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골목에 자리한 한 건물의 낡은 계단을 밟고 3층으로 향한다. 평범한 사무실이 나타나기에 머뭇거리며 ‘차실’이 어디인지 물으니, 직원 한 명이 구석에 있는 방 하나를 가리킨다. 비로소 들어선 담비의 차실. 입구 옆 찬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향신료와 다구가 먼저 손님을 맞는다. 대여섯 명이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테이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고가구와 한편에 세워진 거문고도 눈에 띈다. 마치 시골집에 온 듯,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곳을 이끄는 사람은 1990년대생 티 아티스트 김담비. 자연친화적인 재료를 활용해 전통차를 실험적으로 재해석한 차를 선보이고, ‘허브차 블렌딩하기’와 ‘향 만들기’를 비롯한 워크숍도 열고 있다. 차실에 들어와 인사를 나눈 후, 김담비는 가장 먼저 음악을 틀어놓는다. “일본 앰비언트 뮤지션 다카하시 에이치의 음악이에요. 티 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DJ로 활동했는데, 당시에도 비트가 느리고 잔잔한 곡들을 자주 틀었어요. 5년전쯤 우연히 유튜브에서 ‘달무리’라는 거문고 곡을 듣고 동양 문화의 매력에 빠졌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차에 호기심이 생겼죠. 그 이후 생활 다례, 중국의 다도와 향도 등을 배웠어요. 지금은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차를 만들고 있어요.”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보니 ‘시골 곳간차’, ‘바다 명상차’, ‘우물 안 풍경차’ 등 차 이름이 흥미롭다. “실제로 이름을 보고 차를 고르는 손님도 꽤 많아요. 한방 재료나 식물을 사용하는 차 레시피를 그대로 따르기도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재료로 새로운 차를 개발하기도 해요.”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녀가 내어준 차는 ‘빨간 차’. “빨간색이 예뻐 ‘빨간 차’라고 불러요. 제라늄과 펜넬, 고수 씨앗, 바질 씨앗이 들어가고 따뜻한 물 대신 탄산수를 사용해요. 요즘처럼 더운 날씨엔 이렇게 색감 있는 차를 차갑게 마시는 걸 권해요.”

톡 쏘는 청량감과 함께 식물 향이 향긋하게 올라오고, 씨앗의 식감도 독특하다. 자연에서 얻은 각 재료의 개성이 살아 있어 매일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와는 색다른 기분을 전한다. 김담비는 커피가 현대사회의 도시에 가깝다면, 차는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음료라고 설명한다. “중국의 전설 속 인물인 신농 황제가 약초의 효능을 검증하려고 먹었다가 독에 중독 됐는데, 차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에는 지금과 같은 약이나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음식이 곧 약이었고, 차도 그 역할을 담당했죠. 그래서 차를 마시면 과거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음료이기도 하고요.”

이곳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을 넘어선다. 약 3년 전 다른 공간에서 ‘명상곡’이라는 음악 감상회를 열었던 김담비는 통의동 차실에서 차와 향, 그리고 음악이 더해진 공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귀가 편안한 음악을 틀어놔요. 특정 시대나 국가, 뮤지션을 정해두지 않고 저만의 기준에서 손님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장르는 앰비언트, 모던 클래식, 아방가르드 등이고 최근에는 네오포크도 많이 들어요.”

재료를 가지러 가는 김담비를 따라 옥상으로 향한다. 작은 텃밭에 차에 쓰이는 허브와 꽃들이 자라고 있다. 실제로 야생화와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좋아하는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담비의 식물 이야기’라는 게시물을 꾸준히 올리고 숲에서 보낸 일상을 공유하는 등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20대 초반에 음악 공부를 하러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전보다 급박해진 일상에 ‘멘탈 붕괴’가 왔어요. 그래서 하던 일을 관두고 여름 무렵에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 전통 찻집에 들어갔죠. 거기에서 일만 한 게 아니라 먹고 자는 생활까지 하며 지냈는데, 그 시절이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언젠가는 시골에 내려가 찻집을 운영하고 싶어요. 마치 수련회처럼, 다 함께 자연을 즐기는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싶고요.” 그리고 김담비는 그 꿈을 서울에서 조금씩 실현하고 있다. 담비의 차실을 좋아 하는 사람들을 모아 오픈 채팅방을 만들었고, 지난 5월 초 몇 명의 회원과 함께 ‘서울 도심 속 느리게 걷기’를 했다. “혼자 다니던 길을 같이 걸으며 주변을 관찰하고, 식물을 따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지난여름, 김담비는 베를린의 미술관 마르틴 그로피우스바우(Martin-Gropius-Bau)에서 열린 그룹 전시 <벨트 오네 아우센(Welt ohne Aussen)>에 초청받았다. 두 달 동안 그곳의 차실에서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를 내리는 티 세리머니를 국제 무대에서 최초로 선보였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차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의식 자체보다는 차에 들어가는 재료 등 본질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현지에서 자라는 식물을 사용하거나, 그곳의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등의 작업에 초점을 두려고 해요.” 김담비는 올해 7월 핀란드 피스카스 빌리지에서 열리는 아트 앤 디자인 비엔날레에 유일한 한국 아티스트로 참여하고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도 방문할 예정이다. 찻잔을 기울이며 나눈 대화는 차의 역사에서 출발해 자연과 사람, 인생으로 확장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차를 만들지만, 차 문화에 담긴 철학과 이를 통한 교육은 김담비가 여전히 지키고 있는 전통의 요소다. “차를 마실 때의 절차와 형식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찻잔이나 다구에 신경을 덜 쓰는 편인데, 이 또한 도구에 갇히지 않고 차와 사람에게 본질적으로 다가가고 싶기 때문이에요.”

담비의 차실을 찾아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뭘까? 김담비는 ‘편안하다’라는 단어를 꼽는다. “도시에는 편안하다고 느낄 만한 공간이 별로 없어요. 무의식적으로 일을 하며 살다 보면 ‘이게 맞는 건가?’ 고민하게 되는 시기가 와요. 저도 그런 과정을 거쳤고요. 담비의 차실이 탈출구가 되어주진 못하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