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조인성

조인성

 

조인성 김서룡옴므
터틀넥 니트 톱,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조인성 드리스반노튼 에스티듀퐁
수트와 셔츠 모두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로퍼 에스.티. 듀퐁(S.T. Dupont).

 

“정해진 틀 속에서 안락함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건 더 이상 나의 몫이 아니다.”

 

조인성 김서룡옴므
터틀넥 니트 톱과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조인성 우영미 송지오옴므
코트 우영미(WooYoungMi), 블랙 셔츠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구두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인성 아크네스튜디오 김서룡옴므
니트 스웨터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팬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구두 유니페어(Unipair).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의 발걸음은 어딘지 불안정하다. 가진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지킬 가족만 있는 건달의 인생. 버티고 버텨보지만 그에게 남은 건 의리나 우정 따위는 조금도 없는 비극뿐이다. <쌍화점>의 호위 무사 ‘홍림’. 왕을 사랑했고 왕이 사랑하는 무사지만 왕후를 사랑하고 왕후가 사랑하는 남자가 된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랑도 지켜내지 못한다. 조현병을 앓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 조인성 스스로 지금도 돌아보면 가장 애잔한 인물이라는 장재열은 트라우마가 만든 세상에 갇혀 자신을 해한다. 권력을 가까이하고 싶었던 검사인 <더 킹>의 ‘태수’는 왕이 되기 위해 짓밟혀도 짓밟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안시성>. 온 세상을 손에 넣으려는 당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5천 명의 군사를 이끄는 성주 양만춘 장군은 성과 그 안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전투에 나선다. 그의 활을 움직이게 하는 건 욕심이나 욕망 같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9월 개봉을 앞둔 이번 작품까지, 조인성이 작품을 고르는 속도는 의아할 정도로 느릿해서 그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다시 찾아 보기에도 벅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의 인물들은 관객이 그에게 기대하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있다. <안시성>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새로운 리더이자 젊은 사극이며 많이 알려지 않은 고구려의 역사다. 제작비 규모도 꽤 크고 많은 배우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주인공으로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고분투했을 테고, 자신이 만들어야 할 역사 속 장군의 새로운 모습을 고민했을 테지만 그건 관찰자의 추측일 뿐이며, 그는 무사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라 말한다.

돌이켜보면 조인성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불쑥 등장할 때가 있다. <안시성>의 촬영이 끝난 후에 중국 어느 곳에서 일행과 옷을 맞춰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고, 정가영 감독의 독립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있을 법한 곳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타인의 SNS 사진에는 등장하지만 자신의 계정은 없고, 꼭 필요한 홍보 활동 외에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도대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면 왜 이렇게 보기가 어려우냐는 질문에,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어디선가 불현듯 등장할지도 모른다. 작품 속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인물로, 혹은 타인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보통의 일상을 사는 조인성으로.

 

조인성 김서룡옴므 유니페어
코트와 터틀넥 니트 톱,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구두 유니페어(Unipair).

오늘이 <안시성> 기자 시사회 전날이어서 아쉽게도 시나리오만 보고 인터뷰를 준비했다. 아쉽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았을 텐데.

영화에 자신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영화가 좋았건 싫었건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서로 그에 대해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시나리오는 구체적일 수 없다. 텍스트만 담긴 것과 그걸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각자가 생각하는 상(像)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영화는 텍스트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대본에 있는 내용으로 컨셉트를 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합해 나오는 결과물이다. 시나리오는 일종의 스케줄 표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분량을 촬영하고 어느 정도 진행되고 뭐 이런 큰 그림들. 여기에 감독과 기획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의도와 의견을 들어보고 마음이 가면 서로가 생각 하는 모습을 정리해간다.

<안시성>의 시나리오가 마음을 잡은 이유가 뭔가? 시대 배경이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고대사라는 점. 그래서 상상을 더해 구현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더 많고, 고대사가 주는 엄숙함이 있다. 아마도 그런 부분을 기존과 다르게 표현할 방법을 찾다가 나를 캐스팅한 거겠지.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거고. <안시성>은 엄숙함에서 벗어난 영화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보통 사극 하면 묵직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익숙한 것일 뿐 그 시대에 꼭 그랬으리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안시성>은 고대사가 주는 엄숙함이 있지만 좀 젊게 풀어내려고 했다. 당시 전장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젊은 사람 아니었겠나. 우리는 기존과 다른 사극을 만들고 싶었다.

다르다는 것은 생소한 것이고 익숙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그런 데서 오는 부담감에서 자유로운가?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두렵다는 이유로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해야 하고, 나도 이제 선배 배우가 되어가는데 새로운 시도를 겁내고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 결국 도태될 뿐이다. 새로운 배우는 계속 나오고, 물론 그들과 경쟁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나이가 들며 선배가 되었고, 정해진 틀 속에서 안락함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건 더 이상 나의 몫이 아니다. 안정적인 게 좋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막 연기를 시작한 신인 배우나 젊은 배우들은 그런 안전함 속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 좋지만, 선배들은 이제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

고구려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특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 한편으로 고구려 역사 전체를 보여줄 수는 없다. 그래도 이 영화가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시작점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점점 더 다양한 시대 혹은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찾으려는 열망이 다양한 배경을 끌어들이는 듯하다.

여러 선후배 배우들이 함께 등장한다. 현장을 잘 다독이고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잘 이끌고 가려고 하면 오히려 잘 안 된다. 뭘 이끄나. 다만 내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 특별히 나서서 뭘 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그 자리에 잘 있는 거지. 시간 약속 잘 지키고, 준비 제대로 하고, 모여야 할 때 잘 모이고, 그런 부분을 잘 지키면 나머지 것은 신경 쓸 게 별로 없다. 다 각자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고. 양만춘이라는 지도자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옛날의 리더십은 권위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하지만 아니다. 그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성주로서 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사극은 픽션과 논픽션의 조합이다. 사극은 현대극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르던가? 사극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적인 사실이 있지만 경험해보지는 않았으니 오히려 자유로운 셈이다. 나 역시 그렇고. 어느 날 한 선배에게 작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살아본 적 없는데 정해진 말투나 태도 같은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어.” 궁중의 문화는 사료에 많으니 비교적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 시대 서민의 삶은 기록이 많지 않다. <사도>만 보더라도 궁중의 어투로 대화를 나누다 아이가 웃으니까 “그런데 넌 왜 웃어?”라며 가볍게 말하지 않나. 사극이 오히려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 흥미로웠다.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언가? 그때그때 다른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직접 쓸 수는 없으니까. 혹은 기획이 좋은 경우도 있다. 좋은 감독님이면 한번 함께 작업해보고 싶어 선택하기도 한다. 하나의 기준으로 선택하기보다 범위를 넓게 두는 거지. 이번 영화는 기획이 좋았다. 고구려 이야기라는 점도 그렇고, 역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양만춘의 이야기라는 점도 그렇다. 양만춘은 말하자면 제대로 칭송받지 못한 영웅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면 표현하는 데 오히려 한계가 있었을 텐데, 양만춘은 인물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더 재미있겠다 싶었다.

대규모 전투 신을 구현해야 했을 테니 촬영 현장이 전작들과 많이 달랐겠다. 막연했다. 앞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인데 20만 대군이 몰려온다고 하니. 20만 명이 도대체 얼만큼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많은 것을 상상하고, 텅 빈 블루스크린 안에 무엇이 있다고 가정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기 경험은 있으니 거기에 기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액션도 중요한 작품이다. 현대극의 액션과 사극의 액션은 느낌이 다를 것이다. 싸움은 두 가지인 것 같다. 죽으려고 싸우거나 살려고 싸우거나. 안시성 전투의 싸움은 전체를 살리기 위한 싸움이다. 그래서 좀 광기가 어려 있다. 기술적인 부분은 큰 차이가 없다. 다 몸짓이니까. 반면 감정 상태는 매우 다르다.

촬영하면서 영화로 나왔을 때 가장 기대한 장면이 있었나? 마지막에 활 쏘는 장면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데다 주몽의 활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소 신화 같은 얘기이기도 하고. 그 신화적 요소가 있어야 영웅화되기도 하니까. 역사에 존재하는 일이긴 하지만 진짜로 활을 쏴서 눈에 맞았는지, 아니면 그냥 퇴각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신화처럼 보이는 내용을 관객이 ‘아,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느꼈으면 한다.

<안시성>의 양만춘은 지금껏 조인성이 보여준 캐릭터와 결이 많이 다르다. 그간의 작품에서는 의지하고 싶은 인물보다는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인물이 많았다. 지금은 이전에 비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졌나? 나이 들수록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변화는 내가 의도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일 뿐. 내게 오는 시나리오도 점차 달라지더라. 특별히 내가 변하려 노력한 건 없다.

이번 작품은 조인성에게도 도전이었을 것 같다. 주위에서 도전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도전을 위해 선택한 건 아니다. 음, 재미있으면 한다. 나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외모에서 오는 불편함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작품을 선택하는 데 제약이 많이 생기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멜로 작품을 비교적 많이 했는데 난 이제 한도 초과다. 여러 가지를 해야지. 어떤 틀 안에 머문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박제돼 있어야 한다. 그걸 하나하나 깨려고 노력해야지. 비록 실패할지라도.

자신에 대한 편견 중 가장 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뭔가? 늙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안티에이징이라고 하지 않나. 안티에이징이 아니라 웰 에이징이 맞는 것 아닌가. 잘 늙어가야지.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고 역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계절도 바뀌는데 사람이 뭐라고 늙지 않을 수 있나.

 

20대에 30대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상상은 해봤지. 그때도 막연히 잘 나이 들고 싶었다. 지금도 이렇게 작품을 계속 하고 있는 걸 보니 나쁘게 살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잘될 가능성이 없다. 지금보다 잘될 가능성은 0.001퍼센트? 힘든 시기를 잘 견디며 20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40대도 상상해보나? 그때는 지금보다 편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작품을 한다는 건 결국 내가 선택해야 하는데, 좀 더 쉽게 선택하고 싶다. 가령 영화에서 큰 역할이 아니어도 하고 싶으면 툭 하는 거다. 캐릭터만 좋으면 선택하고 그 작품 안에서 해내고 싶다.

예전과 지금, 연기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는가? 그럼. 확실히 달라졌다. 전에는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표현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연기를 잘 안 하려 한다. 전에는 어떤 감정을 표출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냥 한다. 툭. 어차피 툭 던지는 것 안에 다 들어 있어야 전달이 더 잘된다. 관객은 다 느낄 수 있다.

연기할 때 고통과 기쁨 중 어떤 감정이 더 많이 드나? 고통의 순간. 모든 게 어렵다. 연기하는 것 자체도 어렵고 추운 날 춥지 않은 척, 더운데 덥지 않은 척하는 것도 어렵다. 연기하는 순간이 계속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다. 고통의 시간이 8할이다. 그런데 촬영하다 보면 ‘아, 해냈다’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가있다. 그 찰나의 기쁨 때문에 연기를 계속 하게 된다. ‘덕업일치’가 되면 좋은데 잘 안 된다. 대신 그게 힘들다는 걸 깨닫고 나니 덜 괴롭다. 한때 일하면서도 즐거워야 하는데 왜 즐겁지 않지 하는 생각에 힘든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되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덕업일치’의 순간을 기대하는가? 기대했었다. 잘 안 될 뿐. 보통은 괴롭고 어느 순간 좋고.

작품을 선택한 후 개봉하기까지 가장 힘든 때와 행복한 때가 있다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촬영장에 있을 때. 촬영할 때 가장 행복하다. 가장 힘든 순간은 영화 개봉 직전의 홍보 기간이다. 지금 같은.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하다. 막상 개봉하면 운명이니까.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지금이 가장 모호한 시기다.

영화가 공개된 후 나올 반응에 대한 압박감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비난받았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누가 기억하겠는가. 합당한 비판은 물론 받아들이지만 상처가 되는 비난은 쓰레기통에 버린다. 내게 득이 되는 비판은 받아들이되 저급한 비난은 취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던 건 아니다. 다치고 찢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굳은살이 생겼다. 새싹도 밟혔다가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더 억센 잡초가 되기도 하고. 봄나물은 돌도 뚫고 나온다고 하지 않나. 지난 상처들이 이겨낼 힘이 되어 돌아온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고, 아무리 더워도 가을은 온다. 다만 그 시간 속을 살 때는 고통스럽다. 그 순간마저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더라. 비난받을 때 내가 고통 속을 걷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그렇다고 망가지진 않는다.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 고민하면 오히려 힘들어진다. 그냥 인정하면 된다. 지금 내가 고통 속을 걷고 있구나. 그렇게 걷다 보면 고통의 길은 끝난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찍힌 사진이 SNS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작품이나 작품 홍보 활동이 아니면 조인성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여행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찍힌 그 상황이 어색했다. 맞다. 나도 그렇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날 의식하지 않는데 그 광경이 어색했던 것 같다.

살아가는 방식이 전에 비해 좀 변하고 있나? 물론. 다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배우는 곧 상태다. 어떻게 사느냐와 어떤 배우가 되느냐는 같은 말이다. 지금의 상태가 곧 지금의 연기다. 지금의 배우 조인성이 괜찮다면 지금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작품을 하는 속도가 느리다고 하는 데, 이보다 많이 하기에 난 체력이 안 된다.(웃음) <안시성>도 연습과 리딩, 준비를 3개월 정도 했고, 6개월간 촬영했다. 지금의 템포가 내겐 적당하다.

연기하지 않을 때 여행도 많이 다니나? 오래전 인터뷰에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걸 읽었다. 자유롭게 걸을 수 있어 좋다. 보통의 삶이라고 해야 하나. 전에는 외국에 가야 그럴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국에서도 자유롭다. 여행지가 어디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괴롭다면 무슨 소용인가. 괴로움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여행지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지금 조인성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 전에는 어떤 상태로 살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냥 산다. 그냥. 삼시 세끼 챙겨 먹고 그냥 산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이게 행복이지 싶다. 오늘까지 난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 문제 없으니까.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동생은 일 잘하고 있고, 나는 아픈 데 없고. 꼭 기분이 좋아야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아무 일 없다는 것, 무사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그렇게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으면 좋겠다. 배우로서 나이 들어도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 있는가? 사기는 치지 말자. 관객을 민망하게는 만들지 말자. 어떤 순간에도.

이런 가치관이 만들어기지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다가도 사람들한테 위로받으니까. 차태현 선배가 그렇고 고현정 선배도 그렇고, (정)우성이 형이나 (이)정재 형도 나를 위해 많은 얘기를 해준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

돌이켜봤을 때 배우로서 힘든 시간은 언제였나? 한 3, 4년 전.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만했다. 주변 사람들이 잘한다고 말해줄수록 자신을 바꾸기가 어렵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맞다고. 내가 증명하지 않았느냐고. 잘해냈는데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결국 교만한 거였다.

힘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나? 그냥 지나갔다. 아무리 붙잡아도 시간은 가니까.

가끔 지나간 작품을 다시 보기도 하나? 아니.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남겨둔다. 그런데 유독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불안할 때 그렇다. 현재가 불안하면 과거의 작품을 볼 때가 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재다. 오늘이 중요한 사람.

오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늘 이 많은 스케줄을 어떻게 다 소화하지.(웃음) 내 이름이 다양한 매체에 자꾸 등장하는 게 어색하다. 너무. 그래도 우선 이번 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통 한국 영화가 한 주 간격으로 개봉하는데 명절이어서 동시에 개봉하니 최선을 다해야지.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난 가진 게 별로 없는데 자꾸 앞장서게 된다.(웃음)

그러게 지금껏 너무 꽁꽁 숨어 있었던 거 아닌가. 작품 외에 조인성은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살고 싶었던 걸까?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의도가 있으면 반드시 들킨다.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고 행동하면 들키고 민망해진다.

의도를 들키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 들켜도 상관은 없는데, 그런 의도가 보이는 순간 상대가 미워 보인다. 나는 그렇다. 무수가 상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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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수의 서사

 

도경수 우영미 아미
터틀넥 톱 우영미(WooYoungMi), 팬츠 아미 바이 10꼬르소 꼬모(Ami by 10 Corso Como), 슈즈 커먼프로젝트(Common Projects).
도경수 우영미 아크네
셔츠와 니트 스웨터 모두 우영미(WooYoungMi), 팬츠 아크네 바이 10꼬르소 꼬모(Acne by 10 Corso Como), 슈즈 커먼프로젝트(Common Projects).

도경수 캘빈클라인 우영미
셔츠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터틀넥 톱 우영미(WooYoungMi), 팬츠 르메르(Lemaire).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첫 회가 방영된 지 15시간 만이었다. 그의 첫 주연 드라마가 tvN 월화드라마 사상 첫 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던 차에 체크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청년이 기척 없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동행한 스태프가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인상적일 만큼 수더분한 세자 저하의 등장이었지만 더 인상적인 건 무던한 공기 속 그가 배우로서 지닌 선명한 얼굴이었다.

2014년 영화 <카트>로 시작되는 필모그래피를 되짚어보면 도경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과 환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배우로서 의식적으로 현실에 발을 붙이려는 사람같다. 마트 비정규직 직원의 10대 아들(<카트> 2014), 시력을 잃은 국가대표 유도 선수(<형> 2016), 어떻게든 1천8백만원의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DVD방 알바생(<7호실> 2017), 유약한 군인(<신과 함께> 2017)이 돼 그는 난처하고 비루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낯선 세계에서 평균 이상의, 혹은 모두가 동의할 만한 좋은 연기로 배우로서 재능과 가능성을 증명해왔다. 부단히 장르와 캐릭터의 결을 달리해왔던 그 축적된 변화가 이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중이다. 올겨울 개봉할 영화 <스윙키즈>에서는 당찬 북한군 포로 로‘ 기수’가 돼 그 안에서 한껏 자유로울 테니까.

그의 담백한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도경수는 ‘연기가 좋다’. 목소리와 말의 높낮이, 중간중간 흐려지다가도 똑 떨어지는 대답, 웃음 사이사이에서 그가 거듭 내비치는 좋‘ 음’이 그저 습관처럼 만들어진 감정이 아님을 알았다. 아래 이어지는 인터뷰에는 신중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좋다’는 말이 열한 번 나온다. (날것의 대화를 풀어놓은 녹취 파일에는 스물네 번 쓰였다.) 좋아서 하는 사람의 연기는 보는 사람마저도 좋아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 건강한 서사를 동시대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도경수 랑방 버버리프로섬
터틀넥 톱 랑방 바이 무이(Lanvin by MUE), 트렌치코트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팬츠 아미 바이 10꼬르소 꼬모(Ami by 10 Corso Como).

오늘 아침 <백일의 낭군님>의 첫 회 시청률을 들었겠다. 자고 있다가 전화 받았다.(웃음) 축하도 많이 받고 기분 좋다.

첫 드라마 주연이다. 비중의 경중을 떠나 현장에서 책임감도 경험했을 것 같다. 이번 작품 하면서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된 것 같다. 대본도 볼 만큼 많이 봤는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대본을 열 봤다면 열 번으로는 택도 없겠구나 싶을 만큼. 드라마는 장르 특성상 이야기가 길기도 하고, 극 중 시간의 흐름대로 촬영하는 건 아니어서 이전 상황이 뭐였을까 떠올려 보기도 하고, 종종 헷갈리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내가 대본을 말도 안 되게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년 사이 영화 <스윙키즈>와 <신과 함께 2>, 애니메이션 <언더독>, 여기에 더해 드라마에 공연까지 했다. 도경수라는 사람이 시간과 체력을 어떻게 나눠 쓰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아마 몇 년 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이제 엑소가 데뷔 7년 차에 접어들었고, 노하우가 점점 생기는 것 같다. 공연 준비나 안무 연습을 이전보다는 빠르게 습득할 수 있게 됐으니까 거기서 시간 배분을 잘하려고 한다.

혹자는 긴 호흡을 가지고 때로 쉬기도 하며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도경수의 필모그래피는 오늘만 사는 듯,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 보인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 지나가는 것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시간이니까. 그러니 항상 최선을 다해서···. 나는 그렇다. 누구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하고, 또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다. 물론 내 욕심도 있기 때문에 그걸 채워가려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다.

자기만족에서 동력이 만들어지는 편인가? 확실히 그렇다. 물론 보여주는 직업이고 대중의 만족이 항상 중요하지만, 나 자체의 기준도 높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 내가 먼저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관객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올겨울 개봉할 영화 <스윙키즈>는 춤과 음악을 보여주는 경쾌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1951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담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영화 <카트>와 <7호실> 역시 그랬고. 배우로서 사회의 한 조각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지만 선택 과정에서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다. 극 중 시대와 사회적 배경은 달라도 많은 사람과 작품으로 공감하고, 또 누군가 내 연기로 지친 마음에 힘을 얻는다면,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도경수 우영미
터틀넥 톱 우영미(WooYoungMi).

학자금 대출에 시달는 청년이건 관심 사병이건 도경수가 연기하는 삶은 대체로 녹록지 않다. 약자를 대변하는 건 어떤 면에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 부분에서 주저하거나 겁내지 않는 것 같다. 전혀. 겁낼 일은 아니지 않나. 되레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상황이 감사하고 너무 좋은 일이다. 그 점에서도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다.

영화 <스윙키즈>를 준비하면서 탭댄스를 익혔을 텐데 어렵지 않았나? 엄청 어려웠다. 탭댄스는 춤이 아니라 악기를 배운다고 생각하며 접근해야 하더라. 몸을 써서 크게 보이도록 하는 점도 있지만 드럼을 치듯 발을 굴러 소리를 내는 원리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쉽지 않다. 늘 몸을 써왔는데도 처음에는 내가 몸치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리듬을 만들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쾌감이 있다.

배우의 장점 중 하나는 작품을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거다.지금도 가만히 있을 때는 발을 움직인다. 그런 게 너무 좋다. 작품을 하면서 나만의 장점이나 무기를 얻을 수 있는 거니까.

장르와 캐릭터의 결을 꾸준히 달리해왔다.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어 하는 타입인가? 정확하다. 이전에 마음에 상처가 있는 캐릭터나 어리게 보일 수 있는 캐릭터를 해왔다면 캐릭터도 점차 성숙하고 변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며 사람이 변하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만나는 캐릭터의 성향도 달라지는 것 같다. 그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영화 <스윙키즈>의 주인공 ‘로기수’야말로 남자답고 호기로운 청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하다. (웃음)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남자다운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지금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호기로운 캐릭터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차고 한편으론 사고뭉치에 악동 같기도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도경수 하면 떠오르는 반듯하고 점잖은 이미지를, 그 틀을 한번 깨고 싶어 한 선택인가? 근데 내가 그렇게 점잖지만은 않다. 가까운 사람들은 알겠지만 장난도 많이 친다. 로기수라는 캐릭터에도 그런 면이 많이 담긴다. 내가 못 보여드렸던 모습들을. 방송에서는 어떻게 까불고…(웃음) 그럴 수 없기도 했는데 단체 생활하다 보면 다른 멤버가 맡아서 잘 해주는 부분도 있으니까 오히
려 가만히 있게 되고 그래서 그런 이미지가….

자유분방한 캐릭터 안에서 인간 도경수도 자유를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부분이 참 좋은 거 같다. 연기라는 것이. 평소 하지 않고, 해보지 않을 것을 그 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너무나 큰 장점이다.

해보고 싶은 게 많이 쌓여 있는 건가? 쌓여 있다기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새삼 알게 되는 것 같다. ‘이 캐릭터가 이런 대사를 할 때 마음이 이렇겠구나’ 하면서 헤아리다가도, ‘근데 나는 여기서 이렇게도 할 텐데’ 하며 나를 다시 본다.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내 모습, 그동안 상상하지 않았던 나의 어떤 면이 나오는 것 같다.

몰입했던 캐릭터의 결에 따라 일상의 도경수도 달라지나? 평소의 나는 나고, 연기하는 현장에서는 캐릭터에 최대한 몰입하려고 노력한다. 캐릭터의 차이보다는 시차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 같긴 하다. 한 작품에 몰입하다 보면 생활 패턴이 완전히 뒤바뀌니까 작품이 끝나면 얼떨떨하기도 하다.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 일찍 일어나 시작하고, 또 늦게 끝나기도 하니까 모든 촬영이 끝났는데도 4시간 자면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막상 깨서 덩그러니 있으면 좀 어색하더라. 대본을 읽고 뭐라도 외워야 할 것 같고, 문경으로 가야 할 것만 같고.(웃음) 지금은 그때보다는 잠을 더 자는 편이지만 확실히 부지런해졌다.

연기를 하기 전의 도경수, 연기를 하고 난 뒤의 도경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감독님과 스태프, 배우 분들 등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것 같다. 어른스러워진다고 할까. 연기를 떠나 그게 가장 많이 달라진 점 같다. 연기를 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였다면, 작품을 하나씩 지나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보며 성숙하는 것 같다.

사회화된다고 할까? 근데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웃음) 드라마나 영화 현장이 다른 일에 비해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니까. 가수로 활동할 때는 멤버들과 매니저 형들이 늘 함께하지만 연기하는 현장은 감독님, 배우 분들 할 것 없이 매번 스태프가 다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태도가 많이 달라진다.

배우로 지금의 자리에 온 데는 본인의 어떤 면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나? 내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힘들어도 힘들다 안 하고, 혼자 누른다. 이런 성격이 때로 괴롭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한 때가 많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격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해서.

한데 그 성격이 나를 힘들게 하고 외롭게 할 때가 있지 않나.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는 몸이 두 번 움직여야 하는 상황도 감내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바에는 그게 낫다. 그래서 스스로 훈련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고. 설사 몸을 두 번 움직이는 과정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더 받았다 할지라도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누군가에게는 배려가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게 좋고, 옳은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좋고 옳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부모님의 영향이 큰 것 같다. 힘든 순간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얘기하거나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많은 부모님이 그러시겠지만. 가까이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다.

작품을 떠나 있을 때 도경수의 평균 마음 상태가 궁금하다. 대체로 평온하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도 있지만 되도록 빨리 잊으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불안을 느끼는’ 상황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연습하는 것 같다. 항상.

앞으로 어떤 역할이 오면 단번에 하게 될 것 같나? 지금까지 이런 걸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고 정한 건 아니고 작품을 좋은 시기에 만났다. 영화 <7호실>의 ‘태정’이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읽으면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지금까지 캐릭터들이 때맞춰 내게 왔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은 욕심낸다고 되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래서 내 작품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좋은 시기에 때맞춰 찾아온 작품이라면 그리고 나 역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크게 계산하지 않고 하는 것 같다.

직관적으로 선택해온 셈이다. 시나리오를 다 읽은 뒤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고,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는 현장에서 감독님과 스태프들 그리고 내가 함께 풀어야 하는 거니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상의하는 분들이 있지만 마지막은 내 생각을 따른다. 지금까지 작품들이 모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건 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다음 작품 을에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배우의 자리에서 이제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듯하다. 작품을 고르는 범위가 넓어지고, 내 경험치가 커지면서 또 나를 더 알아가고 있다. 같은 캐릭터라 해도 이전에는 ‘아, 너무 어렵겠다’ 했다면 이제는 ‘지금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게 할 수도 있겠다’고 가늠해보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도경수 우영미 아미
셔츠와 카디건 모두 우영미(WooYoungMi), 팬츠와 슈즈 모두 아미 바이 10꼬르소 꼬모(Ami by 10 Corso C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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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장동윤

장동윤 배우 드라마
레더 셔츠형 재킷 비이커(Beaker), 화이트 티셔츠, 와이드 팬츠, 하이톱 스니커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취업을 위해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하던 대학생이 어느 날 편의점 강도를 잡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 청년은 텔레비전 뉴스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이 짧은 인터뷰 영상을 본 지금의 소속사로부터 느닷없이 배우가 되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배우의 세계에 들어왔다. 드라마틱한 데뷔 스토리를 가진 장동윤은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드라마 <학교 2017> <시를 잊은 그대에게> 등을 거쳐 <미스터 션샤인>과 영화 <뷰티풀 데이즈>까지 급하지 않은 속도로 새로운 세계를 부지런히 배워가고 있다.

장동윤 배우 드라마
셔츠와 타이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Ermenegildo Zegna Couture),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장동윤 배우 드라마
블랙 터틀넥 니트 스웨터, 팬츠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스니커즈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연기를 뒤늦게 시작했다. 남다른 독특한 데뷔 스토리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아마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웃음)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선택한 건데 두렵거나 주저되지는 않았나? 주저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게 좋다. 원래 지루한 걸 싫어한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회사 생활이 과연 나와 맞을지 고민했었다. 처음엔 잘 안되면 돌아가자는 생각도 있었고.

그래도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일 아닌가? 전공을 살려 금융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배우가 된다고 해서 지금껏 살아오고 배워온 것들이 다 사라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시간이 아깝지도 않았고. 비록 뒤늦게 배우가 되기는 했지만 학교생활도 마음껏 즐겼고, 시간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다.

배우가 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배우가 되는 상상을 해본 적 있나? 배우가 되는 상상을 했다기보다는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 영화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싶기도 했고, 글도 써보고 싶었고.

글 쓰는 걸 좋아하나? 시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시를 썼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턴가? 취미 삼아 쓴 건데 누가 시켜서 쓴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계속 썼다. 청소년 문학상을 탄 적이 있고 문예창작영재교육원에서 교육과정도 수료하고. 실은 대학에서도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

어떤 내용의 시를 쓰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에 대해 쓴다. 소시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들에 관한 시를 많이 쓰게 된다. 사람에 대해. 가령 노숙인에 관한 시를 쓸 때면 그분들을 관찰할 때도 있고 직접 대화를 나눠보기도 한다.

연기는 결국 글로 쓰인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글을 쓰는 것과 글로 쓰인 것을 연기하는 일은 많이 다른가? 나도 곰곰 생각해봤다.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연기로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시를 쓸 때는 감정을 컨트롤하지 않는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고 자유롭게 드러내는 데 연기할 때는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이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시와 소설도 다르다. 시나리오는 어쩌면 소설에 가까운 듯하다. 시는 매우 함축적인 문학이고 소설은 펼쳐놓은 문학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글을 쓰면서 키운 감성이 꽉 찬 상태에서, 그 감성을 잘 컨트롤하며 감정을 이끌어내는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기는 왜 재미있나?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서.

시를 쓸 때도 사람에 관한 시를 쓴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 보인다.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은 없지 않나. 당연히 사람을 대할 때 감정이 생기고 더불어 관계도 생긴다. 친구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고. 사람에 관심이 많아서 연기할 때 감정을 다루는 일이 재미있다. 연기와 관련한 이론이나 기술을 배우기 전에 현장에서 먼저 경험하다 보니 현장에서 부딪히고 선배나 동료 배우와 얘기를 나누며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재미있다.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배우는 타고나야 하고 끼가 넘쳐야 하며 노력보다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선배들을 지켜보니 그렇지 않았다. 인물을 분석하고 집중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더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방영 중반부터 등장했다. 많은 선배 배우와 함께하는 촬영장은 더 긴장될 것 같다. 이완익(김의성) 때문에 몰락한 집안의 아들로 신분을 위장한 채 무관 학교에 들어가 복수를 꿈꾸는 ‘준영’을 연기한다. 의욕은 넘치지만 그에 비해 서툴다. 방영 중반에 등장하는 인물이어서 선배들보다 늦게 합류했는데, 그 때문인지 처음 촬영장에 갔을 때는 긴장을 많이 했다. 선배들보다 열 달 정도 늦게 합류하다 보니 처음엔 촬영장이 어색했다. 그런데 선배들 덕분에 빨리 적응했다. 긴장을 많이 한 나와 달리 선배들은 여유가 있어 많이 배려해주었다 선배들의 연기를 보는 것도 좋았다. 연기할 땐 인물에 진중하게 몰입하지만 긴장감보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선배 배우들뿐만 아니라 함께 작업한 감독님, 카메라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 모두 좋은 분이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이 현장을 돌아봤을 때 어떤 느낌으로 남을 것 같은가? 엄청 좋은 기회. 앞으로 만나기 쉽지 않을 기회. 그리고 성장하는 데 좋은 발판이 된 현장으로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나도 <미스터 션샤인>에서 만난 선배들처럼 좋은 선배가 되었으면 한다.

곧 영화 데뷔작도 공개된다. 배우 이나영과 함께 출연한 영화 <뷰티풀 데이즈>가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영화에서 어떤 인물을 맡았나? 지난해 10월 무렵에 크랭크업했으니 개봉을 1년 정도 기다렸다. 내가 맡은 인물은 연길에 사는 대학생 ‘젠첸’이다. 이나영 선배의 아들 역할인데,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버리고 한국으로 간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엄마한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의 상처가 많은 어두운 인물이다. 연변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라 사투리를 열심히 연습했다. 일부러 대림동에 중국 음식을 먹으러 자주 가기도 했다. 그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투리에 대해 조언해줄 분도 한 명 소개받았다. 이제는 그분과 제법 친해져서 얼마 전에 밥도 같이 먹었다.

어릴 때 엄마가 떠났으니 감정의 결핍이 많은 인물이겠다. 그렇다고 대단히 특별한 감정은 아니다. 엄마의 부재로 원망스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떠난 엄마를 원망하고 슬퍼하지만 한편으론 보고 싶어 하고. 충분히 이해되는 인물이다. 엄마와 아들이 떨어져 있던 긴 시간, 그 시간 끝에 만났을 때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만난 후 변하는 엄마에 대한 감정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도대체 왜 엄마를 찾으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감정 역시 변한다. 타인이면 포기할 수 있는데 가족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그 감정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

영화와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않았나? <뷰티풀 데이즈>는 저예산 영화라 더 다를 것 같다. 각자 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드라마 현장은 정해진 시간에 문제를 빨리 풀어야 하는 객관식이고, 영화 현장은 문항은 적지만 오래 풀어야 하는 논술형 문제 같다.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다. 올해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드라마에 출연했고 첫 영화로 레드 카펫도 밟게 될 테니. 어느 해도 특별하지 않은 해가 없겠지만 올해는 유독 성숙할 기회가 많았다. 현장에서 선배들에게 많은 걸 배웠고 연기를 대하는 태도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올해 한 경험 덕분에 연기할 때 좀 더 끝까지 인물을 붙잡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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