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티셔츠와 팬츠 모두 오프화이트(Off white™).

“연기를 남들보다 좀 늦게 시작했어요. 군대에 다녀온 후 연극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그즈음 한 동기 형이 영화를 같이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솔직히 그때는 좀 귀찮았죠. 학교에서 친구 과제를 같이 해주는 기분이었거든요. 영화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불성실한 배우였죠. 그런데 막상 촬영하다 보니 묘한 재미가 있는 거예요. 잠깐이지만 다른 삶을 체험한 듯한, 마치 전혀 모르는 이의 감정 속에 빠져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그 인물의 진짜 감정보다 훨씬 얕았겠지만요. 그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계속 영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2012년, 취직과 연기의 기로에서 얼떨결에 참여한 영화 <밥덩이>는 그렇게 배우 이학주의 시작이 되었다. 배우가 되기 위한 오랜 준비 과정이나 불타는 열망은 없었지만, 처음 출연한 영화에서 느낀 묘한 재미에 빠져 8년째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연기하면서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순간은 맡은 캐릭터의 삶을 온전히 경험했다고 느낄 때다.

“혹자의 말을 빌리면 저는 종지 같은 배우예요. 어떤 캐릭터를 만났을 때 ‘나라면 이렇게 안 할 것 같아’ 하는 생각에 부딪힐 때가 많거든요. 이해의 범위가 좁았어요. 그래서 늘 더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대본을 볼 때도 ‘나라면’ 하는 생각을 배제하고 글로 적혀 있지 않은 서사를 찾으려고 하고요. 대본에 적혀 있는 말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감정이 쌓여 있는지 반추해보는 거죠. 이를테면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인규’가 애인 ‘현서’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인규는 어떤 감정을 쌓아온 인물인지 추적하면서 연기했어요. 특히 인규는 더욱 제 생각을 대입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사견이 들어가는 순간 전혀 납득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요. 최대한 인규로서 인규를 바라보려고 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8년 동안 맡은 무수한 인물 중 가장 실제 자신과 거리가 멀고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인물 인규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의 ‘준근’처럼 명확한 의지로 움직이기보다 휩쓸리듯 우유부단하게 살아온 그에게 <부부의 세계> 속 인규는 지나치게 서슴 없고 직선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무려 ‘지선우(김희애)’, 이‘ 태오(박해준)’와 날 선 대립을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그는 두려움이 앞섰다.

“대본을 보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김희애 선배님과 박해준 선배님을 마주할 때마다 긴장감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인물인데,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두려웠어요. 그럼에도 인규가 될 수 있었던 건 선배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촬영하는 내내 뭔가 사사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별히 이건 이렇게 하라고 얘기하신 적은 없지만, 같이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저로서는 배우는 게 많았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 이름까지 알릴 수 있었으니 <부부의 세계>는 제게 특별한 작품일 수밖에 없어요. 배우로서 이렇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받아보니까 되게 좋네요, 하하.”

<부부의 세계>의 인규에 이어 <야식남녀>의 ‘태완’, 그리고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의 준근까지. 그는 올해를 가장 많은 삶을 탐구한 해이자 이학주라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더없이 좋은 최고의 시기라고 자평했다. 그렇지만 처음이 그러했듯 다음을 위한 명확한 계획이나 노선은 없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더 많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일 뿐이다. “또 다른 인생 작품을 만나고 싶다거나 특정 연기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은 없어요. 그냥 계속 작품을 하는 것, 가능하면 최대한 많은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프리랜서다 보니 늘 고용 불안에
시달리거든요.(웃음) 그 작품들에 저만의 감수성이 담긴다면 조금 더 좋을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