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때문에

같은 과 동기로 만난 우리는 티격태격 밀당을 주고받다 스무 살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11년. 지난 시간동안 우리는 지겹다고 할 정도로 붙어 다녔다. 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졸업한 후에도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매일 학원과 도서관을 같이 다녔다. 우리는 10년 동안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의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그보다 내가 먼저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처음으로 회사원과 수험생으로 다른 환경에서 살게 된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조금 어색한 시간도 있었지만, 우리는 금방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도 곧 합격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처럼 굳건했다. 실은 그럴 거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험에 또다시 낙방한 그를 보고 알았다.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내게 그는 참았던 울분을 터트렸다. 그는 혼자 잘되니까 좋냐, 내가 불쌍해서 만나주는 거냐,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너는 모른다는 말을 쏟아냈다. 그날은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낙방하는 기분을 너무 잘 아니까,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니까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건 며칠 후에야 알았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자신이 안 될 걸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붙들고 있었다며, 시험 준비를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뭐든 나보다 잘하는 너와의 연애도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연애의 끝을 인정하며, 마지막 남은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B(회계사, 29세)

호구면 어때

호구의 연애. 친구들이 내 연애를 두고 붙여준 별명이다. 그와 나는 같은 회사에 다닌다. 다만 직책이 조금 다를 뿐이다. 나는 회사의 대표고 그의 직함은 대리다. 워낙 작은 회사라 직급의 차이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입사 1년 차 대리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6개월째 새 직장을 찾던 그에게 우리 회사의 면접을 제안한 건 나였다. 그가 이전에 하던 일과 크게 차이 없는 분야였고, 마침 회사에 공석이 생겨 사람을 찾던 터라 사심 없이 물었고 그는 흔쾌히 지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철저히 그의 업무 능력만 보고 채용했다. 당당하지 않을 건 없지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비밀 연애 중인 우리는 공사 구분을 철저하게 지키며 일도 사랑도 잘해나가는 중이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보는 우리는 달랐다. 나는 간도 쓸개도 다 내주는 호구였고, 남자 친구는 자존심도 없이 여자 친구 덕만 보고 사는 뻔뻔한 사람이었다. 뭐, 데이트 비용을 많이 내는 쪽이 호구라면 맞긴 하다. 그렇지만 버는 돈이 다르다는 건 그도 나도 아는데, 굳이 비용을 반반씩 내거나 그가 더 많이 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이야 더 있는 사람이 더 쓰면 그만이고, 그게 연애에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진작에 헤어졌을 거고 애초에 그도 우리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도 그의 친구들에게 자존심도 없냐며 핀잔을 듣기 일쑤지만, 워낙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연애에 관한 잔소리는 모두 한 귀로 흘려보낸다. 남들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이는 우리의 연애는 3년째 흔들림이 없고, 얼마 전부터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K(자영업자, 30세)

말하지 말걸

우리의 연애는 한마디로 평등했다. 데이트할 때 그가 밥을 사면 내가 커피와 영화 티켓을 샀고, 내가 밥을 사면 그가 모텔비를 냈다. 여행 경비도 반씩 부담했으며, 기념일 선물도 되도록 비슷한 금액대에서 주고받았다. 애정 표현도, 심지어 모텔을 가자는 제안도 누가 더 하고 덜하고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남자들처럼 ‘내가 더 해주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내 지출과 표현을 막았지만, 받기만 하는 건 체질이 아닌 내 주장으로 지금의 평등함이 만들어졌다. 연애가 길어지면서 그도 자연스럽게 평등한 연애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런 우리의 평등함이 깨지기 시작한 건 그가 내 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날부터였다. 얼마 전 발간한 책이 2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듣고 둘만의 소소한 축하 파티를 하던 중 무심결에 인세 얘기가 나왔고, 굳이 숨길 필요 없었던 나는 수입과 내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여행책에 크게 관심이 없던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좋겠다는 말로 얘기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시끄럽게 연애하는 게 싫다던 그는 갑자기 친구들 모임에 날 데려가 출판사 홍보 팀인 양 내 책에 관해 떠들었고, SNS에는 유명 작가와 사귄다는 식의 과장된 얘기를 올렸다. 여기까지만 하면 귀엽다며 넘어갔을 텐데, 인세 얘기를 들은 후부터 그는 조금씩 데이트 비용을 내게 미루기 시작했다. 특히 비싼 음식을 먹은 날에는 꼭 사달라며 애교를 부렸다. 조금씩 정도를 넘던 행동은 그의 생일날 완벽히 선을 넘었다. 생일 선물로 차를 사달라고 한 거다. 그 와중에 나름 양심을 지킨다며 작은 국산차면 된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날로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지만, 그는 매일 사과의 연락을 해오는 중이다. 이런 그와 계속 만나도 되는 걸까. Y(여행 작가, 3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