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들의 이야기

영화 우리집

우리 집은 왜 이럴까. 부모님은 늘 서로 소리 지르며 싸운다. 내가 밥을 차려준다고 해도 온 식구가 식탁에 앉아 밥 한 번 먹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집은 왜 이럴까. 부모님은 일하느라 우리를 돌볼 겨를이 없다. 이사는 또 얼마나 자주 다니는지. 그리고 또 이사를 가야 한다. 영화 <우리집>은 도대체 우리 집은 왜 이런지 속상한 세 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문체를 해결하기 위해 있는 힘껏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각기 나이가 다른 아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힘을 주며 자신들의 방법대로 ‘우리 집’을 위해 애쓴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그런 시간을 지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며, 우리가 지금을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온 힘을 다해 그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작 <우리들>과 달리 <우리집>은 나이가 서로 다른 아이들 3명이 주인공이에요. 그 연령대 아이들은 1년 차이도 성장 정도의 차가 커서 작업 과정이 전작과 달랐을 것 같아요. 가은 오디션을 할 때 많은 연령대의 아이들을 만났어요. 유진이는 극 중 일곱 살인데 오디션을 볼 때는 여섯 살 아이부터 열 살 아이까지 두루 봤죠. 그런 식으로 나이가 다른 3명의 아이들을 캐스팅하다 보니 초등학생은 물론 중학생 아이들까지 만나게 됐어요. <우리들> 때는 또래 친구들이 등장하니까 배우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이었고, 학업 진도를 비롯한 여러 면이 비슷해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수월했어요. 그런데 연령대가 다른 여러 아이들을 만난 이번 영화는 마치 각각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죠. 모두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다고 할까. 처음에는 이 배우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친해질수록 배우들이 서로 섞여 드는 느낌이 들었고 나도 훨씬 편해졌죠. 나중에는 뭔가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이었어요.

나이가 서로 다른 아이들로 이야기를 끌고 간 이유가 뭔가요? 가은 여러 연령대의 아이들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극을 구성하다 보니 어릴 때 동네에서 만난 언니, 동생들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어릴 때는 같은 나이의 친구들만 친해지는 게 아니라 놀이터에서 놀다 친한 언니가 생기기도 하고 동네 가게에서 동생과 놀게 되기도 하잖아요. 그럴 때면 친구와는 또 다른 유대감이 생겨요. 언니들은 내가 어리니까 나를 도와주고, 동생들을 만날 때면 또래나 언니들을 만날 때와는 다른 감정이 생기고. 어릴 때부터 언니나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우정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우정이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하고.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영화의 출발점이 포스터에 나와 있는 것 같아요. 우리집은 왜 이럴까. 어릴 때는 우리 집만 다른 집과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어른이 보기에 별것 아닌 고민인데 어릴 때는 엄청 크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은 다들 한 번쯤 해본 생각이 아닐까요?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니어도 ‘우리 집은 왜 이러지?’ 이런 생각. 오디션 볼 때 굉장히 많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리 집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말했어요.(웃음) 저마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다를 테니.

<우리집>은 어른이 만든 아이들의 이야기예요. 아이들을 화자로 삼는데 그 때문에 접근할 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는 않았나요? 마치 자신이 다 알고 겪은 일처럼 이야기를 풀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 지점이 고민스러웠을 것 같기도 하고. 가은 지나온 제 유년기를 회고하듯이 쓰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사실 어른이 되어도 생각하거나 고민하는 프로세스가 크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극 중 인물이 나라면 어떻게 느꼈을지, 어떤 행동을 했을지 가정해봐요. 시나리오를 쓸 때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렇게 조사했는데도 배우 캐스팅을 확정한 다음에 물어보는 경우가 더 많죠.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 것 같아?” “이 친구는 이렇게 할 것 같아?” 하는 식으로.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전에는 큰 덩어리의 이야기를 다듬는 과정이라면 배우들을 만나면 배우들의 의견을 들으며 이야기 구조를 디테일하게 다듬게 돼요. 배우들한테 물어보고 시나리오를 고치는 경우도 많고 아예 빼버릴 때도 있고요.

각자 연기한 인물을 어떻게 소개하고 싶은가요? 예림 유진이는 언니들 말을 잘 안 듣고 엄청 까불까불하는 아이예요. 장난을 많이 치고 실수도 많이 하는. 시아 유미는 가족을 많이 사랑해요. 그런데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지쳐 있고, 마음속에는 고민이 많은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동생이 실수해도 크게 화내지도 못하고. 어딘가 따듯한 아이예요. 나연 하나는 겉보기에는 밝은 친구예요. 유미와 유진이도 밝게 대하고. 하지만 부모님의 불화 때문에 걱정이 많아요. 그런 불안한 마음을 밖으로 표출할 수 없으니 마음에 상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안타까웠어요.

지난해 여름 촬영한 영화예요. 돌이켜보았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촬영 순간은 언제인가요? 예림 만들기. 집에서 상자를 가지고 언니들이랑 집을 만들었을 때 너무 재미있었어요. 제가 만들기를 엄청 좋아해요. 제가 만든 종이 집을 큰 화면으로 볼 생각을 하니까 더 좋아요. 가은 맞아. 그때 진짜 열심히 만들었어.

그 종이 집을 직접 다 만든 거예요? 가은 네, 이 친구들이 직접 상자를 꾸미고 풀로 붙이고 그렇게 만들었어요. 공들여서 열심히 만들어 그런지 더 좋아한 것 같아요.

영화에 부수는 장면이 나오던데 마음이 아팠겠어요. 가은 진짜는 남아 있어요. 부수는 집은 일부러 따로 만들었거든요. 그거 따로 만든 거야. 언니들이 부순 거. 시아 저는 부동산 중개인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일부러 이 집에는 벌레도 엄청 많고 덥다고 말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이들이 순진하고 말광량이 같아 보여서 좋았고, 촬영할 때도 그 장면이 재미있었어요. 가은 그날 진짜 더웠던 거 알아? (모두) 완전 더웠어요.(웃음) 가은 오늘 날씨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더웠어요. 게다가 집 안이어서 더 더웠죠. 기온이 40℃ 넘게 올라갔을 거예요. 아마 전체 일정 중 그날이 가장 더웠을 걸요. 그래도 그날 촬영이 재미있었다니 다행이에요.(웃음) 나연 저는 옥상에서 집을 만드는 장면이 좋았어요. 날씨도 좋았고 하늘도 참 예뻤거든요. 그 집을 만드는 장면에서 아이들이 진짜로 ‘우리 집이 이사도 자주 안 다니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가은 저는 클라이맥스에서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인사 나눌 때가 기억에 남아요. 태풍 때문에 날씨가 오락가락하던 때였는데 날씨가 좋아질 거라는 소식에 지방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서울로 올라와서 찍었어요. 지방에서 올라와 바로 그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 스케줄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어요. 중요한 장면을 너무 서둘러 진행하나 싶기도 했고. 날씨를 봐가며 촬영하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는데 이 친구들이 집중을 아주 잘해주었죠. 그 장면은 리허설도 하지 않았어요. 촬영 도중에 시나리오를 쓴 장면이라 장면에 대해서 촬영 당일인지 전날인지 얘기했죠. 연습한 장면이 아닌데도 모니터링 카메라로 클로즈업 된 아이들 표정을 보는데 울컥했어요. 저뿐 아니라 스태프들도 숙연해졌고요. 편집할 때도 배우들의 얼굴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나이 어린 배우들과 작업하는 만큼 꼭 지키는 수칙이 있을 것 같아요. 조심스럽거나. 가은 촬영 수칙도 적어보고 그랬는데 실제로 친구들에게 그런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어요. 일단 주인공인 걸 떠나 아이들이 누구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현장을 만들고 싶었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많이 했어요.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이긴 하지만 촬영 현장은 어른 중심이고, 그곳에 있는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어요. 배우들 모두 이 점에 동의하고 시작한 거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속도와 어른들의 속도가 같을 순 없죠. 그런데 자꾸 어른의 속도에 맞춰서 굴러가게 될 때 속도를 다시 늦추고, 쉬었다 가고 좀 더 시간을 들이려고 했어요. 저뿐 아니라 제작진 모두 그 점을 염두에 뒀죠. 현장에선 어른인 우리 모두 아이들의 보호자이니까 아이들에게 시간이나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잠시 시간을 가졌어요. 다른 촬영장처럼 계산에 의해서 숨 가쁘게 진행하진 않았어요. 자주 아이들에게 시선을 두려고 노력했지만 물론 안 될 때도 있었죠.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안 될 때도 물론 있었고.

클라이맥스에서 그렇게 인사를 나누기까지 세 아이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나연 처음에 하나는 단지 부모님의 불화를 막고 싶은 아이였어요. 아마도 하나의 부모님은 이혼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하나는 엄마, 아빠와 계속 연락하며 지내고 그때보다 더 안정된 모습으로 살지 않을까요? 부모님이 이혼해도 가족은 존재하잖아요. ‘가족은 완벽해야 해’라는 생각 때문에 부모님의 이혼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결국엔 완벽한 가족이 꼭  하나의 모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 같아요. 시아 유미가 처음에는 감정 표현을 잘 안 해요. 그런데 후반부에 쌓아놨던 자신의 감정을 막 드러내잖아요. 그 점이 좋았어요. 너무 쌓아두기만 하면 상처가 되니까 그렇게 드러내서 좋았어요. 예림 음…, 살짝 변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엄청 까불고 장난꾸러기였는데 하나 언니와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좀 슬펐어요. 가은 뭔가 슬픔을 느낄 수 있게 된 거구나. 이별하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나 봐. 하나 언니가 너무 좋은데 헤어지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

<우리들>은 아이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다뤘어요. 반면 <우리집>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죠. 지난 작품보다 훨씬 동적인 느낌이에요. 가은 <우리들>은 시나리오 작업만 2년 넘게 했어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3~4년의 시간이 걸렸고. 아이들이 계속 예민하게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싸우는 내용이다 보니 편집할 무렵엔 지치더라고요. 다음 작품에서는 애들이 싸우지 않고 서로 힘을 합해 각자 고민을 털어놓으며 친해지고, 열심히 움직이는 영화를 만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의 감정이 이번 작품을 만드는 큰 동력이 되었죠. 감정을 막 쓰기보다 좀 더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 때문에 이 친구들이 더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생도 엄청 많이 했죠.

영화 우리집

영화가 여름이라는 계절과 무척 잘 어울려요. 가은 이번 영화는 여름이 잘 표현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태프들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죠. 워낙 땡볕에서 촬영하기도 했고. 해가 너무 뜨거워서 다들 머리 위에 얼음 주머니 하나씩 올려놓고 힘들게 촬영했어요. 무더위에 찍어서 여름 느낌이 물씬 나는 영화가 나온 것 같아 저와 스태프들은 좋았죠. 아이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고생하며 찍긴 했지만요.

처음부터 여름이라는 계절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신 건가요? 가은 네, 처음부터 여름방학을 배경으로 생각했어요.

아이들의 움직임, 그렇게 움직여서 나는 땀, 아이들 옷의 색감까지 모두 여름이어서 더 느낌이 좋았어요. 가은 의상은 저희 스태프들과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에요. 아이들이 실제 입는 옷으로 보였으면 했어요. 배색도 신경을 많이 썼고요. 캐릭터에 따라 변화도 좀 주고. 배경이 처음부터 여름방학이었던 건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잘 못 쓰겠어요. 겨울엔 잘 움직이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레 여름을 배경으로 쓰게 된 것 같아요. 방학으로 특정한 건 아이들이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학교친구들과 떨어져 있을 때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온전히 세 아이만의 시간일 때, 그렇게 만나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영화는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났지만 그 인물들이 계속 살아 있다면 어떻게 지낼 것 같아요? 시아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갔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 언니와 계속 연락하며 지냈을 거예요. 예림 엄마, 아빠가 일을 다 하고 집에 돌아오면 하나 언니를 소개해줄 거예요. 그러곤 한 3일 후에 언니가 놀러 오면 옥상에서 또 재미있게 놀았을 거예요.

감독님은 이 세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기를 바라나요? 가은 이 친구들의 바람에 맞는 대답을 들려줘야 하는데. 예림 감독님의 생각을 얘기하시면 돼요. 가은 진짜? 감당할 수 있겠어? 예림 답은 없어요.(모두 웃음) 가은 답은 없구나.(웃음) 유미랑 유진이 네는 결국 이사를 가게 됐을 거예요. 당장은 아니어도 가까운 미래에 이사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리고 하나 부모님도 관계가 회복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 셋이 나눈 우정의 힘은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동안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다 학년이 올라가고, 이사 가고, 새로운 일을 겪다 보면 연락을 안 하게 될 수도 있겠죠. 멀어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어린 시절 이렇게 좋은 언니, 동생과 굉장히 큰 경험을 했다는 점이 중요해요. 영화에 보면 아이들 셋이서만 집이 아닌 곳에서 하루를 지내잖아요. 여름방학동안 서로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보낸 시간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는 내내 위로와 용기가 되었을 거예요. 평생 기억할 만한 여름을 함께한 거죠. 그 여름을 추억하며 훨씬 더 튼튼하고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친구들이 앞으로 감정도 더 솔직하게 잘 표현하며 더 재미있게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을 거예요. 그 시절이 좋은 경험이 되었기에 세 아이 모두 되게 잘살았을 거예요.

아이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건 어떤 매력이 있나요? 가은 저는 어른이 되면서 자꾸 뭔가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많이 알아가고 지식도 쌓이고 경험도 많아지는데 실제로는 어린 친구들만큼 온전히 마음을 다 쏟아서 문제를 정면으로 보고 덤벼들지는 못해요. 내 방식대로 붙들고 해결하는 힘은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더 커요. 성인이 될수록 그런 힘을 잃어가죠. 쉽게 포기하고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성인이 되니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고 싶어지더라고요. 하지만 어린 친구들에게는 단순한 진심의 어떤 힘이 있어요. 아이들만이 만들 수 있는 기적이 있고요. 그 기적이란 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느끼는 놀라움인 거죠. 이를테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내가 어떻게 이런 경험을 했지, 이런 감정을 어떻게 느끼게 됐지, 이런 식의. 그런 순간을 성인보다 아이들이 많이 마주해요. 아이들이 마주하는 그런 순간을 영화를 통해 어른들에게 보여준다면 그 또한 성인들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요? 만드는 제게는 큰 힘이 되거든요. 촬영장에서도 배우들이 단순해서 집중을 더 잘해요. 그 힘을 성인들은 따라갈 수 없죠. 영화를 만들면서 저도 아이들에게 많이 배워요.

영화가 곧 개봉해요. <우리집>을 본 후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어떤 감정을 안고 돌아갔으면 하나요? 나연 ‘나도 저러던 때가 있었는데’ 하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이전의 고민을 잊고 살아가는 분이 굉장히 많잖아요. 하나와 유미, 유진이가 겪는 일을 보며 과거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공감해주시면 좋겠어요. 가은 저희 배우들과 사랑에 빠질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일단 그 점은 확신합니다.(웃음) 저도 편집하면서 아이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촬영할 때는 잘 몰랐는데 누군가 이토록 열심히 땀 흘리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어요. 정말 마음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문제가 우리에게 닥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영화 속 아이들은 그 문제들 때문에 자신들이 아프더라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런 과정이 참 아름다웠어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시기를 보내면서 얻는 가치가 있잖아요. 스스로 얻는 가치. 그래서 이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나설 때 각자 겪은 과거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칭찬도 많이 해주었으면 해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해서 쓸데없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길 바라요. ‘그래, 열심히 살았구나’, ‘나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 과정이 유의미한 것이었구나’ 그런 과정이 쌓이면 이렇게 하루하루 잘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이런 위로가 용기로 작용할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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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IN MY LIFE

정해인 김고은
정해인 니트 스웨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고은 니트 스웨터 샤넬(Chanel), 데님 팬츠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J12 워치 샤넬 워치(Chanel Watches),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해인 김고은
카디건형 원피스 샤넬(Chanel), 이어링 샤넬 화인주얼리(Chanel Fine Jewelry).
정해인 김고은
재킷 멀버리(Mulberry),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해인 김고은
정해인 니트 스웨터 누메로벤투노(N˚21), 안에 입은 티셔츠 프레드 페리(Fred Perry), 팬츠 와이 프로젝트(Y/Project), 슈즈 에르메스(Hermes). 김고은 롱 카디건과 울 코트 모두 르메르(Lemaire), 와이드 팬츠 제인 송(JainSong),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해인 김고은
니트 스웨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데님 팬츠 프레임 바이 무이(Frame by MUE), 골드 체인 네크리스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ta), 슈즈 르메르(Lemaire),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두 남녀의 이야기가 1994년부터 시작해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요.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두 사람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해인 하고 싶은 일과 현실의 벽에 부딪혀 피할 수 없는 일이 ‘현우’에게 다가와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가 있어 초반에는 조금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어두운 면도 있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면서 좀 더 밝고 긍정적으로 변하죠. 고은 ‘미수’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요.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기보다는 급여가 꾸준히 들어오고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죠. 어떤 면에서는 자존감이 좀 떨어지기도 해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겪기도 했고. 그런데 현우를 만나며 변해요. 그렇다고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완전히 변하는 건 아니지만 좀 더 능동적으로 변하죠. 현우는 미수의 성향대로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상대예요. 불안정하니까요. 그런데 미수는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행동하는 변화를 겪죠.

시나리오를 보고 처음 든 감정은 어떤 것이었나요? 해인 시나리오가 더 재미있게 다가온 이유는 미수 역할을 (김)고은이가 하게 될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감정이입이 더 잘됐어요. 그리고 시나리오의 전체적이 느낌이 따듯했죠. 위로받기도 하고. 아픈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모습이 가장 좋았어요. 고은 시나리오로 처음 만난 미수는 굉장히 현실적인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 또 현우와 미수의 사랑이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한번쯤 꿈꿔볼 법한 지점이 있어요. 지나치게 판타지 같지 않아서 좋았고.

현우와 미수의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해인 처음에는 갇혀 있는 듯한 현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열리는 순간순간을 잘 드러내려 했어요. 고은 비단 남녀의 사랑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과 상황이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미수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로맨스와 멜로라는 장르 속 배우 정해인과 김고은은 익숙한 면이 있어요. 같은 장르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아요. 고은 미수와 현우가 동갑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이 둘이 사랑하는 모습이 아주 현실적이에요. 자취방에서 만나고 함께 퇴근하고 장 보고. 굉장히 현실적인 공간이 배경인데 그래서 더 공감하게 돼요. 해인 맞아요. 촬영할 때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손잡고 길을 걸어가는데 이 커플 너무 부럽다고. 고은 소소한 것을 나누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정지우 감독의 말랑한 멜로영화예요.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나 <사랑니>처럼 마음이 가는 로맨스영화를 기대하게 해요. 해인 처음 함께 작업했는데 말 그대로 장인정신으로 영화를 만드시는 분이에요. 한 땀 한 땀. 굉장히 디테일한데 그렇다고 배우에게 디렉션을 엄청 디테일하게 주진 않으세요. 추상적으로 뭔가에 빗대어 얘기하시기 때문에 처음에는 감독님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런데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니까 감독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금세 깨닫게 되더라고요. 감독님과 대화하려고 엄청 뛰어다녔어요. 모니터링 카메라와 촬영 현장 사이에는 거리가 있잖아요. 처음에는 감독님이 계속 제가 있는 곳으로 뛰어오시는데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뛰어서 중간 지점에서 만났어요.(웃음) 고은 감독님은 어떤 장면을 고민하며 배우들에게 얘기하실 때 추상적으로 디렉션을 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배우에게 어떤 제한을 두고 싶어 하지 않으시거든요. 명백하게 설명해 자신의 의견이 정답처럼 느껴지는 걸 꺼리시죠. 그래서 오랜 시간 대화하게 되는데, 이제 영화 촬영장이 근무시간에 제한이 있잖아요. 그래서 감독님 말씀을 더 빨리 이해하려고 엄청 노력했어요.(웃음) 잘됐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전 감독님과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하니까 도움 되는 사람이 되려고 그런 노력을 기울여봤습니다.(웃음)

정해인 김고은
셔츠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카디건 마르니 바이 무이(Marni by MUE), 팬츠 코스(COS), 슈즈 알든 바이 유니페어(Alden by Unipair).
정해인 김고은
니트 스웨터 마르니 바이 무이(Marni by MUE), 팬츠 코스(COS).
정해인 김고은
정해인 티셔츠 프레드 페리(Fred Perry), 팬츠 와이 프로젝트(Y/Project), 슈즈 에르메스(Hermes). 김고은 롱 카디건과 울 코트 모두 르메르(Lemaire), 와이드 팬츠 제인 송(Jain Song),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촬영 현장 분위기도 좋았을 것 같아요. 꼭 계절의 영향이 아니어도 오늘 화보 촬영하는 모습을 보면 그때의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져요. 함께 출연했다고 모두 친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고은 아, 그럼 너무 힘들 것 같아요. 해인 맞아요.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럼 참 괴로울 것 같아요.

서로에게서 찾은 반전 같은 면모도 궁금해요. 해인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요. 연기할 때와 하지 않을 때가 다르지 않고 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고요. 격의 없이 대해주는 면도 고마웠어요. 현장에서 고은이를 보고 있으면 저만 실수하지 않으면 별일 없겠다 싶었어요. 물론 반전도 있죠. 평소에도 밝고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있는데 얼굴이 붓는 날이면 애교가 더 많아져요.(웃음). 고은 아니, 붓는 게 저는 특히 복불복이에요. 전날 많이 먹었다고 붓는 것도 아니고 굶는다고 붓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사석에서는 상관없는데 카메라에 잡히면 좀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그런가봐요.(웃음) 드라마 <도깨비>가 끝나고 (정)해인 오빠는 이상하게 우연히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으로 만나서 무척 반가웠죠. 제가 격의 없이 대했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다 상대가 잘 받아주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그게 합이 잘 맞는 거죠. 웃긴 얘기 하면 잘 웃어주고, 그래서 현장 분위기도 잘 아우를 수 있고. 반전은! 술을 잘 마셔요. 못 마시게 생겼는데 술을 마셔도 흔들림이 없어요.(웃음)

겉으로 드러나는 분위기도 닮은 것 같아요. 2019년에 <유열의 음악앨범>을 얘기하는 데 이질감이 전혀 없다고 할까요. 고은 둘 다 변화에 민감하거나 시대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 시대의 아날로그가 주는 매력은 뭘까요? 해인 편안함. 시간이 더 머무는 느낌이에요. 노래와 공간, 사진 모두요. 아날로그의 시간은 천천히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고은 아날로그가 좋은 점은 아주 많죠. 세상이 점점 간편해지고 빨라지고 있잖아요.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고. 이렇게 빠른 속도로 뭔가 하나에 집중해서 하다 보면 하나를 놓치기 마련이에요. 그렇게 놓친 지점들이 아날로그에는 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의 시대가 언젠가는 아날로그가 될 수도 있겠죠. 그때는 또 지금을 추억할 수도 있고.

아날로그 아이템 중 사라지지 않고 영원했으면 하는 것이 있나요? 고은 필카! 필름 카메라는 필름 한 통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 장 한 장 마음을 담아 찍게 돼요. 디지털카메라는 고속 연사로도 찍을 수 있으니까 촬영하는 마음이 다를 것 같아요. 해인 저도 필카요. 영화에도 제가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고은이가 보는 장면이 나와요. 소중한 순간의 기억을 찍어서 방에 걸어둔 거죠. 디지털카메라도 인화를 맡길 수 있지만 아날로그처럼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이 덜하죠.

과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해인 촬영하면서 느꼈어요. 미수네 집으로 가는 언덕을 지나는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어릴 때 생각이 났어요.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골목길과 아주 비슷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떠올랐죠. 고은 저도 그래요. 어릴 때 친구들이랑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엄청 즐겁게 놀았거든요. 해 지는 게 싫었어요. 그때는 휴대전화도 없으니까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엄마가 창문 밖으로 큰 소리로 저를 불렀죠. 해 지고 밥 냄새가 나면 집에 들어갈 시간이었죠. 그래서 밥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싫었어요.(웃음)

모든 작품마다 배우는 점이 다를 것 같아요.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을 마친 후에도 그런 점이 있겠죠? 해인 저는 있어요.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끝내고 이 작품을 시작했는데 표현할 때 절제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현우가 워낙 갇혀 있고 어두운 캐릭터이다 보니 말 한마디라도 캐릭터의 결과 다르게 하면 너무 튀었죠. 절제하며 표현하는 것에 대해 감독님과 고은이랑 많은 얘기를 나누며 배웠어요. 고은 작품마다 성장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어요. 한 작품을 끝내면 자기반성의 시간도 가지곤 해요. 그러다 보면 ‘그때 왜 그랬니?’ 이러면서 머리 박고 그래요. 이상하게 잘한 순간보다 그러지 못한 순간이 많이 떠오르거든요. 그게 꼭 연기에 국한된 건 아니고, 저 자신에게 아쉬운 지점들이죠.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이 끝나고 한참 지나 해인 오빠에게 문자도 보냈어요. ‘더 나은 파트너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다’고. 해인 맞아요. 고은이가 LA에 있을 때였어요. 고은 그날 진심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어요. 남들이 알아채는 실수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저만 아는 실수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 게 생각났어요. 그런 실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죠.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고 계속 그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나아갈 것 같아요.

인간은 왜 자꾸 반성하는지 모르겠어요. 반성의 시간만 없어도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고은 그 시간을 짧게 가지면 되죠. 짧게.(웃음) 해인 그런데 그 문자 보고 깜짝 놀랐어요. 고은 현장에선 내가 늘 너무 완벽했어?(웃음) 해인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것과 문자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게 느낌이 다르잖아요. 진심이 담긴 문자가 너무 진지하게 오니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했어요. 어떤 표정과 마음으로 그 문자를 썼을지 그려졌거든요. 여행을 갔다는 건 뭔가 떨치고 비워내려 간 건데 연기 생각만 계속 하고 있는 게 느껴졌나 봐요. 고은 내가 너무 완벽했다면 그것만 기억해.(웃음)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여행을 갔어요. 혼자 동떨어져 있다 보니까 전작이 자연스레 생각나더라고요. 연기는 이미 해버린 거니까 어쩔 수 없는데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제 마음에만 담아두지 않고 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해인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그런데 말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몰랐을 거예요.(웃음)

한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개봉 전에 홍보하고 개봉하기까지, 가장 즐거운 순간과 힘든 순간이 있다면? 해인 가장 즐거울 때는 촬영할 때, 가장 힘들 때도 촬영할 때. 홍보 일정은 바쁘긴 해도 하면 되는데 촬영할 때는 고민도 많고 머릿속도 복잡하고 걱정도 되고 그래요. 고은 극 중 인물로 연기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잘하든 못하든 현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요. 그런데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연기할 때는 괜찮아요. 어차피 카메라 앞의 김고은은 저 자신이 아닌 극 중 인물이니까. 그런데 오늘 <비긴어게인> 촬영하러 가거든요. 너무 걱정돼요. 그때는 연기가 아니라 저 자신을 보여주는 거니까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마지막 질문이에요. 영화 제목이 음악 앨범이니까. 조금 오글거리는 질문이기는 한데, 오늘의 앨범에 담고 싶은 음악은? 해인 루시드 폴의 ‘보이나요’. 고은 전 이소라의 ‘그대와 춤을’. 사랑하는 그대와 춤을 춘다는 내용인데,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서 틀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정해인 김고은
정해인 셔츠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카디건 마르니 바이 무이(Marni by MUE). 김고은 니트 스웨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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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김규리

김규리 화보
원피스 와이 프로젝트 바이 분더샵 (Y/Project by BoonTheShop).

요즘의 계절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밝고 햇살이 비치는 느낌의 노란색 같다고 말한 배우 김규리가 인터뷰를 마치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부채를 집어 들었다. 커다란 부채에는 노란 바탕에 빨간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여름이면 부채에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선물해요. 이건 어제 그린 거예요. 먼저 가장 큰 줄기를 그리고 균형을 맞춰가며 가지를 그려 넣죠. 매화꽃은 겨울이 지나고 봄으로 갈 때쯤 가장 먼저 피는 꽃이에요.” 김규리는 영화 <미인도>에서 신윤복을 연기하며 한국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도 수묵화와 민화를 계속 그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쯤 해서 배우 일을 관두고 한국화 화가로 살아볼까 결심도 했지만 다시 배우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봄이 찾아왔다.

김규리 화보
원피스 하고(HAGO), 블랙 터틀넥 조셉(Joseph).
김규리 화보
숄 코트 코스(COS), 슈즈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규리 화보
체크 코트 푸시버튼(pushBUTTON), 원피스 코스(COS).

김규리 화보

김규리 화보
체크 코트 푸시버튼(pushBUTTON), 원피스 코스(COS).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촬영을 끝냈다. 이제 한숨 좀 돌리겠다. 아직 아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난 날 1시간 자고 칠곡에 있는 숲에 다녀왔다. 산림청 한국산림복지진흥원 홍보대사로 일하게 됐는데 숲 여행을 하며 그 숲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아마 10월쯤에 유튜브 영상과 책으로 나올 것 같다. 숲마다 특징이 모두 다른데, 어느숲에 가면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체험학습장이 있고, 어느 숲에가면 수목장이 있다. 수목장이 있는 곳은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그옆에 캠핑장을 열어 주민들이 운영할 수 있게끔 했다. 여러 숲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됐다.

숲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겠다. 그러고 싶었다. 나무를 원체 좋아하기도 하고. 힘들 때면 소나무의 지혜를 배웠다. 한 번은 너무 답답해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뭐라도 하고 싶어 청계산에 갔다. 그냥 막 올라갔다. 곧 정상에 오를 것 같은데 내가 어디쯤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고, 숨이 너무 차서 그만둘까 여러 번 고민하던 중에 산등성이에 있는 소나무를 보았다. 수백 년은 족히 그곳에서 살았을 법한 엄청 큰 소나무가 서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한자리에서 비바람을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소나무를 가만두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새겨놓은 글씨도 있었고 던져놓은 쓰레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나무는 오랜 세월을 버티며 살아온 거다. 나는 그래도 사람이니까 걸어 다닐 수 있고 숨도 쉬고 피해갈 수 있는데 소나무는 모진 시련을 덤덤히 겪어낸 거지. 그 생각을 하니 숙연해지더라. 소나무를 꼭 안아주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힘을 내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아주 기분좋게 내려왔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언니랑 말다툼을 크게 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집을 나와 벤치에 누워버렸다. 한참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아주 키 크고 가는 소나무 두 그루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더라. 근데 소나무가 쭉 곧은 게 아니라 건물 사이에서 자라며 해를 보기 위해 기를 쓰느라 삐뚤어져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해를 보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있었던 거지. 문득 나는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고 하고 싶을 일을 성취할 수 있는데 소나무는 그렇지 않음에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소나무들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왜 많은 나무 중에 유독 소나무에 마음이 더 가는 걸까? 소나무는 땅의 기운을 받는다더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가 돌산에 있는 소나무다. 나무가 돌이 가득한 땅속의 돌을 피해 뿌리를 뻗는다는 건데, 그런 소나무는 곧게 자라지 않고 구부러진다. 그런데 우리는 일자로 뻗은 소나무보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를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나. 정작 그 소나무는 엄청 힘들게 자랄 텐데. 그러다 문득 나는 내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누군가 나의 인생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산림청 홍보대사도 사심으로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 같고, 이 좋은 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기도 해서.

요즘 라디오 DJ로도 활동하고 있다. 산림청 홍보대사도 그렇고 EBS 국제다큐영화제 사회도 보게 됐다. 연기 외의 활동 영역이 다양한데, 폭넓게 활동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욕심보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연기하는 게 내 직업이긴 하지만 배우라고 해서 1년 내내 연기만 하며 살 수 없지 않나.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환기하고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내가 사랑이 넘쳐야 악역을 맡더라도 사람들에게 내 연기의 진심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보고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경험을 많이 쌓고 공부도 많이 해야지.

어떤 삶을 살지 오래전부터 정해둔 건가? 연기를 시작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릴 때는 사람들이 나더러 욕심이 많다고 하면 듣기 싫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욕심이 있었다.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심. 스타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자꾸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벼랑 끝에서는 간절한 마음이 나오지 않나. 절박하게 연기했다. 나 자신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내 연기가 더 잘 가닿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보니 오히려 한계가 느껴지고 피폐해졌다. 살아남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된 것 같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산에 가고 봉사활동을 하고.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했다. 촬영 마지막 날 어떤 감정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막상 마지막 촬영을 하니까 많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스태프와 동료들 보러 가는 재미로 촬영장에 갔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으니까. <60일, 지정생존자>는 올해 1월 촬영을 시작해 8월에 끝났다. 드라마의 첫 촬영과 마지막 촬영 일정을 같이했다. 맨 먼저 들어가서 맨 마지막에 나온 거지. 이번 작품은 배우들 간의 합이 워낙 좋았다. 팀워크가 좋아서 시간 맞춰 함께 드라마도 보곤 했는데 아쉽게도 나는 함께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9시에 라디오 생방송이 있어서 밤 11시에는 잠을 자야 해서. 8시 30분까지는  방송국에 도착해야 한다.

아침 일정이 회사원에 버금가는 루틴이다. 목적이 있으면 움직이기가 편하더라. 나는 원래 저녁형 인간이었다. 저녁보다도 더 늦은 밤, 새벽에 가까운 밤. 그 시간에 사색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아침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후 깨어 있는 시간이 확 바뀌었다. 생활의 중심이 아침으로 간 거지. 이제 웬만하면 저녁 7시 이후에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많이 늦으면 8시. 그동안 나는 밤을 좋아하고 그 시간에 사색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괴롭히는 시간이었더라. 나는 감성적이어서 사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색이 너무 깊어지면 괴로웠다. 아침형 인간이 된 후에는 햇볕아래 나쁜 바이러스들이 사라지고, 습기가 싹 가시는 것처럼 훨씬 밝고 건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말을 배웠다.

이제 와서 말을 배웠다는 건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하지 마, 말하지 마, 움직이지 마, 조용히 있어,때리면 맞아, 맞아도 아프다고 하지 마.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입을 다물었는데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익숙해졌나 보다.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1시간 동안 말을 해야 하는데, 말 한 마디 꺼내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해서 바뀌는 게 아니라 청취자 때문에 내게 변화가 일어나더라. 나는 계속 공격 당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공격하는 사람이 한 명 있으면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더라. 라디오를 하면서 내게 힘내라 응원해주는 청취자들을 많이 만났다. 지금은 청취자들과 사이가 너무 돈독해졌다. 서로 응원해주는 사이다.

요즘의 삶이 유독 풍성해 보인다. 청취자들의 마음이 너무 따듯해서 말도 다시 배우고 일상성을 회복하는 중이다.

맞다. 업무로 맺은 관계보다 일상적인 관계가 더 큰 위로가 되어준다. 배우로 살고, 연기만 할 때는 뭔가 자꾸 부족한 것 같았다. 요즘에는 라디오 방송을 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상성이 회복되고 있다. 나는 그냥 청취자들과 수다를 떨고 놀 뿐인데 얻는 게 너무 크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지나도 잃고 싶지 않은 인생의 주제가 있다면. 변치 않는 주제는 ‘나’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문제는 아주 어릴 때 풀었다.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더니 답이 나오더라. 나는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 태어난 것 같다. 그렇다고 대단히 많은 사람을 보듬겠다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을 밝게 밝히고 싶었다. 내 주변을 밝히면 그 사람들이 자기 주변 사람을 밝히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며 그 좋은 기운으로 사랑을 퍼뜨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건강해야 하고. 인생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오면 올라간다고 하지 않나. 지난해가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직업을 바꿀 결심을 했었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한 일을 관두는 것이다 보니 결심하기 쉽지는 않았지. 그래도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쿨하게 뒤돌아 서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려니, 할 일이 남았던 건지 갑자기 연기할 기회가 생겼다. 도망가는 것도 기회가 안 오더라.(웃음) 그래서 다시 즐겁게 남게 됐다. 그럼 다시 해볼까 하고 움직이는 중이다.

그래서 오늘의 김규리는 행복한가? 행복하다. 많은 걸 갖고 싶은게 아니라는 내 속마음을 알게 되어 더욱 그렇다. 이 삶을 즐기고 있어서 감사하다. 부피와 넓이를 키우기보다는 깊이 있고 심도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다행이다. 요즘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껏 완벽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완벽한 모습을 보면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부족한 모습을 보면 오히려 정이 가더라. 눈으로는 완벽한 것을 좇지만 심장은 부족한 모습을 봤을 때 움직이더라. 그냥 사람이 사람 같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인생이 편해지더라. 전에는 내 주머니가 비어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빈 주머니를 보여줘도 아무렇지 않다. 아무것도 없으면 어떤가. 살기에 좋은 걸.

김규리 화보
원피스 푸시버튼(pushBUTTON), 페플럼 형태의 허리띠 레하(Le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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