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년 3월 <보그>에 실린 사진. 사진작가 기 부르댕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모델 니콜 드 라 마르주를 ‘우신예찬(Éloge de la Folie)’이라는 표제로 촬영했다. 스팽글 자수로 장식한 디올 드레스는 마크 보앙이 디자인한 것이다. ©ESTATE OF GUY BOURDIN

프랑스의 유명 언론인인 프랑수아즈 지루는 ‘1947년 2월 12일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크리스찬 디올이 바로 다음 날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그의 말처럼 42세의 디올이 자신의 첫 컬렉션에서 만들어낸 건 옷을 넘어 새로운 역사에 가까웠다. 그는 뉴 룩(New Look)이라 불리는 실루엣을 창조해 패션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패션 왕국을 세웠다. 당시 그의 명성은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인 드골 장군에 비할 정도였다. 뉴욕에서 카라카스까지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진정한 오트 쿠튀르를 선보이던 그는 짧은 시간에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1957년 어느 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위대한 패션 하우스의 왕좌는 이제 디올 역사상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에게 돌아갔다. 크리스찬 디올의 통념을 뒤집는 천재성, 이브 생 로랑의 아방가르드, 대중에게 잊힌 불운의 디자이너 마크 보앙의 초정밀적 디자인, 지안프랑코 페레의 화려함, 존 갈리아노의 극적인 판타지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식어 스스로 떠났다고 알려진 라프시몬스의 감각적인 미니멀리즘까지. 그녀는 이전의 디자이너들이 내부 분열과 교체를 거듭하며 쌓아 올린 전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합하고 계승해 브랜드를 지킨다. 그들이 남긴 모든 것은 디올의 유산인 동시에 그녀에게 영감을 선사할 위대한 도서관과도 같다.

패션 역사 큐레이터 플로랑스 뮐레와 올리비에 가베의 기획으로 탄생한 <크리스찬 디올: 꿈의 디자이너(Christian Dior: Couturier du Rève)> 전시는 이 거대한 70년 서사에 바치는 기념비다. 우리는 이곳에서 디올의 정체성을 확립한 디자이너들의 학구적 섬세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전시에 앞서 큐레이터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특수성과 과감한 시도로 그들이 패션계에 남긴 거대한 유산을 회상해보기 바란다.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연 크리스찬 디올.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는 여성들이 즐거움과 우아함, 아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다. ©ASOCIATION WILY MAYWALD/ADAG

크리스찬 디올 1947~1957

CHARACTER “20 대의 크리스찬 디올은 종종 피카소와 브라크, 미로, 달리, 콜더의 작품이 전시된 아트 갤러리로 향했습니다. 그는 달리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모던 스타일이라는 공통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죠. 두 사람은 함께 벼룩시장을 구경하거나 벨에포크 시기의 보물을 찾아 나서곤 했어요. 크리스찬 디올은 그야말로 로맨틱 가이였습니다. 그는 과거를 탐구하고 그 위에 현대성을 입혀 새로운 결과물로 선보이는 걸 좋아했죠. 단숨에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화려한 모임보다는 소수의 친한 친구들과 지내는 걸 훨씬 즐겼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위상에 삶이 짓눌리는 걸 싫어했어요. 본인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그 역시도 위대한 디자이너의 역할을 연기하면 된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 이후로 훨씬 편해졌다는 자서전 <디올과 나(Christian Dior et Moi)>의 글귀가 이를 뒷받침하죠.”

STYLE “ 첫 컬렉션을 디자인할 당시 패션계는 1940년대의 남성적인 실루엣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넓은 어깨와 밋밋한 힙 라인, 짧고 좁은 스커트가 주를 이뤘죠. 그때 등장한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은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샨퉁(shantung)이라는 실크 패브릭으로 만든 바 수트(Bar Suit) 재킷은 부드러운 어깨 라인과 자연스러운 형태를 지녔어요. 그는 여성의 몸을 굴곡진 형태로 인식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패브릭이 아주 풍성하게 이용됐는데, 이건 프랑스의 전후 재건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해요. 이러한 행보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배급 카드를 사용하던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사람들은새로운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패러슈트 패브릭을 사고 침대 커버와 드레이프를 이용해 자신만의 뉴 룩 스커트를 만들어 입었죠. 디올이 시도한 스타일은 순식간에 유행이 돼 번져나갔습니다. 모두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태어난 새로운 것을 환영했어요.”

LEGACY “ 그는 곡선적인 실루엣을 강조했어요.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패브릭은 걸을 때마다 형태가 바뀌었죠. 세상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패션 역사의 혁신이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를 휩쓸었던 여성성이 현대적으로 되살아난 것 같았으니까요. 그는 여성이 가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아주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이브 생 로랑 1957~1960

CHARACTER “ 이브 생 로랑은 1955년 크리스찬 디올에게 고용되었고, 디올 사후에 그 자리를 물려받아 21세라는 어린 나이에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호화스러운 분위기에 갇히지 않았어요. 그 대신 거리의 움직임과 생제르맹데프레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들, 지하 공연장이나 나이트클럽, 재즈를 관찰했죠. 프랑수아즈 사강, 쥘리에트 그레코와 같은 동시대 젊은이의 우상들이 그의 뮤즈가 되었습니다.”

STYLE “ 이브 생 로랑의 최초 컬렉션인 트라페즈(Trapèze, 1958)는 옷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젊은 여성들의 요구를 담아냈습니다. 가슴선을 따라 허리를 조이던 솔기가 느슨해졌고, 드레스도 한결 편안하게 바뀌었어요. 무슈 디올이 선보였던 H, Y, A 실루엣에 대한 오마주로 삼각형 모양의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또한 자유로운 움직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죠.”

LEGACY “ 비트닉(Beatnik) 컬렉션에선 그가 기존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검은색 모노크롬 가죽을 사용했어요. 가죽과 스웨이드는 당시 스포츠 의류에만 쓰이고 오트 쿠튀르에는 쓰이지 않던 소재죠. 이브 생 로랑은 <위험한 질주(The Wild One)>(1953)에 등장하는 미국의 폭주족과 프랑스의 블루종 누아르족 그리고 교외의 반항아들로부터 영감을 받았어요. 패션계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디올의 고객들이 그런 옷을 입는다는 건 그때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지금 보면 한없이 강렬하고 스타일리시한 이 컬렉션 때문에 그는 결국 직장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패션계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남았죠. 검은색 가죽 재킷은 이제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아이템이 되었으니까요.”

 

마크 보앙 1960~1989

CHARACTER “ 전임자와 다른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마크 보앙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주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는 우아함과 고상함의 수호 자를 자처했습니다.”

STYLE “ 커팅의 귀재로 불리던 마크 보앙은 밀리미터 단위까지 정확성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였어요. 그는 실루엣을 재정비했습니다. 가슴둘레를 좁히고 어깨와 팔 부분을 조금씩 줄였죠. 허리는 잘록해 보이면서도 너무 조이지 않도록 변형했고요. 그는 유니섹스와 1960년대 트위기 스타일을 환기했습니다. 과장 대신 현실적인 방향을 선택한 거죠. 1980년대에 마크 보앙은 전문직 여성들의 스커트 정장을 재해석하기도 했어요. 어깨는 넓어졌지만 균형 잡힌 디자인만큼은 여전했습니다.”

LEGACY “ 캐롤라인 드 모나코(그레이스 켈리의 딸이자 모나코의 공주)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잡지 표지에 등장할 때마다 마크 보앙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었어요. 패션의 역사에 크게 기록되지는 못했지만 디올의 고객들은 그를 추앙했습니다. 마크 보앙의 옷을 입으면 멋져 보인다는 확신이 있었던 거죠. 특별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현대적인 감각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고 느낀 겁니다. 과하지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았어요. 마크 보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고객에게 필요한 것을 늘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입기 편하고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우수하다는 점은 오늘날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작업과 공통된 특징이기도 합니다.”

 

지안프랑코 페레 1989~1996

CHARACTER “ 그가 수석 디자이너로 지명됐을 때 다들 놀랐습니다. 국수주의 언론은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가 프랑스 브랜드의 수장이 된다는 사실에 의아해 했죠. 패션이 곧 프랑스와 동의어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까요. 지안프랑코 페레는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관능적인 오페라 스타일을 추구하는 동시에 기하학적이고 명료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추종했어요.”

STYLE “ 호화로움 그 자체였죠. 풍부한 형태와 입체감, 주름과 같은 요소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놀라운 광기 속에 건축적 감각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요? 그의 패션은 마치 향수와 같아서 강렬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LEGACY “ 전형적인 1980년대 패션을 선보였던 페레는 수하의 디자이너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기성복이 점차 자리 잡으면서 ‘작은 손(petite main)이라 불리던 장인들의 일자리도 사라지던 시기였어요. 이런 우울한 흐름과 달리 그는 모자 장인과 플로리스트, 자수공예가 등을 고용해 자신의 의상을 완성했습니다. 예술적인 장식에 언론과 고객의 갈채가쏟아졌죠.”

 

존 갈리아노 1996~2011

CHARACTER “ 존 갈리아노는 파티 중독자였습니다. 1980년대의 클럽에선 늘 친구인 리 보워리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죠. 지독한 괴짜로도 잘 알려진 이 퍼포먼스 아티스트는 런던 공연 예술계의 악동으로 불리던 싱어송라이터 보이 조지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외출해 방종을 즐겼어요. 갈리아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패션에 대해서도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STYLE “ 그의 패션은 충격적인 시각적 병치와 대조적인 영감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사이 컬렉션은 벨에포크 실루엣과 S자형 코르셋을 마사이 예술과 혼합해 창조해낸 것이었죠. 영감의 원천이 워낙 다양해서 그 기원이 어디인지를 결국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LEGACY “ 존 갈리아노는 극단적인 생을 살다 비극적 종말을 맞은 여성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궁정에서 추문을 낳기도 했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이나 독약을 눈에 넣어 눈동자를 이국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는 마르케사 카사티의 일화가 대표적인 예죠. 갈리아노는 내면의 진실이 옷을 통해 밖으로 터져나오며 표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이러한 여성들은 불온하기 때문에 매혹적인 존재였죠.”

 

라프 시몬스 2012~2015

CHARACTER “ 라프 시몬스는 아주 신중하고 은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제품 디자이너였는데 1950년대 모더니즘, 특히 그가 수집하는 도자기에서 영감을 받았죠. 그는 순수한 형태를 좋아했습니다.”

STYLE “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 섬세함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형태를 보는 감각이 뛰어나 입체감과 정교한 구조, 놀라운 복잡성만으로 심플한 효과를 만들어냈어요. 보디스와 그 위에 장식된 선들을 이용해 18세기 파니에 드레스의 구조를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디자인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해 패턴의 절개를 피했고, 의상의 표면은 그래픽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죠.”

LEGACY “ 라프 시몬스는 혁신에 가까운 자수 예술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미스 디올(Miss Dior) 드레스에 대한 찬사의 의미로, 수천 개의 작은 실크 수공예 꽃잎을 이용한 그러데이션 패턴을 만들기도 했죠. 미니멀리즘에서 나올 법한 표현 방식도, 차갑거나 수수한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색채 배합은 아주 섬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