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THE VOICE 성폭력에 맞서는 사람들 ①

서지현 n번방 법무부 TF 대외협력팀장

아직 끝나지 않았다

2년여 만에 복귀한 서지현 검사는 n번방 법무부 TF 팀의 대외협력팀장 을 맡았다. “성범죄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고, 더 많 은 사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나아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히기를 기대한다. 페미니즘은 누군가가 우월 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동등한 인권을 가졌다는 사실 을 말한다. 이렇게 계속 얘기하다 보면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겠나.” 업무로 바쁜 와중에 주말에 시간을 내 <마리끌레르>와 인터뷰를 하는 건 사 람들의 관심이 식지 않도록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 다. n번방과의 싸움은,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n번방 성 착취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고 많은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분노하기는 했지만 크게 놀라울건 없었습니다. 예견된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와 유사하고 동일한 범행이 만연하고 있었지만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도,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성 착취 물을 공유하고 강간을 모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소라넷은 2004년에 단속을 시작했지만 12년이 지난 2016년에야 폐쇄했습니다. 그리고 운영자 1명만이 징역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n번방의 전신이자 1백22만 명이 모여 아동 성 착취물을 공유하던 n번방의 전신인 AV스눕은 관련자 1백22만 명 중 48명 형사처벌을 받고, 9명만이 실형을 받았으며 23만 건을 유포한 운영자는 징역 1 년 6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영·유아 성폭행 영상이 포함된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가입자 1백28만 명 중 국제 공조로 검거된 사용자 32개국 3백10명 중 한국인이 2백23명이었지만 대부분 기소유 예나 벌금에 그쳤고, 운영자 손정우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2심에서 고작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습니다. n 번방 두 번째 운영자인 캘리는 징역 1년이 확정됐죠. n 번방 설계자로 알려진 와치맨은 AV스눕에 성 착취물을 유포했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후 더 대범한 범행을 저질렀고, 검찰에서는 이에 3년 6월을 구형했습니다. 또한 경찰에서 신고조차 받지 않거나 기소유예로 마무리된 범죄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SNS에 ‘함께 분노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분노는 피해자에게 힘을 줄 수 있으리라’라고 덧붙였는데요, 뜨거운 여론도 도움이 되겠지만 여론만 들끓은 채 피해자만 남고 가해자는 흐지부지 사라진 과거 사례를 보면 앞으로 성범죄나 디지털 성범죄를 제대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함께 분노해달라는 글을 남긴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피해자로서 처음 힘겹게 입을 열었을 때, 함께 분노해주신 것이 큰 힘과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미투 운동 때도 버닝썬 때도 여론이 들끓고 피해자들이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 니다. 그때 세상이 바뀌기는 너무나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속적이고 집요한 관심과 분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n번방 사건은 국민의 분노가 크고 지속적이었으며,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하는 많은 분이 있었기 때문에 관련 법안이 통과되는 등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현재 n번방 법무부 TF 대외협력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n번방 법무부 TF 팀은 어떤 일을 하며 대외협력팀장으로서 지금까지 해온 일과 성과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국회, 여성가족부 등 관련 부처와 여성 단체, 언론 등과 협의하고 소통하는 일이 주된 업무입니다. 사실 어떤 분은 제가 굉장히 힘 있는 자리에 가는 줄 알았는지 피해 사실을 이용해 좋은 자리로 가는 것 아니냐고 비난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분은 제게 많은 것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고, 운신의 폭도 넓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20대 국회에서 n번방 방지법안이 일괄 통과된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n번방은 하루이틀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성범 죄에 비해 디지털 성범죄를 가볍게 여기고 가해자가 범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성범죄를 묵인하거나 관대하게 봐온 것이 원인이고, 또 다른 원인은 기성세대가 디지털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살인, 강도, 강간에 비해 디지털 범죄는 일종의 가상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로, 가벼운 범죄라고 인식해왔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훨씬 더 잔인하고 전파성이 강하며, 그 피해가 공공연히 전시되고 피해자는 죽어도 피해 장면은 영원히 재생되는, 영구적으로 피해가 남는 범죄입니다. 기성세대가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법과 제도가 이에 따라 변화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라넷이 2015년에 폐지되었지만 유사한 사이트는 계속 생겨났고, 웰컴투비디오 운영자인 손정우는 1년 6 월형을 받은 데 그쳤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미국 송환을 막아달라는 국민 청원을 올렸고 미국으로 송환되지 않는다면 지극히 낮은 형량으로 그치게 됩니다. 과연 세상이 바뀔 수 있을지 회의감마저 드는데 빠르게 진화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이렇게 느린 법적 대응으로 과연 막을 수 있을까요?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계속 이와 같이 느리게 대응한다면 진화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절대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에서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전문 기구를 두어 진화하는 범죄에 대응해 신속하게 법과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TF 팀 업무를 위해 참고한 디지털 성폭력과 관련한 해외 사례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폭력 특히 아동 성폭력에 관해서는 무관용 엄벌주의를 취하는 것이 전 세계의 공통된 원칙이고 상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앞서 말했듯이 이런 원칙과 상식에 반해 이에 대한 처벌이 매우 가볍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웰컴투비디오 사건만 보더라도 한 차례 영상을 다운로드한 미국인은 징역 70월, 아동 성 착취물을 올린 영국인은 징역 22년, 공유한 말레이시아인은 징역 9년을 선고받았지만 우리나라는 그 사이트를 운영한 자를 1심에서 집행유예, 2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습니다. 제대로된 처벌을 위해서 미국으로 송환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죠.

성폭력 사건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범죄인데도 불필요한 성별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사회나 정상적인 논의만 오가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한국은 성별 대립이 지나치다고 느껴집니다. 성폭력 사건이 왜 성별 대립의 문제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대다수(약 96%)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피해자가 여성이지만 이는 성별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실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입니다. 이는 ‘성폭력은 절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 해온 잔인한 공동체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계속 외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페미니즘을 마치 남성 혐오나 여성우월주의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합니다. 페미니즘이 오해받고 성별 대결 양상을 띠는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의 잘못된 보도 때문인데, 제대로 반성하거나 시정하려는 언론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를 위한 조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법무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피해자가 국선 변호사나 진술 조력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경제적 지원과 심리 치료 등을 위한 피해자 지원금을 교부합니다. 이에 더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위해 불법 영상물 삭제 지원 등 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 중입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해자를 위한 법안만큼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디지털 성폭력의 예방입니다. 이를 위한 법적인 개선안 외에 무엇이 필요 할까요? 여성을 존엄성을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 하지 않고, 단지 성욕이나 지배욕을 충족하기 위한 대상으로 생각해온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해온 잔인한 문화도 변해야 합니다. 전에 ‘강간 문화’라는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이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수십만 명의 남성이 모여 어린 여성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성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잔혹한 범죄를 서로 응원하고 부추기면서 저질렀지만, 그안에 있던 누구도 이를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잠실야구장의 전체 좌석 수가 3만 석이라고 합니다. n번방 가입자 수가 26만 명이라면 잠실야구장에 관중이 꽉 찼을 때의 8~9배에 이르는 인원이 모여서 환호하고 응원 하면서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혹한 성 착취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가담자가 26만 명이 맞느냐 틀리냐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박사방만도 1회 접속자 수가 1만 명이 넘었고, 유사한 채팅방 수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동의 측면이 아니라 피해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가담자가 중복된다고 하더라도 그 수만큼 피해 사례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유·아동기부터 제대로 된 성교육과 인성 교육, 젠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경쟁 위주의 입시 교육이 먼저 바뀌어야 할 테죠. 사회 전반에 걸친 반성과 개선이 있어야 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체감되는지요? 수백만 명의 국민이 n번방 범죄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처벌, 신상 공개를 위한 청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수사나 처벌을 위해서는 경찰, 검찰, 법원의 변화가 절실한 데, 일반 국민의 인식 변화에 비해 국가기관의 변화는 항상 느린 것 같습니 다. 이렇게 느린 국가기관을 조금이라도 빨리 변화하도록 하는 가장 큰 힘은 아무래도 국민의 관심과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지속적이고 집요한 관심과 분노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n번방 성 착취 범죄로 촉발된 여러 국민 청원 중에 신상 공개와 관련한 것이 있었습니다. 범죄자의 신상 공개가 왜 중요한 문제일까요? 경찰, 검찰 등을 비롯한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디지털 세상의 범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신상 공개라고 합니다. 범행 수법 중 가장 강력하게 피해자를 협박하는 도구가 신상 공개이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들의 신상 공개와 관련해 여러 논란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범죄 예방 측면에서 효과가 큰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 2020년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이 발행한 <성범죄 백서>에 따르면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범죄자들은 동종 범죄로 신상 정보가 재등록되는 비율이 75%로 매우 높다고 합니다. 이런 재범을 막고, 인근 거주자 등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오랜 휴직 후 법무부로 복귀했습니다. 복귀를 결심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8년, 사표를 써놓은 채 미투 운동을 시작했습 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절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조직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운 일이며 돌아가더라도 집단따돌림 등으로 인한 고통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무나 끔찍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많은 분이 저를 보고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큰 부담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은 다시 돌아가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없는데, 정상적으로 근무할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다시 근무하게 된다면 지옥 속에서 저 자신을 태우는 일일 텐데, 그러기에는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모든 피해자가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은 첫째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것, 둘째 2차 가해자를 처벌 하고 2차 가해를 막는 것, 셋째 피해자로서 제대로 보호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그나마 치유되는 유일한 방법은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모습을 보는 거죠. 그런데 저는 이 중 어느 것도 실현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엄청난 고통과 아픔으로 남아 있는 셈이죠. 그렇지만 이를 두고 굳이 불행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이 고통과 아픔은 이제 내 인생의 디폴트(기본값)로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다시 검사로 일하고, 법무부에서 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고 희망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 다. 저 자신이 고통과 아픔을 굳이 불행이라 이름 붙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때론 기뻐하고 때론 슬퍼하며 내 삶을 사랑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면 그것이 잘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가 어떤 자리에 가서, 어떤 일을 하며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리가 끔찍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는 자리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일일지라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 무렵, 대법원에서 무죄취지 파기환송이 되어 석방된 피의자가 제게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전히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고 복수 운운하고 다니는 지금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좀 더 힘을 내서 일해보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지금 보다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피해자가 패배자로 남지 않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여성을 포함한 약자의 안전은 법과 제도, 수사 및 사법기관의 의지만으로 보장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성폭력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등 성폭 력을 처벌하는 강력한 법률이 있는데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거나 피해 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수십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에 수반한 비난과 분노도 없었고, 분노가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행정기 관, 입법기관, 사법기관에 있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각자 해야 할 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은 직접적인 가해자에 의한 피해도 크지만, 제3자에 의한 2차, 3차 가해 등 n차 가해가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긴 것이 사실입니다. n차 가해들이 n번방을 만든 것은 아닐 까요? n번방 가담자들은 지금까지도 ‘피해자 들이 자초한 일이다. 피해자들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여성들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뻔뻔한 범행을 저지르고 피해자를 비난할 수있는 건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기, 단톡방 성희롱 대화 등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눈감지 않기, 약자들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기 등은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그래서 피해자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피해자가 패배자라는 의미는 아닙 니다. 그런데도 피해자가 자신의 삶을 사랑하 면서 자신의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그자체로 값진 일입니다. 누구를 이길 필요도, 그무엇도 극복할 필요 없이 말입니다.

사회에서 범죄가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n번방 방지법안 이후 사회가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바가 있는지요? n번방에 어떻게 대응하 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욱더 과학기술이 발달할 것이고, 더 많은 플랫폼과 더 잔혹하고 교묘한 범행 방법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대로 수사하고, 국제적 공조수사 절차를 확고히 해놓아야 합니다. 또 가담자를 엄벌하 고,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하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끔찍한 지옥에 살게 될 겁니다. 철저히 수사하고, 마지막 한 명까지 엄중히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런 지옥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n번방 사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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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파도와 만나다

신작 <파도를 걷는 소년>이 5월 14일에 개봉했다. 제주에 사는 이주노동자 2세 소년 ‘김수’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내가 도시를 떠나 제주로 이사 온 지 4년째 되던 해에 촬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예멘 난민들이 이곳에 많이 들어왔고 사회적으로도 이주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 나 또한 자연스레 이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어느 날 뉴스를 봤는데, 아시아권 국가에서 온 이주민 2세는 내국인과 외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 한국에 조용히 스며든채 살아간다고 하더라. 차별받지 않기 위해 부모의 출신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조명하는 영화를 만들게 됐다.

서핑을 중심 소재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엔 학교를 다니지 않는 소년들의 삶이 권투를 만나며 변화하는 줄거리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옆집에 살던 서퍼 크루 ‘소년회’ 멤버와 대화를 나눈 후 소재가 바뀌었다. 서핑 덕분에 달라진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수의 인생도 이렇게 변해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위 서퍼들을 바라보며, 수는 거리감과 동경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 마음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하지만 작품 내 서핑 장면이 역동적인 편은 아닌 것 같다. <파도를 걷는 소년>을 촬영하며 세운 첫째 원칙은 ‘카메라가 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인물들의 유희와 감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얼굴 표정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제주의 풍경을 관조하려고 했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본 여러 서퍼가 파도 타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좋다고 하더라. 아마 각자 자신만의 파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 역을 맡은 곽민규 배우와 <내가 사는 세상>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파도를 걷는 소년>에서도 함께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민규는 원래 이번 작품에 출연하는 인물들을 담당하는 조감독으로 합류했다. 김수 역할에 알맞은 사람을 함께 찾던 중, 조연출을 맡은 오정민 감독이 민규가 수를 연기하면 어떻겠느냐고 내게 제안했고 민규도 자신 있다고 했다. 작품 속 수는 민규가 직접 만들어낸 캐릭터다. 나는 민규에게 ‘대사를 마음대로 하되 마지막에 저쪽을 봐달라’ 또는 ‘가만히 있어달라’ 정도의 디렉션만 했다. 수의 감정은 오로지 민규에게 맡겼다.

전작에 비해 희망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번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성장하는 소년. 그저 수를 따라가며 그가 이렇게 변한다는 걸 담아내려고 했다.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수에게 삶의 의미가 생기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수를 바다로 이끌고 그의 삶을 변화시킨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단순히 서핑이라고만 하기는 싫다. 사람마다 인생이 변화하는 지점이 다르고, 그 변화는 내면의 어떠한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는 욕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돌아보며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악의적이지 않고 밝다면 참 행복할 듯하다. 파도를 바라보면서 서프보드에 앉아 있는 수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야기가 담긴 공간 ②

문악HOM

5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이층집 내부에 자리 잡은 ‘문악HOM’. 음악과 책을 기반으로 여러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회사 ‘페이지 터너’의 사무실, 서점 ‘라이너 노트’, 온실과 서재 등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강연을 듣거나 뮤지션의 공연도 감상할 수 있다.

한국의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이 설계해 1960년대부터 서교동에 터를 잡고 있는 양옥집. 이곳에 책(文)과 음악(樂)이 함께하는 문악HOM이 오픈했다. 공연 기획과아티스트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회사 ‘페이지 터너’에서 준비한 공간이다. 박미리새 이사는 이곳을 마련하기 위해 삼고초려했다고 고백한다. “잘 보존된 낡은 주택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어요. 집주인이 수리를 하지 않을 입주자를 원해 우리의 계획에 대해 여러 번 설명해야 했죠.” 실제 페이지 터너는 일부 하자만 보수했고 시공까지 직접 진행했다.

처음에는 사무실과 기존에 운영하던 음악 서점 ‘라이너 노트’의 이전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집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 페이지 터너는 이곳을 더욱 다채롭게 활용할 방법을 고안했다. “음악을 주로 다루는 회사의 특색을 살리고 싶었어요. 최근에는 강연과 음감회, 뮤지션의 공연 등을 열고 있죠.”

그렇다면 음악적으로 특별히 설계한 부분은 없을까? 이사는 오히려 주택 본연의 구조가 공연하기에 제격이라고 말한다. “거실 벽면에 있는 원목의 입체적인 구조가 콘서트 홀이나 녹음실의 음향 디퓨저처럼 되어 있어요. 공연을 해보니 소리의 울림도 너무 좋았고요. 이곳과 어울리는 어쿠스틱 공연을 주로 개최할 예정이에요.” 음악과 책, 건축에 대한 존중이 어우러져 공간의 멋을 더한다.

focus on

김중업 건축가가 지은 주택의 특징인 온실을 재건했는데, 유리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등 최소한만 보수했다.
2 오래된 주택의 방들을 음악 서점 ‘라이너 노트’, ‘시간이 머무는 서재’, 페이지 터너 사무실 등으로 사용 중이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15안길 6
문의 070-7730-1145

 

3F/LOBBY

건축사 사무소 ‘로비스트’의 소장 3명이 함께 운영하는 카페. 한쪽에 사무 공간이 있어 탕비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둥근 얼음이 든 잔과 함께 나오는 핸드 드립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 ‘더 로비 블렌드’를 비롯한 원두는 따로 구매할 수 있다.

건축가 김동현, 김수영, 안종훈이 용산역 근처의 건물 3층에 마련한 ‘3F/LOBBY’는 건축사 사무소 ‘로비스트’의 탕비실이자 카페다. 커피를 판매할 뿐 아니라, 업무상 미팅이나 건축 관련 세미나도 진행하는 이곳에는 유리벽으로 구분된 작은 사무실이 한쪽에 있다. “보통 건축사 사무소는 방문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궁금한 건 편하게 물어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오기 좋은 장소를 마련했어요.”

3F/LOBBY를 기획하며 이들이 참고한 건 카페가 아니라 호텔과 사무실에 있는 로비다. 로비의 분위기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행동이 로비스트에서 추구하는 방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곳곳에 놓인 안락한 가구는 이 공간의 컨셉트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로비를 연상시키는 요소는 서비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호텔처럼 가방 거치대가 있고, 손님의 외투는 받아서 크라운카트에 걸어놓아요. 모든 메뉴는 테이블까지 직접 가져다드리고요.”

그렇다면 일반 로비와 다른 3F/LOBBY만의 장점은 무엇일까? 세 사람은 입을 모아 ‘3층’이라 대답한다. “도심 위에 살짝 떠 있는 공간이에요. 남향의 창문을 통해 분주한 거리 대신 하늘,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파리, 날아가는 새를 볼 수 있어요. 이곳의 한산한 분위기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요.” 일상을 벗어나 잠시 쉬길 원한다면 건축가가 맞이하는 탕비실로 향해보자.

focus on

1 커피 바는 건축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인 화강석으로 만들었고 불필요한 요소가 보이지 않도록 설계했다.
2 실제 로비처럼 테이블 사이의 간격을 늘리고 낮고 넓은 디자인의 의자로 꾸몄다.

주소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15길 19-19 3층
문의 02-586-1102

 

오브코하우스(OFCO HOUSE)

집처럼 편안한 사무실을 컨셉트로 한 카페다. 카페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눈치 보지 않고 오래 머물러도 좋은 것이 장점. 프릳츠의 원두로 내린 커피와 일하면서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다.

“처음에는 사무실로 구한 곳이에요. 그런데 생각보다 여유 공간이 많아서 남는 자리에 뭔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다 카페를 만들게 됐어요. 그 생각의 연장선으로 사무실과 카페가 집처럼 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오피스, 커피, 하우스를 조합해 ‘오브코하우스’를 기획했어요.” 프릳츠 커피를 디자인한 그래픽 디자이너 조인혁이 공간 기획을, 외식 기획자 정동우가 메뉴 구성을 담당한 오브코하우스는 1980~90년대 미국의 사무실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조인혁 디자이너는 파라보릭 조명, 알루미늄 블라인드, 멜라민 상판, 원목과 철제 선반 등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소재를 재미있는 형태로 조합해 공간에 녹
여냈다. 여기에 그린, 아이보리, 그레이, 브라운, 블루 등 다양한 색을 섞었다. 이 덕분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이미지를 지닌 사무실에서 영감을 받았는데도 지루하지 않고 귀여운 모습이다.
규모가 넓지 않은데도 소소하게 구경할 거리가 많은 오브코하우스의 두 번째 매력은 편안함이다. 허리를 굽혀야 하는 낮고 작은 테이블, 30분도 앉아 있기 힘든 의자 대신 높이가 적당하고 널찍한 테이블과 편안한 의자를 마련했다. 조도 역시 오래 머물러도 눈이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사무실처럼 커피를 마시면서 업무를 보거나 책을 읽는 손님이 많은 편이에요. 이건 의도한 부분이에요. 회전율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사람들이 편하게 오래 쉬었다 갔으면 좋겠어요.” 참신한 아이디어와 세심한 배려로 완성한 때문일까, 오브코하우스는 매일 자진해서 출근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focus on

1 오브코하우스 입구에는 간판 대신 사무실이나 경찰서 입구에 있을 법한 게시판이 있다. 거기에는 메뉴와 오브코하우스의 로고, 조인혁 디자이너가 공간을 만들면서 제작한 시안 등이 붙어 있다.
2 은은하게 빛이 퍼져 눈이 덜 피로한 파라보릭 조명은 이곳의 포인트 중 하나다.

주소 서울시 성동구 서울숲6길 17 2층
문의 02-463-8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