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오 화보

셔츠 막스 마라(MaxMara), 브레이슬릿 불가리(Bulgari), 이어링 에바 페런(Eva Fehren), 링 티파니(Tiffany&CO.).

샌드라오 화보

재킷과 보디수트, 팬츠 모두 구찌(Gucci), 이어링 마리아 타쉬(Maria Tash).

샌드라오 화보

드레스 발렌티노(Valentino), 링 레이디 그레이(Lady Grey).

“ 모든 피부색의 젊은이들, 체형과 재능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제 수상 소감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상황이 또 나쁘게 바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순간만은 우리 함께해요. 신의은총으로 제가 그 변화의 무대에 서 있으니까요.”

2019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끝난 지 이틀 후, 샌드라 오(Sandra Oh)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승리감과 함께 마라톤 경기처럼 긴 여정을 막 끝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스카이프 너머의 샌드라 오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당시의 기분을 전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시상식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긴장도 했지만, 일요일 밤 끝 무렵엔 기쁨에 들뜨게 됐죠.”

샌드라 오는 앤디 샘버그(Andy Samberg)와 함께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진행했고, 시청자들을 열광시킨 BBC 아메리카 TV 시리즈 <킬링 이브(Killing Eve)>에서 영국 첩보기관 MI6의 첩보원 이브 폴라스트리를 연기 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결말 아닌가. 2006년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데 이어 시상식을 진행한 첫 아시아인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크리틱스 초이스 영화상과 미국배우조합상도 수상했다.

이 모든 순간이 샌드라 오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 한국계 캐나다 배우는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아시아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있는 머리를 숙이는 행동(이는 가장 큰 존경의 표시다)으로 부모님께 존경을 표했고, 한국어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오프닝 멘트에서는 시상식을 진행하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저는 여러분을 직접 뵙고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나와의 인터뷰에서는 할리우드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변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분명히 그 무대에 오를 수 없던 모든 피부색의 젊은이들, 체형이 다르고 재능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제 수상 소감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상황이 또 나쁘게 바뀔 수도 있어요. 변화는 더디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 순간만은 우리 함께해요. 신의 은총으로 제가 그 변화의 무대에 서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이 마흔일곱에 상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 이런 상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 만큼 많은 일을 해왔어요. 그래서 제게 더 큰 의미가 있고요”

샌드라 오에 대한 내 첫 기억은 2004년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영화 <사이드웨이(Sideways)>였는데, 이 영화에서 자신의 애인이 다른 여자와 약혼한 것을 알고는 오토바이 헬멧으로 애인의 코뼈를 부러뜨리는 스테파니를 연기했다. 뒤이어 HBO의 스포츠 에이전트를 주인공으로 한 코미디 드라마 <알리스(Arli$$)>에 일곱 시즌 동안 출연했지만, 10년간 무명이었던 샌드라 오가 이름을 알리게 된 건 메디컬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크리스티나 양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킬링 이브>에서 연기한 이브는 고집불통인데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암살범을 잡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나 자랐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샌드라 오의 가족은 모두 배우와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가졌다. 샌드라 오는 그런 자신을 평화유지군이라 부르는데, 아버지는 경제학자이고 어머니는 생화학자이며 언니는 변호사, 남동생은 유전학 박사다. 그 역시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야심 찬 인물이었지만, 학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꿈을 추구했다. 10세 때 연기를 시작해 일찍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으며, 캐나다 몬트리올의 국립연극학교(National Theater School)에 자신이 등록금을 내고 들어가기 위해 일반 4년제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거슬렀다. 그렇게 연기를 배운 후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에서 몇몇 작품의 주인공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다가 LA로 이주했다. 그리고 1995년, 담당 에이전트로부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듣는다. “당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 유명해진 다음 다시 도전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회사에 이미 아시아 여성 배우가 한 명 있는데, 3개월 동안 오디션을 단 한 차례도 보지 못했어요. 더 이상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빛이 보이지 않던 시간을 뒤로하고 <킬링 이브>를 만났다.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에이전트와 나눈 대화가 여전히 생생하다. “‘제 역할이 뭐죠?’라고 묻자 에이전트가 ‘세상에, 당신이 이브예요’라고 대답했어요. 이브 역할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주연이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죠. 심장이 뛰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연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로 살아왔지만 배우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중요해요. 생각했던 것만큼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 자신을 붙잡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죠.”

오래전부터 불교의 철학과 가르침을 따르며 마음을 다스려온 샌드라 오는 매 순간 삶에 집중한다. <킬링 이브>의 배우일 뿐만 아니라 공동 제작자이기도 한 그는 요즘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 듯하다(샌드라 오의 사생활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홍보 담당자는 샌드라 오가 몇년간 남자친구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해주었다). 가족을 꾸리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샌드라 오는 이렇게 답했다. “30대 중ㆍ후반부터 마흔이 될 때까지는 ‘지금도 충분히 근사하게 살고 있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멋지게 살 수 있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조카들뿐 아니라 친구 아이들의 이모나 고모로서 매우 충만한 삶을 살고 있어요.”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한 샌드라 오는 이제 여러 작품을 제안받고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할 만한 작품을 까다롭게 고르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잠시 쉬려 한다. “연기하는 시간만큼 잘 쉬는 것도 중요해요. 성과가 대단하더라도 쉬지 않으면 균형이 깨질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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