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시즌간 패션계에서 미니멀리즘과 스트리트 패션, 뉴트로 이외의 키워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계적인 하우스에서부터 갓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진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브랜드가 이 세 가지 테마만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제 나름의 색을 고수하던 소수 브랜드의 노력은 등한시됐고, 전형적인 방식의 화려함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그렇기에 새 시즌 다소 뜬금없이(?) 등장한 디스코 트렌드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발맹이나 생 로랑처럼 정체성이 디스코 무드와 맞닿아 있는 브랜드를 포함해 스트리트 패션의 대명사이던 발렌시아가와 와이 프로젝트, 변화의 중심에서도 클래식을 꿋꿋이 수호해온 랄프 로렌과 에르뎀까지 약속이라도 한듯 극도로 화려한 디스코 룩을 내세운 것. 이들의 시도는 당장이라도 입을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컬렉션 피스 가운데 유달리 돋보였다. 특히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과 모스키노는 각각 펑키하게 부풀린 헤어스타일과 바비 인형처럼 볼륨감 넘치는 헤어스타일을 가미해 1970년대 디스코 무드를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을 받았고, 셀린느와 알베르타 페레티는 시퀸과 글리터 소재를 강조하되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템인 블랙 부츠나 메탈 액세서리를 더해 독창적인 디스코 세계를 구현했다.

물론 입는 목적에만 의의를 둔다면 디스코 트렌드가 현실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현란하다 못해 요란하기까지 한 디자인으로 일상에서 소화하기 힘들뿐더러한 번 입어도 열 번 입은 듯한 이미지를 주어 최근 대두하는 합리적 소비 경향에 반하니 말이다. 그러나 개성 넘치던 패션의 부흥기를 떠올리게 만들고, 상업적인 아이템 일색이던 최근 패션계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면 디스코 트렌드의 도래가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때로는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고, 일상과 동떨어진 환상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역시 하이패션이 수행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