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거장

숙성의 시간이 담보될 수 없는 속전속결의 시대, 전체를 통찰하기보다 부분에 집중해야 생존할 수 있는 분절의 시대에 거장은 태어날 수 없다.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는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 거장일 것이다. 조용한 연희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박서보 아트 기지는 그의 자택이자 갤러리와 작업실을 겸하는 곳이다. 화이트 재킷과 페도라로 한껏 멋을 낸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자신의 작품처럼 한국적 기품이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질러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기이할 정도로 아이처럼 눈이 맑다. 그러나 맑은 눈도 앞에 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냉철한 시선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는 한국 화단의 어른이자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다.

지난 5월 18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展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어온 박서보의 삶과 작품 세계를 한자리에서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1950년대 초기작부터 2019년 신작까지 작품 1백60여 점을 다섯 시기로 구분해 선보이고 있다. 무려 70여 년의 화업이다. 누군가의 일생만큼 긴 세월 동안 박서보는 캔버스 앞에 서야 하는 운명을 지고 지금에 왔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는 ‘묘법(描法)’ 연작을 통해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을 뿐 아니라 평론가, 미술 행정가, 교육자로서도 한국 현대미술을 일구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흔을 목전에 둔 거장은 여러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내내 열정적으로 자신의 세계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박서보는여전히 현역이고, 청년이며, 거대한 나무다.

이번 전시 타이틀이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입니다. 처음에는 ‘권태를 모르는 노동자’라는 타이틀도 논의가 됐는데 나는 그것도 좋았어요. 내가 평생 노동자지 뭐.

쉰 적이 없으시죠? 쉰다는 건 도대체 모르니까.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라고 하길래 속으로 나는 노동자인데, 했어요. 학교에 매여 있을 때는 퇴근해서 손 씻고 밥 먹고 작업실에 내려가 밤새 그림을 그렸어요. 아침 7시쯤 아이들이 학교 간다고 인사하는 소리에 시간 됐구나 하고 밥 먹고 2시간 자고 학교에 갔죠. 2009년에 뇌경색이 와서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일평생 4시간씩 자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지치거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시기는 없으셨나요? 70년이나 그림을 그리셨고, 중간에 편찮으시기도 했으니 이제 그림을 그만 그릴까 생각해보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 있지. 그걸 극복하는 거예요. 나는 좌절은 몰라요. 오히려 넘어서려고 애를 썼죠. 그림을 그만 그리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림이 안 팔리던 시절도 있었지. 보는 사람 눈이 멀어서 안 사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내 그림이 시원치 않아서 안 팔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언젠가 반드시 평가받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지.

우리 시대의 거장 박서보의 인터뷰는 연희동에 자리한 박서보 아트기지에서 이뤄졌다. 선생의 자택이자 갤러리, 작업실을 겸하는 이 공간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면서도 지나침이 없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그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림 그리는 게 좋으셨어요? 좋기도 하고, 어떨 땐 지겹기도 하고.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까 돈만 들고 힘들기만 한걸. 차라리 그림 안 그리면 돈 벌겠다고 했으니까요. 나는 유난히 대작이 많아서 캔버스, 물감 값도 다 많이 들었거든. 그래도 늙으면 힘들어서 대작 못 한다, 어차피 안 팔리는 거 엿장사 맘대로다, 그러면서 대작을 주로 했어요. 그러니까 다들 그 당시에는 팔리지도 않을 걸 기를 쓰고 대작 그린다고 뭐라고들 했죠.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대작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아니었어요. 작가는 결국 마지막에 대작으로 승부한다고 믿고 그렸던 거지.

이번 전시는 흔치 않은 대규모 회고전입니다. 작품은 물론이고 관련 자료의 양도 방대합니다. 아마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두 번째 회고전을 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할 거예요. 기획자들한테 창고를 열어줬더니 신이 나서 매일같이 찾아와 자료를 정리한 거야. 항상 일기를 쓰는데 남들이 판단할 수 있는 기록이 되게 하려고 일부러 감정을 담지 않고 써요. 나는 원래는 열 덩어리예요. 자제할 줄 알 뿐이지. 제자들한테 자기를 객관적으로 저기 내동댕이치고 바라볼 줄 아는사람이 돼야 한다고 얘기해요. 나는 나를 아주 냉정하게 비판합니다. 나는 둔재예요, 둔재.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화하면 또한 추락한다.’ 나는 평생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했어요. 작품에 변화를 주겠다는 생각이 들면 4~5년은 하던 작업을 계속하면서 남한테 보이지 않고 밤을 꼴딱 새우면서 새로운 시도를 했어요. 그게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내 신체의 일부처럼 됐을 때 비로소 하던 작업을 중단하고 새 작업을 발표했어요. 그런 오랜 숙성 기간이 있어야 하자가 없어요. 영글지도 않은 개념을 가지고 서둘러 세상에 나가면 추락하는거예요. 나를 철저하게 매질하고, 뒤집어보고, 또 뒤집어보고, 그래야 실수를 안 해요.

올해 작업하신 신작 2점도 눈에 띕니다. 원래는 5미터짜리 작업대에 올라가 출렁거리는 리듬을 타면서 작업했는데 이제는 몸이 불편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대신 캔버스를 눈높이에 맞춰 걸어놓고 집중적으로 심화시켜 나가요. 기분은 못 내죠. 대신 집요할 만큼 밀도감을 중점적으로 파들죠. 전에는 색을 안 썼는데 지금은 바탕에 색을 연하게 깔아요. 색에는 정신을 치유하는 치유력이 있습니다. 이제 수신과 치유를 동시에 이행하는 겁니다.

작업하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어떤 건가요? 나는 풍토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적이라는 건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예요.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건 자연관이에요. 그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서양에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에요. 인간과 자연이 이원화된다고. 우리는 인간이 자연을 부분으로 봐요. 내가 우리 정신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1970년대에 일으킨 거고, 그게 묘법이고.

어린 아들이 장난치는 걸 보고 묘법의 아이디어를 얻으셨다고 들었어요. 우리 둘째 아들이 세 살 때 형이 학교 가고 없을 때 제 형 노트에 글을 쓰고 노는 거야. 칸 안에 글자를 써넣으려고 해. 그건 목적성이거든. 그런데 뜻대로 안되는 거예요. 어린애니까. 몇 번을 반복해도 뜻대로 안 되니까 연필로 마구잡이로 막 그어대는 거야. 그게 체념, 단념이야. 그걸 보고 내가 흉내내고 발전시킨 거예요. 스승은 책 속에 있는 게 아니야. 나는 스승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로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세요? 늘 넌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네가 너를 비운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큼 비웠느냐. 늘 나한테 질문하는 게 그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나는 꽤 많은 걸 비워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과연 얼마나 비웠느냐, 다 비워진 거냐고 자문합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기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운다는 건 뭡니까? 아주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잡욕, 탐욕 같은 것, 의욕이라는 이름 밑의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자연과 내가 하나가 돼요. 내 생각이 버티고 있는 한 자연과 나 사이에는 갭이 생기고 완전히하나가 안 돼. 나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면 시대를 통찰하는 통찰력과 식지 않는 열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둘만 있으면 된다, 지식은 그것이 다리를 붙들고 못 나아가게 하는 짐이 되기도 한다고요. 사람들한테도 책 많이 읽되 절대 기억하지 말고 다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명문을 외우고, 노예처럼 붙들립니다.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만큼 비판이나 비난도 많이 받으셨어요. 보수적인 사람들은 나를 빨갱이 혁신주의자라고 하고, 반대쪽 사람들은 보수 꼴통인 줄 알아요. 공격 받을 거 받고, 대가 치를 거 치르는 거지. 목숨을 걸고라도 옳다고 생각한 얘기는 했어요. 학교에 있으면서 학교 개혁안을 내고 반대하는 목소리에 그림이나 그리자 생각하고 사표를 썼어요. 그때 나한테 물었지. 너는 누구냐. 쥐뿔도 아닌거야. 세상에 무식하기 그지없고. 나는 서양 이론을 우리식으로 적용하려고 한 적이 없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야. 결국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먼저 동양을 알자는 생각에 중국을 공부했고, 그 후에 모두 비워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 방법론은 우리 아들놈한테서 영감을 얻은 거고.

고독하셨을 것 같아요. 고독했죠. 고독해도 고독하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다른 걸 더 열심히 해서 풀어냈지. 그림만 그려댔죠. 경제적으로도 험난했어요.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한 건 2010년이 지나서예요. 그 전에는 그림이 안 팔렸어. 1980년대에는 묘법 작품 100호짜리가 3백만원일 때도 안 팔렸으니까. 어느 놈이 나에 대해서 영 이상한 소리 하고 글 쓰고 한다고 불러서 야단치고 그런 적 없어요. 나는 무시하고 내 할 일만 하는 거예요. 나이 좀 먹었다고 그걸 불러다 야단치고 하면 동네 영감이 되는 거라고. 곁눈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요. 한 번도 허우적거리지 않고 20대부터 2009년 오늘까지 하루 14시간씩 그림을 그리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여러 사람 몫의 인생을 혼자 사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일이란 평론가가 계셨는데 그 양반이 박서보 같은 사람은 1백 년 뒤에도 나올까 말까 하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나는 나 같은 사람은 1천년 뒤에도 안 나온다고 했는데, 그건 우리가 이제 분업화되고 발전돼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자질이 없는 놈은 아니었고, 시대를 모른척하고 내 일만 할 수는 없어서 갖은 욕을 먹으면서도 그 일을 다 한 거예요. 앞으로는 필요 없는 거지 그런 사람은.(웃음)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의 미술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에는 초기작부터 2019년 신작까지 총 1백60여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기간 2019년 5월 18일~9월 1일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MMCA Seoul)
웹사이트 www.mmca.go.kr
문의 02- 3701-9500

요즘 드라마 뭐 봐?

볼거리가 풍성한 여름이다.
영화관에서는 재미있는 영화들의 개봉 행진이고,
TV에도 각 채널 별 새롭게 시작하는 드라마가 한 가득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벌써부터 입 소문난 신상 드라마 3편을 소개한다.

이번 여름밤은 심심하지 않을 전망!

<60일, 지정생존자>

그 동안 보기 드문 소재였던 정치 스토리의 드라마가 요즘 자주 보인다.
Jtbc 에서는 이정재와 신민아 주연의 <보좌관>,
그리고 7월 1일 tvN에서 3.4%의 시청률로 첫방을 마친 <60일, 지정생존자>.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강렬한 오프닝으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끈 <60일, 지정생존자>.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원작의 기본 설정은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법과 현실적인 정치를 로컬화해서
새로운 이야기 전개를 선보인다.

주인공 자리의 배우 지진희는 어떤 정치적 야망도 없이
본인의 신념으로 정책을 펼치기 원하는 환경부 장관 역의 ‘박무진’을 맡았다.
테러범으로 인해 국회의사당이 폭발되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 위원들이 폭사하자
의도치 않게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에 오르게 된다.
테러의 진범들과 공범자들, 검찰, 재벌, 언론 등
외부에서 오는 유혹과 그에 따른 갈등과 사건 사고들로,
그의 가족과 나라를 지키며 성장하는 이야기.

@tvndrama.official

비서실장 역을 맡은 허준호, 비서실 선임 행정관 역의 손석구 등
연기파 배우들의 대거 출연으로 몰입도가 굉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그가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 할 것인지는
끝까지 드라마를 보면 답이 나올 터.

아직 원작 미드 <60일, 지정생존자>를 보지 않았다면
한국판과 같이 정주행하여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솔솔 하지 않을까?

<평일 오후 세시의 연인>

@channela_insta

이번엔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다. <평일 오후 세시의 연인>.
일본의 불륜 드라마 <메꽃- 평일 오후 3시의 연인들>을
한국적 감성으로 각색되어 방영 전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7월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7월 5일 금요일 11시 채널A에서 첫 방송이 된다.

주인공 ‘손지은’ 역을 맡은 박하선과
그녀의 불륜남 ‘윤정우’ 역을 맡은 이상엽
그 외에 예지원, 조동혁 등의 출연진으로
원작과 비슷한 캐스팅 싱크로율을 자랑해 원작 팬들은 꽤 만족해 하고 있다.

섹스리스 부부인 ‘손지은’은 무료한 일상에서
‘윤정우’를 만나 뜨거운 감정을 느끼며 벌어지는 스토리다.

사실 불륜 드라마라 함은 부도덕적이고 지탄 받는 이야기지만,
<평일 오후 세시의 연인>은 새로운 한국형 멜로 드라마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또 이 드라마가 기대 되는 것은 금기된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번민, 고통과 희열 등 감정의 변화를
내레이션과 대사를 통해 어떻게 표현될 지이다.
벌써부터 박하선 ‘손지은’의 대사 일부를 선보인 예고편을 통해
사람들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불러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떤 명대사들로 잔잔하게 마음에 스며들게 할지
이번주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왓쳐>

<보이스 3>가 끝나고 주말 11시 무슨 재미로 보내나
아쉬워하는 이들이라면 걱정 말자.
늘 긴장감 넘치는 장르물 드라마를 선보이는 OCN에서
역시나 기대에 저버리지 않는 새로운 드라마를 방영 예정이다.

오랜만에 TV에 모습을 드러내는
배우 한석규와 김현주, 서강준, 허성태 출연진의 <왓쳐 WATCHER>가 그 주인공.

권력의 부패를 파헤치는 비리수사팀으로 모인 세 남녀가
그들의 15년 전 비극에 얽힌 과거를 파헤치고
현재를 추적하는 감찰 스릴러 드라마다.
이미 ‘비밀의 숲’,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등
디테일한 연출력을 선보인 안길호 감독과
‘굿와이프’의 한상운 작가가 함께 해 일명 믿보 제작진의 작품!

장르물이지만 유쾌함과 더불어
인물의 미묘한 심리전을 보여준다.
연기파 배우들의 흡인력 있는 연기가 더해져
완성도 있는 드라마가 탄생 될 예감이 든다.

6일 토요일 밤 10시 20분에 첫방이니
그 예감이 적중한 것인지는 같이 확인해보자.

여름 섹스

‘쏘 쿨’한 섹스

7, 8월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통스러웠을까. 공기를 쥐어짜면 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 극한의 습도 속에서 이웃집 뒤뜰에 파인애플과 바나나가 자라기 시작했다는 인터넷 뉴스를 접하고, 35℃ 정도는 따뜻한 거라고 정신 승리를 외치게 되는, 이 세상 더위가 아닌 듯한 한국의 여름. 그래도 나는 이런 혹독한 여름의 섹스를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한다. 땀 범벅의 엉망진창 섹스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런 가학적 취미는 없다. 연중 가장 더운 때 제일 쿨한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아이러니의 일등 공신은 에어컨이다. 선풍기 바람처럼 요란스럽지 않고 천장에서 솔솔 불어오는 에어컨의 순풍은 혼을 빼놓는 섹스도 땀나는 수고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실내 온도가 같아도 한여름 에어컨을 튼 공간의 서늘함은 가을이나 겨울과는 다르다. 포근하지만 격한 피스톤 운동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두툼한 차렵이불이나 영 분위기를 깨는 수면 양말도, 세탁하기 골치 아파 뭐가 묻을까 봐 자꾸 신경 쓰이는 오리털 토퍼도 없다. 인견 이불의 적당히 빳빳한 감촉과 사각거리는 소리, 내 몸에 포개진 그의 따끈한 체온, 그에 대비되어 나를 애무하던 그가 핥은 곳에 에어컨 바람이 슬쩍 지나갈 때 오소소 돋는 닭살의 느낌까지 여름밤의 홈 섹스는 생각지 못한 오감을 일깨운다. 다만 침대까지 갈 새 없이 거실의 라탄 러그 위에서 일을 치르려고 한 건 실수였다. 아무리 급해도 등나무 껍질에 엉덩이를 비비는 일은 없어야 한다. I_ 프리랜서, 31세

바닷가 랩소디

여름이 다가오고 기온이 올라갈수록 성욕은 그에 반비례한다고 하는데, 나는 조금 다르다. 햇볕 아래서 몸속에 비타민 D와 세로토닌을 흠뻑 충전하며 활기를 되찾는 여름의 나는, 살을 에는 추위에 존재 자체가 쪼그라드는 것 같은 겨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남자친구도 비슷한 성향이라 마찬가지다. 그런 우리가 꼽는 여름 섹스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휴가지 섹스. 발갛게 익기 시작한 나의 맨살은 창백했던 지난겨울의 흔적을 없애주는 선탠 로션의 도움을 받아 반질한 윤기를 띠고, 선베드에 누운 나를 바라보는 남자친구의 노골적인 눈길은 불볕더위만큼이나 활활 타오른다. 나 또한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을 짧은 수영복 아래 드러나는 그의 허벅지, 모래가 점점이 달라붙은 그을린 어깨, 흠뻑 젖어 한껏 달라붙은 수영복 위로 슬며시 드러나는 페니스의 윤곽 등, 여름 필터를 씌운 남자친구의 비주얼을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렇게 마음속에 불길을 머금은 채 바닷가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올 무렵이면 그도 나도 만반의 준비가돼 있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를 살짝 핥아본다. 가끔 잠자리에서 우연찮게(내 의지와 상관없이) 맛보는 땀의 텁텁한 짠맛과 달리, 그의 가슴팍에서 증발하고 남은 바닷물의 소금기에는 혀끝으로 느껴지는 낭만이 있다. 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잔잔한 파도 소리에 맞추어 절정에 이르는 동안 생각한다. 섹스가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고. O_ 직장인, 29세

여름 원피스계의 다크호스

지난 연애사를 돌아볼 때 여름에 만나던 남자들이 한결같이 격하게 반응하는 내 옷차림이 하나 있다. 선 드레스다. 하늘거리는 얇은 소재라 상체는 적당히 붙고, 허리부터 넓게 퍼지는 간편한 휴양지용 플리츠 원피스. 사실 내가 입는 선 드레스는 핫팬츠처럼 짧지도, 캐미솔처럼 민소매 끈이 가늘거나 노출이 적나라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을 짜릿한 여름밤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이 선 드레스를 입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다. 남자들이 말하는 섹스어필 포인트는 이렇다. 가슴과 쇄골을 따라 흐르는 드레스의 실루엣과 바람이라도 불면 치맛단이 찰랑이며 은근하게 드러나는 엉덩이와 허벅지의 곡선. 그게 짧고 타이트한 옷보다도 훨씬 관능적이란다. 선 드레스를 입은 날엔 데이트를 할 때 그의 손길이 평소보다 바쁘다. 셔츠처럼 단추가 주르르 달려 있기라도 하면 굳이 마지막 단추까지 다 열어보고 싶어 한다. 한편 서로 엄청 달아오른 때는 무얼 벗고 자시고 할 새 없이 팬티만 단숨에 벗어던지고 본론에 들어갈 수도 있다. 드레스 자체가 분위기 메이커인 셈이다. 물론 다른 계절에도 뜨거운 밤을 위한 회심의 옷차림은 있지만, 이만큼 편하게 나를 열정의 섹스로 이끄는 건 없다. L_ 자영업, 3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