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브라를 하지 않고 다니기 좋은 계절이다. 두꺼운 스웨터를 입거나 얇은 옷을 여러 벌 겹쳐 입으면 노브라라도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매서운 추위에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시기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는 셈이다. 얼마 전에는 나를 포함해 여자 넷이 모였는데, 누구도 브라를 하지 않고 왔다. 물론 나는 겨울이 오기 전에 이미 와이어가 들어 있는 브라를 벗어던진 지 오래다. 와이어 브라를 마지막으로 산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다. 지금 우리 집 서랍장에 들어 있는 브라라고는 흐물흐물한 브라렛 몇 개와 유니클로에서 산 와이어가 없는 일체형 브라뿐이다. 가끔 브라를 해야하는 날이면 몸을 거의 압박하지 않는 이런 속옷을 입지만,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뭔가가 가슴을 둘러싸고 있다는 이물감은 떨치기 어렵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브라를 벗어야 비로소 완전히 편안하다. 브라렛이나 일체형 브라가 이 정도인데, 전에는 어떻게 와이어가 있는 브라를 하고 다녔나 싶다. 한 친구는 그나마 남아 있던 와이어 브라는 와이어를 전부 빼서 입는다고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단단하게 가슴을 조이는 와이어 브라를 주로 입었다. 아니, ‘주로’라기보다 전부 와이어 브라였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전혀 몰랐던 때였다. 와이어가 없는 브라는커녕, 우리나라는 브라의 사이즈조차 다양하지 않아서 일본의 모 속옷 브랜드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는 잠깐 붐이 일기도 했다. 내 친구 역시 입어볼 수 있고, 본인 가슴에 꼭 맞는 사이즈를 알려준다며 그 브랜드 매장에 가보라고 내게 권했다. 이후 딱 한 번 브라를 사러 그 속옷 가게에 가봤지만 그곳의 브라 역시 딱딱한 와이어가 들어 있어 숨이 막혔다. 와이어 브라를 하는 동안은 늘 그런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끼는 브라를 찬 날이면 뭘 먹든 어김없이 체했고, 그렇다고 약간 여유 있는 사이즈를 차면 호크가 풀리거나 팔을 올릴 때 브라가 벗겨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씩 브라의 특정 부분이 찢어지면서 튀어나온 와이어가 살을 찌르기도 했다. 그래도 무엇 때문인지 브라를 벗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브라를 매일 꼬박꼬박 하며 체하고, 답답해하고, 불편해하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내게 ‘브라를 꼭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브라를 했다. 발육이 나보다 좀 더 빨라 4학년 때부터 브라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같은 반 남자애들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 채고 뒤에서 브라 끈을 잡아당기거나 놀렸다. 당시 나는 남자애들의 행동에 화가 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나는 아직 브라를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야’ 하는 생각이 있었다. 가슴이 나오고, 어른처럼 브라를 해야 된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엄마에게 어린아이들용 스포츠 브라를 사달라고 조른 적도 있다. 가슴을 감추기 위해 어깨를 움츠리고, 절대 뛰지 않고, 일부러 아주 넉넉한 티셔츠 같은 걸 입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은연중에 그렇게 교육받는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똑같이 가슴이 있지만, 여성의 가슴을 더 의식하며 거기에는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여성의 가슴은 숨겨야 하며, 맨가슴이나 유두가 옷 위로 드러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니 브라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몇 겹으로 감춰진 여성의 가슴은 남성들의 관음증과 야릇한 상상의 대상이 된다. 중학생이 됐을 무렵, 같은 동네에 살았던 남자아이 한 명은 엘리베이터에서 기습적으로 내 가슴을 주무르듯 만지고 도망갔다. 이런 경험이 내게만 있는 건 아닐 것 같다.

가수 설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몇 장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논란’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우스운 이 소동은 설리가 브라를 하지 않은 채 찍은 사진에서 비롯되었다(당연히 옷은 입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설리의 노브라를 근거로 설리가 음탕하고 반항적이라고 했고, 개중에는 정신 상태가 의심된다고 힐난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편하게 브라를 하지 않은 사람이 이상할까, 남이 브라를 했는지 안 했는지 사진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뜯어보는 사람이 더 이상할까.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브라를 하지 않은 게 죽을 죄라도 되는 양 여자 연예인이 어떻게 이런 사진을 올리느냐고 달려들어 비난했다. 마치 ‘얼레리꼴레리, 쟤 가슴 보인대요’ 하고 놀리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처럼. 더불어 몇몇 매체는 여성의 가슴을 터부시하는 동시에 관음증의 대상으로 삼는 기이한 분위기를 부추겼다. 당시 보도된 기사들을 검색해봤다. ‘노브라 설리 vs 린제이 로한, 승자는?’ ‘설리, 집 밖에서도 노브라? 깊게 파인 가슴골 사이…’ 마라 타이겐이라는 모델을 두고는 이런 제목의 기사도 나왔다. ‘노브라로 다닐 만하죠? 시스루에 비친 풍만한 가슴’.

웃기지 않은가. 가슴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사실을 모두 아는데, 여성은 가슴이 있다는 걸 타인(특히 남성)이 의식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 더 기가 막힌 건 가슴을 가리기 위해 브라를 했다는 사실도 감추어야 해서 옷 밖으로 끈이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가끔은 투명 끈으로 바꿔 달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가슴이 처지거나 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신경도 써야 한다. 가슴을 보이면 안 되는데 예쁘기도 해야 하다니, ‘뭐 어쩌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노브라는 안 된다면서도 누군가 노브라로 나타나면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시선도 있다. 애초에 여성의 가슴을 둘러싼 이런저런 인식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누군가 “‘노브라’라는 말은 좀 이상하다. 브라를 하지 않은 상태가 자연스러운 거니까, 브라를 찬 상태를 ‘유브라’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이야기했다. 동감이다.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는 수지(이솜)가 브라를 하지 않고 다니자 여성들은 ‘접대 나가냐’며 수군대고, 남성들은 브라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두고 내기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물론 드라마 특유의 과장이 섞여 있지만 여전히 브라를 하지 않는 건 대단한 반항 혹은 헤픈 여성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 시선을 비웃으며, 나는 ‘유브라’가 아닌 ‘노브라’ 상태로 다녀보려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얇은 옷을 입는 계절이 와도 지금처럼 브라를 하지 않고 생활할 테다. 그게 여성에게는 훨씬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이건 ‘노브라를 허하라!’ 같은 외침이 아니다. 남이 브라를 했는지 안 했는지 굳이 쳐다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