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1983)
장편 <중앙역>ㆍ소설집 <어비>ㆍ장편 <딸에 대하여>

그녀의 글은 들어야 한다. 처음엔 우연인가, 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녀의 단편 ‘아웃포커스’를 읽어주었는데 가만히 듣다 보니 다음으로, 다음으로. 이야기의 뒤 페이지로 자꾸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마침내 마지막 활자 뒤에 마침표가 찍히자 안전한 안도감이 주위를 감쌌다. 뜨거운 국밥을 후루룩 말아 먹고 마지막 국물까지 목구멍으로 넘긴 이후 같은. 조금은 노동 같기도 한 하나의 행위를 끝낸 것 같은 가난한 충만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혜진의 소설은 유독 눈으로 읽을 때보다 귀로 들었을 때 좋다는 느낌이어서 ‘우연인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엔 일부러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졸랐다. ‘줄넘기’였다. “나는 잠자코 줄을 고르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노인이 말했다. 하나, 하나, 하나, 이렇게 줄을 넘어보게나.(중략) 모두들 줄넘기에 열심이었다.(중략) 가만히 보고 있으면 콩콩 몸을 띄우며 달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착시가 분명했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다.”

김혜진 소설의 인물들은 이런 식으로 줄넘기를 한다. 생의 하루하루를 ‘하루, 하루’ 하면서 뛰어넘는다. 가만히 콩콩 뛴다.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을 싫어하는 이 족속들은 크게 헐떡이지도 않는다. 콩콩콩…. 김혜진은 그런 속도와 타격감으로 이들의 흔적을 종이 위에 새겨놓았다. 자신을 관통하는 희비극이라는 달빛 아래 평범한 인물들의 그림자가 위아래로 출렁인다. 그림자는 짙고 검다. 하지만 그 짙고 검은 것이 결코 불우한 절망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김혜진은 정직하게 기록한다. 이 세계를 떠받치는 평범한 근면함이다. 이것이 김혜진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완결성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소설이 왜 그토록 듣기에 적합한지 깨닫는다. 화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건조하게 말을 건다. ‘오늘, 그러니까, 별일은 아닌데…’ 그리고 독자들은 그 조곤조곤한 말을 듣는다. 김혜진은 이 낮은 웅얼거림이 결코 날아가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임을 대담하게 증명한다. 이런 식이다. 장편 <딸에 대하여>의 한 장면은 지금까지도 내 심장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한 중년 여성이 치매에 걸린 노인을 바라보며 되뇌는 밤의 독백이 너무 오래 나를 사로잡아 지금도 놀란다. “이 모든 일들이 아주 멀리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내가 무너지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딸에 대하여> 중)

작가 김혜진이 오늘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창작자 김혜진의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독자로서 나는 작가의 세계를 자꾸 상상하게 된다. 그녀의 묵직한 관찰을, 감정의 균형을 응원한다. 그저 이런 말로 애정을 보낸다. 다음 작품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기다릴 수 있는 작가를 가진 독자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작가 김혜진 덕분에 이 시대 많은 독자들은 아주 큰 행운을 얻게 되었다. _김다은 CBS PD(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 운영자, <혼밥생활자의 책장> 저자)

 

강화길 (1986)
소설집 <괜찮은 사람>ㆍ장편 <다른 사람>

강화길 작가의 단편집 <괜찮은 사람>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여기 나오는 여자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혹은, 되고 싶을까? 아니면 좋아할 수 있을까? <괜찮은 사람>에는 남성과 결혼을 앞둔 연인으로,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로 늘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들이 겪는 불안은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상황만이 묘사될 뿐이지만, 같은 여성인 나는 직관적으로 그들의 불안을 감지하며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고는, 멀리서 보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것 같은 이 여자들에게 내가 어렵지 않게 공감한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게 된다.

장편소설 <다른 사람>에도 불안하고 불행해 보이는 여자들이 나온다. 주인공 진아는 만나던 남성에게 폭력을 당한 후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그 속에서 자신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다른 여성의 이야기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다. 자신이 단순한 피해자가 아님을, 폭력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에 동조한 적 있는 공모자임을 깨닫는 과정은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진아는 포기하지 않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기 위해 끝까지 집요하게 과거를 파고든다. 비슷한 일을 겪은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내고 또 죽어왔는지, 문학과 영화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그려져 왔는지, 소문 안에서 어떻게 상처 입어왔는지 살펴보는 동시에 내가 그들과 나를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 구분 지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반성이나 구조에 대한 고발에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과거를 반성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다음 세대의 여성들이 똑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행동하는 진아의 모습을 보여주며, 강화길 작가는 불쑥 독자들에게도 이런 말을 건넨다. “이야기를 끝낼 사람은 바로 너다.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 오래된 미래를 다시 펼쳐놓은 사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마지막 장.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 순간. 대답할 사람은 바로 너니까. 그렇다. 이제는 네 차례다.”

강간이나 데이트 폭력 등 여성이 겪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다뤘다는 점뿐만 아니라, 반성 그다음의 세계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에서 나는 강화길 작가를 동시대의 동료라고 느낀다. 그리고 강화길을 좋아하거나 사랑한다기보다는 그가 지금 있어야만 한다고 믿게 된다. 사실, 강화길 작가 혹은 강화길이 그리는 여자들은 사랑받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_황효진 칼럼니스트(<아무튼, 잡지> 저자)

 

최은영 (1984)
소설집 <쇼코의 미소>ㆍ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소설은 어딘가에서 끝난다. 우리의 삶도 그럴 테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개 살아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우리 곁을 떠난다. <쇼코의 미소>를 읽으며 받은, 내가 최은영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겠구나 하는 예감은, 시작부터 체념한다는, 그래서 이미 끝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인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언젠가는 바다를 떠나서, 사방을 둘러봐도 빌딩밖에 없는 도시에 가서 살 거야.”(‘쇼코의 미소’ 중) 이런 선언이 어디에 가닿을까. 미성년의 나이에 나는 곧잘 무언가를 선언하고 다짐했다. 계획만 분명하면 그것이 내 것이 되리라 믿었다.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멋진 삶을 동경하는 만큼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가는 가까이의 어른들을 경멸했다. 어느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쇼코의 미소’를 읽으며 괴로웠다. 이 소설이 그 고통스럽던 시간을 다시 살게 해서였다. 놓아버리면 놓아버린 대로, 애쓰면 애쓴 대로 예상하지 못했던 지옥에 산다. 그리고 어느 날 알아버린다. 나이를 먹은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살아온 시간이 내 뒤에 긴 궤적을 그리고, 그 궤적 끝의 나는.

멈춰야 할 곳에서 더 걸어나가는 소설이라고 하면 어떻게 들리는가. <쇼코의 미소>를 읽고 받은 인상은 그랬다. 그 시절 귀엽고 사랑스럽던 부분만을 편집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네. 세상이 우리 모두를 실망시키고, 나 자신이 나를 실망시키던 시간들로 최은영은 우리를 데리고 (돌아)간다.

최은영의 첫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관계’라는 것을 생각했다. 손안에 쥐고 있는 힘껏 부숴보고 싶었던, 그렇게 함으로써 내 힘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이 모든 유혹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했던. 나에게 남은 것이 사람뿐인 것처럼 느껴지던 시간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 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신짜오, 신짜오’ 중) 삶의 한가운데, ‘돌아보는’ 사람이 갖는 우울. 최은영의 목소리는 우울과 슬픔을, 그리움을, 그리고 후련함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_이다혜 <씨네21> 기자(<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스릴러>,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토의 밤 산책자> 저자)

 

최영건 (1990)
장편 <공기 도미노>ㆍ장편 <수초 수조>

소설가 최영건의 <공기 도미노>를 처음 접한 것은 2년 전 여름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최영건을 몰랐다. 건축을 전공한 내게 흥미롭게 읽힐 것이라며 시인 동료 한 명 <공기 도미노>를 권했다. 그의 말대로 첫 페이지에서부터 등장인물 백현석의 주택이 감각적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꼭 직접적인 관련 용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공간을 구성하고 그 안에 감정의 공기를 흐르게 하는 그의 소설은 충분히 건축적이었다. 그러나 나를 <공기 도미노>라는 바다에 빠뜨려 헤엄치게 하는, 그리하여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속에서 발을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힘은 다른 쪽에 있는 듯했다. 이를테면 ‘손을 뻗으려면 눈앞의 공기를 흩뜨려야 한다. 손을 뻗기 전의 장면을 부숴야 한다’, ‘그것은 수치심이 주는 만족감이었다. 불쾌감을 딛고 더욱 강해지며 한층 강한 불쾌감을 기다리는 쾌감이었다’, ‘돌연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단계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만들어낸 것만 같은, 그 연쇄가 느닷없이 아찔하게 몸에 부딪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와 같은 문장들. 나는 문장 뒤로 밀려오는 다음 문장으로 이루어진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징후를 다루는 이 섬세한 정면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돌연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 하나를 끼우고 앞표지 안쪽을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턱을 조금 치켜들고 사선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최영건은 여자였던 것이다. 왜 나는 갑자기 이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소설의 문장이 여성으로부터 쓰였다는 예감이 적중한 순간 왜 그렇게 짜릿했을까. 얼마 전 한 팟캐스트 방송에 출현한 김혜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성 속 포지션을 가진 시인들의 시를 보면 대자아가 나타나서 대상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내려다보거나 남자가 여자를 바라볼 때처럼 대상에 시각만 투여해서 쓰다듬듯 관찰을 해놓는, 그런 대문자 시인의 자아를 내세우는 것을 볼 때가 있어요. 한편 그것의 대립 항에 있는 여성들의 시를 보면 시 안에서 본인이 무엇을 해요. 움직이고, 고백하고, 언어를 가지고 유희하고요.” 최영건 역시 소설 안에서 움직이고 고백하고 유희한다. 공기 도미노를 감지하고 함께 쓰러지는 능력,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나도 모른다고 말하는 능력, 곪아터진 인간 내면의 표피를 정확히 핀셋으로 걷어 올리고 고름을 짜내는 능력은 여성 소설가 최영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공기 도미노>를 쓸 때 그녀는 20대였을 것이고, 이제 30대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최영건의 소설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나이가 들수록 쌓이는 내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흐를 여성 소설가 최영건의 언어에 휩쓸리고 싶기 때문이다. _박세미 시인(시집 <내가 나일 확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