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과 문소리

문소리 장률 부산국제영화제
문소리 레더 셔츠 분더샵(Boontheshop).

선배의 아내인 송현(문소리)을 좋아했던 윤영(박해일)은 송현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녀와 군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짧은 문장에 기대서 장률 감독의 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를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미묘한 감정을 품은 두 남녀의 군산 기행이다. 그리고 이들이 머무는 민박집 주인인 중년 남자(정재영)와 자폐를 가진 그의 딸(박소담)이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틀며 네 남녀의 마음은 엇갈리고 굽이친다. 얽히는 정념 속에 ‘장률스러움’이 드넓게 산재해 있다. 그간 <경주> <춘몽>에서 보여줬듯 영화는 통상적 로맨스라는 장막을 치고 그사이 겹겹의 레이어를 두른 채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낯설고 기묘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경주>를 기점으로 한 장률 감독의 2막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어쩔 도리 없이 빠져들 작품이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 장률과 배우 문소리가 부산으로 향하기 전 카메라 앞에 섰다.

장률 문소리 국제영화제

 

두 분의 인연이 꽤 오래됐죠? 장률 감독님의 첫 다큐멘터리 <풍경> 개봉과 맞춰 두 분이 시네 토크를 열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요. 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웃음) 2005년인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난 이후 계속 봐온 건데 인간관계가 그런 것 같아요. 한 번 만나고 더 만나든지, 아니면 만나지 않든지 그것밖에 없잖아요. (이)창동 감독님과 장률 감독님 두 분이 친분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장률 감독님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하고, 제가 워낙 감독님 작품을 좋아하기도 했어요.

영화 <필름 시대 사랑> 이후 2년 만에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로 작품에서 다시 만난 계기가 있었나요? 또 보고 싶은 거지 뭐. 작품과 배우도 그런 것 같아요. 한 작품으로 끝나는 인연이 있고, 더 만나게 되는 인연도 있고. <필름 시대 사랑>이 너무 짧아서 아쉽기도 했고요. 이번 작품은 시놉시스만 먼저 주셨는데 내용이 재미있어서 오래 기다리고 있었어요.

걸어 다니는 인간 영화라 할 만한 두 분인데 현장에서 어떤 대화를 주로 나눴는지 궁금합니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왜 그런 거 있잖아’ 하면 저는 ‘네, 할게요’ 하고 답하는 식의 대화를 주로 했죠. 장 두 마디 할 거 반 마디만 해도 서로 알아듣고 통하니까. 보통 말이 길어질 때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 문 감독님이 많이 한 이야기는 ‘기도하라’고. 본인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저더러 간절히 기도를 하래요. 근데 그게 실제로 다 이뤄지니까. 한번은 촬영을 시작했는데 뒤쪽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저더러 기도하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기도하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는데 바람이 불더라고요. 바람이 불 만한 상황이 절대 아니었어요. 촬영 내내 그런 경우가 꽤 있었어요. 소리 씨가 과연 신기가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 드넓은 바닷가에 나는 작은 점처럼 보이는 풀 샷인데 감독님이 새가 날아갔으면 좋겠대요. 그럼 또 기도하고, 새가 날아오고. 그러니 쉬는 날에는 ‘내일 기도가 안 먹히면 어쩌지’ 하면서 숙소 근처 절에 가서 기도를 했어요. 백팔 배하고.(웃음)

<경주> <춘몽> 등 지역과 공간을 담는 장률 감독님 특유의 방식과 시선을 좋아하는 관객이 많죠. 이번 영화의 배경은 군산입니다. 처음에는 목포로 정했는데 영화 속 민박집이 될 만한 적당한 집을 찾지 못했어요.그러다 군산에 갔죠. 이 영화에는 남녀가 감정적으로 미묘하게 만나는 접점이 많은데 군산이 그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았어요. 공간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 만약 목포에서 찍었더라면 두 주인공인 송현과 윤영이 한주먹 하지 않았겠어요? 액션영화가 될 뻔한 거죠? 군산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장률 감독님도 한국과 중국의 정체성이 섞여 있잖아요. 군산이라는 공간도 어떻게 보면 한국과 중국, 일본 사이에서 그런 역할을 한 곳이고, 또 과거 흘러간 것들의 흔적이 남은 곳이에요. 우리 영화에도 재일 교포와 중국인, 한국인이 등장하죠. 군산이 배경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률 문소리 국제영화제
문소리 실크 톱 3.1 필립 림(3.1 phillip lim), 코트 빈폴(beanpole), 팬츠 렉토(recto).

군산의 그런 특징 때문인지 장률 감독님의 영화적 반경이 보다 넓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한과 북한, 중국을 넘어 일본까지 아우르게 된 것은 염두에 둔 연출인가요? 장 제가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고요.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야기할 때 그 배경을 빼놓을 수 없잖아요. 군산에는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구석구석 세세하게 남아 있어요. 그리고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정서를 피할 수 없죠. 송현이라면 역사적 사실과 남은 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도 아우르는 사람. 윤영은 본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 송현은 군산에 남아 살 수도 있겠다고 봐요. 영화 만들 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고 다 찍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게 또 남녀의 차이인 것 같아. 여성은 어딜 가도 좀 더 오래 머무는 경향이 있는 것 같고요.

같은 맥락으로 일전에 한 인터뷰에서 ‘여성이 어떤 면에서는 남성보다 강하기도 하고 포용력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은 리듬을 장악한다’라는 말을 하신 적 있죠. 이번 영화에서도 송현이 윤영에게 ‘너는 애매하다. 절반만 한다. 너랑 안 자기 잘했다’라고 말하는 대사도 인상 깊었어요. 여성 캐릭터에 접근하는 감독님만의 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문 감독님이 시나리오는 중국어로 먼저 쓰고 나중에 번역해요. 번역 과정에서 감독님의 의도가 완전히 담기지 않을 가능성이 있죠. 제 오해일지 모르지만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송현이 좀 밀리고 끌려다니는 느낌이 있었어요. 애정에 목마른 듯하고요. 물론 누구나 애정에 목마를 때가 있고 사랑받길 원하죠. 그렇지만 저는 그것 때문에 인생이 이래야 하나 하는 의문도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감독님이 중국 여성에 대해 말씀해주실 때가 많거든요. 이 여성들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요. 송현을 이해하는 데 그 대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간 한국에서 봐오던 시나리오대로 송현을 해석한 것이 아닐까, 감독님이 보여주려는 여성성과 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남자 캐릭터는 어떻게 봤어요? 그냥 보면 이상한 미친놈인데 (박)해일 씨가 하니까 좀 덜 미쳐 보이지 않아요? 어땠어요?

배우 박해일이 지닌 어떤 분위기나 표정이 작품에 따라 허약하고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잖아요. 송현이 선을 긋고 밀어낼 때는 그를 받아줘도 좋지 않을까 하는 측은지심이 생기기도 하고요.  문 그러니까. 진짜 그런 이상한 놈들 받아주면 인생이 엉망이 돼. (안 받아주길) 잘했어. 극 중에서 송현과 전남편(윤제문), 윤영 셋이 중국집에서 만취한 장면이 있잖아요. 술을 먹고 찍어보자 해서 셋 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촬영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시나리오에서는 애매하게 다가오던 송현의 심정이 확실하게 와 닿은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 이런 놈들 차에 실어서 싹 치워버리고 싶다. 방 청소하듯 깨끗이 버리고 혼자 물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송현을 관통하는 중요한 뭔가가 이해되는 열쇠 같은 순간이었어요. 아, 이거구나 싶었죠. 영화를 보고 ‘이상한 남자는 피하자’ 하고 느낀다면···.(웃음)

감독님, 근데 그게 박해일이어서요. 헷갈리게 만들어. 그래서 해일 씨는 자꾸 ‘감독님은 이상한 사람인가요’라고 묻고, 그럼 나는 또 ‘너도 이상한 사람이라 계속 하는 거야’라고 말하고요. 서로서로.

그런데도 영화에서 두 남녀가 주고받는 호흡이 참 매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년 5월에 촬영했으니 이제 1년이 지난 거죠. 근데 군산에서 촬영한 게 꽤 오래된 일 같아요. 예전에 <하하하> 찍을 때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통영에서 한 달간 찍었는데 막상 그때를 떠올리면 지나온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이 작품도 그래요. 그래서 지금 해일 씨가 <상류사회> 홍보한다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 아주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요.

영화 안에도 비현실적 요소가 산재해요. 극 초반에 터널을 따라 두 남녀가 마을로 걸어 들어가잖아요. 이 터널을 지나면 뭔가 비현실적 세계에 닿을 것 같은, 현실로 부터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줘요. 문 촬영할 당시에는 그 동네가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다음에 다시 가보니 관광객도 있는 평범한 동네더라고요. 이상해요. 감독님이 공간을 보는 특별한 눈이 있는 것 같아요.

비현실성이 강한 건 편집의 역할도 컸던 것 같습니다. 시간 순서를 어긋나게 배열해 처음 군산에 도착하던 순간을 영화의 맨 마지막에 붙이고, 돌연 중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니까요. 두 사람이 덜컥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 같아요. 장 이전에는 공간을 많이 다뤘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시간을 많이 생각한 것 같아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제 시작해 언제 끝난다’라고 시간성을 가늠하는데 막상 살다 보면 중간쯤 갔을 때에야 ‘아, 지금 돌아보니 이것이 언제 시작했고, 이제 어느 때를 향해 가겠구나’ 하는 확신이 든단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시작은 이 여정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중간 지점인 것 같습니다. 왜 처음에는 어디를 향해 가겠다고 계획해도 막상 그곳으로 향하지 않기도 하니까요. 인생 또한 중간에 와야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화에서 ‘어디서 본 적 있죠? 어디서 만난 적 있죠?’라는 대사가 반복된  건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장 같은 맥락인데 시간의 중간쯤 오면 어디서 본 것 같고, 나도 겪은 것 같고 아리송해요. 때로는 꿈 같고요. 어디서 본 것 같은 건 실제 꿈에서 본 것일 수 있고 헷갈리고요. 그런 정서를 담는 대사인데. 근데 관객이 이걸 좋아하겠지?

감독님 왜 갑자기 관객 눈치를···. 문 이제 와서.(웃음)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이렇게 다 찍은 다음에는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뒤늦게 생겨요. 편집할 때는 그 생각을 못 하다가 끝나고 나서 이렇게.

어떤 사람이 자신과 잘 맞는지 한 번에 알려면 유머 코드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죠. 무엇에 웃고, 웃지 않는지 그 기준 안에 가치관과 취향 등 모든 게 담겨 있다고요. 두 분은 언제 같이 웃나요? 문 보통 감독과 배우 사이라면 배우가 그 유머 코드를 맞추죠. 작품 끝나면 ‘근데 그 감독님은 그런 걸 재미있어 하더라?’ 하면서. 박찬욱 감독님과 처음 촬영할 때인데 감독님이 나를 좀 이상하게 해놓고 혼자 좋아해요. 현장에서는 이해가 안 갔죠.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아, 감독님이 이런 걸 되게 좋아하는구나, 그럼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감이 와요. 그렇게 초반에 맞출 수 있으면 다행이에요. 장률 감독님이나 해일 씨나 보통의 유머 코드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에요. 둘 다 좀··· 특이해요. 두 사람이 저보다 더 오래 같이 작업해왔으니까 그럴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지닌 웃음의 정서가 분명 있고, 저는 그 특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감독님은 마흔 살에 영화를 시작하셨고, 문소리 씨도 작년에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할 때 ‘내가 뭐든 늦되다. 그런데 하긴 다 해’라고 말했었죠. 두 분 다  ‘늦되다’고 할 수 있는데  늦어서 좋은 점은 뭔가요? 장 긴장이 좀 덜 된다? 바꿔 말하면 야심이 적어요. 왜 사람이 젊고 혈기왕성하면 뭐든 해보려고 하는 의욕이 강할 텐데, 나는 그게 남들보다 좀 적은 것 같아요. ‘뭐, 이렇게 살다 가겠는데?’ 해버리는 태도랄까요. 하나 더 있다면 과거의 시간들이 보태져 다른 색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감독님은 영화 하기 전 작가로 산 삶이 있잖아요. 20대 초반부터 영화에 미쳐서 영화를 해온 사람과는 확실히 결이 다른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스물여섯까지 평범하게 대학 다니고 다른 공부를 하면서 살아온 시간이 더해져 또 다른 색이 되는 것 같고요.

두 분이 언제 잘 맞는다고 느끼나요?  작품이랑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영화제 때문에 감독님이랑 런던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감독님이 한국에는 사천 요리를 제대로 하는 집이 없다면서 사천 요리 집에 데려가셨거든요. 저는 그 전에는 한 번도 내가 중국요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근데 그 사천 요리를 먹으면서 ‘아, 감독님과 나는 참 잘 맞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너무 매운데도 입맛에 딱 맞다고 생각하면서요. 영화는 감독과 배우의 일이기 때문에 그사이 잘 맞고 맞지 않고는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비슷하면 돼요. 근데 입맛은 맞기가 어려워요.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입맛이 비슷해야 쭉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거니까.

<마리끌레르 부산국제영화제 특별판>에는 ‘비전-한국 영화의 오늘’에 초청된 감독 10명이 자신의 인생 영화를 꼽는 기획 기사가 있습니다. 매년 빠지지 않는 작품이 감독님의 <망종>입니다. 문소리 씨는 감독님의 어떤 작품을 꼽고 싶나요? 문 감독님 작품 중 처음 본 게 <두만강>이에요. 무척 강렬했죠. <망종>도 그렇고, <경주>도 좋아하고요. 감독님 작품이 변했잖아요. 저는 그런 시도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작품 세계에는 만든 사람의 인생이 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독자적인 세계 하나를 구축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근데 이를 허물고 다시 변화를 꾀하는 건 영화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봐도 대단히 존경스러워요. 땅을 갈아엎는 수준이 아니라 지각변동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삶이 변했으니까. 지금 서울에서 <망종> 찍으면 그건 거짓말이고요. 좀 전에 나온 늦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데 마흔이 다 돼 시작하면 영화감독으로서 내 일생을 어떻게 꾸리고 끝내야겠다는 포부나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아요. 다만 ‘내 마음대로 한번 해보는 거지 뭐’ 하는 태도가 영화에 더 크게 작용하죠.

이 또한 늦게 시작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말씀이죠? 장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감독으로 사는 것이 내 일생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거죠. 그보다 지난 6년 동안 한국의 대학에서 강의하고, 영화도 찍고, 영화계 사람들도 만나왔습니다. 지금껏 영화를 통해 몸으로 부딪히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정서를 공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쯤 되면 뭔가 알 만도 하잖아요? 그런데도 어떤 날은 내가 이곳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어요. 중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감정이죠. 이게 뭘까? 다음에 한 편 또 찍으면 알게 되겠지?

또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면요? 장 소리 씨가 연기 정말 잘했구나.

장률 문소리 국제영화제
문소리 수트 띠어리(theory), 레더셔츠 분더샵(Boonthe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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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조인성

조인성

 

조인성 김서룡옴므
터틀넥 니트 톱,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조인성 드리스반노튼 에스티듀퐁
수트와 셔츠 모두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로퍼 에스.티. 듀퐁(S.T. Dupont).

 

“정해진 틀 속에서 안락함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건 더 이상 나의 몫이 아니다.”

 

조인성 김서룡옴므
터틀넥 니트 톱과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조인성 우영미 송지오옴므
코트 우영미(WooYoungMi), 블랙 셔츠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구두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인성 아크네스튜디오 김서룡옴므
니트 스웨터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팬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구두 유니페어(Unipair).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의 발걸음은 어딘지 불안정하다. 가진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지킬 가족만 있는 건달의 인생. 버티고 버텨보지만 그에게 남은 건 의리나 우정 따위는 조금도 없는 비극뿐이다. <쌍화점>의 호위 무사 ‘홍림’. 왕을 사랑했고 왕이 사랑하는 무사지만 왕후를 사랑하고 왕후가 사랑하는 남자가 된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랑도 지켜내지 못한다. 조현병을 앓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 조인성 스스로 지금도 돌아보면 가장 애잔한 인물이라는 장재열은 트라우마가 만든 세상에 갇혀 자신을 해한다. 권력을 가까이하고 싶었던 검사인 <더 킹>의 ‘태수’는 왕이 되기 위해 짓밟혀도 짓밟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안시성>. 온 세상을 손에 넣으려는 당태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쳐들어오고, 5천 명의 군사를 이끄는 성주 양만춘 장군은 성과 그 안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전투에 나선다. 그의 활을 움직이게 하는 건 욕심이나 욕망 같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9월 개봉을 앞둔 이번 작품까지, 조인성이 작품을 고르는 속도는 의아할 정도로 느릿해서 그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다시 찾아 보기에도 벅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의 인물들은 관객이 그에게 기대하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있다. <안시성>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새로운 리더이자 젊은 사극이며 많이 알려지 않은 고구려의 역사다. 제작비 규모도 꽤 크고 많은 배우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주인공으로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고분투했을 테고, 자신이 만들어야 할 역사 속 장군의 새로운 모습을 고민했을 테지만 그건 관찰자의 추측일 뿐이며, 그는 무사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라 말한다.

돌이켜보면 조인성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불쑥 등장할 때가 있다. <안시성>의 촬영이 끝난 후에 중국 어느 곳에서 일행과 옷을 맞춰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고, 정가영 감독의 독립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있을 법한 곳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타인의 SNS 사진에는 등장하지만 자신의 계정은 없고, 꼭 필요한 홍보 활동 외에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도대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면 왜 이렇게 보기가 어려우냐는 질문에,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어디선가 불현듯 등장할지도 모른다. 작품 속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인물로, 혹은 타인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보통의 일상을 사는 조인성으로.

 

조인성 김서룡옴므 유니페어
코트와 터틀넥 니트 톱,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구두 유니페어(Unipair).

오늘이 <안시성> 기자 시사회 전날이어서 아쉽게도 시나리오만 보고 인터뷰를 준비했다. 아쉽다.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았을 텐데.

영화에 자신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영화가 좋았건 싫었건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서로 그에 대해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시나리오는 구체적일 수 없다. 텍스트만 담긴 것과 그걸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각자가 생각하는 상(像)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영화는 텍스트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대본에 있는 내용으로 컨셉트를 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합해 나오는 결과물이다. 시나리오는 일종의 스케줄 표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분량을 촬영하고 어느 정도 진행되고 뭐 이런 큰 그림들. 여기에 감독과 기획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의도와 의견을 들어보고 마음이 가면 서로가 생각 하는 모습을 정리해간다.

<안시성>의 시나리오가 마음을 잡은 이유가 뭔가? 시대 배경이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고대사라는 점. 그래서 상상을 더해 구현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더 많고, 고대사가 주는 엄숙함이 있다. 아마도 그런 부분을 기존과 다르게 표현할 방법을 찾다가 나를 캐스팅한 거겠지.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거고. <안시성>은 엄숙함에서 벗어난 영화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보통 사극 하면 묵직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익숙한 것일 뿐 그 시대에 꼭 그랬으리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안시성>은 고대사가 주는 엄숙함이 있지만 좀 젊게 풀어내려고 했다. 당시 전장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젊은 사람 아니었겠나. 우리는 기존과 다른 사극을 만들고 싶었다.

다르다는 것은 생소한 것이고 익숙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그런 데서 오는 부담감에서 자유로운가?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두렵다는 이유로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해야 하고, 나도 이제 선배 배우가 되어가는데 새로운 시도를 겁내고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 결국 도태될 뿐이다. 새로운 배우는 계속 나오고, 물론 그들과 경쟁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나이가 들며 선배가 되었고, 정해진 틀 속에서 안락함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건 더 이상 나의 몫이 아니다. 안정적인 게 좋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막 연기를 시작한 신인 배우나 젊은 배우들은 그런 안전함 속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 좋지만, 선배들은 이제 그 틀을 벗어나야 한다.

고구려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특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 한편으로 고구려 역사 전체를 보여줄 수는 없다. 그래도 이 영화가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시작점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점점 더 다양한 시대 혹은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찾으려는 열망이 다양한 배경을 끌어들이는 듯하다.

여러 선후배 배우들이 함께 등장한다. 현장을 잘 다독이고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잘 이끌고 가려고 하면 오히려 잘 안 된다. 뭘 이끄나. 다만 내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 특별히 나서서 뭘 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그 자리에 잘 있는 거지. 시간 약속 잘 지키고, 준비 제대로 하고, 모여야 할 때 잘 모이고, 그런 부분을 잘 지키면 나머지 것은 신경 쓸 게 별로 없다. 다 각자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고. 양만춘이라는 지도자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옛날의 리더십은 권위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하지만 아니다. 그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성주로서 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사극은 픽션과 논픽션의 조합이다. 사극은 현대극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르던가? 사극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적인 사실이 있지만 경험해보지는 않았으니 오히려 자유로운 셈이다. 나 역시 그렇고. 어느 날 한 선배에게 작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그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살아본 적 없는데 정해진 말투나 태도 같은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어.” 궁중의 문화는 사료에 많으니 비교적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 시대 서민의 삶은 기록이 많지 않다. <사도>만 보더라도 궁중의 어투로 대화를 나누다 아이가 웃으니까 “그런데 넌 왜 웃어?”라며 가볍게 말하지 않나. 사극이 오히려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 흥미로웠다.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언가? 그때그때 다른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직접 쓸 수는 없으니까. 혹은 기획이 좋은 경우도 있다. 좋은 감독님이면 한번 함께 작업해보고 싶어 선택하기도 한다. 하나의 기준으로 선택하기보다 범위를 넓게 두는 거지. 이번 영화는 기획이 좋았다. 고구려 이야기라는 점도 그렇고, 역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양만춘의 이야기라는 점도 그렇다. 양만춘은 말하자면 제대로 칭송받지 못한 영웅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면 표현하는 데 오히려 한계가 있었을 텐데, 양만춘은 인물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더 재미있겠다 싶었다.

대규모 전투 신을 구현해야 했을 테니 촬영 현장이 전작들과 많이 달랐겠다. 막연했다. 앞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인데 20만 대군이 몰려온다고 하니. 20만 명이 도대체 얼만큼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많은 것을 상상하고, 텅 빈 블루스크린 안에 무엇이 있다고 가정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기 경험은 있으니 거기에 기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액션도 중요한 작품이다. 현대극의 액션과 사극의 액션은 느낌이 다를 것이다. 싸움은 두 가지인 것 같다. 죽으려고 싸우거나 살려고 싸우거나. 안시성 전투의 싸움은 전체를 살리기 위한 싸움이다. 그래서 좀 광기가 어려 있다. 기술적인 부분은 큰 차이가 없다. 다 몸짓이니까. 반면 감정 상태는 매우 다르다.

촬영하면서 영화로 나왔을 때 가장 기대한 장면이 있었나? 마지막에 활 쏘는 장면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데다 주몽의 활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소 신화 같은 얘기이기도 하고. 그 신화적 요소가 있어야 영웅화되기도 하니까. 역사에 존재하는 일이긴 하지만 진짜로 활을 쏴서 눈에 맞았는지, 아니면 그냥 퇴각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신화처럼 보이는 내용을 관객이 ‘아,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느꼈으면 한다.

<안시성>의 양만춘은 지금껏 조인성이 보여준 캐릭터와 결이 많이 다르다. 그간의 작품에서는 의지하고 싶은 인물보다는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인물이 많았다. 지금은 이전에 비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졌나? 나이 들수록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변화는 내가 의도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일 뿐. 내게 오는 시나리오도 점차 달라지더라. 특별히 내가 변하려 노력한 건 없다.

이번 작품은 조인성에게도 도전이었을 것 같다. 주위에서 도전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도전을 위해 선택한 건 아니다. 음, 재미있으면 한다. 나에 대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외모에서 오는 불편함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작품을 선택하는 데 제약이 많이 생기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멜로 작품을 비교적 많이 했는데 난 이제 한도 초과다. 여러 가지를 해야지. 어떤 틀 안에 머문다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박제돼 있어야 한다. 그걸 하나하나 깨려고 노력해야지. 비록 실패할지라도.

자신에 대한 편견 중 가장 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뭔가? 늙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안티에이징이라고 하지 않나. 안티에이징이 아니라 웰 에이징이 맞는 것 아닌가. 잘 늙어가야지.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고 역행하려 해서는 안 된다. 계절도 바뀌는데 사람이 뭐라고 늙지 않을 수 있나.

 

20대에 30대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상상은 해봤지. 그때도 막연히 잘 나이 들고 싶었다. 지금도 이렇게 작품을 계속 하고 있는 걸 보니 나쁘게 살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잘될 가능성이 없다. 지금보다 잘될 가능성은 0.001퍼센트? 힘든 시기를 잘 견디며 20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40대도 상상해보나? 그때는 지금보다 편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작품을 한다는 건 결국 내가 선택해야 하는데, 좀 더 쉽게 선택하고 싶다. 가령 영화에서 큰 역할이 아니어도 하고 싶으면 툭 하는 거다. 캐릭터만 좋으면 선택하고 그 작품 안에서 해내고 싶다.

예전과 지금, 연기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는가? 그럼. 확실히 달라졌다. 전에는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표현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연기를 잘 안 하려 한다. 전에는 어떤 감정을 표출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냥 한다. 툭. 어차피 툭 던지는 것 안에 다 들어 있어야 전달이 더 잘된다. 관객은 다 느낄 수 있다.

연기할 때 고통과 기쁨 중 어떤 감정이 더 많이 드나? 고통의 순간. 모든 게 어렵다. 연기하는 것 자체도 어렵고 추운 날 춥지 않은 척, 더운데 덥지 않은 척하는 것도 어렵다. 연기하는 순간이 계속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다. 고통의 시간이 8할이다. 그런데 촬영하다 보면 ‘아, 해냈다’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가있다. 그 찰나의 기쁨 때문에 연기를 계속 하게 된다. ‘덕업일치’가 되면 좋은데 잘 안 된다. 대신 그게 힘들다는 걸 깨닫고 나니 덜 괴롭다. 한때 일하면서도 즐거워야 하는데 왜 즐겁지 않지 하는 생각에 힘든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되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고,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덕업일치’의 순간을 기대하는가? 기대했었다. 잘 안 될 뿐. 보통은 괴롭고 어느 순간 좋고.

작품을 선택한 후 개봉하기까지 가장 힘든 때와 행복한 때가 있다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촬영장에 있을 때. 촬영할 때 가장 행복하다. 가장 힘든 순간은 영화 개봉 직전의 홍보 기간이다. 지금 같은.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하다. 막상 개봉하면 운명이니까.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지금이 가장 모호한 시기다.

영화가 공개된 후 나올 반응에 대한 압박감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비난받았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누가 기억하겠는가. 합당한 비판은 물론 받아들이지만 상처가 되는 비난은 쓰레기통에 버린다. 내게 득이 되는 비판은 받아들이되 저급한 비난은 취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던 건 아니다. 다치고 찢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굳은살이 생겼다. 새싹도 밟혔다가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더 억센 잡초가 되기도 하고. 봄나물은 돌도 뚫고 나온다고 하지 않나. 지난 상처들이 이겨낼 힘이 되어 돌아온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오고, 아무리 더워도 가을은 온다. 다만 그 시간 속을 살 때는 고통스럽다. 그 순간마저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더라. 비난받을 때 내가 고통 속을 걷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그렇다고 망가지진 않는다. 내가 왜 고통스러운지 고민하면 오히려 힘들어진다. 그냥 인정하면 된다. 지금 내가 고통 속을 걷고 있구나. 그렇게 걷다 보면 고통의 길은 끝난다.

얼마 전 여행지에서 찍힌 사진이 SNS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작품이나 작품 홍보 활동이 아니면 조인성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여행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찍힌 그 상황이 어색했다. 맞다. 나도 그렇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날 의식하지 않는데 그 광경이 어색했던 것 같다.

살아가는 방식이 전에 비해 좀 변하고 있나? 물론. 다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배우는 곧 상태다. 어떻게 사느냐와 어떤 배우가 되느냐는 같은 말이다. 지금의 상태가 곧 지금의 연기다. 지금의 배우 조인성이 괜찮다면 지금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작품을 하는 속도가 느리다고 하는 데, 이보다 많이 하기에 난 체력이 안 된다.(웃음) <안시성>도 연습과 리딩, 준비를 3개월 정도 했고, 6개월간 촬영했다. 지금의 템포가 내겐 적당하다.

연기하지 않을 때 여행도 많이 다니나? 오래전 인터뷰에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걸 읽었다. 자유롭게 걸을 수 있어 좋다. 보통의 삶이라고 해야 하나. 전에는 외국에 가야 그럴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국에서도 자유롭다. 여행지가 어디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괴롭다면 무슨 소용인가. 괴로움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여행지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지금 조인성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 전에는 어떤 상태로 살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냥 산다. 그냥. 삼시 세끼 챙겨 먹고 그냥 산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이게 행복이지 싶다. 오늘까지 난 행복한 사람이다. 아무 문제 없으니까.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동생은 일 잘하고 있고, 나는 아픈 데 없고. 꼭 기분이 좋아야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아무 일 없다는 것, 무사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그렇게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으면 좋겠다. 배우로서 나이 들어도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 있는가? 사기는 치지 말자. 관객을 민망하게는 만들지 말자. 어떤 순간에도.

이런 가치관이 만들어기지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았다가도 사람들한테 위로받으니까. 차태현 선배가 그렇고 고현정 선배도 그렇고, (정)우성이 형이나 (이)정재 형도 나를 위해 많은 얘기를 해준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

돌이켜봤을 때 배우로서 힘든 시간은 언제였나? 한 3, 4년 전.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만했다. 주변 사람들이 잘한다고 말해줄수록 자신을 바꾸기가 어렵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맞다고. 내가 증명하지 않았느냐고. 잘해냈는데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결국 교만한 거였다.

힘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나? 그냥 지나갔다. 아무리 붙잡아도 시간은 가니까.

가끔 지나간 작품을 다시 보기도 하나? 아니.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남겨둔다. 그런데 유독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불안할 때 그렇다. 현재가 불안하면 과거의 작품을 볼 때가 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재다. 오늘이 중요한 사람.

오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늘 이 많은 스케줄을 어떻게 다 소화하지.(웃음) 내 이름이 다양한 매체에 자꾸 등장하는 게 어색하다. 너무. 그래도 우선 이번 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통 한국 영화가 한 주 간격으로 개봉하는데 명절이어서 동시에 개봉하니 최선을 다해야지.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난 가진 게 별로 없는데 자꾸 앞장서게 된다.(웃음)

그러게 지금껏 너무 꽁꽁 숨어 있었던 거 아닌가. 작품 외에 조인성은 드물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살고 싶었던 걸까?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의도가 있으면 반드시 들킨다.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고 행동하면 들키고 민망해진다.

의도를 들키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 들켜도 상관은 없는데, 그런 의도가 보이는 순간 상대가 미워 보인다. 나는 그렇다. 무수가 상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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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수의 서사

 

도경수 우영미 아미
터틀넥 톱 우영미(WooYoungMi), 팬츠 아미 바이 10꼬르소 꼬모(Ami by 10 Corso Como), 슈즈 커먼프로젝트(Common Projects).
도경수 우영미 아크네
셔츠와 니트 스웨터 모두 우영미(WooYoungMi), 팬츠 아크네 바이 10꼬르소 꼬모(Acne by 10 Corso Como), 슈즈 커먼프로젝트(Common Projects).
도경수 캘빈클라인 우영미
셔츠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터틀넥 톱 우영미(WooYoungMi), 팬츠 르메르(Lemaire).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첫 회가 방영된 지 15시간 만이었다. 그의 첫 주연 드라마가 tvN 월화드라마 사상 첫 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던 차에 체크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청년이 기척 없이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동행한 스태프가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인상적일 만큼 수더분한 세자 저하의 등장이었지만 더 인상적인 건 무던한 공기 속 그가 배우로서 지닌 선명한 얼굴이었다.

2014년 영화 <카트>로 시작되는 필모그래피를 되짚어보면 도경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과 환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배우로서 의식적으로 현실에 발을 붙이려는 사람같다. 마트 비정규직 직원의 10대 아들(<카트> 2014), 시력을 잃은 국가대표 유도 선수(<형> 2016), 어떻게든 1천8백만원의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는 DVD방 알바생(<7호실> 2017), 유약한 군인(<신과 함께> 2017)이 돼 그는 난처하고 비루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낯선 세계에서 평균 이상의, 혹은 모두가 동의할 만한 좋은 연기로 배우로서 재능과 가능성을 증명해왔다. 부단히 장르와 캐릭터의 결을 달리해왔던 그 축적된 변화가 이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중이다. 올겨울 개봉할 영화 <스윙키즈>에서는 당찬 북한군 포로 로‘ 기수’가 돼 그 안에서 한껏 자유로울 테니까.

그의 담백한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도경수는 ‘연기가 좋다’. 목소리와 말의 높낮이, 중간중간 흐려지다가도 똑 떨어지는 대답, 웃음 사이사이에서 그가 거듭 내비치는 좋‘ 음’이 그저 습관처럼 만들어진 감정이 아님을 알았다. 아래 이어지는 인터뷰에는 신중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좋다’는 말이 열한 번 나온다. (날것의 대화를 풀어놓은 녹취 파일에는 스물네 번 쓰였다.) 좋아서 하는 사람의 연기는 보는 사람마저도 좋아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그 건강한 서사를 동시대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도경수 랑방 버버리프로섬
터틀넥 톱 랑방 바이 무이(Lanvin by MUE), 트렌치코트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팬츠 아미 바이 10꼬르소 꼬모(Ami by 10 Corso Como).

오늘 아침 <백일의 낭군님>의 첫 회 시청률을 들었겠다. 자고 있다가 전화 받았다.(웃음) 축하도 많이 받고 기분 좋다.

첫 드라마 주연이다. 비중의 경중을 떠나 현장에서 책임감도 경험했을 것 같다. 이번 작품 하면서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된 것 같다. 대본도 볼 만큼 많이 봤는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대본을 열 봤다면 열 번으로는 택도 없겠구나 싶을 만큼. 드라마는 장르 특성상 이야기가 길기도 하고, 극 중 시간의 흐름대로 촬영하는 건 아니어서 이전 상황이 뭐였을까 떠올려 보기도 하고, 종종 헷갈리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내가 대본을 말도 안 되게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년 사이 영화 <스윙키즈>와 <신과 함께 2>, 애니메이션 <언더독>, 여기에 더해 드라마에 공연까지 했다. 도경수라는 사람이 시간과 체력을 어떻게 나눠 쓰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아마 몇 년 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이제 엑소가 데뷔 7년 차에 접어들었고, 노하우가 점점 생기는 것 같다. 공연 준비나 안무 연습을 이전보다는 빠르게 습득할 수 있게 됐으니까 거기서 시간 배분을 잘하려고 한다.

혹자는 긴 호흡을 가지고 때로 쉬기도 하며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도경수의 필모그래피는 오늘만 사는 듯,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 보인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 지나가는 것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시간이니까. 그러니 항상 최선을 다해서···. 나는 그렇다. 누구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하고, 또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있다. 물론 내 욕심도 있기 때문에 그걸 채워가려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다.

자기만족에서 동력이 만들어지는 편인가? 확실히 그렇다. 물론 보여주는 직업이고 대중의 만족이 항상 중요하지만, 나 자체의 기준도 높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 내가 먼저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관객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올겨울 개봉할 영화 <스윙키즈>는 춤과 음악을 보여주는 경쾌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1951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담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영화 <카트>와 <7호실> 역시 그랬고. 배우로서 사회의 한 조각에 대해 이야기 해왔다.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지만 선택 과정에서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다. 극 중 시대와 사회적 배경은 달라도 많은 사람과 작품으로 공감하고, 또 누군가 내 연기로 지친 마음에 힘을 얻는다면,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도경수 우영미
터틀넥 톱 우영미(WooYoungMi).

학자금 대출에 시달는 청년이건 관심 사병이건 도경수가 연기하는 삶은 대체로 녹록지 않다. 약자를 대변하는 건 어떤 면에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 부분에서 주저하거나 겁내지 않는 것 같다. 전혀. 겁낼 일은 아니지 않나. 되레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상황이 감사하고 너무 좋은 일이다. 그 점에서도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다.

영화 <스윙키즈>를 준비하면서 탭댄스를 익혔을 텐데 어렵지 않았나? 엄청 어려웠다. 탭댄스는 춤이 아니라 악기를 배운다고 생각하며 접근해야 하더라. 몸을 써서 크게 보이도록 하는 점도 있지만 드럼을 치듯 발을 굴러 소리를 내는 원리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쉽지 않다. 늘 몸을 써왔는데도 처음에는 내가 몸치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리듬을 만들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쾌감이 있다.

배우의 장점 중 하나는 작품을 하며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거다.지금도 가만히 있을 때는 발을 움직인다. 그런 게 너무 좋다. 작품을 하면서 나만의 장점이나 무기를 얻을 수 있는 거니까.

장르와 캐릭터의 결을 꾸준히 달리해왔다.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어 하는 타입인가? 정확하다. 이전에 마음에 상처가 있는 캐릭터나 어리게 보일 수 있는 캐릭터를 해왔다면 캐릭터도 점차 성숙하고 변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며 사람이 변하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만나는 캐릭터의 성향도 달라지는 것 같다. 그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영화 <스윙키즈>의 주인공 ‘로기수’야말로 남자답고 호기로운 청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하다. (웃음)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남자다운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지금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호기로운 캐릭터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차고 한편으론 사고뭉치에 악동 같기도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도경수 하면 떠오르는 반듯하고 점잖은 이미지를, 그 틀을 한번 깨고 싶어 한 선택인가? 근데 내가 그렇게 점잖지만은 않다. 가까운 사람들은 알겠지만 장난도 많이 친다. 로기수라는 캐릭터에도 그런 면이 많이 담긴다. 내가 못 보여드렸던 모습들을. 방송에서는 어떻게 까불고…(웃음) 그럴 수 없기도 했는데 단체 생활하다 보면 다른 멤버가 맡아서 잘 해주는 부분도 있으니까 오히
려 가만히 있게 되고 그래서 그런 이미지가….

자유분방한 캐릭터 안에서 인간 도경수도 자유를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부분이 참 좋은 거 같다. 연기라는 것이. 평소 하지 않고, 해보지 않을 것을 그 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너무나 큰 장점이다.

해보고 싶은 게 많이 쌓여 있는 건가? 쌓여 있다기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새삼 알게 되는 것 같다. ‘이 캐릭터가 이런 대사를 할 때 마음이 이렇겠구나’ 하면서 헤아리다가도, ‘근데 나는 여기서 이렇게도 할 텐데’ 하며 나를 다시 본다.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내 모습, 그동안 상상하지 않았던 나의 어떤 면이 나오는 것 같다.

몰입했던 캐릭터의 결에 따라 일상의 도경수도 달라지나? 평소의 나는 나고, 연기하는 현장에서는 캐릭터에 최대한 몰입하려고 노력한다. 캐릭터의 차이보다는 시차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 같긴 하다. 한 작품에 몰입하다 보면 생활 패턴이 완전히 뒤바뀌니까 작품이 끝나면 얼떨떨하기도 하다. 드라마 촬영하는 동안 일찍 일어나 시작하고, 또 늦게 끝나기도 하니까 모든 촬영이 끝났는데도 4시간 자면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막상 깨서 덩그러니 있으면 좀 어색하더라. 대본을 읽고 뭐라도 외워야 할 것 같고, 문경으로 가야 할 것만 같고.(웃음) 지금은 그때보다는 잠을 더 자는 편이지만 확실히 부지런해졌다.

연기를 하기 전의 도경수, 연기를 하고 난 뒤의 도경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감독님과 스태프, 배우 분들 등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적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것 같다. 어른스러워진다고 할까. 연기를 떠나 그게 가장 많이 달라진 점 같다. 연기를 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였다면, 작품을 하나씩 지나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보며 성숙하는 것 같다.

사회화된다고 할까? 근데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웃음) 드라마나 영화 현장이 다른 일에 비해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니까. 가수로 활동할 때는 멤버들과 매니저 형들이 늘 함께하지만 연기하는 현장은 감독님, 배우 분들 할 것 없이 매번 스태프가 다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태도가 많이 달라진다.

배우로 지금의 자리에 온 데는 본인의 어떤 면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나? 내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힘들어도 힘들다 안 하고, 혼자 누른다. 이런 성격이 때로 괴롭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장점으로 작용한 때가 많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격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해서.

한데 그 성격이 나를 힘들게 하고 외롭게 할 때가 있지 않나.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는 몸이 두 번 움직여야 하는 상황도 감내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바에는 그게 낫다. 그래서 스스로 훈련을 더 많이 하는 것 같고. 설사 몸을 두 번 움직이는 과정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더 받았다 할지라도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누군가에게는 배려가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게 좋고, 옳은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좋고 옳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부모님의 영향이 큰 것 같다. 힘든 순간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얘기하거나 내색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많은 부모님이 그러시겠지만. 가까이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다.

작품을 떠나 있을 때 도경수의 평균 마음 상태가 궁금하다. 대체로 평온하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도 있지만 되도록 빨리 잊으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불안을 느끼는’ 상황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연습하는 것 같다. 항상.

앞으로 어떤 역할이 오면 단번에 하게 될 것 같나? 지금까지 이런 걸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고 정한 건 아니고 작품을 좋은 시기에 만났다. 영화 <7호실>의 ‘태정’이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읽으면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지금까지 캐릭터들이 때맞춰 내게 왔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은 욕심낸다고 되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래서 내 작품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좋은 시기에 때맞춰 찾아온 작품이라면 그리고 나 역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크게 계산하지 않고 하는 것 같다.

직관적으로 선택해온 셈이다. 시나리오를 다 읽은 뒤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결국 내가 하는 일이고,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는 현장에서 감독님과 스태프들 그리고 내가 함께 풀어야 하는 거니까.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상의하는 분들이 있지만 마지막은 내 생각을 따른다. 지금까지 작품들이 모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건 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다음 작품 을에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배우의 자리에서 이제는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듯하다. 작품을 고르는 범위가 넓어지고, 내 경험치가 커지면서 또 나를 더 알아가고 있다. 같은 캐릭터라 해도 이전에는 ‘아, 너무 어렵겠다’ 했다면 이제는 ‘지금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재미있게 할 수도 있겠다’고 가늠해보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도경수 우영미 아미
셔츠와 카디건 모두 우영미(WooYoungMi), 팬츠와 슈즈 모두 아미 바이 10꼬르소 꼬모(Ami by 10 Corso C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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