 나는 연예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연예인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거죠. 그러다 차츰 마음이 열렸어요.

어때요? 잘한 결정 같아요? 그럼요. 많은 사람에게 관심 받고 사랑받는 일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요. 제 추측이지만 아마도 세상의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 칭찬에 즐거워한다고 생각해요. 학생으로만 살았다면 이만큼 큰 사랑은 못 받았을 거예요. 물론 그 속에 칭찬만이 아니라 질책도 있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야 하고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말 들으면 신기해요. 어리고 밝은 이미지라 그렇게 안 보실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스스로도 강하다는 데 동의해요? 잘 받아들이고, 잘 인정하고, 잘 넘기는 것 같아요. 그게 강한 거라면 강한 건데.

적어도 칭찬이건 질책이건 회피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과거 어느 때에는 피하려고도 했던 것 같아요. 회피하는 게 당장은 편하니까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피하는 게 외려 더 불편하더라고요. 뒤늦게 부정적으로 돌아오는 게 더 커요. 그걸 느끼고 난 뒤로는 인정할 부분은 받아들여야 타격이 덜하다는 걸 알았어요.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모른다고 얼버무리는 식의 대응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물론 인간관계나 일상생활에 좋을 게 하나 없더라고 요.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도요.

매일 할 일을 정해 적어놓고 끝내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하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래요? 잘 잊어버려서 할 일을 적어두는데 해낸 것들을 체크하고 나서 남은 리스트를 보면 불안하죠. 요즘 숙제는 장구예요. 영화 <뎀프시롤: 참회록> 준비로 장구를 배워야 하는데 장구 연습에 차분하게 집중한다기보다는 승부욕으로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무래도 장구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잘 늘지 않으니까 거울 보면 화가나요. 화나니까 정복하고 싶고.(웃음)

블루 시스루 톱, 화이트 티셔츠 체크 스카프, 화이트 가죽 로퍼 모두 듀이듀이(Dew E Dew E), 데님 팬츠 스완진(Swan Jeans).

지금 하는 일에 대해 ‘좋은 사람들 만나서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 그 기준 하나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라고 말했어요. 명쾌한 목표 설정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왜 이 일을 계속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한 내 식의 대답이에요. 좋은 사람들이라면 회사의 매니저일 수도 있고 촬영 스태프이거나 걸스데이 멤버들과 팬일 수도 있겠죠. 이 사람들과 재미있게 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가령 주변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데 성과는 좋다고 한다면 그 성과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중에게 이 성과가 제대로 전달될까 의문이 들어요. 내가 즐겁지 않은데 즐거워 보일까요? 나라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아요. 내가 즐거워야 대중도 똑같이 느낄 거라고 봐요.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일까요. 촬영 전 혜리 씨 스태프들로부터 ‘혜리 미담’을 들었어요. 어떤 기분이냐 하면, 오늘처럼 촬영을 한다고 하면 한 컷 마치고 스태프들은 먼저 메이크업실로 들어가 있잖아요. 전 남아서 촬영 컷들을 모니터하고 다시 준비하러 한 발 늦게 들어가고요. 그 방에 들어가는 순간 열 명의 스태프가 동시에 모두 저를 봐요.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요. 이런 순간들이 일상인데 중심에 있는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말해 버린다면 스태프들은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와 함께라면 그런 의심은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신인도 아니고 데뷔 9년 차의 대답이라기엔···. 우리끼리 하는 말로 연습생 때 못된 애들은 진짜 못된 애들이라고 그러거든요. ‘오, 타고나길 못됐는데?’(웃음) 하고요. 신인 때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데 또 한편으로는 늘 긴장하기 때문에 주변을 제대로 못 살피기도 해요. 제가 착한 사람이라기보다 이제는 주변이 보이는 거죠. 적어도 함께 일할 때 내가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으면 하고요.

요즘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말은 뭐예요? 동료나 친구처럼 가까운 누군가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해줬을 때 ‘아, 재미있다! 나 또 할래!’ 같은 소감을 들을 때요. 제가 방탈출 게임을 좋아하거든요. 방탈출 카페에 친구들을 데리고 갔는데 이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본 친구가 ‘너무 재미있어, 대박!’ 이러면 저도 기분이 좋아서 ‘그치? 그치? 또 할래?’ 하게 돼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고, 같이 좋아하고, 좋은 반응을 얻으면 진짜 기분 좋아요.

방탈출 카페에 자주 가요? 방탈출 카페 사장님들 사이에서 저 아마도 유명할걸요? 새로운 카페에 가면 사장님들이 ‘아, 이제 오셨네요’ 하는 표정으로 맞아주셔서. 퀄리티가 좋은 곳들만 검색해서 찾아다니는데 좋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편차가 엄청 커요. 저한테 물어보시면 다 알려드릴게요.

또 어디를 가면 혜리를 만날 수 있죠? 일단 성수동 볼링장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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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할 수 없는

블랙 코팅 스틸 소재의 T 스퀘어 브레이슬릿, 로즈 골드 T 스퀘어 브레이슬릿, 로즈 골드 케이스와 악어가죽 스트랩의 티파니 CT60 듀얼 타임 워치 모두 티파니(Tiffany&Co.), 프레스트 플리츠가 잡힌 블랙 셔츠와 팬츠 모두 이세이 미야케 멘(Issey Miyake Men).
로즈 골드 T 스퀘어 브레이슬릿, 화이트 기요셰 다이얼과 로즈 골드 스퀘어 케이스의 티파니 이스트
웨스트 오토매틱 워치 모두 티파니(Tiffany&Co.), 울 리넨 재킷과 트라우저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Ermenegildo Zegna), 화이트 톱 꼬르넬리아니Corneliani).
화이트 솔레이 다이얼과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의 티파니 CT60 크로노그래프 워치, 화이트 골드 밴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티파니 T 투 링 모두 티파니(Tiffany&Co.), 화이트 리넨 셔츠와 코튼 팬츠 모두 로로 피아나(Loro Piana).
스털링 실버 소재의 티파니 하드웨어 볼 커프,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와 블루 악어가죽 스트랩의 티파니 CT60 크로노그래프 워치 모두 티파니(Tiffany&Co.), 스카이블루 리넨 셔츠 꼬르넬리아니(Corneliani).
스테인리스 소재의 스틸 케이스와 블랙 악어가죽 스트랩의 티파니 이스트 웨스트 오토매틱 워치, 스털링 실버 소재의 티파니 하드웨어 링크 브레이슬릿 모두 티파니(Tiffany&Co.), 차콜 그레이 프레스트 플리츠 셔츠 이세이 미야케 멘(Issey Miyake Men).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와 블루 악어가죽 스트랩의 티파니 CT60 크로노그래프 워치, 화이트 골드 밴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티파니 T 투 링 모두 티파니(Tiffany&Co.), 램스킨 레더 블루종과 블루 슬리브리스 톱 모두 에르메스(Hermes), 화이트 트라우저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블루 솔레이 다이얼과 스테인리스 스틸 브레이슬릿의 티파니 CT60 크로노그래프 워치, 화이트 골드 밴드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티파니 T 투 링 모두 티파니(Tiffany&Co.), 버튼다운 코튼 톱 에르메스(Hermes).

드라마 <미스티>의 반응이 뜨거웠다. 작품을 시작하기 전과 끝난 지금, ‘강태욱’이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은 한결같은가? 아니면 다르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나? 대본을 처음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강태욱에 대한 내 생각은 한결같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늘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경험치가 달라지니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지지 않을까? 지금 강태욱을 만났기에 이만큼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강태욱은 불완전한 인물이다. 겉보기에는 3대째 부장판사를 지내온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자신이 가진 힘을 무섭게 이용할 줄도 알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불완전하다. 그런데도 이 인물이 매력적인건 그가 가진 순수한 사랑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강태욱이 저지른 일로 사랑하는 아내가 힘든 상황에 처한 거나 다름없다는 점이나 강태욱이라는 인물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민이 컸을 것 같다. 장면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연기로 설득하고 싶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저지른 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민을 했을 테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혜란이 힘든 일을 겪는 모습을 보며 자책도 많이 했을 것이고 충분히 슬프고 힘들었겠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태욱의 감정을 담으려 했다.

그렇게 깊이 빠져 있던 태욱은 잘 떠나보냈나? 물론. 나는 작품이 끝나면 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잘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가족까지 힘들어진다. 인물에게서 빠져나오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취미가 큰 도움이 되긴 하는데,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 그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그때 같은 부서 팀장이 근무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퇴근하면 온전히 쉬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운동하고 다시 일하러 나오는 패턴을 유지했다. 집에 일을 끌고 가는 법이 없었다.

배우 입에서 ‘팀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새롭다.(웃음) 그때는 회사에서 대리가 되고 팀장이 되고 언젠가 마스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회생활의 경험이 배우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겠지. 물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연기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 해온 생각들이 연기에 묻어난다. 연기라는 게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니 다른 경험을 했다는 건 큰 자산이다.

취미가 지난 작품을 잘 떠나보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연기하지 않는 시간에는 다양한 취미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겠다. 호기심이 많다. 궁금한 게 있으면 꼭 해봐야 한다. 플라모델 조립이며 암벽등반, 도예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지만 그 모든 것이 행복을 위한 장치다. 취미 덕분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 않는다. 늘 무언가를 하며 바쁘게 지내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기분이 좋지 않을 일도 별로 없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잊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하거나 즐거운 일을 하며 잊는 거지. 사람마다 해결하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그렇게 다양한 취미로 나를 단련해온 것 같다. 자연스럽게 체득했달까.

여전히 해보지 못해 아쉬운 것이 있나? 아쉬운 건 없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계속 생길 것이다. 해보고 싶은 일에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늘 목표치를 정하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면 다른 목표가 생기기도 하고 또 다른 일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래도 늘 이루며 살아왔다. 어릴 때는 농구를 하고 싶어 늦은 밤까지 했고, 요즘은 틈나는 대로 골프를 친다.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기술을 갈고닦는 장인을 좋아하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이 들수록 무언가에 도전하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새롭고 서툰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하기도 하고. 서툰 건 창피한 일이 아니다. 가령 낯선 동네에 갔다고 치자. 그럼 불안하고 조심스럽고 뭔가 갑자기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면 점점 익숙해지고 새로운 동네에서 보내는 일상이 즐거워진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할지라도 반복하면 편해지는 거다. 도전도 마찬가지다. 해보고 싶은 일에 몰두해서 일정 궤도에 올려놓으면 더 잘 즐기게 된다. 더 자유롭게.

<미스티> 직후 예능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의외다. 4명이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지역으로 여행을 가는 내용이다. 새로운 도전이고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배우로서 가진 이미지가 좋은데 기대를 깨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대장금> 다음 작품이 코미디물인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였다. <대장금>의 ‘민정호’라는 인물은 아주 멋진 사람이었다. 촬영하면서 ‘나도 이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인물 덕분에 인기도 많이 얻었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 그와 관련한 활동을 좀 더 많이 했다면 물질적으로 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웃음)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실제로 민정호 같은 사람으로 오해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팬미팅 때 이런 말도 했다. 민정호를 존경하고 좋아하며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고, 많이 반성하고 배웠노라고. 하지만 실제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내가 연기한 인물을 사랑해주는 건 감사하지만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작품에 대한 반응의 온도와 상관없이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기라는 게 금세 변하지 않나. 이제 강태욱에 대한 사랑이 정해인에게 가지 않았나.(웃음) 여담인데, 정해인이라는 배우를 이전부터 좋아했다. 앞으로 더 좋은 배우가 될 것 같다. 난 늘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다. 한때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생각이라고 답했을 정도로.

상대방이 당황했겠다. 생각이라니. 그러더라.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어떻게 하면 빨리 잘될까,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까, 뭐 이런 고민. 플라모델을 한창 조립할 때는 심지어 오공 본드가 나을까, 순간접착제가 나을까, 뭐 이런 것까지. 젊을 때는 생각 끝에 몇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다. 분쟁 관련 뉴스를 보고 사람들은 왜 싸우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시작으로 결국 말에서 비롯되는 오해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싸우지 않으려면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는 그것만큼 세상 편한 게 없더라. 말을 하지 않으면 신기하게도 직감이 발달한다. 그 뒤로 판단이나 결정을 빨리 하게 된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오늘의 지진희는 행복한가? 행복해지기 위해 늘 뭔가를 한다. 그런데 문득 내가 늘 뭔가에 몰두하다 보면 주변 사람에게 소홀한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행복한데 내 가족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가족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한다. 서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의 상황과 마음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면 늘 더 좋은 결말을 만나게 된다. 언젠가 아내와 이런 주제로 서른 시간 가까이 대화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아내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오늘도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하자.’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한다. 그런 좋은 기운이 담긴 말이 결국은 내게 되돌아오더라. 말로, 눈빛으로. 오늘의 나는 잘 살고 있다. 행복하게.

블랙 & 그레이 컬러 나일론 나토 스트랩을 매치한 DLC 코팅 스테인리스 스틸 티파니 CT60™ 워치, 블랙 코팅 스틸 소재의 티파니 T 스퀘어 브레이슬릿 모두 티파니(Tiffany&Co.), 프레스트 플리츠 화이트 셔츠와 네이비 롤업 팬츠 모두 이세이 미야케 멘(Issey Miyake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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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폰 원피스와 턱시도 재킷 모두 니나 리치(Nina Ricci).
실크 원피스 로우 클래식(Low Classic), 모로칸 카펫 소프트 퍼레이드(Soft Parade).
화이트 블라우스 조셉(Joseph), 이어링 지넷 뉴욕(Ginett NY).
화이트 레이스 톱과 드레스 모두 니나 리치(Nina Ricci), 이어링 빈티지 헐리우드(Vintage Hollywood).
실크 원피스 델라 라나(Della Lana), 골드 이어링 지넷 뉴욕(Ginette NY), 모로칸 카펫 소프트 퍼레이드(Soft Parade).

시간이 꽤 지난 일이지만, 지난해 배우 박민영이 보여준 <7일의 왕비>의 ‘채경’은 짙고 무거운 슬픔을 품은 인물이었다. 웃기보다 울 때가 많고 행복하기보단 마음 아픈 순간이 많았던 채경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박민영은 자신의 온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너무 안쓰러운 아이’라 유독 마음이 많이 갔고, 고단했던 채경의 삶을 떠나보내기까지 시간도 많이 필요했다. 그렇게 소진한 체력과 마음이 평소대로 돌아오기까지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보통 드라마 한 편을 끝내면 일주일 정도 잠만 자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회복하는 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래도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냈다는 반증이니 한편 기분이 좋기도 했어요. 지금은 아주 좋아요. 체력이 많이 올라왔고, 마음도 단단해졌고요.” 연기를 하지 않는 시간을 채운 것 중 하나는 여행이다. “미술을 좋아해서 그림 보러 가는 여행을 좋아해요. 화가 한 명을 정해서 어느 도시의 아주 작은 미술관부터 도는 거죠. 이를테면 반 고흐라면 초기 작품이 있는 미술관부터 그가 죽기 직전 머물렀던 마을까지 여행하는 거예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여행도 좋아요. 예쁘게 플레이팅된 요리를 보는 것도 좋고요. 한국에도 아름다운 곳이 많죠. 여행지는 어디든 좋은 영감을 줘요.”

지난 작품을 잘 떠나보내고 여행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채운 후 오랜만에 화보 촬영에 나선 박민영은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로 만든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미소’를 막 만난 참이었다.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는 첫 리딩을 앞둔 그녀는 좋은 기운으로 가득 차 보였다. “화사한 봄을 기다리는 기분이에요.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설레요. 그런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저를 기분 좋게 자극해요.” 그녀가 연기하게 될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미소는 10년 동안 비서로 일하며 ‘비서계의 레전드’라 불릴 만큼 능력이 뛰어나고 책임감도 강한 인물이다. 하지만 일에 파묻혀 살던 어느 날, 자신의 삶이 사라져버렸다는 회의감이 들어 자아를 찾기 위해 일을 관두려고 한다. “하루는 미소가 은행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야 할 곳에 이름 대신 ‘김비서’라고 적어요. 자신의 이름보다 직함이 익숙할 만큼 일에 묻혀 산 거죠. 제 또래 많은 여성이 공감할 고민을 가진 인물이에요. 일에 빠져 살다 보면 나 자신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잖아요.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어요. 과연 배우의 길이 내 길인가 하는 고민이요. 돈을 벌기 위한 길인지 아니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길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죠.” 좀처럼 답을 찾지 못할 때면 자신을 잘 들여다보았다. “모든 걸 비우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요. 그때마다 대답은 ‘촬영장에 있을 때’였어요.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 연기를 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했죠. 가장 행복한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부수적인 스트레스는 받아들여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단 일주일 동안 왕비로 살았던 비극적 운명의 ‘채경’과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으며 살아온 ‘미소’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지난 작품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제가 연기한 인물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역할이죠. 자신감 넘치고 능동적이며 자존감도 높은 인물이에요. 처음으로 할 말을 하는 사람을 연기하게 된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면 엄청난 대사량이에요. 촬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사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연습을 열심히 하는 중이에요.”

새 드라마에 앞서 그녀의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이 찾아온다. 5월에 첫 회가 방송되는 넷플릭스의 <범인은 바로 너>에서 박민영은 사건을 해결하는 일곱 명의 탐정 중 한 명이 된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자기 옷에 걸려 자꾸만 넘어지는,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박민영이 아니라 현실의 박민영이 그곳에 있다. “첫 촬영 때는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엄청 긴장했어요. 그런데 두세 번 넘어지고 나니까 다 내려놓게 되더라고요.(웃음) 열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지는데 하나의 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열 개의 작은 사건을 해결해야 해요. 모두 연관이 있는 사건들이죠. 에피소드마다 카메오도 많이 출연하고 볼거리도 다양해요. 제가 셜록 홈스 마니아여서 추리를 잘 해 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웃음) 수학 문제가 나오는 순간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그냥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게 될 거예요.” 10년이 넘도록 필모그래피를 쌓는 동안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박민영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었다. 20대의 그녀였다면 예능 프로그램을 선택하지 않았겠지만 30대의 그녀는 선택했다. “과거에는 이상한 아집이 있었어요. 배우는 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굳이 잘하지도 못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그들의 영역을 범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제게 맞춰야 한다면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른이 넘으니 저 자신이 즐거우면 다른 사람도 즐거울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범인은 바로 너>에 함께 출연하는 (유)재석 오빠가 저더러 예능 계속 하라는 말도 했어요.(웃음)”

그렇게 세월이 쌓일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넓어지고 있었다. 2018년의 박민영이 보여주는 세계는 아마도 좀 더 넓고 다채로울 것이다. 다만 앞으로 지금까지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가치관이 있다. “정직하게 살며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거예요. 전 딸이라고 딱 정해놓았어요.(웃음) 지금의 저와 엄마의 관계가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꼭 딸이 있었으면 해요. 지금처럼 흔들리지 않고 연기하며 정직한 사람으로 살 거예요.” 아직 한해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한 건 올해의 마지막 날은 지난해의 마지막 날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올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웃고 있을 것 같아요. 올 한 해 열심히 달릴 테니까요. 떠나보내기 아쉬울 만큼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해요.”

화이트 블라우스와 스커트 모두 조셉(Joseph), 이어링 지넷 뉴욕(Ginette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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