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 배우조현철

와이드 팬츠 코스 아카이브 에디션(COS Archive Edition), 울 혼방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 레이 바이 매치스패션닷컴(Raey by MATCHESFASHION.COM).

조현철 배우조현철

블랙 셔츠, 테일러드 재킷 모두 로리엣(Roliat).

조현철 배우조현철

터틀넥 스웨터 맨온더분(MAN on the BOON), 오간자 긴소매 셔츠, 슬립 포켓 조거 팬츠 모두 펜디(Fendi).

조현철 배우조현철

자주색 하이넥 니트웨어, 블랙 캐시미어 터틀넥 니트웨어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XXX(Ermenegildo Zegna XXX).

조현철 배우조현철

셔츠, 아웃 포켓 테일러드 재킷, 팬츠 모두 로리엣(Roliat).

그러니까 조금 다른 인터뷰였다. 배우 조현철과 1시간을 마주 앉아 있었지만 대화의 반은 꽤 단조롭고 밍밍하게 흘렀다. ‘할 말이 있어도 여러 번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안 하게 된다’는 그의 대답을 빌미로 말수 없는 성정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더 길게 답을 해야 하는데’라며 뭐라도 더 이야기해보려는 듯 오래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되레 어느 순간 내 질문이 잘못됐나 싶은 의심이 들었다. ‘조현철은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질문에 최대한 반응하는 사람 같다’는 짐작과 함께 대화가 매끄러워진 건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이야기를 꺼낸 후 부터다. 시간이라는 다층적인 세계와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행위에 대해 그는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생각을 정확히 표현해냈다. 대답의 끝에는 “근데… 이런 이야기 좋아하세요?”라고 상대의 마음을 살피며.

최근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쾌활하고 해맑은 재벌 ‘산체스’ 역할로 주목받았지만, 실제 성격은 그와 정반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데 큰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안 하던 걸 하려다 보니 힘들더라고요. 큰 소리로 대사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고, 표정도 과장하다 보니 쉽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일 끝나면 그냥 좋고 대체로 만족하며 지냈는데 이번에는 대사가 안 외워지고 목소리도 안 나오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카메라 앞에서 계속 떨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약간 위기였어요.(웃음)

독립영화 <영아> <9월이 지나면> <뎀프시롤: 참회록>과 상업영화 <건축학개론> <마스터> <차이나타운> 등 많은 작품에서 연기해왔음에도 새삼 위기를 겪었다는 거죠?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떨 수도 있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연기를 생업으로만 생각하며 익숙하고 편한 방식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나 싶었고요. 아무리 생계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으니까요. 대단한 배우가 되거나 주연을 맡고 싶다기보다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정신 차리고 해야겠다고요.

많은 이들이 인상적인 캐릭터였다고 평가하는데도요? 평가는 알아서 걸러 들어요. 내가 어떻게 연기한지 알고, TV에 어떻게 나오는지 아니까 좋은 평을 들으면 기분 좋지만 흘려듣게 되죠. 반대로 부족했다고 생각한 부분을 누군가 정확히 짚어서 이야기할 때는 마음에 담아둬요. 내가 괜찮다고 생각한 걸 비난하는 것에는 큰 타격을 받지 않는데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오늘 만난 배우 조현철은 배우로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배우에게는 자신을 증명하고 드러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없진 않아요. 다만 뭔가를 드러내고 펼쳐 보이기보다는 작은 역할을 맡아도 사연이 있고 충분히 있을 법한, 도구적이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요. 감초 역할은 웃음을 주거나 정보 전달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그 또한 의미 있고 좋지만 살아 있는 캐릭터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배우 이전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2010년 연출작이자 주연작인 단편영화 <척추측만>으로 제36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했죠. 최근 상업 장편영화로 개봉한 <판소리 복서>의 원작인 <뎀프시롤: 참회록>의 공동 연출자이자 주연배우이기도 했습니다. 독립영화, 상업 영화를 가리지 않고 스무 살 이후부터 줄곧 감독 혹은 배우로서 작품 안에서 살아왔어요. 그런 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는 게 좋았어요. 어디 가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걸 누군가 들어주는 일은 쉽게 생기진 않잖아요. 이런 식으로라도 포장해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꽤 많은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꽤 긴 시간 사이 영화는 무엇일까, 연기는 뭘까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들었을 것 같고요. 영화와 연기에 대해 고민했던 시절은 다 지나간 것 같아요.(웃음) 너무 오래전에 지나간 것 같고… 오히려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 하는걸 별로 안 좋아했어요. 굳이 한다면 어떤 영화에 대해, 어떤 연기에 대해 욕을 하거나.(웃음) 요새는 그냥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웃음),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요. 관심사가 많이 바뀌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긴 해요. 요즘은 시간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요. ‘이게 다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왜 내가 의식이 있는 채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실제로 여기 존재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죠. 지금 이 인터뷰도….(웃음) 이게 다 내가 만든 시뮬레이션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기도 했고요. 그런 식으로 질문을 거듭해가는데 말하자면 시간이라는 것도 인간의 고유한 시각으로 본 현상이라는 거죠. 절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우주의 본질이 그렇지 않은데 인간이 희미한 시각으로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사는 건 아닐까?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 향하는 게 시간의 흐름과 연관 있는 건데… 근데 이런 거 재미있으세요? 진짜로요?

그 책 제목이 뭐예요? 카를로 로밸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요.

이런 다채로운 사유들이 삶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꿈에서 바위산을 타다가 길을 잃었는데 수풀 속에서 수천 마리의 메뚜기 떼가 날아오르는 거예요. 그리고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나타나 내게 양자의 세계를 보여주겠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파란 빛이 보여요. 그리고 ‘이것은 물질이 아니고, 무(無)인 동시에 유(有)이고, 존재인 동시에 비존재’라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연기자로서 성공해야지, 연기로서 뭘 해내야지 하는 생각이 사소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변방이잖아요. 작은 나라이고, 60년 넘게 분단돼 있고, 인종도 다양하지 않고요. 그 속에서 무언가 하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삶을 생각하다가 관점을 달리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그런 걸 궁금해하고 찾아보게 되고요. 다른 것들에는 크게 즐거움을 못 느끼지만 이해할 수 없던 것, 알지 못했던 걸 조금씩 알아가는 것 그리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을 책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선명하게 보고 확인하는 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의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것처럼 배우 혹은 감독으로서 반대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삶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와중에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게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잖아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창조의 과정이고 거기서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순간에 유독 더 이야기하고 싶고, 더 만들고 싶고, 더 쓰고 싶어요? 사랑하는 것이 생겼을 때. 예쁜 걸 보면 나누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는 사랑이 작동하는 것 같아요. 내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을 남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싶고요. 또 죽음을 목격했을 때. 죽음이 어떤 의미이고,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무엇이었고,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무엇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나요? 대단히 아름답기보다는 사소한 것들인데, 길을 지나가다 제철 과일을 보고 돈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누가 생각나서 사게 되는 것,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을 봤는데 날씨가 좋아 좋은 마음이 들면서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는 것도 사랑이겠죠. 그런 마음들을 예민하게 잘 써야 할 것 같아요. 모르고 지나치기 쉽잖아요.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다 느낄 수 있는 건데 막상 보지 못하는 것들을 끄집어내서 보여주고 싶어요. 다들 사랑하고 있지만 사는 게 피곤해서 지나치는 것들이요.

감독 혹은 배우로서 계속 만들고 싶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품게 되는군요. 그렇죠. 하지만 그게 꼭 영화는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농사를 지으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고, 글이야 언제든지 쓸 수 있고요. 하다못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소통할 수 있으니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 해요. 한데 숙명적으로 뭔가 계속 쓰긴 써야 할 것 같아요. 빠져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건.

인간 조현철로서 지금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극적이었던 시기는 3년 전에 지난 것 같아요. 그때 믿었던 것들도, 확신도 있었다면 그런게 하나씩 다 무너지고.(웃음) 자신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고, 믿었던 것들도 다 사라져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가장 활활 타올랐던 때는 다 지나고 재만 남은 건데, 김연수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럴 때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