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기를 선택함 #이정은

영화 <기생충> <여보세요> <미성년>
드라마 <눈이 부시게> <타인은 지옥이다>

배우 이정은

BIFF 이정은

BIFF 이정은
라벤더 색상의 셔츠 드레스 잉크(EENK).

팬입니다. 요즘 어딜 가도 저처럼 팬이라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죠?(웃음) 얼마 전 촬영 때문에 김포 최전방에 갔었거든요. 커피 한 잔 마시려고 다방에 갔는데 거기 주인어른이 절 너무 좋아한다며 본인이 농사지어 직접 만든 도토리묵 가루와 참기름을 주시더라고요. 그 주인 양반이랑 한 시간 떠들었나?(웃음) 연기하는 덕분에 요즘 재미있는 분을 많이 만나는 것 같아요.

<기생충>으로 칸 국제영화제에 다녀온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흥분과 환호가 조금 가라앉은 지금, 배우에게는 무엇이 보이나요? 칸에서 좀 편하게 즐기려고 했어요. 시상식 현장에서도 작품에 대한 부담감을 최대한 안 느끼려고 했고요. 그런 노력 때문인지 다른 배우들보다는 마음이 가벼웠고, 봉 감독님도 나한테 이‘ 작품과 별로 상관없는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보다는 공식 일정이 적기도 했으니 여행지에 온 듯 섬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한데 그건  일종의 거리 두기였던 것 같아요. 나이 드니까 작품으로 얻어지는 것에 대해 한 가지 감정으로 즐거웠다, 슬펐다 크게 흔들릴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지금 이렇게 지나고 보니 확실한 것은 엄청난 행운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거더라고요. 다른 사람은 다 잊어도 나는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내가 왜 거리를 두려고 했을까 곱씹어보면 아마 좀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연극으로 시작해 30여 년간 연기 생활을 이어온 배우로서 ‘내가 드디어 칸에 왔구나’ 하는 식의 감회는 없었나요? 근데 그게 내가 영화만 쭉 해온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외람되기는 하지만 칸의 위상이나 심지어 아카데미도 실감이 잘 안 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이슈인지를 잘 모르겠고 사실 지금도 잘 몰라요. 이 무지가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 같아. 안 그랬으면 어깨에 뽕이 한참 들어갔을 텐데.

흔히 배우는 다양한 배역을 거치며 성장하고 더 두터워진다고 하죠. <기생충>의 ‘문광’ 역을 통해 덧씌워진 것 혹은 빠져나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문광을 연기하는 동안 우리가 클리셰처럼 사용하고 있는 감정의 바운더리를 못 쓰게 한 것이 굉장히 큰 자극이 됐어요. 실제로 봉 감독님에게 중간중간 “이 사람이 이 상태에서 어떤 해결책을 가지면서 진행될까요?”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 덕분에 어떤 상황에 있는다는 건 결국 어떤 삶과 투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문광은 남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기 위해서 김 기사도 만나야 하고, 후임 가사도우미에게 사정도 하며 어떤 해결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하잖아요. 그러다가 사람이 주저앉을 수는 있지만 주저앉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사고해야 하니까. 그런 면이 내 삶에도 영향을 주겠죠. 해결하지 못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주저앉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을 때까지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를. <기생충>의 모든 주인공이 그랬던 것 같아요. 뭔가를 찾아가기 위해 무계획이라 할지라도 분투하는 것.

분투하는 ‘문광’도 참 좋아하지만, 저의 ‘원 톱’은 <미성년>에서의 항구 아주머니가…. 아니, 그거를 왜 그렇게들 좋아하시는 거지?(웃음) 나는 그게 이슈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진짜로. 문광은 감독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만들어낸 인물이니까 그게 당연히 이슈가 될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했고, 물론 그 파장 역시내 생각보다 더 크기도 했지만요. 그렇지만 <미성년>은 아예 그런 가늠조차 못한 작품이에요. 봉 감독님도 그 영화 보시고 “삥 뜯는 것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이정을 만든 것 같다” 하고.(웃음) 근데 나는 사실 그 역할이 어려웠어요. 행여 비슷한 분이라도 만날까 싶어 방파제를 한참 돌아다닐 정도로요. 내가 잘했다는 생각보다 우스꽝스러웠나? 그로테스크했나?

올해 만난 최고의 악당이랄까요. 하하. 근데 김윤석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는 했어요. 주인공의 만행에 대해서 어떤 보복 행위가 있다면 이런 역할이 해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어이없게 저돌적이다가도 마침내 갈취하고 지폐를 흔들고 갈 때의 그 해사한 표정과 뒷모습…(웃음) 맞아. 전에는 그런 역할을 대부분 남자 배우가 했죠. 여성 악당이 나온 건…. 근데 막상 대사를 하는데 이 사람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화가 확 나더라고. 그러니 반드시 돈을 뜯어야겠다 하고….

그런 면에서 영화 <여보세요>는 동시대, 동년배 여성의 노동과 부양에 대한 책임감, 나아가 통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평소 사회적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배우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고민해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매체를 통해 꽤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근데 그거보다는 좀 못하고요. 다만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자라는 세대가 워낙 많으니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번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만 해도 악인들의 이야기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러니 끝까지 봐라, 악인의 최후를.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남들 역시 그럴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만들어줘야죠. 다른 사람들 역시 자유의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나만 독점할 수 없죠.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캐릭터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연기해왔습니다.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연기를 놓지 못한 이유가 있나요? 연기는 진짜 잘 안 되니까 재미있는 것 같아요. 부족하니까. 다음에는 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살면서 문득 ‘아, 그때 그 역할을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드니까 또 하게되고. 그리고 나는, 가끔 이렇게 멀리서 현장을 보면 소꿉장난 같아. 사람들이다 미친 거예요. 근데 자기 인생을 살면서 미치는 일에 한번 종사해보는 것도 큰 행운이지 않아요? 인생이 긴 듯 보여도 짧으니까. 그러니까 중독된 거지, 중독. 현장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기적, 감정이 오가며 만들어지는 카타르시스가 나를 계속 붙잡아놓은 것 같아.

그렇게 현장을 지키며 작은 비중의 역할도 많이 맡아왔습니다. 중년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속에서 비슷한 설정과 톤의 캐릭터도 있었고요.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부류의 배우일까, 혹은 어떻게 이 길을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은 없었나요? 이게 내 자존감일 수도 있는데 나는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가사도우미라 하더라도 전형적으로 풀면 그저 전형성을 가진 도우미겠지만 나는 그 안에서도 살아 있고 싶었어요. 소모되는 역할이라 해도 내 마음을 추스르는 방법은 내가 거기 스스로 존재하는 거잖아. 존재를 선택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여주더라고요. 그래서 나름 혼자 꼼지락거리면서 늘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사람들이 그러죠. “너는 연극까지 해놓고 후배들 보는데 가사도우미 역할이냐.” 근데 동요하지 않았어요. 언젠가 분명히 바뀔 거야. 내 연기가 살아 있는 순간을 사람들이 알아차릴 거야 하고.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강렬한 알아차림 중 하나가 영화 <변호인>의 아파트 집주인이죠. 한 쪽 눈에만 아이라인을 그린 채 ‘오렌지 쥬시’를 권하던.(웃음) 송강호 배우를 비롯해 모두가 부산 출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역할이요. (이정은 배우의 고향은 서울이다.) 근데 그때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송강호 선배와 부딪치며 연기한다는 건 철저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거든요. 많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투리 배웠고, 정열을 다했어요. 그 순간에 집중하려고. 그 역할이 내게 큰 전기가 된 것 같아요.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 배우의 멱살을 잡는 장면조차 혼을 실어서. 봉 감독님이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웃음) 그 현장에 대학로에서 기 세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놨다고 그러는데 나는 그렇게 기 세고, 싸우는 거 잘 못했어요. 얼굴은 착하게 생겼지만 힘 있어 보였나 봐. 나보고 멱살을 잡으라고.

작품 모두 아주 짧은 순간 등장함에도, 그 작은 역할에도 자신을 온전히 담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고 싶은 거죠. 근데 그때는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속에 이 역할로 어떻게 다음 기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 순간밖에는 없는 거잖아요. 배우한테는. 그 순간을 재미있어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는 거야.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에요. 다다음 역할 같은 것은 지금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게 내게는 좋은 비결이었던 것 같아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 적도 없고, 지금도 없어요. 그건 알아요. 관에 들어갈 거라는 것만 딱 알아요. 거기 투숙자로 예약해놓은 것 외에는 없어.(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저는 이야기가 풍요로워지게 하는 역할을 계속하고 싶어요. 배우 키키 키린을 엄청 좋아해요. 그 사람의 목소리나 풍채에서 나오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연스러운 연기, 특유의 정서를 지닌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 외에는 어떤 역할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어요. 어차피 살아온 만큼 쌓인 재료가 연기에 쓰일 것이고,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건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해서 금방 나오지는 않는 것 같아요. 반대로 역할을 통해 배우죠. 내가 모자라니까 어떤 역이든, 모든 역에서 배우는 게 있어요.

이전까지는 여성 배우가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다양한 여성 서사가 만들 어지고 있다고 보나요? 시도를 하고 있죠. 왜냐하면 한국 영화계는 서구 영화계의 영향을 받고 있고,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이야기를 발전시켜야 하겠죠. 근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극을 구성하는 사람과 그 사람들의 관계성에 의해 변하는 거니까, 사람과 관계가 풍요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세요. 한쪽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건을 뒤집거나 판을 깨는 역할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힘을 주지 않으면 좋은 이야기는 못 얻게 될 거라 봐요. 무시할 수 없는 세계적인 변화고 그 속에서 단순하게 남자가 했던 역할의 성별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이제 마무리할까요. 연기를 빼면 이정은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나요? 글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이든 많이 남기고 싶지는 않아요. 집에 가구도 많이 놓고 싶지 않고, 가끔은 옷도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그냥 나는 이렇게 한 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그것이 인생 같아. 그런 게 남는 걸까요? 결국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된 것. 보존할 수 없다는 것. 근데 아이러니한 거죠. 영화는 기록을 남기는 건데 언젠가 나는 볼 수 없잖아. 누군가는 보겠지만. 나는 사라지지만 그 상황을 즐기고 몰입했던 순간은 남겠죠. 그런 게 남을까요?

무형의 것을 남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인 거죠? 그렇죠. 내 마음에 남으니까. 바다에 가서도 이러고 (사진을 찍듯 천천히 두 눈을 한 번 깜박인다.) 마음에 남겨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다 담을 수 없다는 결핍에서 오는 갈증도 커지는 것 같아요. 결코 인간은 담아낼 수 없는 것들. 노을은 노을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있는 건데 그 순간을 보고 있으면 아깝죠, 아름답고. 그런 게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아.

화이트 롱 셔츠 드레스와 부츠, 트렌치코트 모두 잉크(EENK).

존재하기를 선택함 #염혜란

BIFF 염혜란

영화 <증인> <야구소녀> <걸캅스>

배우 염혜란

출연한 영화 중 2편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야구소녀>와 <비밀의 정원>이 초청됐다. <야구소녀>는 제목 그대로 야구를 하고 싶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은데 야구를 하려고 애쓰는 주인공의 엄마가 내가 맡은 인물이다. 처음에는 전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체를 두고 봤을 때는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엄마는 딸의 길을 응원한다. <비밀의 정원>에서 맡은 인물은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다. 오래전 주인공을 성폭행한 범인이 잡히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작품 모두 영화 속 달라진 여성 캐릭터를 담아내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여성 캐릭터와 많이 다르다. 그렇다. <야구소녀>의 엄마는 결국 딸을 응원하는데, 그 엄마처럼 여성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해봐. 앞으로 더 힘들겠지만 힘을 내.’ 이런 응원. <비밀의 정원>은 이보다 첨예한 문제를 다룬다. 남편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결혼했는데, 그 일이 뒤늦게 밝혀지며 삶을 뒤흔들어놓는다. 내가 연기한 인물은 그 주인공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한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올해 개봉한 <증인>에서 맡은 인물도 여성 배우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극에 반전을 주도하는 인물이며 피해자도 아니다. 작품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 역할이 참 좋았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생기는 작품이었다. 온전히 착하기만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내가 연기한 캐릭터가 예상 밖의 갈등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연극배우로 사는 건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계속 연기할 수 있도록 힘을 얻은 원동력은 뭘까? 멀리 내다보지 못한 마음, 좁은 식견?(웃음). 나는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이 일을 계속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당장의 작품을 열심히, 그리고 잘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내다봤더라면 못 했겠지. 당장 이 순간에 충실한 대책 없는 긍정.

왜 연극이었나? 처음 동아리에서 연기를 접하고 처음으로 내가 귀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 전에는 잘하는 게 별로 없었는데, 연극을 시작하고 주변에서 잘한다 해주니까 좋았다. 그런데 연극계에는 잘하는 사람이 참 많더라. 깨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웃음) 지금껏 확신에 차서 뭔가를 선택해본 적이 없다.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배우의 길이 아닌 출판사에 들어갔다. 책을 아주 좋아하거나 출판사에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어딘가에 취업해야 했다. 출판사에서 인턴 기간이 끝나고 상사가 그만뒀는데 회사에서 나더러 출판 아카데미에 다니며 일을 제대로 맡아보라는 거다. 그때는 정말이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됐다. 우선 출판사에 다닐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그 와중에 운명이었는지 동아리 후배들이 연극 연출을 맡아달라 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거다. 그렇게 궁지에 몰려 선택했다.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연기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첫 무대는 너무 떨려서 심장박동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긴장을 뚫고 희열이 느껴지더라. 내 안에 연기를 좋아하는 씨앗이 있었는데 내가 내 욕구를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배우의 삶이 시작된 곳이니 무대 경험이 여전히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없어지지 않는 근육 같은 느낌이다. 연기하는 데 내 기초체력이 된 무대 경험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 전에는 영화와 드라마가 연극에 비해 예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와 영화를 경험해보니 그렇지 않더라.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가 처음 출연한 드라마인데,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 배우들까지 각자의 얘기가 모두 16부작인 것 같았다.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서사가 단단했다. 연기는 결국 근본적으로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번 할 때마다 너무 힘들고, 이 긴장감으로 살다가는 수명이 단축될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럼에도 계속 연기를 하는 걸 보면 미친 것 같다.(웃음)

지금도 연기는 답을 내기 힘든 숙제 같은가? 얼마 전에 나문희 선생님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는데, 지난해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소감을 물었더니 연기에 자신감이 좀 생긴 것 같다고 답하셨다. 세상에. 과연 얼마큼 더 해야 자신감이 붙는 걸까? 그런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선생님에 비해 경력이 턱없이 짧은 내가 떨리는 건 당연한 거라고. 글을 쓰는 사람이 제1 창작자라면 배우는 제2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작품을 보면 배우가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엉성한 구조 속에서도 그 구조를 단단하게 받치는 배우. 계속 정진하다 보면 제2 창작자로서 가지는 한계를 부수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과거의 염혜란이 가진 생각이 있다면 뭘까? 우선 달라진 점은 내가 과거에 비해 너무 쉽게 연기하는 것 같다는 거다. 그래서 늘 반성하고. 그때는 열정만으로 연기하는 대학생 같았다면 지금은 좀 더 유연해졌다. 그런데 진심에 대해 고민하는 건 여전하다. 얼마 전에 드라마를 준비하기 위해 레퍼런스 삼아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찾아 봤는데, 도대체 진짜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애써봐야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라고 느껴지는 그런 연기를 말이다.

지금껏 진심이 전해졌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차력사와 아코디언>이라는 연극이다. 연극에서 ‘써니’라는 인물을 연기했는데 순진하고 순수한 캐릭터다. 남들이 보기엔 바보 같을 만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길>의 ‘젤소미나’와 닮았다. 그 작품을 하며 진심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했다. 써니의 진심에 대해.

작품 수만으로 따지면 필모그래피에서 영화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작품의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그럴 때면 조바심이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냥 무사히 찍고 와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연극만 하던 사람이라 영상의 메커니즘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연기한 장면을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영화에 이렇게 많이 출연했는데 왜 나를 못 알아보지,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연극을 보러 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장에 가는 사람 반만 왔으면, 대학로에 오는 사람의 10분의 1만 연극을 보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연극은 내게 태생 같은 존재다. 하지만 당분간 아이가 혼자 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매체 연기만 하게 될 것 같다. 연극은 아이가 나를 찾을 시간쯤 되면 공연하러 나가야 하니까.

많은 인물을 연기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보고 싶은 장르와 캐릭터가 있다면 무엇인가? 운 좋게 드라마와 영화에서 과분할 만큼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다. 앞으로 만나고 싶은 역은 단단한 성정을 가진 인물이다. 어떤 고민이든 들어줄 것 같은 따듯한 사람.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 난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어느 강력한 인물이나 극적인 사건으로 인한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니라 작은 변화를 겪으며 자신을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나 역시 작고 소소한 것을 좋아하고.

배우로서 지향하는 모습이 있다면? 작품마다 되고 싶은 배우가 달라진다. 본질적으로는 진짜를 해내는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을 잘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배우의 얼굴에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눈 감지 않고 살고자 한다. 보통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가 혹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려고 한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그런 시선으로 살아야 잘 사는 삶 아닐까?

BIFF 염혜란
가죽 소재의 셔츠형 아우터, 캐주얼한 팬츠 모두 자라(ZARA), 안에 입은 니트 터틀넥 코스(COS), 이어링과 구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BE BEWHY

래퍼 비와이
메탈릭한 소재의 셔츠, 그레이 팬츠, CD 로고 벨트 모두 디올 맨(Dior Men).
래퍼 비와이
화이트 언밸런스 셔츠, 블랙 트라우저, 커머번드, 검지에 낀 태양 문양의 실버 링, 앵클부츠 모두 지방시(Givenchy), 약지에 낀 링은 본인 소장품.
래퍼 비와이
선명한 색상 조합과 번개 모양 자수가 돋보이는 니트 스웨터, 레더 셔츠, 블랙 팬츠, 더블 랩 스타일의 나일론 벨트와 레더 벨트, 스터드 장식 블랙 슈즈 모두 프라다(Prada).
래퍼 비와이
화이트 자카드 재킷, 안에 입은 톱, 블랙 팬츠, 스카프 모두 김서룡(Kimseoryong), 첼시 부츠 던힐(Dunhill). 링은 본인 소장품.
래퍼 비와이
블랙 울 코트, 데콜타주 네크라인의 니트 풀오버, 실크 시스루 톱, 팬츠, 러버솔 부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페도라 유니버셜 케미스트리(Universal Chemistry).

한옥에서 화보를 촬영했다. 한옥에 온 건 오랜만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건축물은 아니다 보니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원래 한옥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나중에 한옥 스타일로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옥은 운치가 있는 것 같다. 그냥 멋있다.

7월 25일에 발매한 정규 2집 <The Movie Star>는 어떤 앨범인가? 비와이가 가진 무기, 비와이의 색깔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전곡을 직접 프로듀싱했는데, 앨범 제목을 <The Movie Star>로 정한 만큼 영화적인 사운드를 많이 넣었고 나만의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흔하지 않은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찾아 직접 편집해 사용하고, 트랩 스타일의 비트를 벗어나 테크노를 접목하는 식이다. 내 음악이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향할 거라고 믿는데, 외국 사람들이 들을 땐 메시지보다는 소리에 먼저 반응한다. 그들이 내 음악에 귀 기울이게 하려면 뭔가 색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다른 장르와 조합을 많이 시도했다. 총 12곡을 수록했고, 들었을 때 제일 신나며 공연장에서도 즐기기 좋은 11번 트랙 ‘가라사대’를 타이틀곡으로 정했다.

대한민국 래퍼로서 비와이가 가진 생각이 앨범 전체에 담겨 있다. 이 중 딱 한 곡만 대중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어떤 트랙을 고르고 싶나? 4번 트랙 본‘토’. 힙합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본‘ 토’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 고향의 지명을 말한다. 근데 힙합 팬들은 ‘본토’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미국을 떠올린다. 물론 힙합 음악과 그 문화는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의 것만이 힙합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탈본토’를 하고, 미국이 아닌 내가 밟고 있는 우리 땅을 본토라고 재정의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노래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영향을 받은 앨범이라고 들었다. 평소에도 영웅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인가? 그렇다. 특히 ‘아이언맨’을 가장 좋아한다. 본인의 것을 계속 가져가며 성능을 업그레이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아이언맨이 항상 완벽하지는 않다. 가끔은 외로운 내면을 보이기도 한다. 비와이도 이를 느낀 적 있나? 이에 대한 생각을 담아 7번 트랙 ‘장미는 아름답지만가시가있다’를 만들었다. 직업상 대중의 반응을 신경 안 쓸 수 없다. <쇼미더머니 5> 우승 이후 사람들이 방송에서 보여진 모습만을 원하는 것 같았다. 장미인데, 가시는 없는 모습 말이다.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하면 비난이 들리고 별로다, 구리다는 소리를 듣는다. 타당한 근거가 있을 땐 인정하지만, 그‘ 냥 싫다’가 이유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장 납득할 수 없는 평가는 뭔가? ‘비와이의 랩은 다 똑같다.’ 내가 두각을 나타내는 곡들이 자극적인 편이다 보니 그 안에서 플로나 라이밍을 다르게 하고 톤에 변화를 줘도 비슷하다고 느끼는 듯하다. 더 다르게 하려고 노래하는 트랙도 만들어봤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아 아쉽다.

9번 트랙 ‘초월’은 도입부가 웅장하지만 반전이 있는 노래다. ‘초월’ 바로 전 트랙인 ‘찬란’이 아주 자극적이다. 원래 ‘초월’에서 더 빡세게 달리려고 했지만 그러면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존 비트의 일부분을 지워버리고 새로 만들었다. 도입부는 일종의 맥거핀으로 노래와 상관없는 웅장한 사운드를 넣었다. ‘찬란’을 다 듣고 ‘초월’이 시작되면 ‘비와이가 또 똑같은 랩을 하겠네’라고 판단하겠지만, 도입부 이후 잔잔한 기타 리프가 이어진다. 절친한 씨잼이 피처링 아티스트로 참여했는데, 요즘 씨잼이 음가를 많이 넣으며 랩을 하니 잘 어울릴 것 같았다.

<The Movie Star>의 앨범 소개에 ‘주연에서 주인공으로. 나는 영화가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스스로 주인공이 아닌 주연배우라고 느낀 때는 언제인가? 힙합 음악을 알게 되고 랩을 시작한 순간부터 정규 1집 <The Blind Star>를 만들기까지. 이 기간에 나는 ‘미국 래퍼’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며 ‘연기’를 했다. 당연히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미국 래퍼를 모방하는 게 나쁘다는 뜻도 절대 아니다. 하지만 멋과 음악, 더 나아가 나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The Blind Star> 이후 2년 동안 심경의 변화가 있었고, <The Movie Star>에 그 결과가 담겨 있다.

음악 작업을 안 할 땐 주로 뭘 하나? 요즘엔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 배틀그라운드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취미는 쇼핑인데, 미래를 위해 소비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쇼미더머니 8>에 프로듀서로 출연하고 있다. 참가자일 때와 비교해보면 어떤가? 참가자는 당장 앞에 있는 목표에만 힘을 쏟으면 되는데, 프로듀서는 전체를 봐야 한다. 각 래퍼들이 다양한 프로듀싱에 두루 잘 맞을지, 이번 무대는 어떤지, 다음 무대에서는 어떨지 등을 고려하며 평가한다. 막상 해보니 프로듀서의 역할이 훨씬 어렵다.

<쇼미더머니> 시즌 5와 시즌 8 사이에 한국 힙합 신이 달라졌다고 느끼나? 많이 달라졌다. 나도 적응이 필요할 정도로 빨리, 계속 바뀌고 있다. 래퍼들이 표현하는 색깔도 아주 다양해졌다.

개성이 중요한 시대다. 힙합 신에서 비와이가 가진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단 나처럼 랩을 하는 사람이 없다. <The Movie Star>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스케일의 음악을 하는 사람도 지금 없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멋은 신앙이다.

비와이가 유일한 아티스트로 소속돼 있는 데자부 그룹을 직접 이끌고 있다. 레이블 단위의 작업을 해보고 싶지는 않나? 물론 나도 레이블에 들어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고, 다른 래퍼들과 함께하며 시너지를 일으키길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레이블을 만들고 나만의 공동체를 꾸리겠다는 목표를 빨리 이루려는 생각이 컸다. 앞으로 데자부 그룹을 확장할 예정이다.

<The Movie Star>가 이센스의 <이방인>, 씨잼의 <킁>과 함께 올해의 앨범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앨범들과 같이 언급된다는 것 자체로 무척 감사하다. 이센스 형은 래퍼들의 영웅으로 꼽히기 때문에 함께 후보로 설 수 있어 영광이다. 씨잼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고 <킁> 또한 멋진 앨범이다. 과거에는 내 노래가 음원 차트에 올라가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The Movie Star>는 그렇지 않다.

앞으로 어떤 음악을 시도하고 싶나? 내 음악에 팝 사운드를 더해보고 싶다. 그래서 요즘 브리트니 스피어스, 마룬 파이브, 찰리 푸스 등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의 ‘Mr. Blue Sky’를 부른 밴드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도 좋아한다. 제일 자주 듣는 노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이다.

음악으로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가 궁금하다. 여전히 빌보드를 꿈꾸나? 빌보드도 그래미 어워드도 당연히 꿈꾼다. 최종 목표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비와이의 음악이 더 비와이의 것이 되고 세계적으로 성공했으면 좋겠다. 전 세계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한국에도 이런 음악, 이런 사람이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세워둔 계획이 있나? 영어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판 <쇼미더머니>라고 불리는 <리듬 앤 플로(Rhythm + Flow)>에 나갈 거다. 그냥 나가고 싶다. 처음 봤을 때 피가 끓었다.

주인공이 된 비와이가 만들어갈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인가? 비와이가 점점 커지는 것.

현재 그 영화는 얼마큼 상영됐나? 전엔 결말에 다다른 줄 알았다. 근데 전혀 아니었다. 지금은 뭔가가 갖춰진 기분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배워 나가고 계속 발전할 거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래퍼 비와이
스카프 디테일의 재킷, 니트 터틀넥, 팬츠, 옷핀 모양 브로치 모두 디올 맨(Dior Men), 첼시 부츠 던힐(Dun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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