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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의 내가 만약 <응답하라 1988>을 봤다면, 내 이상형은 정환이도 택이도 아닌 택이 아빠였을 거다. 과묵하고 속 깊은, 어떤 상황이든 평정심을 유지하는 성숙한 어른 남자. 하지만 이제 안다. 신의 경지에 다다른 평정심은 고된 훈련이나 시행착오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탑재된 옵션 같은 것임을. 아무리 눈을 비벼도 쌍꺼풀이 지지 않는 외꺼풀 눈이나 네모진 턱 같은 거다.

화 안 내는 남자를 사귀었다. 화 잘 내는 여자는 화 안 내는 남자 앞에서 매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싸움의 끝엔 늘 패배자의 비참함을 느껴야 했는데, 을도 이런 을이 없었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서로 가까워졌다고 믿었던 순간부터다. 친한 친구의 험담이라도 할 때면 그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같은 소리를 할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눈빛에서 읽히는 감정이 없다는 게 더 의아했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내 믿음직한 대나무 숲이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질투도 실망도 하지 않는 그와 싸우는, 혹은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화를 내는 상황이 잦아졌다. 그는 싸우는 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욕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도 화를 안 낼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더 지독한 말을 내뱉고, 비아냥거리며 그의 속을 긁었다. 싸움의 횟수와 비례해 내 공격 강도는 점차 세졌다. 싸움이 끝날 때면 늘 폐허였다. 추한 내 모습에 상처받는 것도 나였다. 자존감은 점점 왜소해졌다.

싸움 후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그는 일절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연락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어서 전화를 하면 그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늘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본인도 미안하다고 했다. 무엇이 어떻게 미안한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됐다. 화해는 늘 개운치 않았다.

친구들에게 ‘남자친구가 화를 안 내서 화가 난다’고 고민을 말했다가 혹독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결국 여자친구에게 화 안 내기로 유명한 J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기대에 반했을 때 우리는 주로 화가 나잖아. 연인 관계에서는 그 기대가 더 크기 때문에 사소한 부분에도 화가 나겠지. 하지만 나는 상대에게 바라는 게 없어서 그런 건지 화가 잘 안 나. 그 감정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열이 잘 안 오르는 것 같아. 하다못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화가 안 날지도 몰라”라고 했다. 그 대답에 “그럼 바람을 피워도 화가 안 나? 원 나이트 스탠드를 하고 와도 화를 안 낼 거야?” 하고 억지를 썼고, 선배는 그제야 “대신 내 경우에는 말이야…” 하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상대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여자친구에게 친절을 베풀고, 다정하게 대하는 건 더 좋은 관계를 위한 노력이라기보다 그녀에게 다정한 남자친구 역할을 하는 자기 모습에 스스로 만족하고 집중하는 거지.”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화 안 내는 남자야말로 자신만의 성에 사는 왕자 아닌가. 어린왕자는 지구에 가고 싶어 하기라도 하지 이 남자들은 성벽을 쌓고 누군가의 외침을 막는 데 열중한다. 그게 여자친구라도 예외는 아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왕자의 진심을 알 것 같은데 성문이 열리지 않으니, 시집온 공주만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이다.

뒤돌아보면 화내지 않는 그 남자는 그 밖의 다른 감정에도 무뎠다.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야 하는 연애의 열탕과 냉탕의 온도 차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지지고 볶고, 애걸복걸 해야하는 연애의 피로에서 자유롭다. 혼자 불같이 화를 내고 헤어지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어떤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회가 밀려와 무작정 택시를 돌려 폭설을 뚫고 경기도에 있는 그의 집까지 달려갔었다. 문을 연 그는 다른 날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무슨 일이 있냐는듯 나를 맞았다. 연애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우리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은 화 안 내는 남자 앞에서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심지어 보는 관객도 없는 외로운 놀이판이었다. 그날로 우리는 헤어졌다.

자신이 사랑을 준 만큼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 상대에게 크게 기대하기보다 상대를 이해하고 감싸려는 사람들 쿨하고 멋지다. 하지만 난 이제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와는 다른사람이고, 결코 내가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