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의 다른 얼굴

블루종, 랩 셔츠, 울 와이드 팬츠 모두 코스(COS).

<인간수업>의 고등학생 ‘오지수’는 돈을 벌기 위해 범죄의 길에 들어서지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학원에 다니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 취직하고 싶을 뿐이다. 잘못된 선택이지만 무엇이, 그리고 왜 잘못됐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수는 연이어 잘못된 선택을 한다. 배우 김동희는 악의적인 인물에게 동정심을 거두고 다만 상황에 빠져 지수를 연기했다. 문득 벽에 부딪히고 답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시간을 지나 때론 자신도 몰랐던 얼굴을 발견하며 <인간수업>을 마쳤다.

오디션을 통해 <인간수업>의 지수 역을 맡게 되었다. <에이틴 2>를 한창 촬영하고 있을 때 <인간수업> 오디션 소식을 들었다. 두 줄 정도의 대사를 연기해 영상으로 보내는 오디션이었다. 분량은 15초 정도. ‘내 꿈은 비싸다. 내 꿈은 졸업하기, 대학 가기, 취직하기’라는 대사였다. 짧은 시간 안에 연기를 보여줘야 해서 여러 상황을 설정해서 연기했다. 앞뒤 맥락을 모르는 만큼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대사였다. 꿈의 가격을 정해놓다니, 도대체 어떤 인물일지 호기심이 생겼다.

시나리오 속 지수의 첫인상은 어땠나? 인물 자체보다는 대본이 주는 힘이 컸다. 진한새 작가님의 대본은 지문이 엄청 많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해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찾아본 다른 시나리오와 비교해도 지문이 무척 길었다. 한 사람의 대사가 세 쪽을 넘은 적도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가령 소리를 지를 때도 사‘ 자가 포효하듯이 소리를 지르는 지수’ 이런식이다. 머릿속으로는 상상이 되는데 실제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고 그런 점이 재미있었다.

지수는 계속 옳지 못한 선택을 한다. 윤리적으로 틀렸지만 배우로서는 연기를 위해 이해해야 한다.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겠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더 이상 이해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지수는 용서받으면 안 되는 인물인데 연기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안타깝게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점이 연기하며 가장 어려웠다. 지수는 불행한 인물이지만 불쌍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이기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연기하면서 감정을 소진하는 작품이었을 것 같다. 다행히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다. 촬영하고 다음 날이면 잊기도 하고 그런다. 감정을 쌓아두기보다는 순간순간 지수의 감정 상태로 나를 던져 내 안에서 나오는 대로 연기하려고 했다. 김진민 감독님이 그렇게 연기할 수 있도록 현장을 만들어주신 덕분에 온전히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우는 연기를 할 때 풀 숏과 바스트 숏, 클로즈업 숏에서 에너지를 100% 쏟아냈다. 그렇게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한번 터진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연기하며 마음을 다치진 않았지만 힘들었다.

대본에 적혀 있지 않은 인물의 과거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는가?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연기할 인물이 태어난 순간부터 적어본다. 엄마가 낳은 순간부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이런 식으로 매년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상상한다. 한 줄이라도 써가다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극 중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사람은 관계에 따라 성격이 변하고 말투가 달라지니까.

플립 셔츠 질샌더(Jil Sander).
오버사이즈 셔츠, 크롭트 팬츠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가방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김동희를 대중에게 알린 작품은 <SKY캐슬>이다. 두 작품의 캐릭터 모두 같은 고등학생으로 성격은 완전히 다르지만 목표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는 점이 닮았다. 그래서 힘들었다. 결이 다소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지수도 겉으로 보기에는 별문제 없어 보이니 대본을 읽다 보면 <SKY캐슬>의 서‘ 준’과 말투가 비슷해졌다. 그래서 다르게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인간수업>이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 부문 1위에 올랐다. 첫 주연작이 좋은 반응을 얻어 의미가 클 것 같다. 배우로서 첫 단추, 첫 계단인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김진민 감독님을 만나 처음 느낀 순간이 많았고, 상황에 나를 던지며 연기했다. 감독님의 연기 디렉션이 마치 고등학교와 대학교 연기 수업 때 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 같았다. 자의식을 버리고 완전히 이입해서 상황에 빠져드는 것,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막 필모그래피를 쌓기 시작했다. 작품을 거듭할수록 연기하는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오나? 연기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입시 때 이후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 나는 연기에 충분히 빠져 있다는 거다. 연기는 힘들다. 할수록 부족한 점만 보인다. 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은 재미있다. 그리고 배우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연기란 결국 글을 보고 이를 몸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글을 잘 분석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김진민 감독님이 항상 세상을 볼 줄 알아야 연기가 는다고 말씀하셨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게 있어야 하고, 사회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그런 관심을 동력 삼아 많이 배워야 하고, 지금보다 더 공부하라는 말씀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공부가 있다면? 사소한 것이 많다. 책도 많이 읽고. 요즘은 소설이 내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소설책을 읽는다. 부족한 상상력이 채워진다고 할까. 최근에는 한 촬영감독님이 추천한 <환상의 빛>을 읽었다.

<인간수업>과 <이태원 클라쓰>를 마친 후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차분한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잠시 멈춰 돌이켜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무엇인가? 반성. 좀 더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었고, 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회피한 순간이 많았다. 벽이 놓였을 때 부딪는 대신 피한 것 같다. ‘레디, 액션’으로 시작되는 장면은 길어 봤자 5분 안에 끝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때론 더 과감하게 해보고 싶은 연기를 했어야 하는데 생각을 묵혀둘 때가 있었다. 좀 더 자신감 있게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다음 작품까지 쉬는 동안 자신을 채우는 시간을 보내겠다. 채우고 싶은 것이 많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태원 클라쓰> 때까지 쉬지 않고 작품을 했다. 한 작품을 끝내자마자 다음 작품을 준비했기 때문에 지난 내 연기를 되돌아볼 새가 없었다. 어떤 작품이든 휴대폰에 연기 노트를 만들어놓는다. 촬영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날 떠오른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이 해준 얘기를 매일 적는다.

마지막으로 메모장에 적은 내용은 뭔가? 며칠 전 김진민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다 <인간수업>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내가 기여하는 부분은 1%도 되지 않고 모두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것이며, 요즘 배우로서 문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는 점을 얘기했다. 어떻게 헤쳐나가고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놓으니 감독님이 절대 ‘쫄지’ 말라고 했다.

왜 문득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걸까? 아는 게 많아져 그런 게 아닐까? 현실을 좀 더 직시하게 됐다. 나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오가고, 그걸 보면서 무너졌다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좋게 평가해주어도 나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있고, 반대로 나는 만족스러운데 다른 사람들이 나쁘게 평가할 때도 있다. 모든 사람을 설득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 연기에 대해 스스로 객관적으로 정확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연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이 없어지고 막막할 때가 있다. 어떻게 헤쳐나갈지 잘 몰라 답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처음에는 ‘그냥 한번 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덤비던 멋모르던 시절의 패기가 좀 없어졌다. 현장을 알고 나서 그렇게 된 것 같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동료, 선후배 배우들을 비롯해 스태프들과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고 현장 분위기를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쉬는 동안 더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 전에 본가에서 기타를 가져왔다. 오랜만에 쳐봤는데 잘 안 되더라. 엄마가 기타 학원에 쓴 돈이 아깝다고 했다.(웃음) 그래도 다시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영어 공부도 하고. 배우고 해야 할 일이 많다. 올해는 공부를 많이 하고 싶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 답을 찾고 싶고. 아, 너무 어렵다.

지난번에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어느 장르에나 어울리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생각은 변함없나? 없다. 더불어 떳떳하고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아이가 생기면 ‘아빠처럼 되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싶다.

김용지다운 생각

아일릿 장식 톱 로에베 바이 육스(Loewe by YOOX), 베이지 팬츠 JW 앤더슨(JW Anderson), 슈즈 로우클래식(Low Classic), 스트라이프 매트 자라홈(ZARA Home).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두 개 차원을 오가는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명승아와 명나리,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면? 대한제국의 ‘명승아’는 황실 홍보를 담당하는 역할로 본인의 일을 사랑하는 밝은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명나리’는 금수저 건물주이자 카페 사장이다. 1인 2역이긴 하지만 캐릭터 간의 차이가 크지 않아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기보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몰입하는 것을 더 신경 쓰면서 연기하고 있다.

모델로 시작해 지금까지 활동한 시간은 꽤 긴 편인데,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한 건 1년이 채 안 됐다. 심지어 첫 작품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말을 못 하는 역이었다. 사실 목소리를 내는 데 의미를두진 않았다. 모델 활동을 할 때도 어떤 콘텐츠에서는 내 목소리가 들어가는 부분이 있고,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행동이나 표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연기를 하는 것, 배우가 되는 것 자체에 더 큰 감흥이 있었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본 작품이 데뷔작인 <미스터 션샤인>이다. 이어 짧은 시간 안에 드라마 <왓쳐>와 <모두의 거짓말>, 그리고 <더 킹: 영원의 군주>까지 쉴 틈 없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배우라는 세계에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할 새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모두 운이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준비라는 건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정도면 준비를 완벽히 다 했으니 시작해도 되겠다’라는 게 가능할까 싶다. 어떻게 시작하든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고. 그래도 다행인 건 적응력이 좋은 편이라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데 두려움이 적다는 거다.

어떤 지점에서 적응이 빠른 편인가? 변하는 환경에 낯설어 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낯을 가리거나 불편해하는 편도 아니다.

언제 배우가 됐다는 확신이 들었나? 모델을 할 때 처음 광고를 찍고 며칠 뒤에 TV를 보다가 ‘어, 저거 난데!’ 하며 놀란 것처럼, 드라마도 작품 안에 내가 나오는 장면을 볼 때면 아직 신기하고 낯설다. 그렇지만 아직 배우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배우로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제자리에 있을 수 있고, 나를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볼 테니까.

‘신비로움’. 지금까지 김용지라는 인물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인 단어다. 물론 긍정적인 말이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가 신비롭지 않아서 그런지 그런 말에 대해서는 그냥 ‘내가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지란 건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딱히 집착도 없다.

앞으로 생겼으면 하는 다른 이미지가 있을까? 그냥 ‘김용지스럽다’. 예쁘다, 섹시하다, 귀엽다라는 식으로 정의되는 말보다 ‘김용지 같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스스로 생각하는 ‘김용지스러움’에는 무엇이 있나? 털털함. 느긋함. 그리고 세상 모든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

벨티드 랩 드레스 스포트막스(Sportmax), 슈즈 아카이브앱크(Archivepke), 옐로 스트라이프 쿠션과 담요 모두 자라홈(ZARA Home).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꽤 감정의 변곡점이 많은 연기를 보여줬다. <미스터 션샤인>에선 내내 참다가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왓쳐>에선 나름의 수를 부리다 결국 덜미가 잡혀 소리를 내지르는 장면도 있었다. <모두의 거짓말>에서는 자살하는 것과 자살당하는 것 두 가지 연기를 했다. 연기를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하나? 세 작품 모두 캐릭터의 서사가 길게 흐르지 않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왔기 때문에 대본에 나온 정보로는 연기하는 감정을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인물이 되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말을 내뱉기까지 어떤 상황이 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일기를 쓰며 나름 추적해본 거다. 그래야 캐릭터가 갑자기 감정의 변화를 일으켜도 충분히 납득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도와 생각이 잘 반영된 장면이 있었나? 늘 내가 생각하고 표현한 것보다 결과가 훨씬 나았다. 혼자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그런 것 같다.

연기를 하면서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을 꺼내 쓰는 편인가? 오히려 활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연기하는 캐릭터로서 작품 속에 있어야지, 다른 걸 끌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슬픈 감정을 연기할 때 키우는 강아지와 헤어지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표현을 위한 표현일 뿐이다. 그 대신 최대한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생각에 고립되려고 한다. 나로서 출발했지만 ‘나였다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부딪히는 게 많아진다. ‘나라면 이렇게 안 할 것 같은데?’라고 반기를 들면 역할에 온전히 몰입하기 어려워지니까.

배우고 싶어서 연기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연기를 하면서 어떤 배움을 얻어가고 있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연기할 때는 내가 평소에 말하는 패턴, 상대방 말에 대답하는 속도 같은 템포를 다르게 써야 한다는 것. 너무 빨리 움직이면 안 되는 카메라도 있다는 것. 옆모습을 찍을 때 상대 배우의 눈을 보면 흰자만 나온다는 것. 그래서 시선을 다른 방향에 둬야 한다는 것.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다.

가능하다면 꼭 얻고 싶은 배움이 있다면? 대사를 정확히 기억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연기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대본에 써 있는대로 글을 어순 그대로 기억하는 거다. 그런데 정도는 없는 것 같다. 그냥 시간을 들여서 보고, 또 보고 있다.

오디션 볼 때든 촬영할 때든 잘하려고 애쓰는 편인가? 반대로 비워두는 편인가? 비워두려 한다. 물론 현장에 가기 직전까지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잘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걸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으로 여기진 않는다. 최대한 편안하게 하고 싶다. 그래야 같이 연기를 하는 상대방도 편할테니까.

의미 부여하는 것을 즐기는 편인가? 때마다 다르다. 의미 부여해서 더 좋은 것들은 의도하지 않아도 내게 좋은 의미로 남는 것 같다.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는 의미 부여를 하게 될까? 이 작품이 어떤 의미로 남기를 바라나? 나에게 온 소중한 기회를 잘 살린 작품. 그게 무슨 인생 역전의 기회라기보다 이 작품을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게 남길 바라는 마음이다.

배우가 되면서 생각이나 시선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모든 캐릭터에 나를 대입해본다. ‘내가 만약 저 역할이라면?’이라고 상상해보는 거다. 상상의 끝은 ‘진짜 어렵겠다’가 대부분이지만.(웃음) 최근에 대입해본 작품은 <이태원 클라쓰>. 모든 캐릭터에 나를 씌워봤는데 역시 어렵겠더라. 또 드라마를 보면서 자꾸 제작 현장을 생각한다. 이를테면 밤 신이 나오면 ‘저거 찍으려고 밤까지 기다렸겠지. 추웠겠다’라고 생각하는 거다. 두세 번쯤 다시 봐야 순수하게 작품으로 보게 된다.

꿈도 달라졌을까? 예전에 꿈이 세계 여행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는데, 애들이 비행기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서울 시내에 우리 강아지 이름으로 된 강아지 공원을 만드는 것. 서울 시내에 강아지들이 맘껏 뛰어놀 곳이 없다. 산책만으로는 부족한데 말이다. 내가 만든 공원에서 강아지가 뛰노는 걸 보면 행복할 것 같다. 기왕이면 유기견들이 지낼 공간도 있고, 거기서 입양처도 찾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그러려면 꽤 넓어야 할 것 같다. 지금 있는 스튜디오도 되게 넓은데, 이곳보다도 훨씬 넓어야 할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겠다.(웃음)

웃지 않는 남윤수

코튼 프린트 재킷, 블랙 셔츠 모두 프라다(Prada).
레더 트렌치코트, 코튼 점프수트, 블랙 슬립온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넷플리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인간수업>이 곧 공개돼요. 흑백 포스터가 드라마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요. 범죄를 저지른 고등학생들이 그 때문에 혹독한 수업을 치르게 되는 내용이에요. 전 고등하교 일진 ‘기태’를 연기했어요. 다른 학생들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누구보다 집요하고 냉정한 인물이죠. 어른을 상대할 때도 두려워하거나 움츠리지 않고 당당해요.

그간 여러 웹드라마에서 고등학생을 연기했어요. 지난 작품에서 모두 선한 캐릭터를 맡았으니 이번에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겠네요. 김진민 감독님이 기태라는 인물을 구상할때 순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싸움을 하면 끝을 보는 잔인한 친구를 떠올렸다고 했어요. 윤리적으로는 올바르지 않은 인물이지만 배우로서는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아직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기태만의 순수한 면도 있어요. 나쁜 행동을 하지만 자신만의 선이 있어 그 선을 넘지 않아요. 지난해 촬영을 끝낸 <인간수업>은 제가 처음으로 긴 호흡으로 연기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감정적인 소모가 큰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무척 힘들었어요. 집중력도 많이 필요했고. 아쉬움도 많아요. 좀 더 고민하고 하나라도 더 해볼걸, 이런 생각도 들고. 그리고 선배들의 연기를 현장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김여진 선배가 경찰로 등장하는데 실제 경찰 같아서 넋을 잃고 지켜봤죠. 경찰 연기가 워낙 실감 나서 제가 정말 죄를 지은 기태처럼 느껴졌어요.

어떤 과정 끝에 기태를 준비했나요? 기태는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캐릭터여서 학생들이 나오는 영화를 많이 봤어요. 그중 한 편을 꼽으라면 <파수꾼>이 있어요. 영화에서 이제훈 선배가 연기한 인물도 ‘기태’예요. 두 인물 모두 언제 터져 버릴지 모를 감정을 품고 있죠.

배우는 수많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직업이란 생각이 들어요. 다양한 감정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캐스팅된 작품이 아니어도 여러 대본을 구해 읽어봐요. 지금까지 퉁명스러운 듯하면서도 따듯한 일명 ‘츤데레’ 같은 인물을 많이 연기했거든요. 그래서 더 많은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다른 감정선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대본을 구해 연기해봐요. 상상도 많이 하고요. 감정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인물도 해보고 싶어요. 폭력적인 기태를 연기할 때도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연기하는 순간이 너무 즐겁더라고요. 감정적으로 지치는 기분이 들면 연기할 때 도리어 힘이 돼요.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겠죠. 전 마음을 다스릴 때 잠을 자요.(웃음) 커피 한 잔 마시고 혼자 쉬는 걸 좋아해서 조용히 보내는 시간도 많이 내고요. 집 근처에 저수지가 있어서 산책도 하고 밤하늘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요.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얘기도 잘하고 활기찬 편이지만 혼자 카페에 가서 책 읽는 것도 좋아해요. <언어의 온도: 우리의 열아홉>을 촬영하고 읽은 <말의 품격>과 <글의 품격> 같은 책도 좋고.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상대방이 힘들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되고, 그런 의미를 담아낸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 깊이 와닿았어요.

블랙 나일론 재킷, 니트 톱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연기를 시작한 후 생긴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많이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색다른 캐릭터를 만났을 때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게 고민이라면 고민이죠.

<인간수업> 공개를 앞둔 지금은 어떤 고민이 있나요? 고민이라기보다 걱정인데, 아직 완성본을 보지 않아 제 연기가 어떨지 걱정돼요. 그래도 얼마 전에 후시녹음 때문에 해당 장면을 봤는데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촬영할 때 기억도 떠오르고.

반면 공개된 후 기대되는 점은요?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길 바라요. ‘저 나쁜 놈’이란 소리를 듣고 싶어요.(웃음) 스스로에게 냉정한 편인가요? 아니요.(웃음)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 하려고 노력하지만 냉정하진 않아요. 제 연기에서 모자란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이에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 연기하며 흔들릴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진 않아요.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눅들기보다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다만 늘 하는 다짐은 있어요. 열정을 가지고 조금씩, 더욱더 성장해가야겠다는 다짐이요. 그리고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싶어요.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렇게 초심을 잃지 않고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오늘 문득 떠오른 촬영 현장의 기억이 있나요? 스튜디오에 오기 전에 <인간수업> 현장이 떠올랐어요. 배우와 스태프가 50명 가까이 모여 있는 현장에서 느낀 긴장감이 문득 기억나더라고요. 현장의 긴장감. 왜 그렇게까지 긴장했을까 하고 웃음이 났어요.

20대를 앞으로 어떻게 채우고 싶나요?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싶어요. 바빠서 힘든 나날이기를 기대해요. 지난해에 그렇게 지냈어요. 몸은 피곤한데 오히려 힘이 났어요.

이제 막 필모그래피가 시작되었으니 해보고 싶은 역할이 많을 테죠? 로맨스물의 나쁜 인물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온통 따듯한 사람들인데 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나쁜 행동을 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언젠가 병에 걸린 인물도 만났으면 해요. 아프면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기잖아요. 그런 변화를 겪는 일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배우고 싶어요.

올해 5월은 어떤 시간으로 남을까요? 나를 많이 알릴 수 있는 시간. 남윤수라는 배우에게 이런 얼굴도 있었구나, 기태를 연기한 배우가 남윤수구나 하고 알아채는 사람이 많은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