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농작물 농부 이장욱농부 준혁이네농장

휴일을 앞둔 어느 월요일, 서울 강남에서 차로 30분간 달렸을 뿐인데 남양주에 위치한 준혁이네 농장에도착했다. 올해로 21년째, 또래의 젊은 농부가 거의 없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가 길어지면 이른 새벽부터, 밤이 긴 동지 무렵에는 비교적 느지막이 농장을 찾아 농부로 살아가고 있다. “농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이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자식에게는 농사를 못 짓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 주변에 농사짓는 분이 있었다면 아마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웃음) 손가락 관절까지 아픈 일이거든요.” 2백여 종의 채소가 자라는 준혁이네 농장의 비닐하우스는 일반적인 비닐하우스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노지의 자연 재배에 가까운 조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 무투입, 무제초제. 이 단어들에는 그만큼 농부의 더 많은 땀이 들어간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잡초가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여름에는 제 노동의 90퍼센트를 제초하는 데 써요. 뽑거나 잘라낸 풀들은 밭 위에 올려놓으면 자연스레 거름역할을 하고 땅을 폭신한 상태로 유지해주죠. 그러면 경운기로 땅을 뒤엎을 필요가 없어요.”

셰프의 농장

이장욱 농부는 자그마한 칼을 들고 ‘셰프 팜(Chef’s Farm)’이라 적힌 팻말이 있는농장으로 안내했다. 농장에 들어서자 폭신한 느낌이 들 만큼 무성하게 자란 아스파라거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스파라거스를 키우면 이렇게 잎이 무성해져요. 아스파라거스는 죽순과 비슷한 건데 이렇게 키우면 아스파라거스가 하나 둘 올라오죠. 시중에서 파는 건 보통 긴데 저는 길게 키우지 않아요. 그래야 맛이 훨씬 좋고 부드럽거든요. 셰프가 원하는 맛이기도 하고요. 아스파라거스는 로컬푸드의 장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죠. 수확 후 하루가 다르게 맛이 계속 변하거든요.” 한쪽에는 셰프가 직접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작은 틀 텃밭이 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작물의 종류가 달라질 만큼 다양한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이건 월계수 잎이에요. 어린잎과 좀 더 자란 잎의 향이 다릅니다. 이건 무화과 잎이에요. 프랑스 요리를 하는 이지원 셰프가 이 잎으로 음식을 싸서 요리를 하거든요. 잎을 따면 열매를 먹지 못하는데 상관없어요. 셰프가 원하는 것이 이 잎이니까요. 이건 부추예요. 모두가 배불리 먹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에는 다수확 작물 위주로 보급되었어요. 채소는 대부분 김치 재료였고요. 부추도 마찬가지예요. 소금에 절이거나 젓갈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억세게 키워도 상관없죠. 하지만 이 부추는 여린 상태로 재배해요. 그래서 샐러드를 만들어도 부드럽고 풍미가 좋죠.” 셰프 팜에는 이렇듯 셰프와 함께 제맛을 찾아가는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셰프는 일주일에 보통은 한두 번, 많게는 세 번까지 농장을 찾아 농작물을 맛보고 자신의 요리를 위해 어떤 맛이 필요한지 농부와 함께 찾아내고 수확한다. 이장욱 농부는 자신을 물감에 비유했다. 화가인 셰프가 농부가 애써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완성해나가는것이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농사의 모습이다.

우리가 몰랐던 채소의 맛

이장욱 농부는 농장을 둘러보는 내내 작물의 향을 맡아보라고 권하거나 작은 칼로 뿌리채소나 열매를 잘라 맛보라며 건넸다. 그중에는 겨자 잎이나 당근, 비트, 가지, 루콜라처럼 익숙한 것도 있고 브론즈 펜넬이나 와일드 베리, 시소 꽃처럼 낯선 것들도 있는데, 익숙한 채소들도 모두 새로웠다. 당근은 자색이고 겨자 잎은 겨자만큼이나 톡 쏘듯 매콤하며, 루콜라는 맛이 진하고 가지는 잘라서 힘주어 쥐면 즙이 새어 나올 정도로 물기가 가득했다. “보통 빨리 키우려고 물을 많이 줘요. 잎채소는 잎을 하나씩 떼어내는데 저는 밑동을 잘라 수확해요. 여러 번 수확하는 대신 한 번만 수확하고 계속 파종하는 거죠. 그럼 잎채소 본연의 맛이 훨씬 잘 느껴지거든요.” 경제성은 떨어지지만, 이 모든 게 셰프와 함께 가장 맛있는 재료 본연의 맛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매년 채소 한 가지를 20여 품종을 키워봐요. 그렇게 한 해 농사를 지어보고 가장 맛있는 품종을 두세 개 골라 이듬해에 그 품종을 더 많이 키우는 거죠. 채소 한 가지마다 품종이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방금 맛보신 물가지는 물기가 많은 가지예요. 아주 작은 페어리테일가지도 있어요. 껍질 가까운 쪽과 안쪽의 맛이 다르고, 밑동과 윗부분의 맛도 다르죠. 그래서 가로로 자를 때와 세로로 자를 때 각각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요. 방울토마토도 익는 순서에 따라 당도와 산미가 변해 맛이 달라요.”

 

계절이 다른 제철 채소

“제철 채소가 당연히 가장 맛있죠. 그런데 제철이 어디나 다 같은 건 아니에요. 이 농장에서 가장 맛있고 양이 많이 나올 때를 제철로 정하는 거죠.” 가령 샌프란시스코는 겨울에 기온이 기껏 떨어져봤자 영하 4~5℃인데 한국의 겨울은 그보다 훨씬 추우니 재배하는 곳에 따라 제철이 다른 셈이다. 20여 년 전 이 일이 얼마나 고된지 모른 채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장욱 농부는 맛이 변해가는 과정을 따라 성장해 지금은 채소의 맛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농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