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니고

남자친구와 사내 커플로 만난 지 올해로 3년째다. 멀리서 지켜봤을 때는 이 사람, 천사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자기밖에 모르는 왕자병에 걸린 구 남친을 만나고 있던 때여서 더 그랬는지 항상 팀원들을 배려하고 자기 일도 아닌 일을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는 남자친구를 보면서 저 사람, 스트레스는 풀고 있는 걸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남자친구가 진짜 착한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사건은 겨울 여행 계획을 짜면서 벌 어졌다. 나는 항공편을, 남자친구는 숙소를 알아보기로 했고, 나는 근무 시간 틈틈이 적당한 가격의 항공편을 찾아 남자친구에게 공유했는데 별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나자 티켓 값이 10만원이나 더 올라 있었다. 항공권 상의에 왜 대꾸를 안 하느냐, 가기 싫으냐고 물었더니 남자친구가 “사실 조금 고민이 되네”라고 대답했다. “그걸 왜 이제 얘기해?” “너는 거기 가고 싶어 했잖아.” 사소한 일로 보이겠지만 나를 배려한답시고 확답을 주지 않아 이런 식으로 유야무야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번번이 왜 그러냐고 불만을 토로하면 “너를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나 봐. 내가 아직 너한테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해”라고 말한다. 대화가 안 된다. 자세히 지켜보니 일을 할 때도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일을 오케이해버려 그걸 수습하느라 야근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는 벌써부터 ‘남 보증도 서줄 놈’이라며 말리신다. Z, 엔터테인먼트 비주얼팀

 

신데렐라 아니죠

E는 연애만 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늘 잠수를 탄다. 그만큼 연애에 몰입하고 헌신하는 스타일인데 대학교 때는 CC였던 남자친구의 PT 자료를 대신 만들어주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직장인인 지금은 칼퇴 하는 날 반드시 남자친구의 집으로 가 지지고 볶고 끓여서 깔끔한 저녁상을 차려낸다. 남자친구의 퇴근 시간이 늦어지면 청소는 옵션이다. 이렇게 뭐든지 엄마처럼 해주려는 E에게 남자들은 너무 빨리 길들여졌고 그런 탓에 E는 누구나 알 만한 미모의 소유자인데도 연애에서 번번이 차였다.

한 번은 만나던 남자친구의 휴대폰 비용을 대신 내주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함했던 일도 있었다. 그런 E가 새해부터는 환골탈태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정황은 이렇다. 안 그래도 여자 문제로 수상한 기미를 보였던 남자친구가 휴대폰이 꺼진 상태로 새벽이 되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화가 난 E는 그의 집 앞으로 찾아가 밤새 기다렸다. 문제는 그날이 영하 16℃까지 떨어진 날 이었다는 것. 추위 속에서 슬쩍 잠까지 들어버린 E는 아침이 다돼서야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밤 응급실로 실려가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E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거의 죽다 살아난’ 그날, 이제는 전 남친이 된 그 남자는 다른 여자들과 짝을 맞춰 월미도로 조개구이를 먹으러 갔었다고 했다. E는 언젠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말했던 ‘그놈이 그놈’이라는 명언을 뼛속 깊이 새기리라 다짐하며 쓴 소주를 삼켰다. A, 교사

 

나란 남자 잊어줄래?

신년회 자리에 A는 유난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여자 이슈’가 있다고 했다. 그의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궁금해할 만큼 술이 오른 상태였던 우리는 A의 넉 달짜리 연애담에 귀를 기울였다. A가 B를 만난 건 한 취업설명회에서 강연을 하던 날.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묻는 그녀에게 A는 명함을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여기서 A는 ‘사실 B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라는 사족을 달았다. 당시 만나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B가 A에게 격한 호감을 보여 만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한 달 후 A는 그녀와 미약하게나마 오가던 케미가 금세 꺼졌음을 느꼈다. 그나마 잘 하지 않던 연락조차 하루 이틀을 넘기기 일쑤였는데도 B는 A가 야근하면 회사 앞으로 찾아와 간식을 주고 강연을 하는 날이면 보온병에 모과차를 타서 주기도 했다고. A는 부담스러운 한편 이렇게 착한 여자를 밀어내기도 미안한 마음에 그저 “고마워” 하고 받기만 했단다.

그러다 A는 회식 자리에서 신입사원 C를 보게 됐다. 여기서 또 A는 ‘C는 내가 최근에 본 여자 중에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서로 강렬한 호감을 느낀 A와 C는 며칠 후 단둘이 만나 밤새 술을 마셨고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거의 아침이 되어 집으로 들어간 A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B를 만났다. 그리고 B에게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들었다. 그게 이틀 전의 일. “막상 B와 헤어지려고 보니까 그동안 못해준 것만 생각나고 너무 미안한 거야.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얘기했는데 마음이 너무 안 좋으네….” 세상에서 제일 슬픈 남자의 표정을 하고 들어왔던 이유가 이거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일행 중 하나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냥 네가 바람나서 헤어지는 거잖아.” 자기 연민에 푹 빠져 있던 A는 얼굴에 냅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에 맞먹는 쌍욕과 충고를 듣고 얼빠진 얼굴로 돌아갔다. D, 광고 회사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