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승전 자수의 시대다. 성별을 막론하고 자수로 장식한 다양한 레디투웨어가 대거 쏟아지는 중. 이번 시즌 블루마린과 안나 수이, 드리스 반 노튼, 돌체 앤 가바나 등의 쇼에 등장한 자수는 남성복에 자주 등장하는 호랑이와 뱀, 대나무처럼 대범하면서도 동양적인 디테일, 여성 컬렉션을 점령한 꽃과 나비, 새 등 자연의 모티프, 고양이와 리본처럼 아기자기한 디테일 이 세 가지 스타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이패션뿐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로 그 폭이 넓어진 사실에 주목할 만하며, 이는 이번 시즌에도 이어질 엠브로이더리 패션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전 세계 여자들 사이에서 단연 이슈가 된 자수 패션의 원조는 비타킨 원피스다. ‘비타킨 스타일’을 탄생시킨 브랜드의 정확한 이름은 비쉬반카 바이 비타킨(Vyshyvanka by Vita Kin). 우크라이나 출신 디자이너 비타 킨이 론칭한 브랜드로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페전트풍 원피스와 블라우스, 맥시 드레스가 대표적이다. 지난해부터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넓은 의미로 우리의 개량 한복과 비슷하다. 소매와 치맛단을 넉넉하게 디자인해 일상에서 입기 편하게 재해석하고 세련된 컬러와 패턴으로 동시대적 디자인을 완성한 것.

국내에 처음 이름을 알린 건 지난해 여름 즈음인데, 고소영과 변정수, 김나영처럼 패션에 관심이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인스타그램에 비타킨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공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통의 아스텍 자수를 손으로 직접 수놓기 때문에 제한된 수량만을 공급하는 게 원칙. 그 때문에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어 품귀 현상을 빚으며 더욱 위세를 떨쳤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마친 청담동 편집매장 레어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레어마켓을 소개하는 사진이 비타킨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돼 많은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2백만원을 호가하는 비타킨 원피스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과감한 스타일링이 필요하다. 트로피컬 무드의 주얼리나 슈즈를 매치하는 일차원적 선택 대신 심플한 바 형태의 이어링, 시크한 부츠, 블랙 스니키 팬츠처럼 다양한 의상과 소품을 활용해 스타일링해볼 것. 스트리트 패션을 참고하면 한결 이해하기가 쉬운데 가죽 재킷을 걸치거나 패턴이 화려한 풀 스커트를 함께 입어 맥시멀한 스타일을 연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좀 더 캐주얼한 자수 디테일을 원한다면 블리스 앤 미스치프(Bliss and Mischief)가 제격이다. 2년 전 미국에서 설립된 블리스 앤 미스치프의 컨셉트는 빈티지.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오래된 리바이스 청바지와 데님 재킷, 야상 점퍼, 밀리터리 셔츠에 핸드메이드 스티치를 가미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국적인 트로피컬 문양과 야자수, 선인장처럼 자연에서 영감 받은 자수로 꾸미며 옷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톤온톤 컬러 조합을 추구한다. 또한 모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은 감성적인 룩북과 사막의 모습(Face of Desert), 서부의 노래(Song the West), 산의 그림자(Shadow of Mountain)처럼 서정적인 제품명도 인기 요인. 러블리한 소녀 감성을 보태고 싶을 땐 이탈리아 브랜드 비베타(Vivetta)의 컬렉션을 참고하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 모양의 자수 장식으로 이름을 알린 비베타는 빈티지한 동화책과 인형, 고양이, 나비처럼 몽환적인 요소를 모티프로 한다. 이번 시즌에도 이러한 행보는 계속되었고 열아홉 소녀처럼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자수 장식의 옷을 다양하게 출시했다.

자수의 진정한 매력은 수작업으로 공들여 완성된다는 것. 이러한 분위기 덕에 숙련된 장인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아티스트는 제임스 메리(James Merry)다. 나이키나 리복, 아디다스처럼 상징적인 로고에 어여쁜 꽃 모양 자수를 새기는 그는 아이슬란드의 뮤지션, 비요크의 가면 스타일링을 맡아온 실력파 디자이너다. ‘대립되는 두 가지 요소를 매치하고 싶었다’는 그는 생동감 넘치는 스포츠 로고에 고향의 그리움을 투영한 섬세한 꽃 모양 자수를 더했고, 이러한 생경한 결과물이 알려지며 온라인에서 크게 이슈가 된 것. 지난해 오프닝 세레모니와 협업 컬렉션을 출시할 만큼 뜨거운 관심을 받았으며 각종 패션 매거진에서도 앞다퉈 그의 작업을 소개했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스카잔 점퍼를 향한 관심은 여전히 뜨겁지만 더는 아우터가 필요 없는 따뜻한 계절, 우리가 마주하는 자수 장식 옷도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하이패션의 전유물로 여기던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은 엠브로이더리 패션이 보다 다양해지고 있다는 의미. 세상은 넓고 봄을 위한 쇼핑 리스트는 여전히 방대하지만, 조만간 옷장 한편을 차지하게 될 핸드메이드 자수 장식의 옷이 주는 유혹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