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썸의 이유

내 대학 동창인 A는 미인 대회에 나간 경험이 있을 정도로 평균치를 넘는 외모의 소유자다. 비록 지역 예선이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친구들 가운데 제일 예뻤던 그녀는 그래서 클럽에 갈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클럽에 들어가기 전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실 때부터 합석을 청하는 남자들이 말 그대로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A가 술자리에서 특별히 끼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큰 눈이 더 그윽해지고 가무잡잡한 피부는 술집 조명 아래서 더 탐스러워졌다. 남자들은 앞다투어 자신이 가진 모든 유머와 재치를 쏟아냈고, A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면 무리 중 두어 명은 꼭 따라 나갔으며, 그중 한 명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가 A에게만 특별한 아이스크림 (A 는 구구콘, 나머지는 빠삐코)을 사다 주며 그날의 (예비) 승리를 만끽했다. A 역시 신나게 웃고 떠들며 그날 꽂힌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누구에게도 진짜 연락처를 알려준 적 없다.

이유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 때문이다. 그렇다고 A가 순전히 당시 남자친구가 없던 우리를 위해서 그 많은 자리를 함께해준 건 결코 아니다. 그렇게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만난 남자와 있었던 일을 전하며 자신이 아직 다른 남자들한테 먹힌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남자친구에게 확인시키는 게 A의 큰 낙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까지 5년 가까이 만나온 남자친구는 그 말을 허허 웃어넘겼다. A의 말에 따르면 A의 남자친구는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는 체질이라 함께 마셔줄 수가 없으니 친구들이랑 술자리를 즐기라고 이해해주는 편이라 그랬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A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도 같다. A는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몸에 약간 살이 붙은 것 같다고 느끼면 늘 우리에게 ‘불금’ 스케줄을 묻곤 했다. 합석해 술을 마시는 동안 A에게 정성을 쏟는 남자가 없으면 다음 날부터 미친 듯이 다이어트를 했고, 그 반대라면 반년 정도는 그 스타일을 유지했다. A의 썸을 빙자한 ‘객관적 외모 평가’는 직장인이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애써 외모를 가꾸는데 술자리에서 썸이 끊어질 리가 있겠는가.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예의 남자친구와 결혼한 사이라는 건데…. K, 32세, 여

 

빈 잔부터 채워줘?

전 남친과 헤어진 지 3년이 지났다. 연애하다 헤어지면 잊는 데 만난 기간의 2배가 걸린다는데 난 4배의 시간이 지나도 새 인연이 생기지 않아서 한 친구한테 고민을 털어놨다. “사람 만날 구멍을 좀 만들어야 인연도 생기지. 회사에서 집, 집에서 회사만 오가면서 어떻게 남자를 만나니?” 다행스러운 건 그 친구가 팁도 함께 알려줬다는 건데 모든 연애를 술자리에서 시작한 친구답게 일단 술을 좀 배우라고 했다. 술을 마시면 서로 경계심이 풀어지면서 속내도 더 잘 털어놓게 되고 무엇보다 서로 더 예쁘고 멋있어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친구는 주말마다 나가는 러닝 동호회에서 파생된 소수 정예 소주 모임이 있다며 술에 재미를 붙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모임은 없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심심한 생활에 지쳐 있던 나는 일단 주말에 갈 곳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았다.

강남의 한 술집에서 만난 그들은 생각보다 훤칠하고 멋있었다. 자전거를 타다 온 터라 딱 붙는 옷 사이로 드러나는 근육이 솔직히 좀 섹시했다.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를 빼면 나와 남자 둘이었다. 딱 좋았다. 나는 술이 약하니 반 잔씩만 따라주기로 합의를 본 후 가볍게 이미지 게임부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 사람은? 남자 둘이 다 나를 찍었다. 이거 그린라이트 맞지? 쉴 새 없이 잔이 돌아갔다. 하하 호호 웃음꽃이 피었는데 중요한 건 그날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내게 아무도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는거다. 친구를 통해서 물어보려나 싶은 마음에 다음 날 친구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통화한 친구의 입에서는 내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너 여고, 여대 나왔느냐고 물어보더라. 자기 잔이 비었는데 채워주는 센스도 없더래. 술은 반 잔씩 따라주는데도 계속 끊어 마신 건 일부러 그런 거니? 너 일단 나한테 술자리 매너부터 배워. 같이 마시는 사람 술잔이 비면 채워주는 것부터.” 아, 술을 안 따라드려서 기분 나쁘셨어요? 술 주는 대로 다 받아 먹고 네 잔 빌세라 눈치보는 사람이랑 술 먹고 싶으면 회사 후배랑 실컷 드세요, 이 꼰대야. M, 28세, 여

 

술이 무슨 죄여

뮤직 페스티벌이 끝난 직후였다. 흥이 잔뜩 오른 나와 일행은 지인들이 모여 있다는 홍대 인근의 한 술집으로 향했다. 모 밴드의 공연 뒤풀이가 한창인 그 자리는 이미 만취한 자들이 가득했고 특히 거나하게 취한 드러머 C는 나를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관심을 드러냈다. 개구쟁이처럼 장난치며 다짜고짜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리 는 그 로커의 장단에 하룻밤 정도는 맞춰줘도 재밌겠다 싶었다. 우린 옆자리에 앉아 장난과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생일이 지났다고 했더니 갑자기 바깥으로 달려나가 주차장의 고깔을 들어 올려 머리에 쓰려는 C를 간신히 말린 후 2차로 넘어갔다. 신청 곡을 틀어주는 바에서 C는 흥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물론 그 가게 주인조차 C를 말리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C는 그 바닥에서 소문난 돌아이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 있느냐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는지 다음 날 C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정신인 C를 보니 새삼 180센티가 훌쩍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로커 정신을 잃지 않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썩 괜찮아 보였다. 우리는 이름 모를 밴드의 공연을 함께 보고 자연스럽게 술집으로 향했다. 노란 조명 아래서 그의 얼굴이 전날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니, 잘생겨 보였다. 우리는 그날 3차까지 달린 후 사귀기로 하고 근처에 있는 그의 녹음실에서 같이 자버렸다. 섹스를 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날부터가 문제다. 만나면 할 말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밴드 드러머로 살아온 C와 직장인인 나 사이에 공감대라곤 술 하나뿐이었다. 일단 보고 싶어서 만나기는 하는데 대화가 뚝뚝 끊기는 시간이 얼마간 지속 되면 우리는 술집으로 향했고 술집 조명 아래에서 C는 다시 매력적인 남자로 돌아왔다. 문제는 내가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고 술이 당기지 않는 날도 있기 마련인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C를 만나는 게 고역이었다는 거다. 우린 당연한 수순처럼 헤어졌다. 서로 조금의 미련이나 추억 없이 모처럼의 깔끔한 이별이었다. 밤이면 홍대 인근에서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다는 C의 소식은 여기저기서 여전히 잘 전해 듣고 있다. L, 29세,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