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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블라우스와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실버 링 모두 카르펨(Carpem), 스트랩 샌들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지진희는 장거리 러너형 배우다. 영화제 진출작, 터닝 포인트가 될 작품, 기존 이미지를 뒤흔들 차기작 등 억센 욕심을 담아 변신을 시도하기보다 일정한 완성도를 견지하며 한 걸음씩 진화했다. 이 적당한 속도감은 배우 지진희를 멋진 남자 어른의 ‘좋은 예’로 만들었고, 멜로 연기가 가능한 중년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설렘 유발자, 심장 폭행남이라는 애칭을 얻은 최근작 <애인있어요>. 체감 시청률 40%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니아를 양산한 ‘감성 막장’ 드라마를 통해 지진희는 ‘최진언’이라는 인생 캐릭터를 얻었다. 하지만 종영 후 몇몇 인터뷰에서 그는 꽤 덤덤한 모습을 보였다. 종영 후유증을 묻는 질문에 “작품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편”이라고 답하며 “물에 담그면 빨아들이고 짜면 죽 빠지는 스펀지 같은 배우이고 싶다”고 직업 철학을 밝히기도 했다. 배우라면 한번쯤 경험하는 신드롬의 덫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그가 ‘미혹되지 않는’ 나이를 넘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단단히 뿌리내린 현실 감각 덕분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금속 공예를 배우고,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이후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가 어시스턴트 등 30년 넘게 배우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평범한 일상의 공력이 배우 지진희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인 여행서 <이탈리아, 구름속의 산책>을 썼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삶을 살뜰히 돌보며 배우의 삶을 순탄히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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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블라우스와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실버 링 모두 카르펨(Carpem), 스트랩 샌들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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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셔츠와 와이드 팬츠 모두 오디너리피플(Ordinary People).

혹자는 한결같이 그를 따라다니는 CF 속 젠틀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두고 나이브한 배우라 오해할 수 있겠지만 배우 지진희의 연기 스펙트럼은 상상 이상으로 넓다.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기존 배역과 다른 성격의 캐릭터만 맡았으며 그러면서도 한 번도 본래의 자신처럼 연기하지 않았다. 진가신 감독의 뮤지컬영화 <퍼햅스 러브>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천사 역을 맡았는가 하면 죽은 동생의 복수를 위해 괴물이 되는 하드보일드 영화 <수>, 비열하고 여자를 밝히는 만화가를 맡았던 블랙코미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스릴러 <평행이론> 등 변주를 이어왔다.

“제 이미지는 드라마 속 모습만 보셨던 거예요. 영화에서는 다른 시도와 실험들을 해왔어요.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고 극장까지 찾아온 관객에게 TV 속 익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의미가 없고,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같은 모습을 다시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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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이드 톱 반하트 디 알바자(VanHart di Albazar), 팬츠 센트머리(Centmary), 슈즈 에이레네(EIRENE).

4월의 마지막 주, 평창동 MK2 쇼룸에서 배우 지진희를 만났다. 그는 촬영 컨셉트와 의상, 장소 등을 유심히 확인하고 난 뒤 속전속결로 촬영을 이어갔다. 카메라 셔터 리듬에 맞춰 포즈와 무드를 세심히 전환했다. 결과물이 궁금할 법도 한데, 오케이 컷이 나면 모니터를 보지 않고 바로 의상을 갈아입었다. ‘컷마다 모니터를 하는 것은 사진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예전 인터뷰를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 모습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치열한 현장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신뢰하고, 조용히 그리고 매끄럽게 분위기를 주도하는지 짐작했다.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끝난 촬영. 그는 ‘3분 거리에 아주 맛있는 중국집이 있다’며 20여 명의 스태프를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초대했다.

평창동에 자주 오나봐요? 근처에서 도자기를 배웠어요. 그때마다 이 중국집에 들렀죠. 탕수육이 아주 맛있어요.

도자기, 레고, 야구 등 알려진 취미가 다양하죠. 무엇보다 많은 취미를 두루 깊게 즐기는 ‘성덕(성공한 덕후)’으로도 유명하고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과거에는 책에서 많을 걸 배웠잖아요.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고전이라 해도 책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각일 뿐이에요. 의심 없이 흡수하는 것은 위험하고 경계해야 하는 일이죠. 인터넷도 해외여행도 없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궁금하면 직접 몸으로 해볼 수 있는 시대잖아요. 무엇보다 관심 두는 일을 끝까지 해보는 것은 멋진 것 같고요. 다양한 취미를 경험하며 좋은 영향을 받았고 배운 점도 많아요. 이 긍정적인 결과들을 실생활과 연기에 어떻게 연결할지는 제가 고민해야 할 몫이고요.

해보고 싶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직접 나서는 행동하는 건 유별나게 부지런하거나 남다른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요. 금속 공예도 했었고, 요즘은 지승 공예(전통 한지 공예)에도 관심이 많아요. 취미는 지금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죠.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로 풀었는데, 음주만큼 비효율적인 해소법은 없더라고요. 대부분의 취미가 한 달 술값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도자기만 해도 조금만 관심을 두면 주변의 작은 공방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요. 취미 정말 중요하죠. 오죽하면 중년 남자를 위한 취미를 주제로 책까지 내려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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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로브, 화이트 셔츠, 배기팬츠 모두 오디너리피플(Ordinary People), 안경 빅터 앤 롤프 바이 시원아이웨어(Viktor & Rolf by Seeone Eyewear), 로퍼 닥터마틴(Dr. Mart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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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미술에 대한 관심과 감각이 연기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나요? 디자인과 미술은 연기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직업과 연결돼 있어요. 밥 한 끼 상차림도 결국 디자인이거든요.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미술은 꼭 시키려고 해요.

서른두 살에 배우가 됐죠. 10대와 20대를 평범하게 보낸 뒤 배우가 된 건 지진희만의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해요. 아주 다행이고 복이죠. 물론 어린 나이에도 훌륭한 친구들이 있고, 나이만 많고 이상한 어른도 많아요. 하지만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부터 한 가지 길에만 몰두하면 그 외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는 힘이 떨어져요. 연기가 아닌 다른 삶을 꿈꾸지 못해요. 배우라는 목표만 보고 달려왔는데 정작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혼란이 오죠. 이런 친구들이 있다면 이제 와서 돌아갈 수 없다고 좌절하기보다 과감히 내던지고 다른 길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쉽지 않죠. 저 역시 자신 없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뒤늦게 배우가 됐지만 다행히 긴 무명 생활을 겪지 않았어요. 여전히 잘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연기력이나 외모가 배우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에 보면 완벽하게 잘생겼거나 특별히 예쁜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랑받는 배우들 많잖아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사람과 사람이 대면할 때 주고받는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 에너지에 대중이 열광하는 거죠. 말 한 마디나 표정이 아니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같은 것. 저는 사는 게 연기 공부였던 거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은 사람 사는 이야기 들려주는 일이잖아요. 최대한 이 바닥에서 버티며 많은 것을 경험하다 보면 그게 내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실전에서 배워나간 것도 많았어요. 물론 쉽지만은 않았고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지적이고 젠틀한 이미지가 답답하지는 않나요? 큰 무기라고 생각해요. 연기자로서 코믹성이 극대화되면 멜로 연기를 하기 쉽지 않아요. 반면에 멜로를 하면 코미디도 하고 액션도 할 수 있죠. 배우는 다양한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가능성이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운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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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자마 셔츠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실버 뱅글 카르펨(Carpem).

하지만 ‘불륜남’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던 <애인있어요>를 선택한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죠. 시놉시스가 좋았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첫사랑과 결혼하는 것을 꿈꾸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첫사랑과 사랑하고, 돌고 돌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전처럼 느끼지는 않았어요. 물론 극 초반 진언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에요. 불편하고 거북스러워서 외면할 뿐이죠. 살다 보면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리는 유혹이 많은데 이 유혹에 동조하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선택이거든요. 많은 이들이 잠깐 흔들리지만 다시 빠져나오며 삶을 이어가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죠.

5월 말, 한중 합작 영화 <연애의 발동: 상해 여자, 부산 남자> 개봉을 앞두고 있죠? 밝고 코믹한 내용이에요.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은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영화이기 때문에 한국 정서와 조금 다를 수 있어요. 이전 작품 중 <적도>도 한중 합작 영화였어요. 홍콩 누아르 감성을 이해하면 국내 영화와 다르게 다가오는 면이 있어요. 저는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이번 영화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나와서 반응이 어떨까 궁금해요.

중국 촬영 현장은 어떤가요? 잘 맞는 편인가요? 한국에서 어떻게 촬영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보다 앞서 있어요. 중국은 할리우드 자본과 시스템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포맷이 정확해요. 미리 계산된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이뤄지죠. 한국 영화 현장이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면, 중국은 돌발 상황까지 이미 다 계산돼 있어요. 배우는 연기에 대한 연
구와 고민만 하고 그 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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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수트와 스트라이프 셔츠 모두 카루소(Caruso), 가죽 스니커즈 루이 비통(Louis Vuitton).

드라마 <대장금> 덕분에 아시아에서 인지도가 높잖아요. 한중 합작 작품이 처음은 아니죠? <대장금> 효과에 얹혀 가느냐, 조금 더 나를 개발하면서 변화를 주느냐가 딜레마인데 얹혀 가면서 개발하려고요.(웃음) 지금까지 한중 합작 작품을 꽤 했는데 즐기면서 하고 있어요. 낯설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못 하겠다고 빼기보다 다른 점을 찾아가며 재미를 느껴요. 우리 사회가 다름을 적대시하는 문화가 있잖아요. 아이들이 있다 보니 교육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획일적인 답을 내놔야 하는 교육 때문에 다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저 역시 그런 교육을 받았고요. 살면서 배운 것들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었거든요. 저도 아이들도 스펀지처럼 뭐든 담그면 빨아들이고, 짜면 쭉 빼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큰 것 같아요.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아요. 배우로서는 액션 작품을 하고 싶고요. 드라마나 영화 상관없이 장르 불문하고 새로운 방식의 TV 예능이나 다큐멘터리에도 열려 있어요. 최근 예능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에 출연한 이유도 프로그램 자체가 신선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예쁘게 먹을 때 이 사람들은 왕창 먹거든요.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1년 동안 팬으로 시청하다가 출연했죠.

16년 동안 연기를 해오며 느낀 직업 배우의 장단점은 무엇인가요? 제가 원래 뭐든 안 좋다는 이야기를 안 해요. 공예를 할 때는 공예가가 이 세상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사진 할 때는 사진가가 최고라고 여겼어요. 지금은 연기자가 으뜸이라고 생각하고요. 모든 직업에는 장단점이 있는데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사느냐, 좋은 점을 보고 사느냐는 각자의 선택이거든요. 얼마 전에 에덴동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동산에 다 좋은 사람들만 살면 그 사람들이 정말 좋은 건지 어떻게 알겠어요? 나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의 존재를 아는 거잖아요. 무엇을 보고 살 것인지는 결국 각자의 몫이라고 봐요.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인생에 대한 생각과 의견이 명확한 배우라는 느낌이 들어요. 반전 매력의 소유자라는 생각도 들고요. 한데 주장이 강하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지는 않나요?(웃음)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들었을 때 힘든 건 가치관이 흔들리기 때문이에요.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린 거였나 하면서요.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들었을 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상한 소리 하네하고 무시하기도 하죠.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막힌 사람에게는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안 하죠. 연기자들은 대번에 알거든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할 때 이런 표정이나 자세가 나오는구나, 항상 연구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노년의 지진희는 어떤 모습일 것 같아요? 백발의 뚱뚱한 할아버지가 공방에서 무언가를 만들다가 잠깐 쉬는 풍경이 막연하게 머릿속에 있어요.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사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유롭고 평화롭고, 누군가 봤을 때 이 사람 잘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무인도 같은 곳에서 혼자 농사짓고 살 수도 있고요.

무인도요? 대를 잇지 못하고 있는 무형문화재 어르신들 밑에서 평생 일하며 배우고 싶기도 해요. 만약 배우를 안 했다면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 것 같아요.