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로이 페미니즘

아룬다티 로이

강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억압적인 사회·경제적 관습 때문이다.

부커상 수상작 <작은 것들의 신>의 저자인 아룬다티 로이. 사회의 제도와 관습에 의해 파괴돼가는 한 가족의 삶을 보여준 이 책에는 여성과 아이 등 나약하고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은 것들의 신>은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돼 출간되었고,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 집필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과 이를 위한 다양한 강연 활동을 이어가며 <타임>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자본 주의: 유령 이야기> 등 저서를 통해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며 보다 많은 보통 사람의 연대를 꿈꾼다.

<작은 것들의 신>에는 거대한 사회제도 안에서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카스트가 뚜렷한 사회인 인도에서 힘없고 약한 존재들에 주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약한 사람들을 위해 말하거나 그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의 입장이나 상황을 대변할 수는 없다. 나는 다만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작가로서 이야기를 풀어갈 때 이 세계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정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펴본다. 나 역시 나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만의 세계관을 선전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인터넷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인터넷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데, 문제는 익명성에 기대 논란을 위한 논란, 반대를 위한 반대 의견도 무분별하게 쏟아낸다는 점이다. 젠더 이슈도 마찬가지인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이 아니라 서로 편을 가르고 대립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인도 역시 서로 다른 계급, 종교 간 갈등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지 궁금하다. 나는 인간 사회가 ‘E-페르소나(E-Persona)’를 겨우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는 전례 없이 많은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있는데, 대개는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인터넷은 인간의 뇌 시스템처럼 사람과 사람을 서로 연결해주는 광범위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셈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을 편 가르기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디지털 세계에서 집단 싸움을 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에서 추방되고 침묵을 강요당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플랫폼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이런 현상조차 굉장히 편향적으로 나타난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이르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 에서 나타나는 집단 간 대립은 잔인하게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힌두 민족주의 정부를 둔 인도에서도 이러한 대립이 종교, 계층, 성별 간에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한 끔찍한 범죄도 일어난다. 어떤 힌두 우월주의자가 무슬림 노동자를 도끼로 난도질해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영상에 담아 열광적인 관중을 위해 인터넷에 자랑스럽게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E-페르소나는 진화론적인 면에서 호모사피엔스와 인간 사회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매우 빠르게 전개될 것이다.

인도는 여성 인권 의식이 약한 편이다. 당신 또한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약자에 속할 텐데도 사회운동가로서 목소리를 높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인도에는 여러 세기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범하고 강인하며 자유로운 여성들을 찾아볼 수 있는 반면 가장 핍박받고 억압당하는 여성들도 볼 수 있다. 세상에 정의가 무엇인지 알리고자 거침없이 활동하는 많은 여성 변호사, 선생님, 사회 운동가가 있다. 하지만 여아 살해와 여아 낙태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결코 ‘약한 자’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내가 약한 자를 위해 싸운다고 말하면 그건 마치 그들의 불행이 그들 자체가 부족하거나 약하기 때문인 것처럼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의 불행은 결코 그들 자신의 탓이 아니다. 강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억압적인 사회·경제적 관습 때문이다.

빈부의 격차는 비단 한 나라 안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도 그로 인한 문제가 일어난다. 이를테면 얼마 전 한국에서는 쓰레기를 외국에 수출하는 문제가 이슈화됐다. 강대국이 자신들의 쓰레기를 가난한 나라에 버린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그때 처음 알았다. 또 약소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며 그 덕에 제품의 원가가 낮아진다. 착취의 악순환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외국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를 부끄럽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 놀랍다. 씁쓸하지만 인도인은 한국인처럼 반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도는 카스트제도를 통해 잔인하게 사람들을 구분 짓고 이러한 계급화에 종교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불공평한 사회다. 수백만 명의 달리트 계급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당하고 청소나 오물 처리 같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카스트제도의 상위 계급 사람들은 자기 변기조차 한 번도 직접 닦은 적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폐기물을 수출한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물론 우리가 쓰레기를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소비를 지향하는 삶, 그리고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지구의 위기는 모두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문제다.

미투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미투 운동이 폭로에 그치고 젠더 의식의 큰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든다. 인도 사회에서도 미투 운동이 활발한 편 인가? 그로 인한 변화가 체감되는가? 미투 운동은 일종의 폭발이다. 오랫동안 억압돼온 분노가 쏟아져 나온 거다. 하지만 이를 두고 혁명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이르다. 현재 인도 사회는 카스트제도와 많은 사람을 위협하는 국수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상위 계급 남성들은 달리트 계급 여성들을 강간하고 폭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여겼다. 안타깝게도 이에 대항하는 시위도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 통치하는 카슈미르와 마니푸르 지역에서 인도 군인들이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이를 두고 사람들이 격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분노라는 것은 선택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조금씩 일고 있다.

과연 이 세계는 긍정적인 미래로 향하고 있는 걸까? 지구와 인류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느낄 수 있겠는가? 긍정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물론 부정할 수 없다. 나, 어머니, 할머니를 떠올려보면 단 세 세대 만에 엄청난 해방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전히 많은 것이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지구의 시스템을 빠른 속도로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발전을 이야기한다. 이 발전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지구를 개발 대상으로 보고 더 빠른 발전을 바라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발전을 기대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치를 대가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최근작 <The Ministry of Utmost Happiness>의 주인공은 히즈라다. 쉽게 말하면 여장을 한 남자지만 단편적으로 설명하기는 복잡하다. 트랜스젠더는 아니지만 여장을 한 채 구걸하며 살고 때론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카스트에서는최하위 계급에 속한다. 왜 하필 히즈라를 등장인물로 선택했나? 소설 속 ‘안줌’이란 인물은 히즈라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정의하는 유일한 정체성은 아니다. 그녀 역시 우리처럼 고유한 한 개인이다. 1950년대 올드 델리에서 태어난 시아파 무슬림이다. 사실 오늘날의 인도에서 안줌이 히즈라라는 사실보다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이 그녀를 더 위협한다. 나는 소설을 통해 어떤 선언을 하거나 독자에게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이 내가 창조해낸 이야기 속 세계를 걷길 바라며 이를 위해 노력할 따름이다.

쉬지 않고 투쟁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자부심이란 건 단순한 감정인데 내겐 항상 너무 복잡하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하는 활동에 자부심을 느끼진 않는다. 다만 그저 원하는 대로 글이 써질 때 종종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럴 때 느끼는 행복감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온 것이 아닐까? 그러면 혈관 속 피가 더 자유롭게 흐르고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불쑥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작가마다 그 역할이 다르다. 예술가에게 특정한 역할을 규정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올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는가? 아직은 특별한 계획이 없다. 아마 조만간 무슨 일이든 생길 거다.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