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1984)
장편 <보건교사 안은영>ㆍ장편 <피프티 피플>ㆍ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ㆍ장편 <지구에서 한아뿐>

해맑고, 유쾌하며, 사랑스러운. 정세랑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자주 떠올린 세 가지 형용사들이다. 정세랑은 아주 비극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할 때도 화창하고, 다정다감하며, 어쩐지 명랑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슬픔이 가볍게 그려지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을 삶의 근원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성숙함과 담담함에서 우러나오는 투명함 때문이다. ‘이제 정세랑의 시대가 오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내게 전해준 소설은 <피프티 피플>이다. 한 대학 병원을 중심으로 무려 50인의 사람들을 집단적인 주인공으로 만든 이 과감함은 일찍이 한국 장편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에너지였다. 누구도 엑스트라가 아니며, 누구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악인이 아니며, 누구도 단순히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으며, 그들 모두는 우리 사회의 아픔과 사연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는, 우리 모두의 투명한 자화상이었다. <피프티 피플>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성 소수자, 층간 소음문제, 낙태와 피임, 싱크홀 추락 사고, 대형 화물차 사고 등 한국의 신문지상을 항상 오르내리는 ‘오늘, 우리의 문제’를 대학 병원이라는 압축적 공간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빗길에 미끄러진 25톤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어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화물연대의 집회를 보고 자신이 먹으려던 샌드위치를 건네는 장유라의 모습은 트라우마를 보듬고, 대면하며, 마침내 이겨내는 인간의 기적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정세랑의 소설 속에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다뤄지지 않는 인물들의 복잡하고도 담백한 고뇌가 그려진다. 병원에서 매일 매일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단 한 사람의 이송 기사가 옮긴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을 보고 처음 알았다. “전용 이동 침대와 고인을 덮을 부직포 덮개를 챙겨 호출이 온 층으로 올라간다. 타이밍이 적절해야 한다. 너무 빨리 가면 유족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시간을 방해하는 게 되고, 너무 늦게 가도 유족들의 충격이 심해지기 때문에 몇 분의 차이지만 사려 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을 병원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같긴 하다.” <피프티 피플>의 이런 담담한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좁은 인간관계의 울타리 속에서 편협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된다. 정세랑의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앓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아픔을 앓는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따스한 시선을 던진다. 이런 고요한 따스함, 이런 눈부신 다정다감함이 정세랑의 다음 소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다. _정여울 작가(<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 정여울> <빈센트 나의 빈센트> 저자)

 

김초엽 (1993)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바이오해커, 우주비행사, 생물학자, 천재 아티스트가 나오는데 다 여자들이야!” 누군가에게는 이 책을 이렇게 추천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뛰어난 SF 소설(집)인 동시에 귀중한 여성 서사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점이 유기적으로 함께 간다. 김초엽은 과학기술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과연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기술의 발전, 경제 효율의 논리에서 배제되는 소수자들을 프로타고니스트로 내세운다. 임신과 출산의 경험이나 모녀 관계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여성끼리의 파트너십, 유전적 장애를 가진 사람, 비혼모들이 딸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도 등장한다. 작가는 마이너리티인 인물들이라 해서 마냥 선하거나 정의로운 속성만을 부여하지 않는다. 실패하거나 밖으로 밀려나고, 누군가에게 잊히거나 뭔가를 잃어버린 이 사람들은 분명 불완전하며 종종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는 면에서 용감하고 근사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기 위해,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들은 고통스러운 지구에 남거나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가망 없는 여행을 떠난다.

김초엽의 우주에 대해 내가 특별히 아름답다고 느끼는 부분은 거대한 도서관같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인드 데이터를 보관하고 접속을 통해 추모할 수 있는 도서관이 등장하는 ‘관내분실’, 금서들을 모아둔 서가에서 마을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같은 작품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이런 시선이 관통한다. 김초엽의 이야기에는 두 가지 타임라인이 흐른다. 책을 쓰는 사람들의 시간과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시간. 한편에는 관찰하고 기록해 자료를 남기는 이들이 있으며, 반대쪽에서는 문자나 그림 혹은 색채 언어를 해독하는 이들이 있다.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는 시간이나 인종, 문화로 인한 간극이 있지만, 그들은 서로 이해하려는 열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데이터를 통해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마침내 고립과 단절을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니. 무의미하게 흩어지거나 서로를 공격하는 언어로 가득한 인터넷의 시대에 얼마나 낭만적인 이야기인지. 보이저호에 실어 보낼 레코드를 위해 바흐 파르티타를 고르는 마음처럼 로맨틱한 고귀함이 김초엽의 글에는 깃들어 있다. 93년생인이 작가를 앞으로 오래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벌써 행복하다. _황선우 작가(<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

 

김세희 (1987)
소설집 <가만한 나날>ㆍ장편 <항구의 사랑>

김세희의 소설을 읽으며 오랫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방들에 하나씩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환해져서 좋았지만 적나라해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놀라웠다.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볼 수 있단 말이야? 정말? 이런 유의 감정을 이렇게까지 잡아채주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정말? 분명 나의 일상과 내면에서 일어났던 ‘현상’인데, 지나치게 미묘해서, 너무 찰나적이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제대로 꺼내보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것들을 저 멀리 하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세희가 하나씩 하나씩 건져 올려 소설의 형태로 착 펼쳐놓은 것 같았다. 일견 과학책 같기도 했다. 과학책을 읽다가 자연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의 이치와 그에 따라붙는 인과를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았을 때와 비슷했으니.

나는 실제로도 김세희의 소설을 다분히 그렇게 사용했다. 어느 샌가 주변 친구들에게 그의 소설집 <가만한 나날>을 권하고 때로는 선물하며 “너 재작년 겨울 서촌식당에서 내가 뭔지 모르겠는데 복잡한 기분이라고 말했던 거 생각나?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읽어봐. 그거였어, 그거.” “너 한동안 왠지 모르겠는데 계속 울고 싶다고 했던 거, ‘현기증’의 그런 감정 아니었어?” 같은 말을 던졌고, 그들에게서 먼저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소름. 우리 그때 한참 심란해하면서 염리동까지 걸었던 날 생각났어. 우리 이거 뭔지 너무 잘 알잖아.” “나 ‘말과 키스’ 읽었는데, 너도 그 장면의 그런 기분 느낀 적 있어?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같은 말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뭔지 모르겠고, 왠지 모르겠고, 뭔지 너무 잘 알겠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나만 느끼는 것 같아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김세희의 소설을 빌려 비로소 설명할 수 있었고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는 적당히 닳아야 세련된 ‘어른의 세계’에 걸맞지 않은 것 같아 억지로 과거에 떼어두고 온 감정들 또한 많았고, 떼어내는 과정에서 입은 회복할 수 없는 손상과 돌이킬 수 없는 훼손들 또한 많았다. 그것들을 시간을 들여 살펴보는 대신 황급히 불을 끄고, 문을 닫은 다음 없었던 일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기에, 우리는 역시 김세희의 문장을 빌려 이 아픈 질문에까지 함께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 그렇지 않니?”

매사에 지혜롭고 싶었지만 지혜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던,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무지 속에서 발을 떼야 했던, 그 발이 무엇을 밟아 망가뜨리는지 잘 몰랐던, 알았지만 버티기 위해서 못 본 척하기로 결정했던 시간들을 관통했고 하고 있지만, 그 시간의 마디마디에 체기처럼 걸려버린 감정들에 말을 찾아주지 못한 사람들에게 김세희라는 이름을 조용히 건넨다._김혼비 작가(<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