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연애

더 설레는 연애를 위해

한순간이었다. ‘사귀자’는 말 한마디로 우리는 20년지기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직업적 고민부터 가정사와 연애사까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와의 연애는 이해시킬 일이 없어서 편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어떨 때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원하는 것을 잘 알아서 수월했다. 다만 새로 알아가는 재미가 없다는 사실이 함정이었다. 서로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게 연애를 설레고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데, 우린 그게 없었다. 그래서 동거를 시작했다. 밥먹기, 영화 보기, 술 마시기, 여행 등 다 같이 해봤지만 같이 살아본 적은 없으니까. 결론적으로 우리의 선택은 꽤 성공적이다. 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속옷까지 색깔별로 정리하는 깔끔한 습관이나 아침에 일어나서 부스스한 얼굴로 안경부터 찾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잠들기 전 잘 자라고 인사하거나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마주치는 사소한 순간마다 묘하게 설렌다. 다른 사람들에겐 동거가 서로 익숙해지기 위한 방식이라면, 우리에게 동거는 서로에게서 생경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동거 세 달 차, 우리에게는 여전히 매일 새롭고 설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C(브랜드 디렉터, 34세)

 

동거라서 차라리 다행이야

프러포즈를 받은 순간부터 시작된 우리의 결혼 준비는 거칠 것이 없었다. 각자의 부모님에게 축복받으며 결혼 허락을 받았고, 상견례도 큰 의견 충돌 없이 즐겁게 치렀다. 웨딩 사진은 친구에게 부탁해 간단하게 찍었고, 마음에 드는 식장도 어렵지 않게 구했다. 모든 것이 수월했는데, 그중 가장 간단했던 일은 의외로 집 마련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시기에 운 좋게 내가 아파트를 분양받았기 때문이다. 각자 월세를 내며 원룸에서 살던 터라 조금 서둘러 살림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면 동거지만, 어차피 결혼할 사이니까 신혼생활을 미리 하는 거라며 부모님도 어렵지 않게 설득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산다는 생각만으로 마냥 꿈에 부풀어 있던 우리의 동거 생활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면서 악몽으로 변했다. 연애할 때부터 결혼 준비 기간까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우리였는데, 같이 살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몰랐던 문제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독립한 지 5년이 넘은 그는 제 손으로 밥 한 번, 청소 한 번 하지 않았고, 내가 하루라도 집을 비우는 날이면 지저분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 되었고, 심지어 장을 볼 때도 그는 은근히 돈을 내는 일을 나에게 미뤘다. 어른스럽고 남자다운 모습에 반해서 결혼을 결심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집안일은 여자 몫이라고 생각하는 한남 중의 한남이었다. 남들 시선을 신경 쓰는 탓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일탈을 감행해본 적 없지만, 이번만큼은 결심을 해야 했다. 거실 곳곳에 뒤집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그의 양말을 본 그날, 나는 그에게 선언했다. 우리의 동거도, 결혼도 오늘로 끝이라고.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동거는 그렇게 상처와 큰 교훈을 남겼다. K(은행원, 30세)

 

비밀이야

우리는 6년째 연애 중이자 3년째 비밀 동거 중이다. 우리의 동거가 비밀이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사귄 여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한다고 하면 누구나 으레 곧 결혼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거 기간이 길어지면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이제 그만 식을 올리라고 재촉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이나 친구들 말에 떠밀리듯 ‘결혼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거는 우리만 아는 사실이 되었다. 솔직히 조금 불편하긴 하다. 친구들과 다 같이 놀다가 헤어질 때면 각자 방향이 다른 척 택시를 탔다가 집에서 만났고, 간혹 부모님의 급작스러운 방문을 막는 일은 해도 해도 뻔뻔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친한 친구한테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연예인도 아니면서 공개할지 말지를 놓고 심도 깊은 토론을 벌인다. 그리고 현재까지 결론은 비밀을 유지하는 쪽이다. 어떤 틀에도, 말에도 얽매이지 않고 우리만의 공간에서 연애를 하는 것이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지내는 걸 감수할 만큼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같이 살면서 서로의 생활 방식에 적응하느라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우리만의 룰을 정했고, 이제야 익숙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는데 솔직하려다 괜히 이렇게 완벽한 동거를 망치고 싶지 않다. 언젠간 들키겠지만, 일단 오늘까지는 무사히 즐겁게 같이 사는 중이다. P(작가, 3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