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쉬 버스터즈

왼쪽부터 ‘트래쉬 버스터즈’의 공동 창립자인 디자이너 최안나, 설치 작가 곽동열, 축제 기획자 곽재원, 브랜드 컨설턴트 김재관.

132.7kg. 한국은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1회용 컵 사용량은 2백57억 개, 1회용 빨대는 1백억 개, 1회용 비닐봉지는 2백11억 개로, 미국의 수치 93.8kg을 훨씬 앞선다. 생산과 소비의 사이클 자체를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활용되지 않고 폐기되는 일회용품의 수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일회용품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축제장, 행사장에서의 플라스틱 사용량은 아예 계산이 불가능한 상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이벤트를 제외하면 그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아직까지 정부는 아무런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트래쉬 버스터즈’가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민 이유다.

정확히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인가?
한마디로 ‘일회용품 대체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일회용품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일회용품의 대체재를 개발했고, 작년부터 편하고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다회 용기 대여 시스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일회용품 대신 다회 용기를 행사나 축제 관객에게 빌려주고 다시 수거해서 세척한 다음, 또 다른 장소에서 빌려주는 ‘리사이클 렌탈 서비스’다. 기업 고객에게는 다회 용기의 구매와 관리, 그리고 세척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 근시안적 편리 때문에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일회용기가 소비되고 폐기된다. 서울시 산하 기관에서 행사를 기획하는 일을 했을 당시, 축제가 끝나고 나면 현장을 정리했는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회용품 쓰레기를 보며 늘 죄책감을 느꼈다. ‘일회용품이 없는 축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결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뜻을 모아 ‘트래쉬 버스터즈’를 설립했다.

축제 기획자, 브랜드 컨설턴트, 디자이너, 설치 작가 등이 모여 이룬 시너지는 무엇인가? 이전에 해왔던 일들을 어떻게 우리의 사업에 접목시킬 수 있을지 가장 먼저 고민했다. 그 결과 현재 트래쉬 버스터즈는 기획, 브랜드 마케팅, 제작, 연구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각 분야의 ‘어벤져스’가 모인 셈이다.(웃음) 서로에 대한 믿음 덕에 어떤 아이디어가 생기면 빨리 진행되는 편이다.

‘트래쉬 버스터즈’라는 재미있는 이름에 눈길이 간다. 직역하면 ‘쓰레기를 잡는 사람들’이란 뜻이다.(웃음) 1980년대에 유행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를 오마주했다. 그들이 유령을 잡는 방식이 우리가 쓰레기를 대하는 생각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환경문제에 무겁게 접근하기보다는 유쾌하게 해결해나가고 싶은 마음도 담았다.

트래쉬 버스터즈를 이루는 디자인적 요소도 인상 깊다. 브랜드의 핵심 컬러는 오렌지다.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띌 컬러를 선택했다. 식기 또한 오렌지 컬러를 사용해 식감을 돋울 수 있도록 했다. 흔히 쓰레기를 줄이는 사업이라고 하면 ‘친환경, 에코, 착한 기업’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그린 컬러가 등장하곤 하는데, 그런 진부한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했다. ‘우리 착해요!’보다 ‘뭔가 멋지다!’라는 인상이 우리의 서비스를 표현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대중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거라 믿는다.

‘서울시 청년 임팩트 프로젝트’ 투자 사업에 당선되어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서울시 청년 임팩트 프로젝트는 일반 투자 사업과는 다르게 소셜 임팩트(사회적 가치)에 투자하고 있다. 일회용품 문제 개선과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가지 이슈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서울시 청년청과 트래비스 파트너스의 시드 투자 덕에 사업의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투자금의 대부분은 다회 용기 개발과 제작, 세척 공간에 사용됐다. 세척기 덕분에 시간당 4천5백 개의 용기를 세척하고 살균, 건조할 수 게 됐다.

첫 베타 서비스에서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관객은 훨씬 늘었는데, 쓰레기는 그 전에 비해 98%가 줄었다. 나머지 2%는 푸드 입점 업체에서 발생한 쓰레기였다. 더 놀라운 건 관객의 반응이다. 사전에 충분히 홍보했더니 관객이 자발적으로 SNS에 바이럴 포스팅을 해줬다. 축제 자체의 내용보다 트래쉬 버스터즈의 언급이 더 많을 정도였다. 작년 9월 법인을 설립한 뒤 현재까지는 크고 작은 행사 여덟 번을 치르며 총 1만9천8백60개의 일회용품 쓰레기를 줄였다.

다회 용기를 개발한 과정이 궁금하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축제에 참여하는 관객들의 편의성과 음식 종류를 범용적으로 포괄하는 실용성에도 집중했다. 푸드 트럭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음식의 종류를 모두 조사해 완성했다. 다회 용기의 재질은 화상의 염려가 적고 대량 세척과 살균에 용이한 폴리프로필렌(PP)이다. 물론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이를 대체할 만한 소재가 충분하지 않다. 생분해성 플라스틱도 실제 자연 조건에서는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쓰레기의 문제는 플라스틱 자체가 아니라 한 번 쓰고 재활용되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순환 시스템을 택하기로 했다. 그린피스 역시 플라스틱 제로는 현실적으로 불가하며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사용하는 다회 용기는 일정 기간 뒤 다시 분해해서 재생산할 예정이다.

다회 용기 시스템은 축제 내내 들고 있어야 한다는 불편함과 보증금을 주고받아야 해서 번거롭다는 지적도 있다. 버려지는 일회용품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지만,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연결하려면 일종의 명분이 필요하다. 번거로움의 이면에 더 큰 목적이 있다는 의식 때문인지 현재까지 다회 용기 반환율은 99%에 달한다.

비슷한 해외 사업 사례도 있나?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리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은 영국과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일본 기업 정도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시민들의 환경 의식이 높아 정책으로 강제하지 않더라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축제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문화를 관객에게 자연스레 전파시키는 것도 우리의 목표 중 하나다.

트래쉬 버스터즈를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축제가 끝난 뒤 깨끗한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일회용품이 없는 축제가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앞으로 평균 한 해에 열리는 1만여 건의 축제(5천 명 기준)에서 연간 700억원의 일회용품 제작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힘든 점은 없나? 아직도 이 서비스를 왜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할 때 가장 힘들다. 아직도 소비 중심적인 생각을 하거나 환경문제에 대해 당사자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꽤 많다.

플라스틱 외에 관심이 가는 환경문제가 있나? 대부분의 환경문제는 하나의 원인을 공유한다. 플라스틱 문제 역시, 조금 더 큰 대목에서는 ‘기후 위기’와 근접하게 닿아 있다. 지구온난화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소 배출량을 어떻게 조절하고 억제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이를테면 다회 용기를 배송할 때 전기차를 사용하고, 식기 생산 시 배출량을 감소시키는 대책 등을 연구하고 있다.

올해 새로운 계획이 있다면? 다양한 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축제 때 사용되는 다회 용기뿐 아니라 배달 음식 용기, 스포츠 경기장과 장례식장의 일회용 식기, 카페의 테이크아웃 컵, 극장의 일회 용기, 전시장의 일회용품 등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일회용품을 다회 용기로 대체하려 노력 중이다.

트래쉬 버스터즈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세상은? 우리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지속 가능한 기업이고 싶다. 트래쉬 버스터즈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행동하며 이 시대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

3월 셋째주 #신작 추천

3월 셋째주, 새롭게 볼 만한 드라마, 예능, 영화를 모았다.

그 남자의 기억법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
과잉기억증후군
에 걸린 아나운서 이정훈(김동욱)과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잃은 인기 배우 여하진(문가영)의 관계를 다룬다.
기억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함께 한다면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듀얼>의 김윤주 작가와 <투깝스>의 오현종 PD가 제작했다.

편성 수·목요일 오후8시55분 MBC
첫방송 3월 18일

여왕의 전쟁: 라스트 싱어

실력파 여성 보컬 24명이 경연을 펼치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 <여왕의 전쟁: 라스트 싱어>.
<보이스퀸> 우승자 정수연, <트로트퀸> 우승자 지원이 등이 출연하며
이들의 일상적인 모습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최후의 1인에게는 1천만원 상당의 순금이 수여될 예정.
양수경, 주영훈, 박애리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MC는 배우 김승우가 맡았다.

편성 목요일 오후10시40분 MBN
첫방송 3월 19일

세인트 아가타

<세인트 아가타>미혼모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수녀원을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
수녀들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던 주인공 메리(사브리나 컨)와 미혼모들이
이곳에 감춰진 비밀을 알게 된 후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다.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장면들을 통해 공포를 전한다.
<쏘우> 시리즈의 2~4편을 제작한 대런 린 보우즈만 감독이 연출했다.

개봉일 3월 19일

비행

 

 탈북자 근수(홍근택)와 남한에서 어렵게 생활 중인 지혁(차지현)이
돈을 얻기 위해 마약을 빼돌리며 벌어지는 사건을 담은 영화 <비행>.
경제적 풍요가 새로운 삶을 보장한다고 믿는 청년들의 ‘비행’을 통해
녹록지 않은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단편 영화 <햄버거 맨>을 만든 조성빈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그가 직접 경찰서의 마약 수사과, 탈북민 신변 보호관 등에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했다.

개봉일 3월 19일

존 윅

영화 <존 윅>이 약 5년 만에 재개봉한다.
은퇴 후 평범한 삶을 살던 살인 청부업자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 정체 불명의 인물 때문에
부인과 반려견 등을 잃게 되자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
화려한 무기 없이 권총을 활용한 액션 신이 관전 포인트다.
<분노의 질주: 홉스&쇼>의 데이빗 레이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제작에 참여한 채드 스타헬스키
두 감독이 공동 연출했다.

재개봉일 3월 19일

내가 사랑했던 X들에게

끝내 호명하지 않을 이름에게

어제는 비가 오더니 오늘은 맑다. 사랑할 때나 썼지 사랑했던 이들에게 쓰는 편지는 처음이네. ‘안녕’이라거나 ‘잘 지내니’ 같은 인사는 생략할게. 이 말은 진심으로 안부가 궁금할 때만 쓰고 싶거든. 연애 관계가 끝나고 더 이상 교류가 없다면 그건 아는 사이라기보다는 알던 사이라고 해야 맞겠지?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야. 추억이라는 말은 좀 거창한 것 같고, 그냥 함께 나눈 시간은 사라지지 않은 채 과거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진행형의 삶만이 각자 앞을 향해 달려간다는 생각. 그래서 네 삶은 좀 살 만한지 모르겠다. 나? 나는 살 만해. 요즘은 그거면 족하다 싶어.

사랑이란 감정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늘 충만하게 알아챘는데, 상처 주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영 어렵더라. 독학이 잘 안 되는 분야야. 그럴 때면 옛 이름들은 자주 나보다 더 너른 품이 되어 내 모난 부분을 둥글게 안아주곤 했지. 존중 속에 성장한다는 기분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 고마워. 하지만 그 극진했던 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을 여태 만나지 못한 것 같아. 내가 이토록 삶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나 싶던 때도 언제나 헤어진 후의 시간을 감내하면서 맞았거든.

싫다는 나를 억지로 데려가려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쌍욕을 날리는 대신 정강이를 차줄까 봐. 그래도 길바닥에서 싸우는 짓만큼은 안 하고 싶어. 누구랑 연애해도 그건 제일 싫더라고. 늦은 밤 수화기 너머로, 멀리서 메신저로 내게 보내준 사랑과 걱정은 지난 시간 속에 잘 간직할게. 그러니 괜히 ‘쿨병’ 걸린 척 내 인스타그램 팔로하고 그러지 마. 보는 거야 어쩌겠냐마는 팔로 삭제하는 입장에선 매번 불필요하게 수고스럽다. 이젠 말 안 해도 그 정도 매너는 갖췄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네.

진짜 이별은 헤어짐이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더라. 너와 갔던 장소에 다시 가도 생각은 나지만 슬프지 않은 지 꽤 오래됐어. 어디서든 네 이름의 잔상을 발견해도 기억과 감상이 분리된 후의 내 삶은 새로운 기억을 덧씌울 거야.

끝내 이름은 부르지 않으려고 해. 혹시 내 얘기인가 싶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사실만 밝힐게. 다만 너도 어디선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범인류적 차원에서의 잘 살라는 얘기야. 그럼 다신 부를 일 없을 이름들, 이만 안녕. writer 함수린(<삶이 고이는 방, 호수> 저자)

 

내 연애를 망친 8할은 술

2014년 8월 19일 나는 생일날 만취해서 이런 일기를 썼어. ‘헤어진 애인들을 다 보고 싶다. 나란히 앉혀두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까지 동공을 마주 보고 싶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아마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고, 일어난다 해도 너희는 ‘쟤는 여전하구나. 개 버릇 남 못 주지’ 하며 콧방귀나 뀔 테니. 우리 상황을 설정해보자. 중학교 때부터 7년간 만난 첫사랑, 그 첫사랑을 두고 바람을 피운 치기 어린 동창, 대학교 때 CC, 일은 안 하고 연애만 했던 신입 아르바이트생 등 사랑스러웠던 사람들을 나란히 앉혀두고 함께 술을 마시는 상황이야. 그곳은 밤새 불 켜진 심야 식당이고, 나는 재야의 고수처럼 중앙에서 안주를 만들 거야. 주인이니까 가끔씩 너희에게 말도 걸 거야. 참고로 너희는 이미 집에 가는 걸 잊을 만큼 취했다고 치자. 몇 자 안 되는 편지에서조차 술이 등장하니 이쯤 되면 내가 여전히 술독에 빠져 산다는 것쯤은 눈치챘겠지.

예전부터 나는 애정을 품은 누군가를 앞에 두고 술 마시는 게 좋았어.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빈 병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봉인이 해제되는 매력이란 것이 너희에게 있었거든. 웃을 때마다 귀엽게 사라지는 눈이나 가까이에서 듣고 싶은 목소리나 안주 삼기 좋은 잔잔한 유머나 그런 것 말이야. 반대로 나는 빈 병이 늘어갈수록 추태를 부렸지. 갑자기 화를 내며 폭언하고, 혼자 한껏 즐거워서 밤새워 마시자고 조르고, 친구들과 클럽 간다고 외박을 밥 먹듯 했어. 나도 알아, 내 연애를 망친 원인의 8할은 술이라는 거.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니까 이제는 아무리 신나도 집에 잘 들어간다. 흥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나는 방에서 혼자 춤을 춰.

하지만 기억하니? 혜화 로타리 골목, 어느 가로등 밑에서 많은 인파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적인 키스를 했었지. 스무 살이 된 그해 겨울, 을왕리 해변에서 강소주를 마시며 널 위해 아이유의 ‘마시멜로우’를 불렀고, 종로 치킨집에서 너는 홍상수 영화 속 누군가처럼 그렇게 내가 좋다고도 했잖아. 한바탕 싸우고 만취해서 찾아간 너희 집 앞에서 드라마처럼 화해했던 일도 잊을 수 없지. 그날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큰해진다. 지금보다 좀 더 낭만적인 순간이 술처럼 흘러넘쳤던 것 같아. 내 연애에서 술을 떼려야 뗄 수 없던 건 내가 소심하기 때문이었어. 적당히 취한 내가 평상시 모습보다 좋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거든. 좀 더 용기 있고 쿨하며 재밌는 인간이 되는 것만 같더라.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격의 없이 친해지는 데 술만큼 좋은 걸 난 아직 못 찾았다.

그래, 나는 하나도 안 변했어. 여전히 예의 ‘8할’까지 끌어안고 살아. 너희는 이성적 잣대로 날 재단했고 우리가 헤어진 이유의 대부분이 내가 바라는 ‘끓어오르는 뭔가’가 없었기 때문이잖아. 아쉽게도 내 머릿속엔 가장 흥청망청 바보처럼 사랑했던 기억만 남았고. 나는 아직도 종종 내일이 없을 것처럼 행동하고, 미치도록 재밌는 것들에 스스로를 내던지며 살아. 혹시라도 이런 불나방 같은 내가 그립다면 언제든 연락해. 우리 서로 애인으로는 영 아니지만 친구로는 또 괜찮을지 모르잖아(그냥 술이나 마시자는 말이야). 끝으로 너희에게 내가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선물하고 싶어. ‘나는 왜 개미들의 행진을 쫓아가는가/ 아무 일 없어도 왜 숨이 막히는가/ 왜 키스 없는 계절을 내버려두는가’ 오래도록 몸 건강히 잘 지내길 바란다. 그런데 계산은 하고 가야지. writer 백가경(프리랜스 에디터)

 

지나고 나면 아름다웠던 추억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는 말. 내 지난 연애에 그런 말은 안 통해. 생각해보면 헤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지. X는 바람을 피우다가, 또 다른 X는 매일같이 내 스케줄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나를 들들 볶다가, 마지막 X는 사소한 다툼이 쌓여서 결국 헤어진 건 기억하고 있겠지? 연말이 되면 1, 2월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내 연애는 설레던 처음의 기억은 사라지고 질질 끌다 결국 헤어진 지질한 순간만 남아 있더라. 벌써 수년이 흘렀으니 ‘그때 내가 어려서 그랬지, 생각해보면 괜찮은 사람이었지’ 하고 회상할 법도 한데, 난 아니야. 내 인생에서 좋지 않게 끝나고, 회복되지 못한 관계는 연애뿐이었어.

그렇다고 이제 와서 너희를 탓할 생각은 없어. 이미 헤어지는 순간에 화는 낼 만큼 냈으니까. 그보다 왜 나의 연애 관계는 늘 짜증 나고 화나는 순간만을 남기며 사그라지는지, 잠 못 드는 밤에 괜히 건드려보고 싶은 X 하나가 없는지가 궁금할 뿐이야. 바람을 피운 첫 X는 일단 넘어가자. 네가 바람의 이유로 나를 언급했을 때부터 이별의 책임에서 날 빼기로 했거든. 그럼 집착남 X와의 연애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몇 가닥을 끌어올려보자면 초반에는 좋았던 것 같기도 해.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집착이 관심이나 내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좋게만 보이던 행동이 집착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물론 귀찮다는 이유로 답장을 안 한 내 행동이 큰 몫을 했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애초에 만나서 좋을 게 없는 관계였던 것 같아. 마지막 X와는 왜 그렇게 싸우기만 했지?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엇갈려서, 뉴스를 보다가, 어떨 때는 이유도 없이 싸웠던 것 같아. 게다가 너는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고, 나는 중간에 지쳐 그만했으면 하는 성향이라 이 싸움은 더 끝을 내기 힘들었던 것 같아. 서로 감정이 사그라드는 지점이 달랐으니까.

이렇게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는 연애라는 관계가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난 문제가 생긴다 싶으면 항상 회피하려고 했거든. 실컷 싸우려 들다가도 빨리 끝내고 이걸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고, 계속되는 집착으로 인한 문제를 대화로 풀려고 하기보단 소통 창구를 닫는 식으로 무마하려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너를 떠올릴 때도, 그때의 나를 떠올릴 때도 좋은 기억이 없지 않을까 싶어.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연애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아마 너희는 이미 다른 연애를 시작했겠지? 아마 나는 당분간은 연애를 하지 않을 것 같아. 지금도, 지나고 나도 아름다운 기억은 혼자일 때가 훨씬 많거든. 혹시라도 내가 잘 지내나 궁금할까 봐 하는 말인데, 나는 너희 없는 지금이 제일 좋아. writer 이혜진(연애 칼럼니스트)

 

여보세요

‘지금, 통화 괜찮아요?’ 그의 문자는 마법을 거는 주문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짬을 내서 전화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나의 말을 전하는 게, 이렇게 달콤한 시간이었나? 수화기를 넘어오는 그의 목소리는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당시 내 모든 여가는 그에게서 시작되었고, 업무 외 모든 시간은 그와 함께했다.

당시 사회 초년생이던 내가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의 매일 자정 무렵이나 아침이 되어서야 퇴근했지만, 그런 생활에 적응해야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하루를 몽땅 투자해서라도 견뎠다. 그는 이런 나를 ‘구름이’라고 불렀다. “네가 너무 바빠서 자주 볼 수 없으니까. 자주 통화하고 상상하지만 나와 섞이지 못하고 구름처럼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 마침 내가 그를 부르는 애칭은 ‘하늘이’였다. 그는 푸른색이 잘 어울렸고,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여자였다. “하늘은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을 감싸 안아주잖아. 넌 내게 꼭 그런 사람이야.” 하늘이는 나보다 사회생활을 몇 년 더 일찍 시작했지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나를 가르치거나 훈계하지 않았다. 내 삶의 무게를 멋대로 판단하지 않고 다만 들어주는 사람. 이게 내가 그를 하늘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이제 씻고 누웠는데, 지금 전화해도 돼요?’ 퇴근 이후엔 언제나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응!’ 밤이건 새벽이건 하늘이의 답장도 같았다. 새삼스럽게 안부를 묻고, 온갖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간.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장 사적인 일정. 밀려오는 졸음을 참느라 기를 쓰다가도, 깨기 싫은 꿈을 꾸듯 즐거워했고,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한참을 까르르 웃었다.

피곤해서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귓가에 또렷이 울렸다. “졸려서 미안해.”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통화 중에 잠들기도 했고, 쏟아지는 졸음이 밉지 않고 달콤했다. “같은 꿈 꾸자.” 내가 이렇게 기름진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버석거렸는데. 통화는 달콤했지만, 멀리 있는 몸의 거리를 메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새벽일지언정 우당탕 만나 함께 지새운 밤도 종종 있었지만, 서로의 체온을 자주 느낄 수 없다는 건 하늘과 구름 사이를 갈라놓는 벽과 같았다.

‘지금, 통화 괜찮아요? 나, 할 말 있는데.’ 하늘이는 평소처럼 문자메시지를 보낸 건데, 그날은 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반듯한 그 문장이 우리 관계의 종지부처럼 읽힌 건, 메울 수 없는 몸의 거리를 견디지 못해 시들던 걸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어진 통화는 서로 주고받는 말보다 정적이 길었고, 조심스럽게 고른 듯한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깊은숨이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이 지나서야 돌아보네. “이제 전화 안 할 거예요.” 별안간 네가 차분하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우리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걸 느꼈어. 나는 어떤 말도 못 하고 머뭇거렸지. 그러다 한숨처럼 이런 말을 했지. “그래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 고마웠어요.” 애써 의연하게 말했지.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나는 다시 업무에 복귀했어. 연이어 일했지. 6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몇 년째 쉬지 않고 일만 하며 지내는 건, 네가 곁에 없기 때문일까? 구름은 여전히 바람 따라 흐르네. writer 김유진(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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