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 M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런 표정은 고3 시절 수능 성적표를 받던 날 이래로 십 수 년 만이었다. 그녀는 잘되기를 고대하며 한 달 가까이 만나던 썸남과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을 전했다. 숫자 ‘1’ 표시가 사라지지 않는 메신저 창을 몇 번씩 확인하면서 잠수나 타는 치졸한 자식이라 욕을 해보아도 쓰린 마음을 달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홧김에 작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와 잤단다. 잠깐, 전 남친?

정해진 파트너가 없는 사람은 상대 또한 싱글이라면 누구하고든 거리낌 없이 섹스를 할 수 있다. 그게 싱글의 좋은 점 중 하나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선택이 항상 탁월 하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M이 그랬다. 그녀와 전 남자친구의 연애는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서 파탄이 났었다. 들키고 나서야 울며불며 용서를 구하는 전 남자친구의 지질함에 오만 정이 떨어진 M은 그와의 모든 연락 통로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녀가 예의 썸남과 데이트를 시작할 무렵 전 남자친구가 새 SNS 계정으로 M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새로운 연애에 들뜬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읽씹’ 했다. 그때 그를 다시 차단했어야 하는데. 썸남에게 차인 사실이 확실해진 어느 밤 술에 취한 그녀는 SNS를 하다가 전 남자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보게 되었고 불쑥 답장을 보내버렸다. 그는 그녀에게 득달같이 달려왔고 둘은 밤을 함께 보냈다. M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에 누운 남자가 마치 자신이 간밤에 벗어던진 옷가지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 애가 사람이 아니라 허물처럼 느껴지더라고. 정신이 퍼뜩 들었어.” 하지만 그 하룻밤을 재결합의 불씨로 받아들인 남자는 자신을 피하는 M에게 문자 세례를 퍼부었고 그녀는 결국 그를 차단한 뒤 혹시 몰라 자신의 SNS 계정 또한 비공개로 돌려야 했다.

M의 이야기를 옆에서 함께 듣던 또 다른 친구 P도 헤어진 남자친구와 섹스를 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물론 누군가는 좋은 감정을 잃지 않은 채 헤어진 사람과 어쩌다 연락이 닿아서 잠자리를 한 일이 새삼 애틋하고 로맨틱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헤어진 이유와 별개로, 걔랑 섹스할 때 뭔가 이전에 이미 해봐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어. 우린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말이야. 왠지 시금털털한 기분. 근데 섹스가 시금털털해서야 되겠어?”

K에게도 헤어진 연인만큼이나 후회막급인 섹스 상대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거래처 직원이다. 우리 모두 안다. 프로답게 일터에서는 일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가족보다도 자주 보고 연락하고 함께 한 숨 쉬고 기뻐하는 이들에게 전우애 이상의 애정을 느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K에겐 매주 만나 미팅을 하던 거래처 대리가 그런 존재였다. 미팅이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어느 날 그들은 자리를 옮겨 치맥을 하며 자연스레 친해졌고 처음으로 큰 거래가 성사된 후 축하주를 나누던 날, 서로 호감을 느끼던 둘은 그날의 기분에 취해 밤을 함께 보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밤을 한 번 함께 보냈을 뿐, 서로 알아가는 단계였을뿐더러 설령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고 해도 공개 연애는 꿈에도 생각이 없었던 K와 달리 그를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날부터 당장 티를 못 내 안달했다. 행여 미팅에 그녀가 빠지면 꼭 모두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고, 우편으로 보내도 될 서류를 굳이 그녀의 사무실로 직접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이 눈치채고 K를 놀리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뒷말도 은근히 해댔다. 그녀는 그를 윽박질렀지만 이미 퍼진 말을 주워 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했던 그녀는 그간 공을 들여온 거래처를 스스로 동료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진짜 경솔했지. 그렇지만 그 남자에게 묻고 싶었어. 넌 사회생활 안 하니?” K는 잊었던 대학교 CC 시절을 떠올렸고 이러나저러나 사회에서 남녀에 관한 소문은 결국 여자에게 훨씬 불리하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같은 집단에 속한 누군가와 엮였던 K와 마찬가지로 H도 그렇게 남자를 만났다. 다만 H의 상대는 직장 동료가 아니라 그녀가 꾸준히 참석하던 동호회에서 만난 남자였다. 온라인 동호회로 출발해 오프라인으로 이어진 모임인데 상대는 그 커뮤니티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취미와 관련한 업계에 연줄도 많아 항상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한정판을 구해 오거나 다른 회원들은 모르는 소식을 먼저 전하는 그가 K에게는 어찌 보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을 때 K는 왠지 기분이 우쭐했다. 하지만 침대에서 만난 그는 더 이상 K의 아이돌이 아니었다. 둘은 전혀 통하는 부분이 없었고 그녀는 지루한 나머지 섹스 도중 그의 방에 진열된 희귀 컬렉션에 정신이 팔리기도 했다. 이후 K는 그 남자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취미활동을 위한 커뮤니티를 포기할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녀는 덕질은 덕질로 끝나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섹스 상대를 결정할 때 그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알고 있다. 다만 취기를 이기지 못하거나 기분에 취해서,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서 그 직감을 무시할 뿐. 하지만 때로는 C처럼 그저 운이 나쁜 경우도 있다. 그녀는 바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사실 그는 특별히 인상적이진 않았다. 침대에 갈 때까진 말이다. 첫인상은 서로 약간 심드렁했지만 둘은 합이 척척 맞는 섹스 덕분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C는 남자의 SNS 계정을 둘러보다 댓글에서 어쩐지 전에 본 듯 익숙한 아이디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그는 대학 동창의 친동생이었다. 그것만이라면 문제 될 건 없었을 테지만 C와 남자의 누나는 학기 초에 잠시 친했지만 남자의 누나가 무엇 때문에 C에게 감정이 상했는지 이간질과 험담을 해댄 탓에 이후 둘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C 또한 복수랍시고 남자의 누나가 좋아하던 남자 선배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치기 어린 행동도 했다. C는 고민을 거듭했지만 행여나 사이가 깊어졌을 때 과거를 극복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날 같이 밤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 남자가 이렇게 아쉽진 않을 텐데….” 어쩌겠나. 세상도 섹스도 요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