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빈

백 버튼 화이트 셔츠와 자켓, 핀턱 와이드 팬츠 모두 렉스핑거마르쉐(Lexx Finger Marche).

전여빈

블랙 터틀넥 포츠 1961(Ports 1961).

전여빈

블랙 터틀넥과 화이트 플리츠스커트 모두 포츠 1961(Ports 1961).

한 소녀가 사라졌다. 사건을 맡은 경찰과 소녀의 부모, 같은 반 친구들의 의심은 실종 전날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전여빈)’에게로 향한다. 의심은 확신으로 얼굴을 바꾸며 영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곧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제 자신을 결백을 증명하고, 이 지옥에서 빼내올 이는 오직 영희 자신 뿐이다. 영화는 2시간 내내 증명해야만 살 수 있는, 혹은 증명할 수만 있다면 살지 않아도 좋을, 스스로를 파괴해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직감한 영희의 고통스럽고 참담한 과정을 극단까지 끌고 간다. 김의석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죄 많은 소녀>에서 영희라는 무겁고 외로운 짐을 진 이가 배우 전여빈이다. 그는 배우로서 영희라는 인물을 만나고 표현한다는 것이 결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 완전히 자신을 쏟고 내던진다. <죄 많은 소녀>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해야 할 신인 감독의 작품에 수여하는 ‘뉴 커런츠’을 받았으며, 배우 전여빈은 ‘올해의 배우 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보고 확신했다. 올해가 끝날 때쯤 모두가 이 영화와 배우 전여빈을 호명하게 될 것이라고. 굳이 더 보태지 않아도 소문이 날 대로 난 수작이다. 9월 13일 개봉한다.

1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의 완성본을 처음 봤나요?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전 완성본 전 단계의 러프한 편집본을 본 적 있어요. 스크린이 아니다 보니 그때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작품을 봤던 것 같아요. 또 이상하게도 내가 연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정작 나를 안 보게 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 연기를 유심히 봤어요.(웃음) 아마 어떤 방어기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완성된 작품을 처음 본 거죠. 극장 안에 앉아 있으니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었고···. 첫 GV를 한 날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시나리오 안에서 내가 품었던 마음, 촬영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 싸워왔던 마음, 영희의 심정까지 한꺼번에 터져버렸어요. 그때 많이 울었어요, 처음으로. 영화가 끝나면 GV를 해야 하는데 잘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요.

연기를 너무 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던 시기에 <죄 많은 소녀>를 만났다고 했어요. 2년 전이었죠? 스물한 살에 배우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고, 그 이후 저 나름대로 배우가 되기 위한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보냈으니 긴 시간이었죠.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성과를 내야만 했어요. 단순히 마음 좋게 ‘언제 나에게 기회가 올까’ 할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이십대 후반이었고 가정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내가 나를 책임져야만 했으니까 절실했어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있지만, 그만큼 불신도 있었어요. ‘나에게는 날개가 있어’라고 되뇌는 와중에도 벼랑 끝으로 계속 가고 있는 심정이었으니까요. 스물아홉 살까지 배우로서 어떤 행보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포기하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을 한 상태에서 <죄 많은 소녀> 오디션을 봤어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배우로서 느낀 무게감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 어땠어요? 2차 오디션에서 대본을 받았어요. 대본 파일을 스마트폰으로 받아 읽어보는 데 정말 빨리 넘어갔어요. 읽히는 속도도 속도지만 그림이 완벽하고도 아주 섬세하게 그려졌어요. 스마트폰 액정으로 보기가 아까울 정도로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집 앞 제본소에 가서 책을 만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었어요. 니체의 책에서인가 이런 구절을 본 기억이 있거든요. ‘피로 쓰는 글이 있다’고요. 제가 볼 때 이 글이 그랬어요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너무 행복했어요. 정말 멋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은, 그런 기대를 품게 하는 글이었어요. 그렇게 오디션을 다시 봤고 그날 감독님과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어요. 나라는 사람으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들, 숨고 싶었던 상황들, 변화시키고 바꾸고 싶던 일들, 누구를 미워했던 감정들까지 고해성사 하듯 말하게 됐어요. 감독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랬던 거 같아요. ‘어떻게 하다가 이런 글을 쓰게 됐어요?’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서.

전여빈

백 버튼 화이트 셔츠와 핀턱 와이드 팬츠 모두 렉스핑거마르쉐(Lexx Finger Marche), 화이트 앵클 힐 지미추(Jimmy Choo).

배우로서 ‘영희’라는 인물을 만나고 표현하는 것이 결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님을 직감했군요. 모든 걸 쏟고 내던지고 싶었어요. 이제 시작하는 배우임에도 여성 배우로서, 그리고 신인으로서도요. 20대 후반인 저를 불안해하면서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신인인데 나이가 좀 있는 게 아니냐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 했고.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겁나지는 않았고요? 겁이 나는데 너무 감당하고 싶은 거예요. 찢기고 찢겨지더라도 그냥 한번 해볼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공포보다 더 컸어요. 촬영을 하는 동안 작품이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도 ‘이 다음에 다시 나에게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할 것 같아. 너무 행복한 현장을 만났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힘든 현장이었거든요. 영희라는 역할이 내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좋았어요. 치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동안 쌓인 갈망을 다 받아주는 것 같은 현장이었어요.

김의석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진짜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본인의 이야기로 체화됐으면 좋겠다’라는 감독의 디렉팅을 어떻게 받아들였어요? 감독님은 기술적인 연기를 가장 경계했어요. 배우가 본래 지니고 있는 가장 깊은 것을 꺼내 사용하길 바랐고요. 그런데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방어 기질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픈 기억이 있다 해도 그걸 꺼내는 걸 주저하게 돼요. 이번 작품을 하며 느낀 건데 나는 극복 의지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더라고요. 극복 의지가 뭐냐 하면 마음이 바닥을 쳤어요. 그럼 그 순간 다시 올라오려는 성질 있잖아요. 그걸 감독님이 캐치해요. 그러곤 “여빈 씨 업하려고 안 했으면 좋겠어요. 더 깊이 들어가면 좋겠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어떤 순간에는 그 말이 너무 미워요. 근데 고마운 거예요. 잡아주니까. 그럼 전 맞다고 수긍하고 더 깊이 파고들려 했던 거 같아요. 인간이자 배우인 전여빈의 상처, 영희의 상처를 동시에 가져가려고 했던 의지인지, 그걸 집중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어린 배우라 어떤 상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걸 놓지 않으려고 했어요.

영희가 그러하듯 전여빈도 온몸으로 버티고 있다 는 느낌을 줘요. 이 영화가. 마음에 짐을 지고 있는 상태잖아요. 몸이 너무 아팠거든요. 촬영하는 내내 계속 아팠어요. 그런데 그게 스스로 달가워하는 고통이었어요. 아프고 싶었어요. 그만큼 잘해내고 싶었으니까. 작품에서 연기를 하는 게 단지 재미있으려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웃고 떠드는 시간을 보내려고 영화 현장에 모인 게 아니니까. 우리의 목표는 같았어요. 이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자. 거짓말하지 말자. 그러니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영희라는 캐릭터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 영화 안에서 굳이 의미 있는 일 같지도 않아요. 증명하고자 하는 영희의 극단적인 행동들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어요? 영희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선택을 하면서까지 자기 나름대로 증명하려고 하는데 저는 그게 이해됐던 것 같아요. 아, 모르겠어요. 제가 다른 사람의 감정은 모르지만 내가 가장 어두웠을 때, 가장 행복했을 때, 보통의 시간일 때 등 지금까지 나의 감정 폭을 가늠해보니 영희의 선택이 조금은 이해되요. 물론 그렇게까지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죽은 친구의 어머니나 담임선생님, 반 친구들을 보면 이들 역시 자기 변호와 자기 증명, 자기방어를 하고 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각자 캐릭터에 맞게 구현되고 있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됐어요. 이해가 된다는 게 굉장히 마음 아프면서도 동시에 위로가 되는 거예요. ‘아, 나만 이렇게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 사람들도 덜 아프고 덜 상처받았으면 좋겠다’ 하면서.

이 영화를 만나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면 무엇이 가장 크게 변했나요? 행복해졌다는 거요. 어떤 부분에서는 희망을 갖게 됐고요.

배우로서의 희망인가요? 이제 더한 고통도 감내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역설적이고 희한한 말이지만 너무 힘들었는데 행복했어요.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그동안 스스로를 믿으면서도 미래는 불확실하니까 나는 믿지만 상황은 확신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 믿게 됐고,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확신도 생겼어요. 아, 애를 쓰는 이 마음들이 모이면 분명히 뭔가가 나온다 하고요.

맞아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전여빈이라는 배우가 어둡고 캄캄한 진흙탕 속에서 너무 큰 즐거움을 느꼈겠다고 짐작하게 되더라고요. 진짜 그랬어요. 이게 되게···(웃음) 어느 날은 너무 힘든 악몽을 꿔요. 그러다 일어났는데 이상하게 행복한 거예요. ‘아, 내가 배우로서 뭔가를 하고 있나 봐, 거짓되지 않은 어떤 상황 속에 있나 봐’ 하고요. 2학년 7반 친구들로 나왔던 배우들과도 연기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거든요. 모두 다 고통받고 있었어요.(웃음) 근데 그러면서도 다들 이 옭아매는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행복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던가요?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굳이 정답을 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 불균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요.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자기애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이 인간적으로 형편없음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도요. 존재 자체가 어떤 한 단어로 규정되거나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요.

왜 이런 질문을 했냐면,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맞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너무 밝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잖아요. 사람은 그 자체로 울퉁불퉁한 거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꿈꾸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꿈꾸고, 또 실패하면 좌절도 하면서.

영화 안에서 배우 전여빈은 연기가 전부인 듯하고, 인생의 모든 부분이 연기로 가득 찬 사람처럼 보였어요. 연기 말고 인생에 다른 무엇이 또 있나요?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전부인 것 같아요. 전에는 인생이 유한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금방 끝나버릴 것 같고, 모든 것이 순간일 것만 같고요. 그러면 마음이 조급해져요. 지금도 그 마음은 남아 있어요. 그렇지만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에 가장 충실하고 싶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마음을 다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세상이 무한한 듯 혼자 시간을 마냥 보내면서 하늘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요. 그때만큼은 최고의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아, 이게 살아 있는 느낌인 건가? 행복하네. 사랑하는 엄마가 생각이 나네. 연락을 해볼까, 좀 걸어볼까’ 하면서. 계절을 느낄 때도 행복하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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