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새하얀 지방시 쇼장에 들어서자 새해 첫날 백지상태의 다이어리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컬렉션은 눈이 시리도록 대담하고 선명한 컬러가 주를 이루었는데 모델들이 차례로 걸어 나올 때마다 빈 캔버스가 화려하게 채색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시작해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컬렉션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는 디자이너의 의도가 명확히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방시는 한눈에 웅장함이 느껴지는 여타 브랜드와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던한 무드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오트 쿠튀르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보이는 섬세한 깃털 장식이나 비딩에서 진정 ‘오트’의 경지에 이른 기술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일반적으로 잘 쓰지 않는 소재인 라텍스를 사용하는 파격적인 시도로 클레어 웨이트 켈러 식 쿠튀르를 창조했다는 찬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