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해 말아야 해

섹스, 성, 사랑

Q. 가끔 손으로 자위를 하긴 하지만 기구는 한 번도 써본 적 없어요. 한번 사볼까 싶지만 큰맘먹고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보면 현란하고 적나라한 제품이 많아서 주눅 들고요. 저처럼 소극적인 사람도 섹스 토이를 쓸 수 있을까요?
A1 에그 로터로 시작해보세요. 크기도 조약돌만 하고 자위 기구 같지 않아요.
A2 에그 로터. 이거 요물이에요. 국민 바이브레이터죠. 말 그대로 작은 달걀 모양의 바이브레이터인데 클리토리스에 적당히 갖다 대기만 해도 금방 본인이 느끼는 지점을 찾을 수 있어요.
A3 대신 이건 주로 바깥쪽에서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는 용도고, 질안에 깊숙이 삽입하면 빼내기 힘들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A4 바이브레이터는 아무리 작아도 너무 싼 건 피하세요. 진동 세기가 충분하지 않아서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어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입니다.
A5 온라인 쇼핑몰까지 둘러본 정도면 소극적인 것 아니에요! 저는 섹스 토이도 디자인이 실제 성기 같거나 촌스러우면 구매욕이 확 떨어지더라고요. 북유럽 브랜드에서 예쁜 디자인의 제품을 많이 내놓아요. 그런 것 위주로 살펴보면 눈도 한결 편안하고 시도하고 싶은 욕구도 강해질 거예요.

Q. 혹시 관계 도중 본인이 내는 소리에 놀란 적 있나요? 저는 사실 조금 시끄러운 편에 속하는 것 같은데 가끔 섹스를 하다가 제 목소리가 너무 크고 요란해서 남자친구가 싫어할까 봐 지레 움츠러들어요. 역시 자제하는 편이 나을까요?
A1 뭐하러요! 몸 가는 대로 마음껏 소리치소서.
A2 섹스는 그야말로 감각이 전부인 유희인데 욕구를 억누르거나 의식적으로 소리를 줄이면 결국 충분히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A3 남자친구가 관계 중에 표현이 큰 편인데 거북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리고 오래 만나다 보면 상대방 신음도 상황에 따라 구분할 수 있어요. 그걸 알아채기 시작하니 저도 적절하게 대응하게 되고, 잠자리의 밀도가 더 높아지더라고요.
A4 전 오히려 제가 내는 소리에 자극받아서 더 흥분하기도 해요. 그래서 섹스가 살짝 지루하거나 도중에 딴생각이 들면 일부러 교성을 더 크게 내면서 제 목소리에 집중해요. 느끼는 척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잠자리를 더욱 즐기기 위한 일종의 부스터 역할을 해주는 정도예요.
A5 오래 사귄 남자친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적 있는데, 전혀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도 워낙 흥분하고 몰입한 상태라 신경 쓸 겨를이 없다나? 대부분 비슷할 거예요.

Q. 여름휴가 때 비키니를 입으려고 제모하기로 결심했는데, 이왕 하는 거 그냥 남김없이 다 없애는 브라질리언 왁싱을 할까 고민 중입니다. 다가오는 기념일에 남자친구에게 깜짝 이벤트가 될 것도 같은데, 반응이 어떨지 감이 전혀 안 와요. 그리고 이거 많이 아픈가요?
A1 해본 친구가 참을 만하다고 해서 덩달아 받아봤는데 솔직히 진짜 아픕니다. 왁스를 바르고 한꺼번에 뗄 때보다도 그 후가 문제예요. 듬성듬성 남아 있는 털을 족집게로 하나하나 뽑아서 정리해주거든요. 그 과정이 그야말로 중세의 고문 수준이에요. 왁싱숍 직원의 말로는 고통을 잊으려고 술을 한두 잔 마시고 오는 손님도 종종 있다고 해요. 결과는 만족스러워요. 남자친구도 금방 적응하더라고요.
A2 저는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 지 7년 정도 됐거든요. 그간 만난 사람 중에 처음에 놀라는 남자는 있어도 싫다는 남자는 못 봤어요. 무조건 하세요.
A3 그 싫다는 남자, 바로 제가 겪었습니다. 구남친인데 자기는 관계할 때 그 부분에 쿠션(?)이 조금 느껴지는 편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본인 털도 그렇게 수북하게 길렀나 싶었어요.
A4 전 생리할 땐 털이 없는 편이 훨씬 편해서 아픔을 참고 왁싱을 했었는데, 하고 나서 2~3주 차가 항상 고비였어요. 털이 다시 나기 시작하면서 그곳이 퇴근한 아버지 턱수염처럼 까끌까끌해지는데 살이 겹치는 부위라 간지럽기도 하고 미관상으로도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이 시기에는 남자친구도 거슬거슬하다고 그곳을 입으로 애무하는 걸 꺼려서 지금은 왁싱은 안 하고 종종 숱만 쳐요. 왁싱은 포기해도 커닐링구스는 포기 못 하겠더라고요.

취할 수박에 없는 #수박주

지금은 수박 전성시대!
그냥 먹어도 맛있는 수박이지만 여기에 알코올이 첨가 됨으로써
그 사랑 두 배, 세 배가 된 수박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giphy.com

지난 한 방송에서 요식업계의 대부 백종원이 수박주 만드는 방법을 공개하고 난 후
직접 만들어 먹는 이들이 늘며, 수박주의 인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수고스러움을 한 방에 날려 줄 #술박 이 출시 되었다.

@gs25_official

GS 25에서 출시한 술박은 수박 착즙액과 알코올을 섞어 만들었다.
일단 귀여운 패키지는 둘째치고, 색깔도 여심 폭발하게 만드는 핑크 빛에 은은한 수박향이 벌써 취하게 만든다.
술을 못마시는 이들도 술박이라면 첫 걸음마를 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9.2% 도수를 자랑하니 방심하지 말자.
달달한 맛과 귀여운 패키지에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칠 수 있다.
정말 술-술 넘어가는 술박을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

@gs25_official

일명 #수박토닉 .
얼음 가득 넣은 유리컵에 술박을 2/3 만 따르고 그위에 토닉 워터 또는 탄산수를 부어준다.
그리고 수박과 향긋한 민트 잎을 넣어주면 그 어떤 칵테일 부럽지 않다.

레시피 보러 가기 

이 맛있는 술박이 왜 이렇게 대란이라고 하면 바로 리미티드 에디션이기 때문.
한발 늦은 이들을 위해, 없어서 못마시는 이들을 위해,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giphy.com

준비물 : 애플수박,소주, 사이다

애플 수박의 윗부분을 조금만 잘라 준 후 수박 과육을 적당히 파낸다.
그 후 소주와 사이다의 비율을 1:1로 맞춰 부어 주면 끝!

더 맛있게 먹는 팁을 주자면 수박 향이 베일 수 있도록 몇시간 정도 숙성해 둔 후
사이다를 넣으면 더 시원한 스파클링 수박주를 즐길 수 있다.

사실 수박 과즙을 내어 소주와 섞어 먹는 방법도 있으니
취향껏 쉽고 편한 방법으로 맛있는 수박주를 즐겨보자.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해로울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시대의 개척자

사진작가 김옥선의 전시 <베를린 초상(Berlin Portraits)>이 열리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들어 서면 비슷한 구도의 커다란 인물 사진이 줄을 맞춰 걸려 있다. 사진 속 재독 한인 간호 여성들은 1960년대에 베를린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갔다. ‘주변과 이방’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작가는 이번엔 베를린에 사는 한인 간호사들의 집을 찾아갔다. 작가에게 선뜻 문을 열어준 그들은 마음의 문도 함께 열었다. 작가 역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음의 문이 열렸다. 어떤 이는 간호사로 일하며 모은 사업 자금을 들고 사라진 남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다른 이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집을 따듯한 말로 안내했다. 슬픔을 강인함 뒤로 밀어놓고 낯선 곳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이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텍스트가 아닌 실재가 전하는 이야기와 그로 인한 마음의 움직임이 읽힌다.

전시의 시작점은 언제인가? 2017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라는 전시를 했다. 재독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기 시작한 시점이 1966년이니, 50주년을 기념한 전시였다. 처음 독일에 갈 때는 3년 계약직의 이주노동자 신분이었고, 후에 강제 귀국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명령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할 때 돌아가겠다며 체류 연장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했다. 당시 재독 간호사에 대한 독일 내 여론이 좋았던 터라 사람들이 선뜻 서명에 참여해 체류 연장 허가를 받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한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비자 기간이 연장된 것이다. 이는 세계 이주 노동사의 관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쟁취다. 현재 베를린에 베를린 재독 여성 모임이 있는데 주축이 간호사들이다.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한국 작가와 간호사들이 뜻을 모아 자신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했고, 베를린에 거주하는 간호사 세 분이 강연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많은 한인 간호사가 여전히 베를린에 거주한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작업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 때 만난 간호사들에게 작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는데, 흔쾌히 자신들이 섭외를 도울 테니 베를린에 와서 해보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장비를 챙겨 베를린으로 떠났다. 당시 한 달 정도 베를린에 머물며 촬영했는데, 한 번에 끝내지 않고 이듬해에 한 번 더 촬영했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국민들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던 시기다. 여성 인권 수준은 더 낮았을 텐데 선택당하는 삶이 아니라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그렇다. 보통 ‘파독 간호사’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들은 이 표현을 거부한다. 누군가 보내서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서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루트를 만들어줬을 뿐이고 경비를 비롯한 모든 것을 개인이 준비해서 독일로 갔다. 그래서 파독이 아닌 재독 간호사라 부른다. ‘파독’이라는 말에는 가족을 위한 희생, 외화를 버는 애국, 이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 재독 간호사 여성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 덕분에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파독 간호사란 용어를 들었을 때는 이분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연민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개척자의 삶이다. 그렇다. 인권에 일찍 눈을 뜨고 투쟁하며 만들어간 삶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존경스럽다.

모든 촬영이 아주 사적인 영역인 집에서 이루어졌다. 인물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정서적으로 피사체와 가까워져야 하는 만큼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다. 나로서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재독 간호사들이 연세도 많고 살아온 세월 동안 경험한 일도 다채롭다. 지금까지 이방인을 주제로 외국인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때와는 다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바로 훅 들어온다고 할까? 내가 이런 작업을 위해 베를린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겼고 작업 의도를 잘 이해하셨다.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셨다. 거리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만나자마자 가까워지고 공감했으며 그들의 삶에 내가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음의 문이 열렸다.

재독 간호사 중에는 독일인과 결혼한 여성이 많으니 개인적인 상황이 비슷해 더 쉽게 교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나 역시 국제결혼을 했고 재독 간호사 중 많은 분이 독일인과 결혼했다. 나는 결혼 후 1년 정도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이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해서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가 고향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처음에는 내가 마치 이방인처럼 느껴진 시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 거주하는 보통의 여성이 외국인과 결혼하면 외국에 나가 살라며 등을 떠밀던 때다. 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인 여성에게는 비자를 발급해줬지만 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에게는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런 현실이 부당하다는 생각에 제주에 사는 국제결혼한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국제결혼 한 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포트레이트인 <해피 투게더> 작업을 하게 됐다. 그 작업을 통해 국제결혼 한 부부를 대하는 법률이 얼마나 부당한지 시각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베를린 초상>을 작업하면서 내 미래의 모습이 재독 간호사의 현재 모습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겪은 세월이 더 궁금했고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토록 의연하게 지나온 굴곡 많은 생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난 너무 엄살을 부리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들었다.

이주민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편견이 가득하다. 베를린에서 작업하던 2017년 당시 제주에 많은 난민이 들어왔다. 베를린의 간호사들은 이 뉴스를 접하고 자신들도 난민이자 이주민이었고 독일이 받아준 덕에 이렇게 자리 잡고 살고 있으니 우리 역시 난민을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재독 간호사들에게서 어떤 표정과 포즈를 이끌어내고 싶었나? 인물에 많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고, 연출로 상대방을 장악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삶을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이번 작업에서는 그게 내 역할이었다.그분들이 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를 바랐다.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크게 웃고 있지 않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크게 웃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면을 바라보라는 정도만 요구했고, 의자에 편히 앉아 이야기하다가 찍거나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는 정도만 연출했다. 그렇게 자신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있는 순간을 담았다.

사진에 인물의 이름이나 나이 같은 신상이 전혀 적혀있지 않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개개인을 부각하기보다는 독일에 계신 간호사 모두에게 주목하고 싶었다. 한 개인의 삶에 있는 모든 서사에 경의를 표하지만, 전시는 이들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과 성취를 담고자 했다. 전시된 사진은 언뜻 보기에는 거의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된다. 반복을 통해 관람객이 사진 속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연스레 사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거다. 각자 사진을 보며 대상의 서사를 완성해가길 바란다.

사진은 어떤 장점과 기능을 가진 예술의 매개체라고 생각하나? 사진은 기계가 찍는다. 나와 사물 혹은 인물 사이에 기계가 있기 때문에 사진 속 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실재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은 실존하는 것을 보여주는 힘을 지니고 객관성을 지닌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과장되거나 주관적이지 않으며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 거다. 실재를 보여주는 사진이 좋다. 작업의 주제를 정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주관적이지만 카메라는 결국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그 정도의 거리감이 곧 객관성인 것 같다. 이번 전시 <베를린 초상>도 드라마틱한 느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진에 가치 판단을 포함하지 않고 관람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이다.

<해피 투게더>나 <베를린 초상> 등 작품을 기획할 때 주로 어떤 대상에 마음이 움직였나? 나는 국제결혼을 한 부부, 여성, 이방인, 난민을 주제로 주로 작업해왔다. 이번 전시작을 포함해 최근 작업은 비슷한 이미지가 반복되고 일렬로 병치되도록 해사람들이 사진 속 대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내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보여주며 사진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작가로서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읽어내는지 궁금하다. 이방인에게 관심을 가진 건 나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주에는 남편처럼 외국인이 꽤 많이산다. 남편은 제주도에서 교직에 종사했었는데, 어느 날 그일이 하기 싫다며 다이빙 숍을 운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배를 만드는 이유를 물었더니 세계 일주를 하겠다더라. 그렇게 혼자 책을 보며 1, 2년 공부하더니 배를 만들기 위한 자재를 구하기 시작했다. 철판을 알아보다 크기가 맞지 않아 외국에서 수입하는 합판을 구해 4년 동안 배를 만들었다. 시간 날 때마다 대패질을 해가며. 우리는 보통 50세가 넘으면 노후를 준비하지 않나.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고. 그런데 남편이 꿈꾸는 것은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었다. 그 배가 과연 뜰까 싶었다. 남편뿐 아니라 제주에 사는 외국인 중에는 직업은 돈을 버는 수단이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은 따로 있는 사람이 많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버는 거지. 삶을 보는 포커스가 달랐다. 그들을 보며 내가 살아온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이방인들에게서 어딘가에 정착해 집을 마련하고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보다 원할 때 어디로든 이주할 용기를 보았다. <함일의 배>나 <노 디렉션 홈> 같은 작업에서 나와 다른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는 이방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 배는 어떻게 되었나? 배는 떴다. 만들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진수했다. 인생 작업이었지. 그런데 독일 국적으로 등록됐다. 외국 국적의 배가 바다를 통해 들어온게 아니라 제주의 바다에서 만들어졌으니 지금껏 없던 사례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요트 문화가 거의 없어 요트로 등록하는 게 꽤 복잡했고 6개월이나 걸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태풍이 왔다. 태풍에 배가 날아가서 등대에 맞고 깨졌다. 그야말로 인생 드라마 아닌가! 이 일련의 과정을 배의 이름이기도 한 <카벵가>라는 영상 작업으로 남겼다. 한 번 사는 인생, 극한까지 해본다는 남편의 태도가 부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