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고백

“우리 오늘부터 1일.” 좀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난 이렇게 관계를 명확히 해주는 게 좋다. 사귀는 첫날의 설레는 감정도 만끽할 수
있고. 무엇보다 “1일이야?”라고 묻지 않고, “1일이야”라며 리드하는 그녀의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O(33세, 마케터)

“손 잡아도 될까?” 덮치듯이 스킨십을 하던 전 남친과 다른 그 말 때문에 마음이 갔다. 착하고 고운 심성을 가진 그는 어떤 일이든 내 동의를 구한 후에야 행동에 옮기려 했다.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대가 불편해하거나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면이 좋았다. Y(30세, 영어 강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맛있는 밥을 먹고, 좀 걷다가 커피도 마시고, 그러다 손도 잡고, 헤어지기 전에 키스도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날부터 연인이 되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J(31세, 헤어 스타일리스트)

“내가 잘할게.” 이 말 말고도 그는 내게 족히 열 번은 고백했다.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연애 감정이 들지 않아 매번 거절했는데, 그사이 감정이 쌓였던 것 같다. 한결같은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던 차에 들었던 한마디는 결국 우리를 연인으로 만들었다. C(28세, 간호사)

“뭘 좋아해? 네가 좋아하는 거 다 기억해둘게.”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지만, 진짜 내가 그날 얘기한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며 우리는 즐거운 연애를 하고 있다. 내게 이렇게 온 관심을 쏟아주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S(28세, 번역가)

“라면 먹고 갈래?” 영화 대사를 따라 한다면서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가볍게 건넨 그 말에 설렐 줄 몰랐다. 워낙 오랜 시간 친구 사이로 지내서 서로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장난 같은 한마디가 우리 관계를 친구에서 연인으로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Y(29세, 에디터)

“우리 사귀자.” 사실 그가 어떻게 고백해도 사귈 작정이었다.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그라드는 이벤트나 애매모호한 말 대신 직접적으로 고백하니까 더 좋더라. K(30세, 공무원)

최악의 고백 

“우리 사귀자. 그런데 이 말을 내가 하게 만들어야겠어?” 뒷말만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좋은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귀기 전에 실체를
알게 되어 오히려 다행인 건가. 썸 타는 내내 쿨하고 배려심 넘치던 그녀의 모습은 다 고백을 받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걸, 그 말을 듣고 알아챘다. 고백은 남자의 몫이라는 생각, 아마 우리 부모님도 안 할 거다. K(34세, 연기자)

“이제부터 다른 남자 만나지 마.” 여기서 만난다는 건 연애의 의미가 아니었다. 친구, 선배, 후배, 직장 동료 등 주변의 모든 남자를 정리하라는 말이었다. 이 연애를 하려면 친구도, 직장도, 일상도 포기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남자는 없고, 좋은 연애 상대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는다. G(32세, 헬스 트레이너)

“좋아해. 대답은 나중에 들을게. 지금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고 얘기해줘.”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있는데 왜 생각해보라는 건지. 애초에 나는 그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고, 여지도 준 적이 없다. 뜬금없이 고백해놓고 대답도 듣지 않는 태도는 뭔지. 나는 아니라는 말을 언제쯤 전할 수 있으려나. P(20세, 학생)

“봄에 꽃 피면 데이트할래?” 고백인 줄 몰랐다. 혼자 로맨틱한 고백을 했다는 기분에 취해 있던데,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꽃이 피기 전에 우리 관계를 정리했다. K(35세, 일러스트레이터)

“내 마음, 네가 더 잘 알잖아.” 알긴 뭘 알아. 고백과 대답을 모두 내게 미룬 최악의 고백. 심지어 취중이었다. 취중진담은 솔직해야 좋은 거라고. H(34세, 회사원)

“아침에 눈을 뜨면 네 생각이 나. 창밖을 바라보다 네 생각이 나. 그렇게 멍하니 또 하루가 흘러가. 너도 날 가끔씩은 떠올릴까. 네 생각이 나.”
말이 아니라 노래였다. 존 박의 ‘네 생각’. 들으면서 ‘설마 포털 사이트에서 고백하는 법이라도 검색했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혼자 연습했을 걸 생각하면 고맙긴 하지만, 이런 사람과 사귀면 기념일마다 노래를 듣게 될 것 같아 거절했다. I(26세, 학생)

“그날 고백할 거야. 기다려줘.” 고백 예고제라고 들어봤나? 고백하는 게 대단한 거사를 치르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만들더라. 처음엔 기대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뭔가 싶었다. 막상 고백 당일에는 별것도 없이 사귀게 됐다. 설렘 없는 시작이라 그런지,
관계는 얼마 가지 못해 끝났다. K(29세, 은행원)

“나이도 있는데 괜히 시간 끌지 말고 확실히 하자.” 놀랍게도 이게 고백이었다. 이건 마치 연애 상대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프로젝트를 위한 팀원을 구하는 것 같았다. 나이가 있는 것도 맞고, 시간 끄는 거 나도 좋아하지 않지만 연애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M(37세, 호텔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