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라는 장르

실험적인 서사와 탐미적인 언어로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한 작가 박솔뫼가 소설 <고요함 동물>로 돌아왔다. 소설 속 ‘나’는 작가가 선사하는 공간과 기억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간다. 고양이 탐정 ‘차미’와 함께 수상한 기미와 징조들을 성실히 따라가보길. 평범한 일상이 특별하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탐정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혔고, 드디어 탐정소설 <고요함 동물>을 출간했다. 사실 언젠가 탐정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갖고 있다. <고요함 동물>은 탐정소설이라기보다 탐정소설의 여러 장면을 가져와 본래 내가 쓰는 스타일에 활용했다고 하는 편이 더 알맞다.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싶은데 본격적으로 쓰기에는 아직 그에 맞는 상태가 되지 않은듯해서 내가 좋아하는 탐정소설의 순간들을 가져왔다. 소설 제목은 깊이 고민하기보다는 길을 걷다 우연히 떠오른 단어에서 착안했다.

소설 속 구성이 반복된다. 작품은 주인공의 ‘일상’과 고양이 발자국이 찍힌 ‘사건’, ‘대화’와 ‘대화의 끊김’같은 구성으로 이어지는데, 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런 구성을 자연스럽게 여기기는 듯하다.

고양이 차미가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으로 등장한다. 고양이를 등장시킨 이유가 있나? 주변에 고양이와 함께 사는 친구들이 많다. 차미 역시 친구의 고양이 이름이다. 함께 있을 때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고양이만 보고 있어서 언젠가는 고양이가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거대한 시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친근한 소재를 선택했지만 반복 어구나 리드미컬한 문장의 흐름으로 서사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내 소설에 일관된 공통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때그때 다른 것 같다. 처음 작품을 쓰고자 한 순간이나 장면에 집중하려고 한다. <고요함 동물>은 전작들과 달리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귀여운 이야기다.

‘좋아하는 소설들과 긴장감을 유지하며 글을 쓰고, 그 태도를 좋아한다’고 말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글을 쓰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가 있다면 누구인가? 최근 수년간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결과물인 내 소설이 볼라뇨의 소설과 비슷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아무리 좋아해도 비슷한 결과로 출력되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지난해에는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책 <실내연구>와 연결된 ‘방의 복원’, 즉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태도는 전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각 공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늘 공간과 장소에 흥미를 느낀다. 항상 어딘가를 궁금해하고 그곳이 어떤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생각하는 편이다. 평소 생각에서 소설이 시작되기 때문에 공간이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쓰게 되는 것 같다. 밖에 나갔다가 방으로 돌아오면 방이 평소와 다르게 보이고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편해지지 않나. 이런 식으로 미세하게 변화하는 상태를 ‘방의 복원’이라고 표현했다.

<실내연구>를 쓴 작가 피에르 소골의 집은 김포발 하네다행 비행기 내부다.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웠다. 비행기 내부에 관해 쓸 때 가장 몰입했고, 글을 쓰며 기분도 좋았다. 비행기 안에서는 평소에 하던 행동을 쉽게 하지 못하고 제한된 상황에 놓인다. 비행하는 동안은 행동에 제약이 있으니, 다른 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책을 읽기에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해왔다. 현실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감각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5장의 ‘고양이는 소리 냄새 촉감 움직임 등으로 고유의 실내를 구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방에 떨어진 회색 캐시미어 니트가 회색 고양이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공간뿐 아니라 고양이까지 만들어진 셈이다. 작품에는 친구들의 고양이와 길에서 스친 고양이들의 특징이 섞여 있다. 특히 ‘작가의 말’에 쓴 고양이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아한 표정의 흰 고양이 ‘두모’, 분홍색 입이 매력적인 큰 고양이 ‘꼼이’, 초록색 눈을 가진 ‘오이’, 고등어 고양이 ‘짱이’ 등이다. 특히 5장의 ‘나’가 도쿄 여행을 마치고 호텔 방에 들어섰을 때 만난 회색 과학자 고양이 ‘미오’는 ‘나’가 벗어놓은 회색 캐시미어 니트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니트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작품 속 ‘나’는 평상시에 좋아하는 방의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꼽아보며 잠이 드는데, 이런 생각들은 실제 형태로 존재하며 또 다른 방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공간을 만드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품 속 세계를 구축할 때 중시하는 점이 있나?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늘 어렵다. 다만 ‘이상한 자연스러움’의 상태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12장의 마지막 구절 ‘모든 방은 스스로를 복원하며 방 바로 그 자신이 될 것이다’는 결국 작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말, 즉 공간을 통해 진짜 자아를 찾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비슷한 구절을 <Viewers>라는 전시 관련 출판물에 수록된 글에 쓴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며 방이 복원되는 상태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다가 이번 소설에서 확장하게 됐다.

<고요함 동물>의 마지막에는 해설 대신, 동화 <차미 새미 보미>가 담겨 있다. 원래 해당 시리즈에는 작품 해설이 들어가는데, 해설이 붙는 것이 어울리는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즈음 전시 도록에 쓴 <차미 새미 보미>를 수록해도 괜찮을 것 같아 마지막 장에 담았다. 난해하거나 복잡한 소설은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해석하며 읽기 바란다.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도 좋지만 읽다가 잠시 쉬면서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하며 읽는 것을 추천한다.

박솔뫼의 작품에는 항상 다양한 평론과 독자들의 반응이 따른다. 다양한 시각을 담은 다채로운 해석을 볼 때 작가로서 어떤 기분이 드나? 늘 흥미롭게 읽는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반응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부산에 가고 싶어진다는 평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늘 기분이 좋다.

박솔뫼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전에는 이런 질문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삶에서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다음 작품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 곧 단편집을 시작한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간단히 목과 어깨를 스트레칭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다가 또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일어나 산책한 뒤 원고 쓰기를 반복할 것이다. 하반기에는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한다. 그 전까지 무사히 원고를 잘 고쳐볼 생각이다.

BE THE VOICE 성폭력에 맞서는 사람들 ②

브리 리 작가 겸 여성운동가, 퀸즐랜드 지방법원 前 재판연구원

눈물을 닦고 상처를 마주해 진실을 고발하기까지

어린 시절 오빠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십 수 년의 시간을 버텨왔다. 그러다 사춘기를 겪으며 내적 방향성이 ‘진실과 정의’를 향해 있음을 깨달았고, 정의 같은 걸 찾으려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지방법원의 재판연구원이 되었다. 1년간 법원에서 일하며 수많은 성범죄 사건을 마주하는 건 더없이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직면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건을 고발했고, 피고인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는 작가이자 여성운동가 브리 리의 실제 이야기이며, 그는 법조인이자 성폭력 피해자로서 감내하고 고통받다 용기를 낸 경험을 담아 책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을 썼다. 자해까지 이어지던 성폭력 피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고소인으로서 법정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그는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울어야지. 울고 싶은 만큼 실컷 울고 나서는 눈물을 닦고 다시 정신을 차려야지. 그 러곤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지. 그래야지.”

십 수 년 동안 혼자 견뎌온 일을 가족, 애인, 친구에게 말하고 고소하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듯 이 책을 내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법률 시스템의 명암을 모두 아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사람 중 정작 자신의 불만을 법정에 호소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법조 경력을 담보로 시스템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변호사도 거의 없고요. 저처럼 특권을 가지고 주변의 지지를 받는 사람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책은 창작자가 온전히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예술의 종류라는 생각에서 책을 통해 제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습니다.

책 제목을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가해자 완전책임)’은 무척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이름만 듣고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원리는 간단합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때렸는데 B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B의 두개골이 마치 계란 껍데기처럼 얇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 해도 A는 자신의 행동이 일으킨 파문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범죄자는 행위의 심각성을 가늠할 자격이 없으며, 피해자가 나올 때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죠. 이 원칙은 약자인 고소인을 배려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로스쿨 시절에 처음 배운 뒤로 오랫동안 이 개념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해왔고, 성범죄 사건에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이를 책 제목
으로 택했습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뉩니다. 1부에는 재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마주치는 성범죄 사건을 통해 과거 자신이 겪은 일을 밖으로 꺼내는 과정이, 2부에는 과거 성폭력의 가해자를 고소하고 끝내 유죄판결을 얻어내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지치는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아주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책을 통해 제대로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제게는 훌륭한 친구들과 의지가 되는 동반자와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모두 저를 믿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지지 없이는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브리즈번에서 2시간 떨어진 지역 워릭(Warwick)에서 마주한 사건의 피해자가 결정적으로 제게 용기를 심어줬습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 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곧 끝을 맺는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안도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마침내 스스로를 위해 정의를 되찾는 노력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성폭행 피해의 트라우마로 폭음, 폭식, 자해까지 했다는 내용은 충격적이지만, 사실 이는 성범죄 피해자 대부분이 겪는 일입니다. 이런 행동과 감정은 어디에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하나요? 이건 무척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금도 괴로워하는 분이 있다면 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권합니다. 저는 심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에 대해 조언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저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적 학대나 성인 간의 성폭력을 비롯한 성범죄가 널리 퍼져있고, 이 사회가 가해자보다 피해 생존자를 비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피해 생존자들을 비난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사회가 전가하는 수치와 비난을 피해자가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여타 사건과 달리 성범죄 사건은 유독 피해자에게 가혹한 측면이 있습니다. 피해자는 피해 당시 야한 옷을 입고 있어서는 안 되고, 관계를 원치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도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해자는 술을 마셨다거나, 어린 시절 학대당한 트라우마가 있다거나,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몰랐다거나 이 중 하나에만 해당해도 이를 이유로 유죄판결을 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법과 절차는 피해자가 인간으로 존중받거나 신뢰받지 못하는 세상의 산물입니다. 피해자를 존중한다면 이러한 범죄는 지금보다 덜 일어날 겁니다. 또 피해자를 신뢰한다면 이러한 범죄에 대한 고발도 많아질 겁니다. 우리의 법률 시스템은 많은 사람의 태도만큼이나 과거에 갇혀 있습니다. 진보는 이처럼 느리고 어려운 일입니다.

성범죄 사건의 법적 절차에 필요한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모든 사람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때, 하다못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보호받고 존중받고 신뢰받아야 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추정의 원칙으로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고발인은 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시스템이 고발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셈입니다. 고발인은 이런 시스템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다 공평하게 만들면 더 많은 고발이 뒤따를 것이고, 사람들은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싸우기를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해악에 대해 책임져야 할
유일한 사람은 바로 가해자입니다.”

용기를 내어 과거의 사건을 고소하고 유죄판결을 얻어낸 이후 내적, 외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무적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싸운 저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그 마음은 배심원의 평결이 다른 방향으로 내려졌더라도 똑같았을 겁니다. 싸우는 과정은 제가 겪은 가장 무섭고 어려운 사건이었고, 앞으로 그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게 너무 강하거나 무서운 적 따위는 없습니다.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호주 법조계와 사회에도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미투 운동은 많은 것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간 여성들이 높은 확률로 학대와 추행, 폭력을 당해왔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라도 알 정도로 널리 퍼졌습니다. 퀸즐랜드에서는 저를 포함한 사람들이 성범죄를 다시 심의하도록 하기 위해 싸워왔고, 실제로 현재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2년 전 미투 운동이 일어난 이후 성범죄 근절을 위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행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엄청난 백래시도 있고, ‘혐오’라는 이름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못된 짓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때로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기도 하지만, 법적 절차가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않죠. 그들이 두려워하고 방어적으로 나오리라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에요.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아무 거리낌 없이 여성을 학대하고 유린하다가, 갑자기 이런 행위로 유죄로 잡혀 들어가고 있으니까요. 당연히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하겠죠. 페미니즘은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답답한 일이기도 해요. 변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책 말미에 ‘그가 건드렸던 여자아이가 분노한 페미니스트로 성장했으니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소녀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제가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치는 바로 평등입니다. 모두가 평등하길 바라는 마음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여러분은 강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목소리를 내고 항의한다고 해서 그로 인해 일어나는 힘든 일이나 귀찮은 일을 여러분이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든 해악에 대해 책임져야 할 유일한 사람은 바로 가해자입니다. 계속해서 경찰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끊임없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사랑받으십시오.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원천이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겁니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모든 세대는 새로운 형태의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다만 모두가 바라는 최종적인 결과물을 얻지는 못했고, 지금을 사는 저 역시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렇지만 아름답고 멋진 세상은 어떻게 그것을 발전시킬지, 그리고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이미 가장 아름답고 멋진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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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섹스 라이프

자가격리 삼주 차, 싱글인 나는 결국 그동안 망설이던 데이팅앱을 깔아보았다. 다짜고짜 누드 사진을 보내라는 놈, 당장 만나자는 바보도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적당히 점잖으면서 종종 야시시한 대화를 흘리는 그와 연결되었다. 왕년에 취미로 야설을 쓰셨나, 그의 유려한 문장력은 매번 나를 흥분시킨다. 온라인으로 누굴 만나는 데 회의적이라 실제 그를 보게 될진 모르겠지만, 코로나 사태가 끝나고 그와 나눌 ‘터치’를 상상하면 또 몸이 달아오른다. 만날 수 없어 더 짜릿한 나의 섹스팅 파트너다.  피비(영국, 24)

상점이 문을 닫고 모든 집합은 두 명 이하로 극히 제한되었지만 다행히 외출은 자유로이 할 수 있기에 남자친구와 산책이나 집 데이트는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키스조차 참아왔다. 한 달 즈음 되었을 때 고비가 왔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지만 또한 다짜고짜 달려들기가 꺼림칙하기도 했다. 우리의 결론은? 안전장치로 마스크를 쓰고, 마주보지 않게 섹스를 했다. 심히 유난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뭐, 특별한 상황엔 특수한 해결책이 필요한 법이니까. 슈테피(독일, 30)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자가격리에 지루해진 커플들 덕분에 코로나 베이비붐이 일 거라고 하는데, 슬프게도 신혼인 우리에겐 먼나라 얘기다. 나는 얼마 전 직장에서 임시 해고통보를 받았고, 요식업에 종사하는 남편은 시에서 내린 레스토랑 휴업명령으로 손님을 받을 수가 없어 고심하고 있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생계를 위협받으니 스트레스가 심해 성욕 따위는 잃은 지 오래다. 2세 계획은 말할 것도 없다. 알리사(미국, 30)

재택 근무를 하게 된 이후로 우리는 평일 모닝 섹스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었다. 잠도 푹 잤고, 숙취도 없고, 말짱한 정신과 상쾌한 마음으로 커튼 사이사이 스며드는 햇살을 받으며 그와 사랑을 나누는 요즘은 인생에서 손꼽히는 건강한 순간이다. 긴 통근시간에 지쳐 평일에 잠자리를 하는 건 꿈도 못 꾸었고, 주말에는 대부분 놀러 나갔다가 거나하게 취한 채 돌아와 반쯤만 기억되는 섹스를 해 온 우리였다. 재택 근무 만세다. 엘리(미국, 33)

남자친구과 함께 살지만 그는 회사 내 헬스장을, 나는 집 근처 요가원을 다니기에 서로 운동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도시가 완전히 봉쇄된 후 우리는 거실에서 함께 홈트를 하기 시작했다. 운동하며 솟은 엔돌핀 때문일까, 땀에서 나온 페로몬일까, 그저 서로의 섹시한 뒤태에 홀리는 걸까, 우리는 벌써 몇 번 홈트 직후에 약속이나 한 듯 격한 스킨십을 나눴다. 여러분, 홈트로 유혹하세요. 소피아(스페인,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