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어리 여행 ③ 강원도 평창 화이트 크로우

암벽등반을 하기 위해 주말이면 강원도로 떠났던 캐나다인 남편 레스 팀머맨즈(이하 레스)와 한국인 아내 김수진 씨는 정원이 있는 시골집에 살고 싶은 로망을 8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실현했다. 현실적인 문제는 잠시 밀어두고 꿈에 그리던 집을 찾았고, 일단 평창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도시의 한 고등 학교에서 일하던 아내는 강원도로 전근 신청을 했지만 예상과 달리 평창에서 먼 동해로 발령이 나 뜻하지 않게 주말 부부로 살게 됐다. 도시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평창에 정착한 남편은 시골 마을에서 사는 삶에 스며들며 홈 브루잉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해의 학교에서 2년간 근무를 마친 아내가 평창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캐나다에 사는 남편의 어머니 집근처에 수제 맥주 제조와 양조장 관리에 관해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부부는 캐나다로 떠났다. 남편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평창으로 돌아와 지난해 1월 ‘화이트 크로우 브루잉’을 오픈했다. 화이트 크로우라는 이름은 평창의 옛 이름인 백오현(흰까마귀의 고장)에서 따왔다.

맥주 맛의 시작은 아이디어다. “꿈의 맥주가 무엇인지 늘생각해요. 특별한 맥주를 만들고 싶거든요. 맛을 상상한 다음 어떤 성분이 필요한지, 무엇을 섞어야 할지 고민하며 레시피를 만들어가죠. 곧 출시할 예정인 ‘새소리’는 얼그레이를 블렌딩했어요. 맛 좋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의 비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떤 재료든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아야 해요.”(레스) 화이트 크로우는 자연에서 만든 맥주를 지향하며 지하 220m에서 길어 올린 천연 암반수를 바탕으로 질 좋 은 몰트와 홉을 더한다. 지난해 8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2019 아시아 맥주 챔피언십에서 화이트 크로우의 ‘고라니 브라운’이 브라운 에일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현재 이곳에서 만드는 맥주는 10여 종으로 평창 골드, 앨티튜드 앰버, 고라니 브라운, 화이트 크로우 IPA, 하이홉, 영벅, 블랙벅, 밝은 밤, 새소리 등이다. 각각의 이름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고 이는 대부분 평창의 자연과 관련있다. 이 중 불그스름한 색을 띠는 ‘앨티튜드 앰버’는 평창의 가을 하늘을 의미한다. 해발고도란 의미의 앨티튜드라는 이름은 평창의 높은 고도에서 착안한 것이다. ‘평창 골드’라는 이름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의 금메달과 햇빛을 담고자 했다. ‘하이홉’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홉’이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차다는 것. ‘밝은밤’은 평창의 별이 쏟아지는 밤이 모티프가 되었다. 모든 맥주는 포스터를 따로 제작해 각자가 가진 스토리를 그림으로 담아냈다. 앞으로 자신들이 키우는 강아지 이름을 딴 맥주도 만들 예정이다. “집에 개가 세 마리 있어요. 모두 유기견이었죠. 눈이 하나 뿐인 시추 웅을 위한 ‘원 IPA’, 다니던 학교 옆에서 발견한 엄마 유기견 그레이시를 위한 ‘그레이시 스타우트’, 그레이시의 새끼 메리 브라운을 위한 ‘메리 브라운 에일’을 만들 예정이에요. ‘레스큐 독(Rescue a Dog)’ 라인이 되는 거죠.”(최수진) 얼마 전 완성한 새소리에 이어 사우어 맥주도 만들 계획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년 6월에는 달리기 행사를, 가을에는 사이클 대회를 열었는데, 올해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기 위해 잠시 보류 중. “맥주 만드는 일의 가장 큰 즐거움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맥주를 나눠 마실 수 있다는 거예요. 평창에 와서 브루어리를 운영하며 새로운 인연을 많이 만났어요. 오늘 밤에도 잠시 ‘애비로드 펜션’에 들러 신선한 생맥주를 나눠 마시려고요.(웃음) 하루 일과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도 브루어리에서 일과를 마치고 맥주를 마실 때예요.”(레스) 맥주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맥아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당이 빠지게 하는 당화 과정을 거친뒤 한 번 끓인다. 여기에 홉을 넣어 끓여 효모와 이스트를 넣고 발효시키는데 발효 후 맛에 따라 홉이나 다른 재료를 첨가해 맛을 만들어간다. 그다음은 숙성. 맥주가 완성되기까지 라거는 석 달, 에일은 한 달 정도 걸린다. 이 시간 동안 청소에 많은 공을 들인다. 브루어리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 맥주 맛의 기본이기 때문. 브루어리에 있는 탭하우스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에 3일만 문을 연다. 탭하우스에서는 네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맥주 샘플러와 캐나다식 감자튀김인 푸틴과 페퍼로니 피자 등 맥주와 어울리는 음식도 맛볼 수 있다. 탭하우스가 문을 열지 않아도 브루어리에 가면 병맥주를 구입할 수 있다.

SUMMER PICK
새소리

“영종도에 위치한 슬로스 브루잉과 콜라보레이션한 맥주.
도수가 4.7도로 낮은 편이며 얼그레이 티를 첨가해
홍차 특유의 향과 시트러스 향기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다.
오후에 차 한 잔을 마시듯 여름날 오후에 마시면 청량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화이트 크 로우 브루잉 대표
레스 팀머멘즈

브루어리 여행 ② 대전 여행 스팟

LOCAL’S RECOMMEND

교토 스탠다드 2

“도룡동은 카이스트와 엑스포 과학공원 사이에 자리한 한적한 단독주택 마을이에요. 교토 스탠다드2는 호텔이나 펜션 같은 숙박업소라기보다는 호스트가 사용
하는 공간 중 일부를 나누려고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교토에서 들여온 물건들로 채운 고요한 집. 온종일 FM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 호스트의 고향에서 온 사과나무와 살구나무, 장미, 허브 등이 잔뜩 피어 있는 소담한 정원까지 ‘교토 스탠다드 2’는 당일치기 여행으로 대전을 찾은 여행자가 ‘쉼표’를 찍기에 알맞은 공간이다. 주방 그릇이나 화분, 오가닉 침구까지 장인정신의 가치를 잃지 않는 교토와 꼭 닮아 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조금만 걸으면 산책로가 있어 동네를 돌아보기에도 좋다. 단독주택 건물을 사용할 수 있으며, 몇 가구 살지 않는 동네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나친 소음과 음주는 금물이다.

주소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영업시간 15:00(체크인), 11:00(체크아웃)
문의 www.instagram.com/playburger

 

흥부네칼국수보리밥

“대전에는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이 많아요. 가게 근처에 구봉산이 있어 등산 후 방문하는 손님들도 많습니다.”

가수원동에 오래 거주했다면, 흥부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메인 메뉴인 칼국수와 보리밥, 파전 말고도 대표가 매일 정성 들여 손수 준비한 반찬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상추와 배추김치, 제철 나물, 된장찌개, 콩비지 등이 기본 반찬으로 제공되고 여러 사람이 먹어도 남길 만큼 푸짐하다. 어머니의 손맛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가격. 평균 5천~7천원대다. 여름 한정 메뉴인 열무냉면도 놓쳐서는 안될 메뉴 중 하나다.

주소 대전시 서구 가수원중로 53 1층
영업시간 11:30~21:30, 월요일 휴업
문의 042-541-6855

 

커먼힐즈

“갈마동은 유행에 민감한 밀레니얼 세대가 모여 사는 곳이에요. 이곳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죠.”

알록달록한 원색의 가구가 꽉 찬 공간에 들어서면 고소한 커피 향이 코끝에 닿는다. ‘커먼힐즈’는 레스토랑 메인 셰프로 일했던 대표가 오픈한 카페. 커피는 ‘싱크커피로스터즈’에서 로스팅한 커먼힐즈 맞춤 원두를 사용하는데, 견과류의 고소한 맛과 과일의 부드럽고 달콤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싱글 오리진 원두는 호주 현지의 듁스 커피로 바리스타가 한달에 한 번, 나라별, 품종별로 ‘이달의 커피’를 선정해 소개한다. 제철 과일 주스와 크루아상, 애플파이, 깨찰빵 등의 베이커리류도 사랑받고 있다.

주소 대전시 서구 대덕대로161번길 38 1층
영업시간 10:30~01:30
문의 042-536-3389

 

다다르다

“대전은 참 재미있는 지역이에요. 독립영화관과 헌책방, 소극장, 갤러리가 넘쳐나거든요. 독립서점은 19곳이나 되고요. 아날로그 감성 여행을 즐기기 좋은 도시죠.”

‘다다르다’는 삶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책을 소개하고, 지역 주민과 청년에게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서점이다. 대전에는 19개의 대학교가 있어 청년 인구가 많은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감을 주고 싶어 만든 공간이기도 하다. 1층에서는 대표가 좋아하는 커피를 소개하고, 1년에 한 번 마을 지도를 만들어 대전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점 주변 지역을 안내하는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년 충남도청에서 열리는 시티페스타 역시 그의 손을 거친다. 세계의 다양한 도시에서 한 달 살이를 경험한 대표가 주제를 선정해 공연과 전시, 영화 상영, 포럼 섹션 등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가 직접 영수증에 작성하는 ‘서점 일기’도 눈여겨 봐주길.

주소 대전시 중구 중교로73번길 6 1층
영업시간 12:00~20:00, 화요일 휴업
문의 010-9430-2715

 

설짬뽕

“관저동은 대전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동네입니다. 지역주민과 여행자가 뒤섞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대전 관저동을 지난다면 꼭 들러야 할 맛집으로 꼽히는 짬뽕 전문점 ‘설짬뽕’은 30년간 짬뽕만 연구한 주방장의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모든 음식을 주방장 혼자 조리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편. 불 맛을 진하게 입힌 ‘직화 짬뽕’과 꼬막과 부추를 푸짐하게 넣은 ‘꼬막 짬뽕’, 새콤한 소스와 새싹 채소를 올린 쫀득한 ‘찹쌀탕수육’이 추천 메뉴. 짬뽕 메뉴는 자유롭게 밥을 추가해 먹을 수 있도록 가게 한편에 항상 준비해둔다. 늘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에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직후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주소 대전시 서구 도안대로 37 1층
영업시간 11:00~21:00, 15:00~17:00(브레이크타임)
문의 042-542-7545

 

두탭스

“대흥동은 서울의 종로 같은 동네죠. 대전의 원도심이자 대전역에서 가까워 외부에서 접근하기도 편합니다. 젊은 유동 인구가 많아서 수제 맥주를 알리는 데 적합한 곳이라 판단했어요.”

미국에서 10년간 맥주에 대해 공부하고 비어 소믈리에가 되어 돌아온 대표는 수제 맥주를 판매하는 비스트로 펍을 오픈했다. 식사를 하며 술을 곁들이는 외국의 술 문화를 알리기 위해 23가지의 다양한 맥주와 감바스, 새우 로제 파스타 같은 페어링 음식을 함께 선보인다. 추천 맥주는 레드 와인을 연상시키는 ‘듀체스 드 부르고뉴’와 상쾌한 청량감이 특징인 ‘코로나도 노스아일랜드 IPA’. 모두 여름밤에 잘 어울리는 맥주다. 독특한 맥주를 모아 시음회도 열고 있다.

주소 대전시 중구 중앙로130번길 37-14
영업시간 17:00~12:00(평일), 17:00~01:00(주말)
문의 010-6430-2020

바야흐로 사랑의 시절

날 선 사랑의 기억을 담은 소설 <여름, 스피드>로 문단에 등장한 작가 김봉곤은 용감했다. 세간의 가시 돋친 말들을 감내하며 스스로 퀴어 문학, 게이 소설을 쓴다고 밝혔고, 2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을 발표했다. 성 정체성을 인식하기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와의 재회, 학교 선배에게 당했던 폭력적인 섹스의 경험, 새로운 만남 앞에서 꺼내 든 옛사랑의 추억, 오랜 연애를 끝내기까지 지나쳤던 계절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생활을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한 이야기까지. 모두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를 6편의 소설로 묶은 이 책은 그가 다시금 용기를 낸 결과물이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사랑에 지지 않았다.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 이후 2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이 나왔어요. 전작을 읽은 독자들의 영향인지, 반응이 처음과는 확연하게 다른데요. 첫 번째 소설집은 요란한 느낌이 있었어요. ‘몇 쇄 찍었습니다’라는 글도 계속 업데이트 했고요. 트위터에는 엄청 좋다는 반응이 있는 반면, 악랄하고 상처를 주는 악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많이 달랐어요. 생각보다 잔잔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훨씬 좋았어요. 첫 번째에 비해 조금 더 정제된 느낌으로 쓴 글이라 그런지 독자들도 편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제 책을 읽으면서 퀴어 장르에 안면을 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확실히 전작보다 가독성이 높은 문장으로 구성되었어요. <여름, 스피드>는 막 데뷔한 시기에 쓴 거라 거친 면이 있고, 그래서 더 용감하게 쓴 면도 있었어요. 나쁘게 보자면 두 번째 소설을 쓸 때는 제가 깎였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날이 바짝 서 있다가 독자들의 평가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면서 좀 뭉툭해졌달까요. 딱히 신경 쓴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전에 비해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좋게 쓴 느낌이긴 합니다.

작가의 말 첫 문장이 “첫 소설집은 쓰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면, 두 번째 소설집은 묶는 데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예요. 실제로 <시절과 기분>은 과거에 써둔 6편의 작품을 엮은 책인데, 이를 완성하는 데의 용기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큰 건 ‘마이 리틀 러버’를 개고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창비의 문학3이라는 사이트에 연재했던 작품인데, 쓸 당시에 약간 정신이 나간상태였거든요. 제가 데뷔한 이후, 그러니까 등단작에 나온 남자와 헤어진 뒤에 연애를 한 적이 없었어요. 계속 소설 쓰고, 회사 다니면서 바쁘게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퓨즈가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때부터 남자를 만나러 미친 듯이 돌아다닌 거예요.(웃음) 그때가 ‘마이 리틀 러버’를 연재하던 시기였어요. 매주 마감 전날까지 남자와 만나서 놀다가, 다음 날 아침에 뭘 쓸지 생각하고, 점심시간에 짬을 내 겨우 써냈어요. 그래서 이걸 열심히 썼다는 기분이 들지 않아 마음에 차지 않았죠. 책을 내려면 잘 들여다보고 고쳐야 하는데 그걸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났던 거죠. 그런데 담당 편집자가 정해지고 당장 책을 내야 할 때가 되어서야 꾸역꾸역 다시 봤더니 생각보다 괜찮은 거예요.(웃음) 우려했던 만큼 최악도 아니었고요. 막상 용기를 내고 보니 할 만했고, 그때부터 박차를 가해서 완성한 책이에요. 원래 퇴고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마이 리틀 러버’는 개고를 하면서 새로운 경험까지 얻은 작품이에요.

퇴고를 많이 하지 않는 건 쓰던 당시의 감정을 남겨두기 위해서인가요? 확실히 그런 마음이 제일 커요. ‘마이 리틀 러버’를 쓰면서 그제야 퇴고의 재미를 알게 된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는 썼을 때의 에너지를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리고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제가 문단의 라이징 마감 쓰레기라서 퇴고할 시간이 없었어요.(웃음)

전작을 ‘퀴어, 학예, 로맨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번 작품은 뭐라 말할 수 있을까요? 유의미한 ‘첫’들의 모음. 사실 ‘처음’이라는 말은 어디에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말이라 날카로운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요. 첫 연애, 첫 섹스, 첫 이별. 이런 것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전작에 이어 <시절과 기분> 역시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실제 삶을 담은 소설집이에요. 글로 확장된 내용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쓰기 힘들 것 같아요. 어떻게 모든 사랑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가요?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해요. 그런데 그게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보단 어떤 세부 사항을 강렬하게 기억하는 쪽이에요. 그걸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혹은 앞뒤로 살을 더 붙여서 글을 써요.

과거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데, 이를 글로 되새기면서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이를테면 너무 미화하지 않으려고 했다거나, 반대로 좀 더 아름다운 방식으로 풀어냈다거나. 소설을 쓸 때 딱히 고려하지 않는 부분이 예쁘게 써야 한다는 거예요. 오히려 최대한 제가 보고 기억한 것을 독자들이 가장 비슷하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요. 더 아름답거나 비참하게 만들어 제가 기억하는 것 이상을 발견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을 쓰는 건가요? 그런 것이라는 식의 설명보다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 없는 명확한 표현이 많습니다. 브랜드명도 자주 등장하고요. 제가 어릴 때부터 메이커를 밝히는 애였어요.(웃음) 브랜드는 쓰고 싶었던 것의 10분의 1도 안 쓴 거예요. 그리고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은 욕구와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그냥 셔츠가 아니라 보라색 폴로 셔츠를 말해야 하는 거죠. 브랜드뿐 아니라 다른 문장도 마찬가지예요. 에두르지 않고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나는 게이다’라고 말해요. 있는 그대로 적시하고 싶은 건 제게 그냥 당연한 일이거든요.

브랜드 못지않게 글에 쉼표가 많이 등장합니다. 나열, 강조, 친절한 설명 등의 용도로요. 맞아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 리듬감을 만들고 싶은 이유도 있어요. 제가 쓰면서 느끼는 그 리듬감으로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굳이 쉼표를 찍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쉼표를 맥시멀하게 쓰는 작가로 알려진 이인성 소설가를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그분의 책 <낯선 시간 속으로>를 보면 한 줄에만 대여섯 개가 있을 정도로 쉼표가 정말 많아요. 제가 그분의 글을 좋아하고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쉼표를 찍는 부담이 적은 것도 이유고요.

<시절과 기분> 속 ‘나’ 혹은 ‘봉곤’은 계속 사랑에 대해 생각해요. 자신이기도 한 그는 어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랑에 있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지만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요. 모든 걸 포기하기 때문에 이기기도 하는 사람이고요.

그럼 이 책에서 사랑을 빼면 뭐가 남을까요? 풍경과 공간. 좀 더 확장하면 계절감까지. 저한테는 이야기만큼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저는 유머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글을 쓸 때 웃기려고 작정하는 건 없어요. 쓰는 동안에는 좀 더 진지한 자아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어디가 어떻게 웃긴 건지 감은 있어요. 그게 필요하다면 넣는 편이고요. 실제로는 못 웃겨서 안달인 사람이에요. 험담과 비난조의 유머를 구사하고 있습니다.(웃음)

<시절과 기분>을 퀴어 문학, 게이 소설로 규정하는 말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어요. 당연히 부정할 필요 없죠. 퀴어 소설, 게이 소설, 연애소설 다 맞아요. 맞는 말을 두고 ‘그거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거죠. 물론 문학을 협소하게 만드는 식의 라벨링에는 반대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규정되는 것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퀴어 문학이라는 기표는 그대로라도 그 안의 내용은 계속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그 흐름만 잘 읽어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게이 소설이라는 이유로 비하와 혐오의 말과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숱한 비하와 혐오와 부정과 번복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다름 아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라는 글이 그 시선에 대한 답이라고 봐도 될까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가 담대하고 평안해 보일 수도 있겠죠. 실제로 제가 지금 상황에 만족하며 잘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혐오와 차별이 사라진 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퀴어든 아니든 현대 시민이라면 인식할 수밖에 없는 문제고요. 게다가 저는 좀 더 예민하게 감각하는 입장이고요. 그리고 제 문장에 담긴 비하와 혐오는 외부에서 오는 것일 뿐 아니라 자기혐오에서 오는 말이기도 해요. 어떨 때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스스로에 대한 검열 때문에 힘들기도 하니까요.

줄기차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자기 복제’라는 반응도 있는데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섬세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당신 잘못이야’라는 다소 과격한 생각도 해요. 모든 작가가 자기 복제를 하지만 결국 다른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 차이를 음미하는 것도 독서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좀 더 섬세하게 그 차이를 가늠하는 독법에 관심을 가지면, 함부로 누군가의 작품을 두고 자기 복제라는 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두 권의 소설집을 낸 작가인 동시에 편집자라는 직함을 가진 회사원이기도 해요. 전업 작가가 되지 않고 회사 다니며 글쓰기를 병행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학교 다닐 때 ‘소설가들은 돈을 벌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데도 가고, 좋은 것도 사고, 사치도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말에 깊이 동의했어요. 금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경험들이 있잖아요. 또 전업 작가를 하면 종일 제 생각만 하게 될 것 같더라고요. 내 소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때 나는 어땠나 등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보단 회사에 나가서 자아를 접어두고 일을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돈도 벌잖아요. 물론 회사에 다니면서 쌓이는 피로감도 있지만 반대로 덜어지는 불안감도 있어요. 불안과 피로를 바꾸는 거죠. 어쨌든 회사는 계속 다닐 예정이에요.

작가가 아닌 편집자일 때는 어떤 사람인가요? 아무래도 작가들이 자신의 고민을 쉽게 말할 수 있는 편집자이지 않을까 싶어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한 말을 글 쓰는 저하고는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거든요. 비교적 작가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편집자 입장에서 본 작가 김봉곤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끔찍하죠.(웃음) 제가 교정 교열 단계의 피드백은 잘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업무 프로세스를 잘 알아서 불필요한 허례허식도 없고요. 그런데 표지에 미친 사람처럼 굴어요. 작가가 표지의 색감에까지 관여하는 건 드문데, 제가 그래요.

벌써 다음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띄엄띄엄 단편 몇 편을 발표하게 될 테고요. 내년에는 첫 장편을 쓸 예정입니다. 장편을 쓰겠다고 얼마 전에 컴퓨터도 새로 샀어요.

역시 사랑 얘기겠죠? 아닐 것 같아요. 아마 다른 걸 쓰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사랑이 당연히 있긴 하겠죠. 하지만 생각보다 그 농도가 옅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히 예상하고 있어요.

현실에서 이미 사랑이 충만해서 그런 걸까요?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