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an choosing dress from closet

#01

옷장 너머의 진실

마크 주커버그의 페이스북에 어느 날 “출산휴가 후 첫 출근. 무엇을 입을까요?”라는 글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짜잔~ 1백20만 명이 ‘좋아요’를 누른 그 포스팅은 바로 옷장 안을 찍은 사진이었다. 크기와 색상과 모양이 동일한 회색 티셔츠와 후디가 각각 아홉 벌씩 가지런히 걸려 있는,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면서도 어딘지 코믹한 공간. 흠, 캘리포니아의 이 젊은 억만장자가 1년 내내 회색 티셔츠만으로 버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하지만 똑같은 무채색 상의만 나란히 걸린 장면은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도 새삼스러운 자각과 자극을 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걸 보고 마침내 나는 오랫동안 외면했던 카오스와 정면 승부하기 위해 ‘헬게이트(옷장 문에 내가 붙여준 별명)’를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내 옷장은 사계절의 미세먼지와 수십 년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거대하고 묵직한 옷들의 덩어리였다. 그중 8할은 한번 처박히면 다시 빛을 보지 못했으니, 옷장보단 차라리 ‘옷들의 무덤’이란 표현이 어울릴지도. 바꾸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데 일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어느 집이나 비슷하겠지만 대체로 물건은 너무 많고, 공간은 너무 좁으며,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이사해서 아주 넓고 멋진 드레스룸을 새로 꾸미지 않는 한 미제 사건으로 남겨둘까도 싶었다. 하지만 주커버그 같은 남자도 저렇게 근사한 옷장을 갖고 있는데, 그보다 옷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효율적인 시스템을 한번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의외로 소셜 커머스에서 염가로 대량 구매한 옷걸이가 큰 도움이 되었다. 같은 옷걸이를 나란히 걸어놓기만 해도 드레스룸 전체가 정돈된 느낌이 드는데 다 옷끼리 짜증나게 엉키는 일도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걸 수 있게 되면서 공간 효율이 훨씬 좋아졌다는 점이 좋았다. 50벌도 겨우 구겨 넣었던 봉 하나에 70벌을 걸어도 여유가 생기다니 너무나 신기했다. 처음에 바지걸이 1백 개를 샀다가 다 써버리고 나선 집게 달린 치마걸이 1백 개를 추가로 구입했고, 다시 상의걸이를 1백개씩 두 번 사들였는데, 대체 숨은 옷이 얼마나 많은 건지 아직 끝을 모르겠다.

옷장을 뒤엎는 일은 상당한 중노동이었지만 확실히 대가도 있었다. 그간 나의 모든 소비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와 합리성이 있었다. 패션 종사자로서 이 정도는 입어줘야 하니까, 내 체형에 어울릴 것 같으니까, 좋아하는 디자이너니까, 리미티드 에디션이니까, 유행하고 있으니까, 세일이니까, 너무 싸니까…. 하지만 그런 명분은 한 철을 못 가 사라지고, 훨씬 오래 남는 것은 후회와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한때의 열망으로 소유하게 된 로고 백이나, 프리미엄 청바지나, 노출이 심한 드레스가 이 안에서 초라하게 나뒹굴고 있어서 부끄럽다. 필요하거나 어울리는 것과는 무관한, 온갖 스타일이 뒤범벅된 너무 많은 옷이 부끄럽다. 그렇게 많은 옷을 샀어도 당장 봄이 오면 또 입을 게 없다는 걱정이 드는 게 부끄럽다. 한도 없이 실컷 쇼핑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물건을 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산 물건을 끝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사용하는 일에 비하면 말이다. 옷장은 명백한 취향의 이력서다. 주커버그처럼 ‘취향 없음’을 단호히 선언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왕이면 좋은 취향의 이력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러려면 우선 이 작은 공간을 내 취향에 맞게 잘 관리해야 할 것 같다. 새 옷을 사들이는 건 그 이력서 작성이 끝난 후에나 고려해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