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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에요.”

스트리트 스타일 포토그래퍼이자 유명 블로그 ‘Advanced Style’을 운영하는 패션 블로거인 60대 여인, 아리 세스 코언(Ari Seth Cohen)의 말이다.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면,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들이 모델 못지않은 위트와 개성을 뽐내며 해맑게 웃고 있다. 그저 생경하게만 느껴지던 이들의 모습이 언젠가부터 경이롭고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비단 에디터만이 아닌 듯하다. 아리 세스 코언의 블로그는 책뿐 아니라 작년 9월 <은발의 패셔니스타>란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구성되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고, 최근 온라인 옥션 사이트 ‘Paddle8’과 합작해 빈티지 액세서리 라인을 선보이는 등 패션계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으니까.

얼마 전 <뉴욕 매거진>이 운영하는 패션 블로그, ‘The Cut’에서 새로운 아이콘으로 선정한 인물 역시 87세의 할머니, 배디 윙클(Baddie Winkle)이다. 손녀의 옷을 뺏어 입는 ‘나쁜 할머니’를 컨셉트로 기상천외한 셀피를 찍어 올리는 그녀의 인스타그램은 40만 명이 훌쩍 넘는 팔로어 수를 자랑한다고. 마일리 사이러스, 리한나, 니콜 리치 등 핫한 셀러브리티들이 광팬을 자처할 만큼 인지도 또한 높다.

무조건 새롭고 신선한 것만을 찾는 패션계에서 소위 ‘할머니’들에게 열광하는 현상은 작년 유례없는 은발(granny hair)의 유행으로 수면 위에 떠올랐다. 레이디 가가, 리타 오라, 리한나, 카일리 제너 등 유독 트렌드에 민감한 셀러브리티들이 너나없이 회색 머리로 탈색한 것. 할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를 연상시키는, 다소 엽기적인 이 헤어 컬러는 패션 블로거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지난 F/W 시즌을 기점으로 2015 S/S 시즌, 패션계는 보란 듯이 예순이 훌쩍 넘은 백발의 여인들을 뮤즈로 앞세우며 본격적으로 ‘그래니 시크(Granny Chic)’ 신드롬을 예고했다. 60대 슈퍼모델이자 스타일리스트인 린다 로딘은 2014 프리폴 시즌 더로우의 룩북과 카렌 워커 선글라스의 얼굴로 기용됐으며, 90대의 전설적인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은 케이트 스페이드와 알렉시스 비타의 광고 캠페인에 등장해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뽐냈다. 이 밖에 세린느는 80대 작가 존 디디온을, 생 로랑은 70대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을 앞세웠고 바니스 뉴욕은 ‘Better than Ev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팻 클리브랜드, 베단 하디슨, 스테파니 세이모어를 캐스팅해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5 F/W 시즌 역시 한 단계 진화한 그래니 룩이 메가급 트렌드로 대두했다. 디자이너들이 저마다 컬렉션에서 ‘할머니’를 모티프로 한 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 “소녀와 여인, 할머니 스타일은 한 끗 차이예요. 재미있지 않아요?” 스타일리스트 레슬리 프리마의 말처럼 올가을 런웨이엔 트위드, 퀼팅, 벨벳 등 투박한 소재와 체크, 꽃 등의 고상한 프린트가 심심찮게 포착됐는데, 브랜드의 DNA를 다채롭게 녹여낸 스타일링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구찌의 새로운 수장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할머니의 옷장에서 꺼낸 듯 빈티지한 감성이 짙게 배어나는 룩에 집중했다. 짧게 깎은 퍼 코트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플리츠스커트를 매치하고 빨간 베레를 쓰거나 잔 꽃무늬 실크 원피스에 레트로풍 안경을 쓴 것. 여기에 깨알같이 매치한 모피 장식 로퍼(혹자는 시골 할머니가 애용하던 쓰레빠(!)를 연상시킨다고 말할 정도)는 구찌 표 할머니 룩에 방점을 찍기 충분했다. 반면, 막스마라는 메릴린 먼로를 오마주한 만큼 우아한 여인에 가까운 그래니 룩을 선보였다. 퀼팅 소재로 포인트를 준 오버사이즈 캐멀 코트에 펜슬 스커트를 매치하거나 포멀한 슬립 드레스에 얼기설기 짜인 니트 카디건을 걸친 모델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여기에 60대 슈퍼모델, 베네데타 바르지니를 피날레에 등장시킨 안토니오 마라스의 로맨틱한 룩까지! 프라다샤넬이 소녀 감성으로 변주한 트위드 룩 역시 예뻤다. 전체 스타일을 빈티지한 무드로 통일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큼직한 유색 젬스톤 귀고리나 브로치, 베레, 금테 안경 등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줘도 좋다.

“할머니를 오마주한 스타일이 대세인 이유 중 하나는 경기 불황으로 실질적인 고객의 연령대가 높아졌기 때문이에요.” 돌체 앤 가바나 디자이너 듀오의 말이 살짝 씁쓸하게 다가오긴 하지만 뭐 어떤가. 나이가 들수록 더 쿨해진다는 아이리스 아펠의 말을 절감하게 되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