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비비에가 개발한 게임 ‘워크 유어 튜나’. 반려견과 함께 파리의 곳곳을 여행하는 컨셉트다.

세상이 변했다. TV보다 유튜브 채널의 인기가 높고,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은 스타를 앞선다. ‘꼰대’라 조롱받지 않기 위해 밀레니얼 세대의 소통 방식에, Z세대의 문화에 발맞춰야 한다.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에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뜻이다.

루이 비통의 맨즈 컬렉션 티저 영상. 동물을 주제로 한 만화 형식이 독특하다.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오랜 전언도 MZ세대의 세상에서는 효력을 잃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성과 진지함보다 즐거움을 우위에 두는 취향은 우아함을 지루함으로, 고급스러움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이 때문에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에 기반을 둔 하이패션도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눈에 띄기를 마다하지 않고, 소비를 놀이처럼 여기며, 플렉스를 즐기는 MZ세대의 담대한 구매력이 무시하기에는 너무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이패션도 태초부터 지켜온 고고함의 벽을 허물고, 이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센강에 보트를 띄우고 새 시즌 쿠튀르 쇼를 펼친 발망. 틱톡
앱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했다.

구찌가 IGTV에서의 컬렉션 공개를 앞두고 티저 영상을 먼저 배포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럭셔리 하우스가 컬렉션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발망의 올리비에 루스텡은 ‘틱톡’ 앱을 통해 새 시즌의 쿠튀르 쇼를 생중계했고, 구찌는 오는 7월 17일에 유튜브와 트위터, 웨이보, 카카오 등의 채널을 통해 구찌 에필로그 컬렉션을 공개하겠다고 밝혔으며, 루이 비통 역시 새 시즌 맨즈 컬렉션을 위해 만화 형식의 팝한 티저 영상을 제작하고, 인스타그램 나의  IGTV 채널에서 쇼를 선보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컬렉션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홈페이지 대신 젊은 세대가 접근하기 쉬운 채널을 택한 것. 이 덕분에 오프라인 패션쇼가 일부 VIP나 프레스에 한정되어 있다는 비판도 상당 부분 해소했다.

‘동물의 숲’에 등장한 마크 제이콥스의 신제품.

서핑 레이스를 즐기는 버버리의 온라인 게임 ‘B 서프’.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브랜드를 각인하기 위해 게임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사례도 많다. 발렌티노와 마크 제이콥스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닌텐도사의 게임 ‘동물의 숲’에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고, 버버리는 TB 서머 모노그램 컬렉션의 출시를 기념하며 서핑 레이스를 즐기는 온라인 게임인 ‘B 서프’를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지난해부터 공식 앱 내의 아케이드 섹션에 여러 즐길 거리를 제공하며 게임과 패션의 결합에 앞장 서온 구찌 역시 유명 모바일 게임인 ‘테니스 클래시’와 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게임 속에서 유저들은 실제 컬렉션과 유사한 디자인의 아이템을 입고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외에 로저 비비에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반영하는 캐릭터를 선택한 후, 반려견 캐릭터 튜나와 함께 장애물을 피하거나 간식을 얻어가며 파리의 랜드마크를 산책한다는 독특한 컨셉트의 게임 ‘워크 유어 튜나’를 공개하며 브랜드 특유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테니스 게임인 ‘테니스 클래시’와 협업한 구찌.

브랜드에 젊은 피를 수혈하려는 노력도 여전하다. 독보적인 모던함을 지향하던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 결별한 지방시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매튜 M. 윌리엄스(Matthew M. Williams)를 임명했다. 매튜 M. 윌리엄스는 스트리트와 유스 컬처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브랜드 1017 Alyx 9sm의 오너 디자이너로, 소식이 알려지자 젊은 감각을 갖춘 디자이너를 통해 전성기의 인기를 되찾은 구찌, 버버리, 루이 비통 남성 컬렉션과 같은 성공 사례의 뒤를 이을지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한편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여러 럭셔리 하우스의 모기업인 케어링 그룹은 배우 에마 왓슨을 그룹의 비상임이사이자 지속가능성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하며 “관점의 다양성에서 오는 집단 지성과 서로 다른 경험이 지닌 질적 풍요로움이 그룹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탁월한 인재의 합류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여성 인권 향상과 자연보호에 앞장서며 10~20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그의 합류로 그룹 이미지도 제고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긍정적인 반응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쿠튀르 정신을 수호하고, 시대에 앞서는 이미지로 패션의 예술성을 지켜내는 일이 패션의 첫째 가치이자 의무라는 것. 그러나 스트리트 혹은 서브컬처가 하이패션에 스며들던 과정에서 학습했듯,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게 패션계의 섭리다. 그러니 유연한 시선으로 지켜봐주길. ‘경계’를 가장 경계하는 MZ세대가 사고 만들고 이끄는 세상에서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구분되는 것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문화와 즐거움으로 살아남는 게 하이패션에도 더 유의미한 일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