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자본주의니 계급사회니 하는 개념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편견과 차별은 늘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며, 인종과 나이에서부터 외모와 성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곤 한다. 오늘날의 젠더 문제가 그렇다. 불거진 젠더 문제는 패션 월드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의식 있는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여권신장을 주장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프라발 구룽의 컬렉션이 역사에 기록되고, 미투 운동에 거부감을 드러낸 칼 라거펠트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일을 단편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올바른 생각을 지니지도, 시대 흐름을 발 빠르게 읽지도 못하면 도태되는 건 시간 문제고, 그걸 결정하는 기준은 소비자와 대중의 눈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젠더에 관한 여러 논의 중 지금 가장 뜨거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젠더 뉴트럴. 즉, 성 평등을 전제로 성별과 성 지향성에 관한 구분을 없애는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흐름 때문일까? 당연하다는 듯 패션계도 젠더 뉴트럴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보디수트 아래로 맨다리를 드러내거나, 드레스 또는 시스루 톱을 입고 굽 높은 힐을 신은 남성 모델들이 자유롭게 런웨이를 거니는 광경은 뉴욕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밀라노와 파리로 패션위크가 옮겨가는 짧은 기간 동안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반응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많은 노출이 따르는 보디 수트와 시스루 톱, 활동을 제한하는 치렁치렁한 길이의 드레스와 높은 굽이 여성복을 상징하게 되기까지 패션계가 여성을 표현해온 방식을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여론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흔하게 ‘여성스럽다’거나 ‘남성스럽다’고 일컬어지며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한 시대착오적 스테레오 타입을 비껴갔다는 면에서는 칭찬해 마땅한 일이지만, 반대로 ‘젠더리스 패션’의 심벌처럼 여겨지는 남성복 수트를 입은 여성 모델이 한 치의 노출 없이도 멋스럽다는 점과 반대의 경우가 그리 아름답지 않은 데다 불편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는 점은 패션계가 ‘미감’을 핑계로 여성을 불필요하게 대상화해왔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니 말이다.

저질러놓은 잘못을 해결하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젠더 뉴트럴 트렌드가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다.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여성의 전유물 같던 옷을 남성이 당연하게 공유하게 되면 결국 여성과 남성 사이 스타일상의 구분, 나아가 삶의 방식과 그에 따르는 구분도 조금이나마 흐릿해질 거란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젠더 뉴트럴이 상업성의 수단이 되지 않고, 패션이 젠더 스테레오타입의 잔존에 미치는 악영향을 완전히 잘라내는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어쨌든 시대는 변하고 있고, 대중의 시선은 그러한 흐름을 가속화할 충분한 힘을 지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