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솔직할 용기

 

<서울 구경>에 <재윤의 삶>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했다. 특별히 서울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한 이유가 있나?
<재윤의 삶>이 제목 그대로 재윤의 이야기라면, <서울 구경>에서는 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소재를 다루고 싶었다. 나는 경상도의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더 넓은 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늘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진학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10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지금은 또 다른 도시를 동경한다. 서울이 단순히 지명이 아니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욕망의 개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책에 서울은 등장하지 않는다.
책을 펼치면 툭 떨어지는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입학 안내 팸플릿으로만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서울 구경>에는 부모를 잃은 형제가 등장하는데, 형 W는 동생 XX를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유학 보내려 한다. 그 고등학교 입학 안내 팸플릿을 내가 직접 그려 책에 끼웠다. 나는 이걸 ‘회심의 지라시’라고 부르기도 한다.(웃음) 주인공들에게 어느 날 입학 안내 팸플릿이 쥐여지듯, 독자들에게도 자연스레 스며들길 원했다. 팸플릿은 실제 입학 안내 책자에서 착안했다. 이 속에 담긴 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힘든 입시 현실과 달리 셔터스톡 이미지처럼 웃고 행동하지 않나. 그게 이상하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W는 M을 만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서울 구경>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 M은 어떻게 설정했나?
M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늘 친구 수보다 소문에 등장하는 횟수가 더 많은 인물이다. 실제 내 경험이냐고 묻는 독자도 많은데, 나는 부끄럽게도 그런 가십을 이야기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소도시에 살다 보니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이런 경우 전통 서사에서는 남성이 어려움에 처한 여성을 구원하는 왕자로 등장한다. 나도 이런 스토리를 많이 읽고 자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서사가 내 인생을 망쳐놓은 것 같다.(웃음) 그래서 <서울 구경>에서는 그 역할을 뒤바꾸고 싶었다. 이름 역시, 남자 주인공이 W(Woman)고, 여자 주인공이 M(Man)이다. W에게는 M을 만난 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다. M를 만나면서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분리되고 싶은 동생에게서 해방되어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다만 M이 여성 히어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면 했다. 큰 야망이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여러 남자를 만나는 게 나름의 동력이다. 하지만 연애를 한다고 해서 남자에게 의존하는 인물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뿐이다.

‘원래는 내 상황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게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라는 M의 마지막 말이 <서울 구경>이 독자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인가?
W는 XX를 사랑하지만 전통적인 희생의 서사를 따르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할 몫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 역시 서울이 보여주는 꿈과 희망만 좇아 올라온 케이스다. 서울에 가면 이곳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살아보니 꿈과 희망을 제외한 영역, ‘서울적이지 않은 것’까지도 고민해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서울 구경>의 인물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질문을 던졌다.

이 메시지는 <재윤의 삶>의 ‘나는 나일 뿐인데 그걸 극복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 마지막 말인 ‘금방 익숙해질 거다. 난 원래 여기 살았으니까’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체념의 정서가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열망,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한 흔적이 느껴진다.
그렇게 읽어주어 참 고맙다.(웃음) 두 권의 만화는 주어진 삶에 체념하는 내용이 아니다. <재윤의 삶>은 내가 불편했던 것들을 소재로 다루는데, 그것들을 싫어하는 동시에 좋아하는 애증의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를 들면, ‘가슴’을 소재로 한 만화 역시, 가슴은 태어날 때부터 내 몸에 있을 뿐인데, 가리느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나. ‘그래도 가슴이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너도 내 몸뚱이인데’라고 마무리한 것처럼, 내가 아닌 삶을 살 수 없다면 주어진 환경에서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판단해야 했다.

<재윤의 삶>에서 가슴을 주제로 다룬 ‘우연하게도!’ 편이 주목을 받았다. 이건 그동안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실 <재윤의 삶>에서 가슴이나 생리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많지 않은데도, 그동안 자유롭게 다루지 못한 소재라 더 주목받은 것 같다. 여자의 몸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의 절반 이상이 공감할 소재인데도 말이다. ‘우연하게도!’는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그렸다. 여성의 이야기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시기다. 단, 가슴이 보이는 걸 민망하게 여기는 것이 너무 싫고 힘들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세상에 태어나니 가슴이 거기 있어서 생긴 일인데, 이걸 왜 없는 양 가리면서 살아야 하지?’ 하는 정도의 의문으로 표현했다. 그런 건조한 접근을 독자들이 좋게 봐준 것 같다. 생리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하다 못해 생리대를 빌릴 때도 창피한 일인 양 비밀스럽게 감추곤 하지 않나. 그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두 권의 책 모두 ‘웃픈’ 정서가 담겨 있다. ‘정재윤식 유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난해 연말 시상식에서 개그 우먼 박나래 씨가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한 개그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한다. 다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유머를 고민하면서도 마냥 다정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는 건 모순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마냥 가볍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어떤 감정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 그걸 의도하기도 했다. 하나의 창작물이 어떻게 사람의 모든 감정을 위로할 수 있겠나. 단지 독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누군가가 한국 땅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머라는 표현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싫고 불편한 것에 대해 말하는 건 여전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도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대중매체에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느낀 걸 솔직하게 그릴 용기가 생겼다.

<재윤의 삶>은 제목 그대로 재윤의 삶을 다룬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부담감은 없었나?
그에 대한 부담이 커서 편집을 많이 거쳤고,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화로 솔직하게 그려서 신기하다는 독자들이 있는데, 사실 나는 별로 솔직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경험을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만화의 단초일 뿐이고, 그걸 이야기로 풀어갈 때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남의 이야기를 하듯 썼으니까. 교묘하게 편집을 잘한 셈이다.(웃음)

두 권의 만화를 그리기 위해 영감을 얻은 작품이 있나?
이란의 그래픽 노블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를 가장 좋아한다. 이란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이슬람교 정권의 정책 때문에 여성에 대한 압박이 심한 나라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쓰지 않으면 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고, 옷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단속당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작가는 자기 자신을 연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권을 비판하는 투사가 되지도 않는다. 단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담담하게 풀어낼 뿐이다. 이 만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이걸 내 방식으로 어떻게 풀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여느 90년대생 인물과 마찬가지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입시를 준비한내 성장 서사는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러다 김정연 작가의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만화를 만났는데, 서울에 사는 가상 디자이너의 일상을 건조한 유머로 엮은책이다. 이 책을 보며 꼭 엄청난 서사가 없어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많은 여성이 순정만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예전에는 멋있게 느껴지던 남자 주인공이 사실은 데이트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정재윤 작가에게 영향을 준 만화는 어떤 작품인가?
나 역시 그런 로맨스물의 충실한 소비자였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끌고 억지로 차에 태우는 장면을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재윤의 삶>에 등장하는 노랫말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힘이 없으니 네가 나를 이끌어 우리 관계를 완성하고 책임져달라’는 정서가 깔려 있는 노래들을 수없이 듣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내 연애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다음 세대 아이들은 부디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여성의 시각을 담은 콘텐츠가 더 많이 나와야 하고, 나 역시 앞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려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나올 콘텐츠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을 계획인가?
은연중에 흘러가는 장면, 이를테면 뉴스 앵커나 팀장 캐릭터를 여성으로 그리는 등 이전에는 당연히 남성으로 그려지던 인물에 변화를 주고 싶다. 현재 서울신문 서울젠더연구소, 서울시 교육청의 성평등팀과 협업해 서울신문에 <오늘의 젠더 이야기 – 모던타임즈>라는 만화를 연재 중인데, 지금까지는 전래 동화에서 발견한 젠더 이슈에 대해 다뤘다. 지금 보면 굉장히 불평등한 일인데, 예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나,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던 작품을 골라, 다른 시각으로 다룬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깨닫게 되는 일이 참 많다. 앞으로 전래 동화가 아니더라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아이돌을 어떻게 다루는지, 인터넷 광고에서 여성을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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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날

최고의 고백

“우리 오늘부터 1일.” 좀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난 이렇게 관계를 명확히 해주는 게 좋다. 사귀는 첫날의 설레는 감정도 만끽할 수
있고. 무엇보다 “1일이야?”라고 묻지 않고, “1일이야”라며 리드하는 그녀의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O(33세, 마케터)

“손 잡아도 될까?” 덮치듯이 스킨십을 하던 전 남친과 다른 그 말 때문에 마음이 갔다. 착하고 고운 심성을 가진 그는 어떤 일이든 내 동의를 구한 후에야 행동에 옮기려 했다.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대가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면이 좋았다. Y(30세, 영어 강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맛있는 밥을 먹고, 좀 걷다가 커피도 마시고, 그러다 손도 잡고, 헤어지기 전에 키스도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날부터 연인이 되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J(31세, 헤어 스타일리스트)

“내가 잘할게.” 이 말 말고도 그는 내게 족히 열 번은 고백했다.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연애 감정이 들지 않아 매번 거절했는데, 그사이 감정이 쌓였던 것 같다. 한결같은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던 차에 들었던 한마디는 결국 우리를 연인으로 만들었다. C(28세, 간호사)

“뭘 좋아해? 네가 좋아하는 거 다 기억해둘게.”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지만, 진짜 내가 그날 얘기한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며 우리는 즐거운 연애를 하고 있다. 내게 이렇게 온 관심을 쏟아주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S(28세, 번역가)

“라면 먹고 갈래?” 영화 대사를 따라 한다면서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가볍게 건넨 그 말에 설렐 줄 몰랐다. 워낙 오랜 시간 친구 사이로 지내서 서로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장난 같은 한마디가 우리 관계를 친구에서 연인으로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Y(29세, 에디터)

“우리 사귀자.” 사실 그가 어떻게 고백해도 사귈 작정이었다.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그라드는 이벤트나 애매모호한 말 대신 직접적으로 고백하니까 더 좋더라. K(30세, 공무원)

최악의 고백 

“우리 사귀자. 그런데 이 말을 내가 하게 만들어야겠어?” 뒷말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좋은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귀기 전에 실체를
알게 되어 오히려 다행인 건가. 썸 타는 내내 쿨하고 배려심 넘치던 그녀의 모습은 다 고백을 받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걸, 그 말을 듣고 알아챘다. 고백은 남자의 몫이라는 생각, 아마 우리 부모님도 안 할 거다. K(34세, 연기자)

“이제부터 다른 남자 만나지 마.” 여기서 만난다는 건 연애의 의미가 아니었다. 친구, 선배, 후배, 직장 동료 등 주변의 모든 남자를 정리하라는 말이었다. 이 연애를 하려면 친구도, 직장도, 일상도 포기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남자는 없고, 좋은 연애 상대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G(32세, 헬스 트레이너)

“좋아해. 대답은 나중에 들을게. 지금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고 얘기해줘.”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데 왜 생각해보라는 건지. 애초에 나는 그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고, 여지도 준 적이 없다. 뜬금없이 고백해놓고 대답도 듣지 않는 태도는 뭔지. 나는 아니라는 말을 언제쯤 전할 수 있으려나. P(20세, 학생)

“봄에 꽃 피면 데이트할래?” 고백인 줄 몰랐다. 혼자 로맨틱한 고백을 했다는 기분에 취해 있던데,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꽃이 피기 전에 우리 관계를 정리했다. K(35세, 일러스트레이터)

“내 마음, 네가 더 잘 알잖아.” 알긴 뭘 알아. 고백과 대답을 모두 내게 미룬 최악의 고백. 심지어 취중이었다. 취중진담은 솔직해야 좋은 거라고. H(34세, 회사원)

“아침에 눈을 뜨면 네 생각이 나. 창밖을 바라보다 네 생각이 나. 그렇게 멍하니 또 하루가 흘러가. 너도 날 가끔씩은 떠올릴까. 네 생각이 나.”
말이 아니라 노래였다. 존 박의 ‘네 생각’. 들으면서 ‘설마 포털 사이트에서 고백하는 법이라도 검색했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혼자 연습했을 걸 생각하면 고맙긴 하지만, 이런 사람과 사귀면 기념일마다 노래를 듣게 될 것 같아 거절했다. I(26세, 학생)

“그날 고백할 거야. 기다려줘.” 고백 예고제라고 들어봤나? 고백하는 게 대단한 거사를 치르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만들더라. 처음엔 기대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뭔가 싶었다. 막상 고백 당일에는 별것도 없이 사귀게 됐다. 설렘 없는 시작이라 그런지,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해 끝났다. K(29세, 은행원)

“나이도 있는데 괜히 시간 끌지 말고 확실히 하자.” 놀랍게도 이게 고백이었다. 이건 마치 연애 상대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프로젝트를 위한 팀원을 구하는 것 같았다. 나이가 있는 것도 맞고, 시간 끄는 거 나도 좋아하지 않지만 연애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M(37세, 호텔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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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

마흔 살의 찬실이는 어느 날 갑자기 길을 잃는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던 시간이 애초에 없었던 시간처럼 사라져버렸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일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찬실이는 복이 많다. 서로 응원하는 사람들과 만들어가는 소소한 일상이 있고, 밥 한 끼를 챙겨주는 할머니를 만나고, 한숨 고른후 시작할 용기를 얻고, 잠시 잊고 있었던 꿈의 시작을 되짚으며 다시 길을 찾아간다. 찬실이는 복도 많다.

옐로 오버사이즈 재킷 대중소(Daejoongso), 네이비 셔츠 코스(COS), 이어 커프와 체인 이어링 파나쉬 차선영(Panache Chasunyoung).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노래가 중독성 있다. 민요에 더해진 가사를 자꾸 되새기게 된다.(웃음)

김초희 가사는 내가 썼다. 영화의 후반 작업을 하면서 엔딩곡은 가사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다 경기민요 이수자인 씽씽밴드의 이희문 씨를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내 친구 남편이 이희문 씨의 공연을 스페인에서 봤는데 무척 좋았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 이런 인연으로 문득 이희문 씨가 엔딩곡을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자마자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섯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엔딩곡도 함께하게 됐다. 내가 가사를 쓰고 이희문 씨가 ‘사설방아타령’이라는 곡을 추천해줬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정중엽 음악감독이 편곡했다.
강말금 배우의 어떤 면에서 찬실이를 찾은 건가? 김초희 단편영화 <자유연기>를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본후 일주일 정도 고민하다 배우에게 메일을 보냈다. <자 유연기>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와 많은 면에서 다른 작품이었지만, 영화 속 강말금 배우의 진정성 있는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진짜 같은 얼굴. 그 안에는 이야기가 있 었고 살아온 시간의 구력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묵직한 다발 같은 다양한 결 속 어느 한 부분이 찬실이의 결과 맞닿아 있다. 찬실이도 청춘을 다 바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내달리다 뜻하지 않은 이유로 갑작스레 일을 잃고 멈춰버린다. 그래서 찬실이의 얼굴에는 청춘을 다 바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온 느낌이 있어야 했다.
시나리오를 통해 만난 찬실이의 첫인상이 궁금하다. 

강말금 감독님이 보낸 메일에 적힌 글이 참 좋았다. 간곡 하고 예의 바르면서 물기가 있는 느낌.(웃음) ‘당신이 좋으니까 함께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으니 행복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 찬실이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데다 싱글이 고. 내 인생도 느린 속도라서 공감됐고, 찬실이처럼 작은 실패의 연속이라는 점에서도 통했다.
김초희 인생은 무수한 실패와 소수의 성공으로 점철돼 있지 않나.
강말금 자신 없기도 했지만 장편영화를 통해 한 여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 기회가 왔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찬실이를 쓴 감독과 찬실이를 연기한 배우가 이 인물을 소개한다면?

김초희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사람. 그리고 주어진 조건에서 답을 찾는 인물.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위기가 있지 않나. 위기에도 충실하게 살아야 하지만 어쨌거나 그 시간을 넘어간다. 그 실패 안에 갇혀 있거나 그런 순간에 매몰되어버리면 인생이 망가진 다. 찬실이는 비록 위기에 처한 인물일지라도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강말금 찬실이는 솔직하고 일단 연애 감정에 서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다.(웃음) 말하자면 여자 진국. 충분히 매력적인데 좋아하는 남자와 마지막 단계 에서 성사가 잘 안 될 뿐이다.
김초희 찬실이는 환상을 심어주지 않거든. 연애의 필수 조건이 환상 아닌가. 연애의 과정은 환상을 깨가는 것인데 깰 것이 없으니 연애가 되지 않는다.
강말금 찬실이는 여자 진국이다.(웃음) 건강하고 씩씩 하고.

영화에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고 알고 있다.

김초희 영화는 찬실이가 겪는 좌절부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내 자전적인 이야기가 모티프가 된 것은 사실이다. 영화의 출발은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찬실이만의 좌절 이후의 일이 펼쳐진다.
강말금 그래서 고민하다가 내가 경험한 좌절감에 무게를 더했다. 그런데 그 무게감이 지나쳤는지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감독님이 좀 더 귀엽게 하라고 했다. 귀엽게 해라. 다시 귀엽게, 다시 귀엽게.(웃음)
김초희 찬실이가 인생에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고통스럽게만 보이면 오히려 공감할 수없다고 생각했다. 그 슬픔을 통과하는 주인공이 밝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모두의 공감을 사지 않겠나. 어두울때 어둡고 귀여울 때 귀엽고 밝을 때 밝고. 심각한 인물로 그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심각해지면 한번 더 갔다. “안 돼요, 한 번만 더 갈게요. 지금 안 귀엽 습니다” 하며.(웃음) 촬영 현장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김초희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다 보니 많은 회차로 오랫동안 촬영할 수없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매 순간 고개를 넘는 기분이었다. 그저 행복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강말금 쉬운 현장은 아니었지만 늘 앞으로 가는 기분이 드는 후회 없는 현장이었다. 지나간 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기분. 나는 작은 일에는 좀 부정적 이고 비관적인데, 큰 절망 앞에서는 희망의 싹을 본다.
수처작주 같은. 찬실이가 밑바닥에 있을 때 장국영도 나타나고, 좋은 글도 등장하고, 좋은 할머니를 만나는 것처럼 내 삶도 그랬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났다.

브라운 수트 르비에르(LVIR), 체인 네크리스 파나쉬 차선영(Panache Chasunyoung), 가죽 슬리퍼 코스(COS).

촬영을 마친 후에 작품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김초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탈 줄 몰랐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해줄 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 늘 걱정했고 노심초사했다. 영화 제에서 처음 공개하고 많은 관객이 좋은 평가를 해준 덕분에 이 영화를 만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말금 배우에게) 관객이 좋아해줄 줄 알았나?
강말금 몰랐다. 편집본을 봤을 때 내 얼굴만 계속 나오 니까 못 보겠더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상 다 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큰 화면으로 보니 내가 연기를 하고 있긴 하더라.(웃음) 편집본을 혼자 볼 때와 다르게 극장에서 영화를 보니 관객의 반응이 사이사이 채워 졌고, 걱정과 부끄러움을 그제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부끄럽고 걱정된다. 그래도 환대해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껴지니 이제 마음을 좀 열어야겠 다는 생각이 든다. 개봉을 기다리는 지금 행복하다.

영화에 대한 평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김초희 ‘찬실이는 남자에게 지질하지 않다. 차이더라도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와서 다시 잘 산다.’
강말금 ‘오늘 같이 슬픈 날에 나에게도 장국영이 있었 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시나리오에 장국영이 등장해서 참 좋았다. 수호천사가 있는 거니까. 연기 하면서도 장국영이라는 존재가 있어 힘이 됐다.
김초희 내게도 등장인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으라면 장국영이다. 영화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고, 그런 판타지 같은 인물이 다. 사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장국영이라는 배우 때문이다. 내가 중학생일 때 홍콩 영화가 그야말로 붐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가 좋아지고 나서 보니 고민 거리를 던져주지 않으면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을때 영화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가 홍콩 영화와 장국영이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시간까지도 보듬고 싶었다. 그래서 장국영이라는 인물을 만들게 됐다.
강말금 이런 평도 있었다. 장국영과의 대화는 결국 찬실 자신과의 대화라고.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같은 거아니었을까?

찬실이는 마흔 살의 여성이다. 강말금 배우는 마흔살 무렵 영화 연기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강말금 40대에 들어선 비혼 여성은 장기가 죽는 경험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나의 장기 중 자궁이 가장 먼저 죽은 거지. 그와 동시에 나도 언젠가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에 연기를 시작하고 서른다섯 살까지 실패만 했다. 연극을 시작한 후 한동안 돈을 거의 벌지 못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도 말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다 서른다섯 살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맘때쯤 살 만하다 싶었는데 다시 내리막길이 오더라. 일은 잘 풀렸는데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내 속도가 너무 더딘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를 키운 게 연극 무대와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이지만 결국 짝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대와 사람 모두 내게 잘해줬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 그 즈음 영화 <자유연기>를 만났다. 연기는 구체적인 꿈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달려온 시간이 문득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내 삶에서 연기가 가장 중요했던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이가 들면서 가족을 좀 더 돌보고 일상을 더 단정하게 꾸리려고 한다.
김초희 마흔한 살에 프로듀서 일을 그만뒀다. 영화를 한다고 쉼 없이 달려왔는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끝나버린 거다. 어리기만 한 나이가 아니다 보니 뭔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선뜻 실행하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내 인생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영화 일을 했는데 상처만 남은 것 같았다. ‘찬실’이라는 이름은 빛나는 열매라는 뜻이다. 내 인생에도 결실을 맺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영화를 꿈꿨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젊을 때는 목표를 두고 꿈을 향해 패기 있게 내달렸다면, 앞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가며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기로. 마흔 살 언저리에 그런 점이 보여서 다행이다. 전에는 영화 없이 살 수 없을 것같았지만, 이제는 영화가 아닌 삶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성공도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게 꼭 우리의 행복과 상관이 있지는 않다. 우리 찬실이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성과나 성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기뻐했으면 한다.

영화의 원래 제목이 <눈물이 방울방울>이었다.

김초희 영화를 만든 후 거리를 두고 보니 찬실이가 집도 없고 일도 없고 뭐 하나 잘되는 거 없지만 사람 복만큼은 진짜 많더라. 힘든 시간을 고군분투하는 삶은 고생스럽 겠지만 살아 있기에 이런 감정도 느끼는 것 아닌가. 살면서 갈등이나 고통, 힘듦 이런 것들을 부정하곤 하지만 겪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갈등과 고통의 시간을 긍정하는 마음을 제목에 담고 싶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과 공유하고 싶은 감정은 무엇인가?

김초희 우선 다양한 분들이 보면 좋겠다. 몇 년 전의 나처럼 앞날이 뿌연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잘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찬실이의 이야기에 더 공감 하고 힘을 얻지 않을까? 절망의 시간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관객에게 그런 희망을 전하고 싶다. 감히. 슬픔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강말금 지금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 후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길 바란다. 황량했던 마음이 조금 채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